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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주일) 창세기 40:5~23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을 글을 씁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다 우물에 빠졌다. 우물 밑에는 독사가 있어 내려갈 수 없다. 올라가려니 사자가 아가리를 벌리고 올라오기만을 기다라고 있다. 우물 벽에 매달려 떨고 있는 데 칡넝쿨 하나가 보인다. 넝쿨을 잡고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구멍에서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 뿌리를 갉아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넝쿨 뿌리는 다 쏠려 우물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 때 바로 옆에 있는 벌통에 눈이 들어온다. 여기서 꿀이 한 방울 떨어지려는 찰나 혀를 대고 맛을 보며 ‘아 달아!’라고 하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삶과 같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인생은 끝이 보이는 시간과 연속된 고난을 순간적인 행복감으로 잠시 잊으며 견디는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고난이 닥치면 ‘왜 나에게 힘든 시련이 왔는지’ 의문을 던지며 억울해하고, 속으로 화를 내며,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비난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 자체보다 그 고난을 해석하지 못해 더 근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해석되지 않는 어떤 고난의 문제로 근심하고 계십니까?” 그런 인생에게 오늘 본문의 야곱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정말 여러분 인생에 닥친 고난이 해석되는 그런 은혜가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5~8절).
감옥에 갇힌 요셉은 그곳에서 왕에게 죄를 지어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 즉 왕의 술맡은 권원장과 떡굽는 관원장을 수종듭니다. 어느 날 각기 다른 꿈을 꾼 그들이 꿈의 내용을 해석할 수 없어 근심합니다.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으니 불길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근심에 쌓여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섬기는 요셉은 그들에게서 ‘근심의 빛’(6절)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근심의 이유를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셉은 그들에게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오늘 안색이 좋지 못하세요’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 주위 사람들의 ‘근심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무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주변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는 사고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잘 쌓지 않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잘 헤쳐나간다고 하지만, 매사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없어서 실수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비슷한 유형이기느 하지만, ‘무관심한 사람’이 있는데요. 이런 사람은, ‘난 괜찮아 그러니 주위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대체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인데요 이들은 자신의 용모나 행동과 같은 외적 측면에 주의를 잘 기울이지 않는 성향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심한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중 어디에 속합니까? 바라기는 요셉과 같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근심의 빛’을 알아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셉은요, 자신도 옥에 갇혀 있는 힘든 상황이지만, 자신이 수종드는 자들의 근심과 아픔에 늘 관심을 갖고 그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즉 인간관계를 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에 보면, 카네기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관심’입니다. ‘흑심’이나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스토킹’은 아니지요. 또한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관심사’를 물어봅니다. 카네기는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화제로 삼는 것은 쌍방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 다른 이들로 부터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서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을 다채롭게 해주는데 도움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관찰해보고 그에 대해 묻고 대화하는 것이지요. 또한 카네기는 “자주 웃어주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자주 불러라 그러면 당신은 많은 찬사를 받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좋은 인간관계를 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주하고 합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줌으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도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참조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인데요.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 없겠죠.
요셉은 근심하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구차한 말을 하지 않고 바로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절) 이 대답은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습니까?’라는 말과 ‘그 하나님이 오늘도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라는 요셉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의 ‘고난과 깊은 수렁과 기가막힐 웅덩이’에서 조차도 일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란 말은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 관원의 꿈을 통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인데요. 그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안에 거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는 것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요셉은 두 사람에게 꿈 해석을 통해서 그들에게 ‘확정된 인생’을 말해주었습니다. 즉 꿈 해석을 통해 ‘한 사람은 사흘이 지나면 죽고, 한 사람은 사흘이 지나면 복직해서 삽니다’라고 말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확정된 인생’의 결말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에 빠진 인생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되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영원히 죽습니다’ 이런 확정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요한일서 5:12]에도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 최권능 목사(본명은 최봉석목사)는 늘 이렇게 확정적인 성경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죽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믿어야 천국갑니다. 예수믿어야 삽니다.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최권능 목사를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거나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최목사님은 이것이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확정된 진리’이기에 늘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를 넘어서야 합니다. 근심의 빛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되, 그것을 넘어서 요셉처럼 말씀으로 그들의 근심이나 고통을 확정적으로 해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있습니다“라는 요셉의 말처럼 말이지요. 적용) 나는 근심하는 자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합니까? 아니면 말씀으로 그들의 근심을 해석해 줍니까?
2. 길한 해석과 흉한 해석을 주시는 이유(9~23절)
세상에는 세가지 길한 소리, 즉 ‘3길성’(3吉聲)이 있는데, 곧 ‘아이 우는 소리’, ‘베짜는 소리’, ‘선비가 글읽는 소리’라고 합니다. 반대로 ‘세가지 흉한 소리’(3凶聲)는 ‘늑대 우는 소리’, ‘여우 우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의 꿈의 내용을 듣고는 길한 해석, 즉 그의 복직을 예언합니다(12,13절). 반대로 떡굽는 관원장의 꿈을 듣고는 흉한 해석, 즉 그의 죽음을 예언합니다(18,19절). 요셉은 길한 해석을 해준 술맡은 관원장에게는 복직하고 난 후에 자신을 기억해서 감옥에서 건져주기를 부탁합니다(14,15절). ‘술맡은 관원장’은 길한 해석을 통해서 요셉을 옥에서 건져내줄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에게 때로는 길한 해석의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네 시간, 네 건강, 네 물질로 주의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가 그동안 10여년을 무료로 사용하던 그 건물에서 나가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은 길한 해석을 주셨는데,그 길한 해석은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르밧과부가 마지막 남은 떡한조각을 구워서 엘리야선지자를 대접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그러면 너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불타서 교회와 사택이 전소한 교회에 드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30배의 복으로 지금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건을 해석해주고, 인생을 해석해주시며, 길한 해석을 통해서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본문의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길한 해석으로 복직이 되자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요셉의 말을 잊어버립니다(23절). 사명을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는 자기 문제 해결에만 관심이 있기에 타인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고난을 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고난의 감옥’에서 나갈 생각만 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고 환경이 바뀌기만 바랄 뿐 ‘구원’이나 ‘사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편, ‘흉한 해석을 받은 떡굽는 관원장’은 요셉의 말대로 처형됩니다(22절). 요셉의 흉한 해석을 받은 지 3일만에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일뿐’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남은 날이 단 3일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말기암 환자들을 케어하는 곳이 경기도 ‘용인 샘물호스피스 병원’이 있는데요. ‘호스피스’란 용어는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연명치료 대신 인생길의 마지막 쉼을 제공하는 의료활동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이 1박 2일동안 그 병원을 탐방했는데요. 그는 그 병원건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얀 벽에 붉은 진흙 기와를 올린 지중해풍 건물이 눈이 시리도록 반짝거린다. 잠시 남유럽의 휴양지인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마다 환자복 안에 감춰진 마른 꼬챙이 몸들이 느껴진다. 김소엽 시인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란 시가 한쪽 벽에 걸려 있다. 비로소, 이곳이 ‘죽음’과 관련된 곳임을 짐작하게 된다” “오전 11시 매일 열리는 예배시간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라는 찬양이 울려퍼진다. 예배 담당인 원**(66) 목사가 기타로 흥겹게 반주하면서, “오늘 하루가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고 환우들의 힘을 북돋웁니다. “반 죽은 것처럼 살지 말고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살아봅시다.” 샘물호스피스병원의 김재송 원장은 “큰 병원에서 항암 치료 받다가 임종 임박해서 여기로 오는 사람이 많다”면서 “마지막까지 무리하게 항암에 매달리기보다 조금 더 일찍 들어오면 통증 관리도 되고 따뜻한 분위기를 맛보면서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호스피스병원을 잘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들의 마지막 삶의 동반자가 되려는 호스피스 병원의 설립동기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으로부터 이 흉한 해석을 받은 떡맡은 관원장은 주어진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어떻게 죽음에서 벗어날 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왕에게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기회로 삼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리고 그동안에 사랑고백을 하지 못했던 가족과 지인들에게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평생 시각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 켈러 여러분 아시죠? 두 살 때 뇌막염으로 추측되는 심한 열병을 앓은 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주변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언어를 배우고 문자를 습득하고 몇 군데의 장애인 학교를 거친 뒤 미국의 명문 래드클리프대를 졸업했구요. 작가이자,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명성을 얻었는데요. 그녀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건 가장 큰 축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흉한 해석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마4:17). 저도 24살 때 예배 자리에 갔다가 말씀과 성령을 통해 흉한 해석을 들었습니다. “네가 혹시 지옥갈 자가 아니냐?” 이 말은 ‘네가 만일 지금처럼 살고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흉한 해석이죠’ 감사하게도 이 흉한 해석을 듣고 ‘아 이제부터는 교회를 다녀야 겠다’라고 결심하고 결심에만 그친 것이아니라 그동안의 삶을 청산하고 그 주일부터 즉시 가까운 교회에 나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흉한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사면서 첫 설교는 마 4:17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위한 해석은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교훈과 책망을 겸해야 합니다(딤후3:16~17).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흉한 해석과 같은 책망은 ‘사랑’이 동기가 될 때 비난보다 도움이 됩니다. 또한 책망은 영적으로 자라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히 12:6~8]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적용) 나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현재 나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길한 해석입니까? 회개를 촉구하시는 흉한 해석입니까? 나는 책망의 메시지, 회개의 메시지를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까? 아니면 귀에 거슬리는 말로 들으십니까?
3. 결론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술맡은 관원장이나 떡굽는 관원장과 같이 자신의 상황이나 사건을 해석하지 못해 근심합니다. 성도들은 요셉과 같이 주위 사람들의 근심을 민감하게 살펴 외면하지 말고, 그들의 근심을 듣고 공감할 뿐 아니라 요셉처럼 말씀을 통해 ‘길한 해석’과 ‘흉한 해석’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한 해석을 받은 자들에게는 구원과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흉한 해석을 받은 자들을 회개를 촉구하셔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수정교회 성도들이 늘 말씀을 묵상함으로 나 자신과 내 주위 사람들에게 길한 해석과 흉한 해석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 죄를 보게 함으로 모두가 구원으로 인도하게 되는 도구로 쓰임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나 자신에게도 이것을 적용해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에도 낙심하지 않고 이를 통해서 나의 죄를 바라보고, 회개하며 새 힘을 얻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런 고난과 문제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믿는 자로서 주위 사람들의 근심을 외면하지 않고 민감하게 살펴 말씀으로 그들의 사건을 해석해주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이 교회공동체에서 말씀으로 고난의 사건을 해석받고 시원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해석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날마다 말씀과 교회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 묻는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