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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교육부가 진행하는 전교우 성경통독 프로그램의 이번 주 범위는 ‘신명기’였습니다. 신명기라는 책 제목에서 신(申)자는 ‘되풀이한다’ 혹은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되풀이해서 선포하는 말씀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히브리성경에서 신명기의 이름은 ‘드바림’입니다. 신명기 1장 1절은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 편의 아라바 광야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라고 시작되는데, 여기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드바림’입니다. ‘말’을 의미하는 ‘다바르’의 복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는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선포한 장소는 요단 동쪽 숩 맞은 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였다고 신명기는 밝히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여리고 맞은 편에 위치한 모압 땅입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지 40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선포한 설교입니다. 유감스럽께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역할은 애굽에서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설교는 모세의 고별설교에 해당이 됩니다. 이 설교에서 모세는 출애굽하고 시내산에서부터 40년의 광야생활을 회고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와 법도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쉽고 편하고 빠른 길을 선호합니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가장 빠른 경로를 따라서 차를 몹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을 기대합니다. 힘든 길이라면 아예 가려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그 땅을 기대하며 흥분과 감격 속에 애굽을 탈출해 나온 것입니다. 그 땅으로 가는데, 애초에 광야로 나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애굽을 떠나 온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이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을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이 도로는 대상들이 오가는 중요한 교역로입니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편한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3:17에는 이 길을 포기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가까운 길이지만,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국경 수비대가 진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군대를 만나서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길을 택하였다면, 약 200킬로미터가 좀 넘는 이 길을 가는데 하루에 20킬로씩만 걸어도 10일이면 족할 거리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선 길은 ‘홍해의 광야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수에즈만을 따라 시내반도 남쪽으로 내려가서 시내산을 거쳐서 다시 시내반도의 우측 아카바만 쪽으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올라가는 경로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러분이 출애굽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참고한다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참을 우회하는 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시내 광야는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참으로 척박한 땅이었고, 그 길을 통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광야 가운데 솟아있는 하나님의 산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홍해의 광야 길로 들어선 후에도 이스라엘은 좀 더 빨리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돔 왕은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을 결코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군을 가로막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번 에돔 땅을 동쪽으로 돌아서 먼 길을 우회해야만 하였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 때 '그 길로 인하여 백성들은 마음이 상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도 막히고, 에돔을 가로질러 가는 길도 막혔습니다. 빨리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자신들의 기대가 깨어졌을 때 그들은 그 길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상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꼬이고 그래서 한 번, 두 번, 실패를 되풀이하는 경우, 마음이 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계획이나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합니다. 실패자라고 하는 다른 사람의 평가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혹은 주변 사람이나 환경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의 가는 길이 번번이 막히고 힘이 들자 누군가를 원망하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과 모세였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도 그랬고, 먹을 양식이 없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은 마음이 상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고 지도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40년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불평과 원망의 길이었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가 그 40년을 불평과 원망 속에 살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모세와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은 광야 40년 세월이 지난 후, 아라바 광야 요단강 강가 모압 평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모세는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지나온 길들을 회고하면서 몇 가지 권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하여 ‘기억하라’는 권고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신15:15, 24:18 등에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이 말씀은 곧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애굽에서 억압받으며 종으로 살아가던 그 힘든 날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종의 신세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 생활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8장에서는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억할뿐 아니라, 애굽에서 해방된 이루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40년 동안이나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도보로 10여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광야의 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라는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룩스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그의 책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누구나 더 ‘큰 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유나 권력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중요시하는 세상이다 보니, 이런 것들을 얼마나 소유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를 오르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길들여지고 말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Big Me’의 시대입니다. 더 큰 내가 되고자 하는 문화 속에서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가치나, 나 자신의 도덕적인 능력 따위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은 누구나 ‘뒤틀린 목재’와 같이 결함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스스로 큰 자라고 착각하지도 말고, 세상적인 의미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연약함을 극복해 나가면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내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품격은 바로 그러한 과정 가운데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싸움에서 필요한 덕목은 겸손과 절제라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인간은 스스로 작아집니다. Little Me! 작은 나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낮아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알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과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이며 ‘낮아짐’입니다. 바로 이것을 시험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40년이란 세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40년의 광야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바로 그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훈련하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b)고 하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날마다 그 날의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아침마다 진 중에 하얗게 내린 하루의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이틀치를 욕심내서 거두었다면 한낮에 그 만나가 상하여 악취가 진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일의 양식까지 쌓아두려는 인간의 불신과 탐욕은 이렇게 그의 삶과 인격에서 악취로 풍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떡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떡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양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일용할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떡을 주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시절에 대해서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9:7에서는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올리셔서 모세가 40일을 시내산에 머물며 마침내 하나미의 계약의 율법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고리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준 신이라고 선포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송아지는 바알의 상징입니다. 금송아지 안ㅍ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는 것은 곧 우상 숭배를 의미합니다. ‘뛰놀았다’는 말은 원어로는 성적인 방종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는 풍요와 쾌락의 신을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풍요와 쾌락이 나 자신을 구원하며 내 삶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우상숭배자들 가운데 삼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의 계명보다 물질과 세상적인 쾌락과 세상적인 성공을 더 사랑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두운 과거. 실패의 역사를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으로 인한 죄책감이나 수치심,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패의 역사 속에서 겨ㅛ훈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40년이라고 하는 그 기나긴 고난의 시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는 바알 신앙과 이방의 풍습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한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7:19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물 가운데도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게 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수많은 인생의 위기도 넘어왔습니다. 어찌 견딜까. 어찌 넘을까 걱정했던 고비들을 잘 넘어서 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권능의 날들과 그 날의 경험들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광야란 매일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날마다 베푸시는 그 날의 만나와 생수가 아니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의 그 고난은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자기를 낮춰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갈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오늘 누리는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아갈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의 길’이 아니라 먼저 ‘홍해의 광야 길’을 지나게 하십니다. 우리로 낮추셔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겸손하게 하시고 그래서 힘 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회하는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지금 광야에서 힘들어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우리 앞에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고난의 의미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광야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정금처럼 연단되어,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광야의 길, 그 길에서의 실패와 그 길에서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