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位의 효자는 중시조 문경의 9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하고 뛰어난 재기가 있어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충성심도 남달랐다. 8세 때 양친이 중병에 들자 단지주혈(斷指注血)하고 효심이 지극정성, 신인(神人)을 만나 선약을 구하여 드리고 상분(嘗糞)하는 등 지극한 간병을 다하였다. 상(喪)을 당하면 3년 동안 시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1624년(인조2) 이 괄의 난 때에는 병곡을 모으고 의병을 일의켜 충주까지 출전 평정케 되니 1661년(현종2) 3형제 모두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었다. 죽옹 김정서는 태어 난지 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모친 봉양에 효성을 다하여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학남 김 우는 일찍 학문에 명성이 높아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일컬어지고 면암 최익현과 도의지교를 맺고 학문과 충절 유풍진작에 힘쓰다가 1910년(庚戌) 국치(國恥)의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 10여일만에 졸하였다.
월산재(月山재)는 용강사의 강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 제 73호로 지정되었다. 앞의 산이 반월형 같다하여 山은 월산이요 川은 월내천이라 부르는데서 연유하여 월산재(月山齋), 월내서재 또는 낙영재(樂英齋)라고도 한다.
본향 천관산(영은동천) 자락에 위치한 장흥위문의 대표 사우인 장천재(長川齋)에는 8개의 액호 편액과 시운 편액 36점 등 총 46점의 편액글이 현재 소장되어 있습니다.
용산면 모산마을에 위치한 월산재 경내에 영광김씨와 우정의 표석을 남긴 장흥부사 松石 송기로는 1883년 2월~1884년 8월, 1887년 4월~1888년 3월간 2번 장흥부사를 역임하면서,
장천재 경내에 액호 추원각(追遠樓) 액호 1점과 시운 3점 등 4점 편액글을 남겼습니다. 이러함은 장흥위문과 상당한 인연을 맺었음이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