추사(秋史)의 제주도 유배길과 대흥사 이야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24세 때 중국 연경(燕京)에 유학(留學)하여 당대의 거유(巨儒) 옹방강(翁方綱)을 스승으로 완원(阮元)등과 교유하며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경학(經學)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면서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였다.
한송불분(漢宋不分)이란 당시 청(淸)의 학풍은 한(漢)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宋) 명(明)의 이학(理學)을 배척하였는데, 옹방강은 그 어느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추사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달하였고 청나라의 거유(巨儒)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으며, 그 자신도 이런 칭송(稱頌)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문화의 큰 별같은 존재였다.
추사(秋史) 서체(書體)의 그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맹부, 소동파(蘇東坡), 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 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를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이 내포되어 있는 서체로 볼 수 있다.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서화(書畵)를 풍미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추사의 진면목이 특히 드러나는 명필로는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이며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차위촌부자제일락상락)-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추사가 타계직전에 남긴 글씨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벼슬도 부귀도 영화도 소용없다는 인간 본연의 소박한 술회라 할 수 있다.
김정희의 가문은 나라에 훈공(勳功)이 있는, 임금의 친척(親戚)인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앞으로 양자(養子)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였다.
김정희는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의 증손자로서 왕실이 외가(外家)였으나 김정희가 조정에 입시하던 때는 이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시기로 옹주의 후손이라 해서 특별히 배려를 받던 시기는 아니었다.
55세(1840년) 되던 해, 추사는 안동 김씨의 역모탄핵으로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연루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오랜 친구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만은 면해 제주도로 9년 동안의 긴 유배길 을 떠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절대고독과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건이란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가 죽기 전에 윤상도라는 유생이 상소문을 올려 당시 호조판서였던 박종훈과 신위 등을 탄핵하다가 효명세자의 잘못까지 무례하게 참소하였다하여 후에 헌종임금때 옥사를 일으켜 윤상도를 참수 한 사건으로 그 상소문의 배후에 추사 김정희의 부친이 연루되었다고 안동김씨세력이 헌종을 부추겨 죽은 김정희의 아버지를 직첩을 빼앗고 김정희를 사형시키고자 했으나 지기(知己)인 풍양조씨 조인영의 주청으로 목숨만 건지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제주도 귀양 9년 만에 풀려났으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는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계에 복귀하지도 못했다.
추사는 70세가 되던 해는 관악산 기슭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초옥(草屋)을 지어 은거(隱居)하면서 학예(學藝)와 불문(佛門)에 몰두하다가 이듬해 봉은사(奉恩寺)에서 기거하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세상을 떴다.
봉은사 뒤뜰에는 추사의 마지막 글씨인 판전(板殿) 현판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9월 초, 고문(拷問)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제주 유배의 길에 오르면서 전북 전주를 들러 당대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만난다.
호남 명필 71세의 노서예가였다. 창암은 추사를 위해 시를 하나 썼다.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장차는 영원한 삶을 누릴지니.〉
추사는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영원한 삶이라는 무량수(無量壽) 단어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한승원이 쓴 소설 〈추사〉에서는 이삼만의 글씨를 이렇게 표현했다.
〈누에의 머리처럼 앙당그러진 획에는 한이 서려 있는 듯하고 말발굽처럼 뻗어나간 파임에는 밝은 빛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추사는 속기(俗氣) 가득한 글씨를 좇는 세태 속에서 가난한 시골 향반(鄕班) 이삼만의 글씨를 누가 보석(寶石)으로 알아줄 것인가를 탄식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전주에 들러 창암(蒼巖)을 만나 서로의 글씨를 겨뤄보았다. 추사는 16년이나 연상이었던 창암의 글씨를 보고 조필삼십년(操筆三十年)에 부지자획(不知字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뜻은 〈30년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획(劃)도 하나 못 긋는구나!〉라고 이삼만을 조롱하였다.
창암 제자들이 추사를 두들겨 패려고 했지만 창암이 가만히 두라고 말렸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오는 길에 다시 전주에 들러 창암(蒼巖)을 찾았을 때. 이때 창암은 이미 작고한 뒤였으므로, 추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비문을 남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길 에 친구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선사(草衣禪師) 를 만나기 위해 전남 대흥사에 들렀다. 추사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대흥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을 보더니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圓嶠)인데, 어떻게 자네는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대흥사에 걸어 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친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내고 그 대신 추사써준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을 달았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엔 이광사(李匡師)의 현판이 걸려있고 바로 옆 요사(寮舍)채인 백설당(白雪堂)에는 추사의 현판이 걸려 있다. 두 글씨는 사뭇 다르다.
그후 세월이 흘러 추사는 귀양살이 9년3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초의선사와 해후(邂逅)하게 된다. 이 때 추사는 초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초의,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는가 ?.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면 내 글씨를 떼고 다시 달아주게. 그 때는 내가 잘못 봤어?
버렸을 리가 있나 !
이 말은 곧 추사 인생의 깨달음이었다. 원칙을 넘어서 개개인의 개성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그는 외로운 귀양길에서 채득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연을 안고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는 현재도 대흥사의 본전에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걸려 있다.
필자는 해남 대흥사를 1976년에 답사하였다.
그때는 절 입구가 개발 되기전이라서 산사(山寺) 들어가는 길에 이끼낀 바위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꼬불꼬불한 길 개울 하나를 건너는 다리 하나에도 불심이 서려있었고 고색창연한 대흥사가 두륜산 동백을 배경으로 매우 아름다웠는데 그 후 절 입구를 시멘트 도로로 개발하여 흉물스럽게 되어 있어 나그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대흥사에는 명필들이 쓴 편액이 많이 남아 있어 마치 서화(書畵) 전시장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정조 대왕이 쓴 표충사(表忠祠),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 해탈문(解脫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가허루(駕虛樓)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无量壽閣)과 동국선원에 걸린 일로향실(一爐香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冥府殿) 응진당(應眞堂)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의 대광명전(大光明殿) 표충비각(表忠碑閣)등이 있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를 떠올릴 때 그의 글씨체를 생각하며 마치 얼음같이 차가운 선비로만 생각되지만 추사에게도 명주바지 같은 따뜻함이 있었다.
추사는 혼인을 일찍이 하였으나 어린 시절, 첫째 부인을 잃고 시름에 잠겼던 김정희는 이후 예안이씨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한번 부인을 잃었던 김정희는 두 번째 부인인 예안이씨에게 정성과 사랑을 다한다.
절해 고도였던 제주도에서 외로이 귀양살이를 하던 김정희에게
어느 날 아내의 갑작스런 부고가 전해진다.
그 것도 아내가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난 뒤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의 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에는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김정희의 비통한 그리움이,
근엄함이나 체통에 묻혀버리지 않은 한 남자로서의 그의 사랑이,
구구절절이 녹아 있다.
配所輓妻喪 (배소만처상)
那將月老訟冥司(나장월로송명사)-어찌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하여
來世夫妻易地爲(래세부처역지위)-다음 생에는 우리부부 바꾸어 태어나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나는 죽고 당신이 천리 떨어진 곳에 홀로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그대로 하여금 나의 이 비통함을 알게 하고 싶다오.
이처럼 우리나라 사찰이나 전각의 편액 정자 누각의 현판에는 역사속의 각계의 명사 명필들의 글씨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담겨 있다.
서예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나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글씨를 잘 쓴다
해공의 목포유달산 “유선각(儒仙閣)” 우남의 고성 “청간정(淸澗亭)”의 현판 글씨는 대표적으로 멋있는 글씨다.
필자는 신익희 선생이나 우남 이승만은 정치인이나 대통령으로 보기 보다는 한사람의 문인(文人)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글을 쓴후 반드시 〈우남(雩南)〉이라 호를 썼고 해공(海公)선생도 꼭〈신익희(申翼熙)〉라고만 썼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