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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26- 강릉 오죽헌 1
2019년8월14일 강릉 오죽헌으로 떠났습니다. 진부에서 유명한 부일식당에 아침식사를
하였습니다.
부일식당의 메뉴판입니다. 50년 전통의 이곳은 오직 산채백밥으로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더덕구이가 빠진 산채입니다.
대관령 옛길 구비구비 아흔아홉구비가 끝나는 지점에 대관령 박물관이 보입니다.
대관령박물관은 강릉 성산면에 위치한 박물관입니다. 청동기, 철기, 신라, 삼국, 조선시대 등
약 20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문관석(文官石)입니다. 조선시대 문관석은 무덤앞에 세운 문신의 석상으로 양반을 상징하며
금관의 2줄 이량관(二梁官)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잡고 있고 뒷면에는 후수(後繡)가 조각
되어 있습니다.
고미술품 수집과 연구를 하던 홍귀숙씨가 1993년 5월 15일 강릉의 영산인 대관령 중턱
어흘리에 연 박물관입니다. 2003년 3월 13일 박물관 건물과 2,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일체를
강릉시에 기증하였습니다. 평생 결혼을 안하였다고 합니다.
평생동안 수집해온 각종 문화재들을 전시하기 위하여 1993년 5월 15일 사립박물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부지 8,794㎡에 연건평 972㎡, 그리고 686㎡ 규모의 6개 전시실과 야외
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2,000여점의 유물을 소장, 전시
하고 있습니다
태합(胎盒)입니다. 고려시대 왕실의 왕자의 태(胎)를 보관하려 돌로 만든 태합은 윗단의
태합한쪽에는 태를 담은 항아리를 넣을수 있는 공간이 있고 내부와 연결할수 있도록 윗면의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조선시대때는 궁중에서 왕가의 자손이 태어나면 그태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였다가 좋은 날을 택하여 태의 주인과 태어난 날짜 시각,등을 기록한 태지석과
함께 태봉(胎峰:태를 묻는 산)에 묻었는데 아기의 무병장수와 자손의 번창을 비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조상들이 태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신라시대때부터 조선시대
까지 전래되었으며 왕가뿐만 아니라 여유가 있는 양반가에도 태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박물관 옆의 풍경입니다.
전통 사방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방과 우리방 및 토기방에는 토기, 민속, 서화 등
각 시대의 유물을 주제별로 한자리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평소 박물관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셨던 홍귀숙 관장님의 신념에 따라 분신과도 같은
대관령 박물관의 소장유물을 2003년 5월 강릉시에 기증하였고 현재는 강릉시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글이 써 있습니다. 간교, 권모, 싸움으로 남을 이기지 말라고 합니다.
박물관 내부의 유물들을 보며 한 개인이 이런 엄청난것을 수집하였다니 상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가격만 따지더라도...ㅎㅎ
밖에는 돌 장승들이 무더기로 서있습니다.
흰꽃이 비에 젖어 더욱더 돋보여 보입니다.(꽃이름은 모릅니다. ㅎㅎ)
오죽헌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이오죽(烏竹)입니다. 줄기가 까맣습니다. 중국이 원산지로 높이 약 7m입니다. 줄기의
색은 처음에는 녹색이나, 가을 무렵부터 멜라닌 색소가 증가하여 검정으로 변합니다.
색의 농담(濃淡)이나 변하는 방식은 입지에 따라 다릅니다. 양지바른 건조지에서는 선명한
검정을 띱니다.
오죽헌(烏竹軒)은 보물 제165호로 강릉시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생가
입니다.
견득사의(見得思義)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덕수(德水)이씨인 율곡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요즘 정치판은 이득을 볼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것을 보는데 정치인들은 이문구를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양심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
조선시대때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평면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칸이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이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初工)
하나로 장설(長舌)과 주심(柱心)도리를 받도록 했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華盤)이 한 개
있을 뿐이다. 추녀도 너무 들리지 않고 원만하다. 뒤뜰에 오죽이 자라고 있어 오죽헌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차문성이가 대표로 선서를 합니다. 견득사의(見得思義) 를 다짐하겠다고..ㅎㅎ
5천원권에 이이 율곡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습니다.
공통된것은 오천원 오만원 오(五)의 발음과 오죽헌의 오(烏)와 같은 발음입니다.ㅎㅎ
오죽헌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입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 문인으로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초충도란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 꽃과 새, 동물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은 다양한 소재들 속에 담긴 부귀富貴, 장수長壽, 다산多産 등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변의 동식물들을 묘사하며 누구나 염원하는
‘자손번창’, ‘풍요’, ‘장수’, ‘출세’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신사임당"에 등장한 이영애와 송승헌의 수적(手跡)이 있습니다.
발자취가 아니라 손자취입니다.
오죽헌의 안내도 입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습니다. (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습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썻습니다.
오죽헌 안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홍매화'입니다
오죽헌에 들려 돌아보는 이 세 가지의 나무는 각각 의미가 남다릅니다. 돌계단을 올라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배롱나무가 서 있습니다. '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명명하는 이 나무는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합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배롱나무의 원줄기는 고사했습니다. 현재의 나무는 원줄기에서 돋아 난 싹이 자란 것
입니다. 그 수령은 이미 6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의 수령을 보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의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 선생이 중종 31년(1536)에 탄생한
집이며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으로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오래된 주거 건축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오죽헌을 처음 지은 이는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강릉 최치운으로, 최치운은 이 집을
차남인 병조참판 최응현에게 물려주었고 최응현은 다시 그의 사위인 용인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무남독녀로 사위인 평산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을 하였는데 친정에 머물러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훗날 이곳에서
율곡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명화는 또 그의 넷째 사위인 안동 권화에게, 권화는 그의
아들 권처균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즉, 신사임당 외조부의 집이었는데, 외조부가 무남독녀인
신사임당의 어머니에게 집을 상속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임당 어머니의 집인 셈입니다
즉,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 선생의 외가인 것.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둘째 딸의 아들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헌이 권처균의 소유가 되었던 것이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이율곡의 사촌인 권처균의 호에서 유래했습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 이 씨에게서 집을 물려받았는데, 집 주위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오죽)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호를 다시 집 이름에 붙이면서 그 집이 오죽헌이 된 것입니다. 기후적 측면에서
살펴볼 때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해양성 기후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나무는 원래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강릉 정도의 북쪽 위도에서는 대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릉은 동해안에 접해 있어서 해양성기후를 띠고 있고, 또한 따뜻한 동한해류의 영향도 많이 받기
때문에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입니다. 이러한 따뜻한 기후 덕택에 대나무가 자랄 수
있었고, 오죽헌 이라는 이름도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1504) 10월 29일, 강릉 북평 마을에서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신명화는 고려 태조의 충신 장절공 숭겸으로부터 18대손이며, 어머님은 용인 이 씨
로서 생원 이사온의 무남독녀로 강릉사람 참판 최응현의 외손녀입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 씨는 부친 이사온에게서 무남 독녀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학문을 배운 현명한 여성으로
효성이 지극한 여성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집안 배경은 신사임당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끼치게
했습니다.
신사임당은 태어나면서부터 인물이 뛰어나 부모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천부적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기 때문에 여자로서 배워야 하는 바느질이나 자수는 물론이요 시, 서, 화, 그리고 학문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속한 여성들로서는 섭렵하기 어려웠던 분야들을 습득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신사임당의 나이 18세 되던 해, 강릉 북평에 계신 외조모 최씨가 별세하자
상을 치르기 위해 부친 신명화가 한성으로부터 강릉으로 내려왔는데 도중에 병을 얻어 집에
도착했는데, 그때는 거의 절망상태였습니다.
이때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온갖 간호를 다하여도 차도가 없어 최후의 정성으로 외증조부
최치운의 무덤을 찾아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고하고 피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튿날 아침,
아버지 병석 곁에 앉아있던 신사임당이 잠깐 조는데 꿈에 신인이 하늘로부터 대추알만한 약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잠을 깼는데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씨를 표창하는 열녀 정각을 세워주었습니다.
신사임당은 7세 때부터 안견의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많이 읽으며 성장합니다.
신사임당이 1536년(중종 31년) 12월 26일 검은 용이 날아드는 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으셔서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부릅니다. 마루방은 율곡선생이 신사임당으로부터 글을
배우던 곳이며, 몽룡실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이처럼 뛰어난 학식과 외조부 이사온의 학문, 아버지 신명화의 엄격한 훈계 덕분에
양가집 규수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 교양과 인품을 길렀음은 물론이요 후에 율곡과 같은 인재를
키우고 예술가이자 현모양처가 되는 기반을 서서히 닦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의 나이 19세인 중종 17년(1522)에 서울에 있는 이원수(1501~1561)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원수는 고려 중랑장 곽수로부터 12대손으로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처음 이름은 난수, 자는 덕형이며 부인 신사임당보다 3살 위인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이 혼인한지 몇 달 되지 않아 그해 11월 7일, 부친 신명화가 47세로 세상을 떠나
아버님의 3년 상을 치뤘습니다. 이후 시어머님 홍씨 부인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신혼례를
드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파주와 강릉, 봉평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신사임당은 나이 21세~39세(1524~1542) 동안 넷째 아들 우를 마지막으로 출산하여 4남 3녀를
낳았습니다. 특히 33세 때 셋째 아들 율곡을 임신했을 땐, 꿈에 동해가에 이르렀더니 선녀가
바다 속으로 부터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 하나를 안고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고
강릉 친정에서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는 검은 용이 동해로부터 날아와 거의 침실 문머리에
서려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사임당 나이 38세엔 강릉 친정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과 헤어져 서울 시댁으로와 수진방(지금
수송동과 청파동)에서 시댁 살림을 주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임당이 서울로 올라와 시댁
살림을 주관하던 때로부터 꼭 10년째 되는 명종 6년(1551) 48세 때 수진방으로부터 삼청동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남편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세곡을 실어 올리는 일 때문에 율곡과
같이 평안도 지방으로 갔는데, 그 사이 평소 약하던 몸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지 2~3일 만에
(5월 17일 새벽) 서울 삼청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에 신사임당은 정경부인으로 중직되었습니다.
이나무가 강릉 오죽헌 율곡매(江陵 烏竹軒 栗谷梅)입니다.2007년 10월 8일대한민국 천연
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습니다.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성이 깊은 나무입니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합니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큽니다.
이이는 찰방 원수를 아버지로 하고, 사임당 신씨를 어머니로 하여 1536년(중종, 31년) 12월 26일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의 다섯째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은 아니었으나 정신적
으로는 안정된 가정 분위기 속에서 건실하게 성장했습니다. 본관은 덕수이며 율곡은 그의 호이고,
석담, 우재라고도 합니다. 숙헌은 그의 자이고, 이이는 이름입니다. 7세 때 사서를 비롯한 경전을
읽었다고 하며 8세(1543) 때 쓴 화석정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 정감이 애틋하여 세상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습니다. 47세(1582)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
렸습니다. 이 해에 김시습전을 쓰고, 학교모범을 지었으며, 48세(1583)에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49세(1584) 1월 초부터 지병이 악화되고 끝내 16일에 경성 대사동에서 별세했습니다. 2일 전인
14일 병석임에도 불구하고 서익이 북로 순무의 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하여 6개 조항을
불러주어 기록하게 하는데 선조의 인덕을 선양할 것, 번부를 안무 할 것, 선조의 위엄을 신장할 것,
배반한 오랑캐를 제압할 것, 사신들의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것, 장수들의 재력을
미리 살펴 위급한 일에 대비할 것 등의 이와 같은 내용이 율곡의 마지막 글이되었습니다.
오죽헌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이익공(二翼工)계의 건물이며 좌측 2칸은 대청
으로, 1칸은 뒤편에 퇴가 달린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굵직한 장대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 기둥 위에 둥근 도리를 얹었고 지붕은 겹처마입니다. 굵은 댓돌로 짜인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배열하고 각기둥을 세웠습니다. 대청 전면은 띠살문의 4분합문을,
측면과 후면에는 각기 두 짝의 여닫이 창호로 하고 판문 하부 벽면에는 머름을 둘렀습니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가운데 2개의 동귀틀 사이에 작은 청판들을 깔아 칸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으로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위치한 대들보는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쳐져 있습니다.
오죽헌 대들보 위로 종량과의 사이에는 대공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입니다. 측면 창호 문틀에는 중간
문설주 가 있었던 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된 가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청 천장 위에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다른 부분은 연등 청장으로 하였습니다. 익공의 쇠서와
첨자의 곡선은 오래된 옛날기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화반은 주심포에서
익공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지붕 처마를 높이 올려 일조와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있습니다. 공포는 이익공형식으로서 주심포계와 유사한 모습이 초기수법임을 보여 주며,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합각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비교적 낮은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나
층고를 충분히 확보해 사용된 구조부재들이 충실하여 겹처마의 팔작지붕이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의 여유 있는 공간의 조성과 조경도 이 같은 느낌을 도와줍니다. 일부 장식화 된 부재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구성으로 조선 전기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수작입니다.
이 건물은 주택건축에서는 비교적 드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으며,
첨차의 형태는 조선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구(遺構)입니다.
벽에 붙어있는 사군자중 죽의 시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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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신 사임당이 자식 공부를 성공시켜서 아들을 과거에 급제 시킨것 까지는 좋은데 ...
요즈음 세간을 시끄럽게 만드는 조 ㅇ 교수 딸래미 논문과 소위 스카이 그룹들의
서글프고 어이없는 현대판 음서제도와 이와 비슷한 행태를 지켜 보면서
혹시나 혹시나 그럴리는 없지만 그 당시에도 권력과 세도 그리고 학문을
독점한 자들이 또 황당하고 무엄하게도 혹시 신사임당 같은 분들도 자식을
키우면서 조 ㅇ교수 집안과 같거나 비슷한 일은 없었을까 ?
하다 하다 이제는 신사임당까지도 불손하게 의심해 보게하는
높으신 분들과 가진 자들의 가증스러운 작태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가정교육부터...인데...
가정교육도 학교교육도 큰 문제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