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황등행 열차는 20시에 떠나네.(제31회)
"'정인숙 !?' 이건 정말 파격적인 캐릭터다. 뭔가 필이 탁 오는데, 이건 말야, 사형수 소크라테스의 왼쪽 가슴에 빨간색의 수인 번호를 달아 놓은 것처럼 애절한 서글픔이 있다. 허허허" 서울대 철학과 허진우가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오호!! '정인숙' 그 강변여인 '정인숙' 말이냐? 와하!! 대단하다!! 하느님과 성인들 사이에 '정인숙'이가 낀다. 와하!! 놀래라. 하느님과 성인들 하면 우선적으로 그 접근 성이 껄끄럽고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 사이에 낀 '정인숙'이라! 정말 위대한 발상이다. 좋았어 뭔가 화끈할 것 같다."라고 하는 녀석은 민중태였다.
"이건 말야, 미술로 말하면 '액션 페인팅' 기법을 창안한 '잭슨 폴록'의 화법 같은 것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려 놓는 것 말야, 미술의 천재가 아니고는 그런 발상을 못하지, 그 발상이란, 캔버스는 완성결과를 지향하는 예술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은 그림의 소재와 싸우는 치열한 경기장이다. 그 과정이 치열할수록 그 가치가 더 부여된다.
즉, 쌩콩이 '노망난 하느님'에 '정인숙'이라는 밤의 요정을 등장시킨 것은 말야, '모나리자의 미소' 그 핵심의 입술에 검정 색의 페인트 덩어리를 던져 놓은 것이다. 그것은 뭐냐? 고루한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성이거든, 바로 그거야, 쇼크!" 미술전공의 김영태가 방방 뜨며 말했다.
"환쟁이 영태, 넌 그렇게 보여지냐? 난 말야, 돌부처, 그 거대한 석상에 빨간색의 여자팬티를 걸쳐놓은 것 같다. 이것은 허상에 대한 경고표시다!"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유정민이 말했다.
"땡초, 석불(石佛)이 허상이냐?" 김영태가 물었다.
"허상 중의 허상이다, 그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아낙을 보면, 진짜의 부처에게 깨달음을 달라는 불공이 아니라, 돈 불, 출세 불, 명예 불, 권력 불에게 그것의 소원성취를 비는 아주 지독한 세속이다.
그런다고 해서 그 세속적 욕망이 이루어진다면 그 얼마나 권할 만 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뻔한 공염불이다. 그래서 불타(佛陀)는 말했다. 그런 허상은 멀리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그리고 그런 유혹에 빠져드는 자신과 타협하지 말고 진리와 친하라고."
"유정민, 난, 네 녀석이 순수땡초 인줄만 알았는데. 알아도 너무 아는 것 같다. 허허허 쌩콩의 '노망난 하느님!' 여기에는 그런 허상을 멀리한 실존철학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역시 같은 철학도 허너털이 거기에 동감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정인숙이 역은 누가 할 것이냐?" 음대 생 설응수가 물었다.
"풍각쟁이, 그걸 질문이라고 던 지냐? 누군 누구야, 박선옥이 밖에 더 있어. 쌩콩이 그걸 염두에 두고 집필 한 것이 벌써 눈에 훤히 보이는데 허허허" 허너털의 너털웃음이었다.
"오호! 그렇구나. 이 나라 지존을 필두로 뛴다난다 하는 사내들의 오금을 못 쓰게 한 '정인숙!' 그 매력, 그 마력, 그 카리스마와 우리 '청석골' 녀석들을 저 살인적인 해바라기 미소로 죽이는 박선옥이와 상통하는 점이 아주 많다. '정인숙' 역은 박선옥이가 딱! 이다. " 설응수가 박선옥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쌩콩, 박선옥이가 있기에 '정인숙'이라는 캐릭터를 설정 한 것이냐?" 손창민이가 물었다.
"그건 '정인숙'이가 먼저겠지."설응수가 대신 답했다.
"우리가 '정인숙'이를 몰랐다면, 쌩콩은, 어떤 캐릭터를 설정했을까?" 불문학을 전공하는 유인수가 송민호를 보며 물었다.
"처음엔 동서고금의 경국지색들 중에서 그 누굴 설정할까? 하고, 박선옥이와 그걸 한참 고민했다. 그런데 그 캐릭터는 너무 진부했다. 그래서 '파리의 노틀 탑'의 '에스멜다'와 '죄와 벌'의 '쇼냐'중에서 고민하다 섬광처럼 튀어나온 것이 '정인숙'이다." 송민호가 답했다.
"오호!! 그 매력덩어리 집시의 여인 '에스멜다'와 천사로 채워진 창녀 '쇼냐' 그 캐릭터도 괜찮다. 역시 쌩콩이다." 유인수가 탄복했다.
"쌩콩이 '정인숙'을 먼저 생각했나? 아니면 박선옥의 입에서 '정인숙'이 튀어나온 것이냐?"손창민이 또 물었다. 이에 박선옥은,
"그건 내가 먼저 했다, 그 비극의 여인, '정인숙'의 죽음 앞에서 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또 그 한편으론 환희의 합창이라도 불러주고 싶었다."
"환희의 합창, 그건 왜?" 손창민이 또 물었다.
"연극영화를 전공한다는 녀석이 그런 필도 없냐? 박선옥이가 환희의 합창을 불러주고 싶었다는 것은 '정인숙'의 죽음을 애석하게도 생각했지만 어떤 통쾌함도 느꼈을 것이다." 설응수가 대신 답했다.
"그렇다. 그 어떤 통쾌함,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생각해 봐라, 한나라의 왕초로 시작해서 내 노라 하는 그 많은 사내들을 손가락 하나로 사족을 못 쓰게 한 그 마력의 여인 '정인숙' 그 얼마나 우리를 기분 좋게 한 여인이냐? 나도 그렇게 좀 살아 봤으면 원이 없겠다. 하하하" 박선옥은 송민호를 흘깃 보며 말했다.
"박선옥! 뭐라고!? 그렇게 살아 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렇다면, 내 대본에서 '정인숙'을 빼 버린다. 대신, '양귀비'를 넣을까?" 송민호가 삐친 척 했다.
"쌩콩, 삐지긴, 촌스럽게 양귀비가 뭐냐? 차라리 춘향이를 넣어라 허허허" 허너털 이었다.
"쌩콩, '정인숙'을 빼기 만 해봐라, 난 그 연극에 출연 안 한다. 하하하" 박선옥은 그 살인적인 해바라기 웃음으로 또 주변의 사내들은 뇌쇄(惱殺)시켰다.
"잠깐, 그 사람 환장하게 하는 그 미소, 박선옥, 언제 내 모델이 되어 줄 수 없나?" 김영태가 꼬셨다.
"이봐 환쟁이, 넘볼 것을 넘봐라, 우리'청석골'의 지존 쌩콩의 피앙새나 다름없는 박선옥을 꼬시냐?" 설응수의 핀잔이었다.
"'정인숙'은 한 나라의 최고상전을 비롯하여 뛴다난다 한 놈들을 쥐락펴락 했는데 천하의 박선옥이가 쌩콩 하나로 만족할까? 우리도 말야, 캠퍼스에선 뛰고 나는 놈들 아닌가? 하하하" 민중태가 말했다.
"이봐, 서울 법대 생, 민중태, 서울대학 위에 육사 있다는 것을 모르나? 육사 위에 중앙정보부 남산 청사(廳舍)가 있고 그 청사 위에 세종로 1번지 대통령관사가 있고. 그 관사 위에 밤의 여인들인 여사가 있다. 그 중에 서울법대가 제일 찬밥이라는 것을 모르나?" 핀잔 잘 주는 설응수였다.
"그래, 맞다. 그래서 난 고시를 포기했다. 되어 봤자. 그자들 '따까리' 노릇이나 한다고. 어떤 선배가 그러더라...." 민중태가 한숨지었다.
"통금 한시간 전이다. 자, 자, 씨잘데기 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내 대본에 수정 할 곳을 찾아라." 송민호가 서둘렀다.
"난, 없다. 원본대로 통과다." 허너털의 말에,
"이하 동문!" '청속골' 멤버 전원의 합창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주에 모여 배역 결정을 한다. 배역 중 하느님은 물론 나다. 하하하" 송민호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허허허 저런 도우~동놈, 문화예술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찾겠다는 우리 '청석골' 인데 제 마음대로 하느님이야 허허허" 허너털의 악의 없는 농담이었다.
"자, 자, 그럼 우리 청석골의 환타지아, '카타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합창하고 오늘 모임을 끝내자." 설응수의 선창으로 멤버들은 그 노래를 부르고 각자 헤어졌다. 선옥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민호에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