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 6일,
박동선, 로비 사건으로 미 법무부에 기소
미국 법무부는 1977년 9월 6일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을 `미국 정계에 뇌물 증여` 등의 혐의로 기소한다
고 발표했다. 기소장에는 `박동선은 1967년부터 7년간 미국인 리처드 해너와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이후락 등과 공모,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미국 의원에 뇌물을 주었다`고
써 있었다.
이 사건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한국정부, 미국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
(Seoul Gave Millions to U.S. Officials)’이라고 폭로하면서 표면화됐다. 폭로 내용은 재미 한국인
실업가인 박동선이 1970년대에 연간 50만 내지 1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박동선씨는 미국산 쌀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재미 한국인 실업가였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박씨는 워싱턴의 '마당발'이었다.
특히 그가 1960년대 워싱턴 시내에 개설한 '조지타운 클럽'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제럴드 포드
부통령까지 출입했을 정도로 주목 받는 고급 사교장이었다. 박씨는 이 자리를 미국산 쌀 수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과 교류하는 장(場)으로 활용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에서 1974년)에 분노했던 미국인들은
의회마저 부패에 찌들었다는 언론의 폭로에 치를 떨었다. 동시에 한국은 뇌물 공여를 통해 국익을 꾀하는
나라로 인식됐다.
특히 3선 개헌, 유신선포, 잇단 긴급조치 선포 등 한국 정부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도
곱지 않은 상태여서 한국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갖고 있던 의원들 사이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삭감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고,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의원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보다 앞서 중앙정보부가 미국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1975년 미 하원의회의
청문회에서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에서의 반(反) 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공작을 벌인다"는 요지의 사실을 폭로했으며, 이를
계기로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은 한국의 불법적인 로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76년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주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씨는 망명 후 이른바 '백설작전(Operation Snow White)'을 폭로해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백설작전이란 김씨에게 맡겨진 특별임무로써,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 내 긍정적 여론을 유도하기
위하여 미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기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포섭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미 의회와 국무부는 당연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핵심인물인 로비스트 박동선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
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미국이 식량차관을 삭감했다. 결국 미군 철수 카드에 밀려 1977년
말 한국 정부는 박동선이 미국으로부터 전면 사면권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박동선을 미국에 넘겼다.
그리고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 상,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쌀 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중 800만 달러를 로비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3일 공개청문회
에서 32명의 전, 현직의원에게 85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선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공화당 후보 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1978년 2월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박동선 씨가 미의회 청문회에 증언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심경과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미 의회에서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고발한다. 1977년 6월 2일, 김형욱은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미
의회에 나가 자신이 중앙정보부 부장으로써 행한 각종 불법, 탈법 행위들에 대하여 폭로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이와 더불어 1977년 6월말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보기관이 청와대 도청 의혹 사실을 보도하였는데 이런
도청을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박동선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한국 외무부는 즉각 주한 미국대사를 초치해 기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미
대사는 즉석에서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윌리엄 포터 전 주한 미국대사가 CBS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도청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갈등이 재현되기도 했다.
박동성 사건과 관련해 미국 의회와 법무성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박동선의 로비활동이
과연 한국정부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사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서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로비활동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정부가 사주한 로비활동이었는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미국하원 소위원회 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 기록(책 두 권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청문회
기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박동선은 한국정부를 위한 로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축재(蓄財)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 위원회의 한 의원의 말에 의하면 박동선의 로비활동은 한국의 국가이익을
빙자해서 개인의 재산을 축척하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1979년 8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라고 불리운 박동선 사건이 종결될 때 워싱턴의 연방지방법원은
박동선씨에 대한 36개 항목에 걸친 기소를 취하했지만, 미 국세청은 박동선씨가 쌀 거래로 올린 수입에
대한 세금을 냈어야 했다면서 1천5백만 달러의 추징금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