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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풀 과의 한해살이 풀, 쪽 |
쪽빛을 영어로는 ‘인디고’ 또는 ‘인디고 블루(indigo blue)’라고 하는데,
이미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인디고로 염색한 아마포를 미라의 몸에 감쌌고,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카펫을 인디고로 염색했다는군요. 또한 대영박물관에
기원전 7세기의 바빌로니아 염색법이 소개된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27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쪽으로 물들인 옷감 |
쪽빛을 낼 수 있는 풀들은 사실 수십 가지나 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쪽과 대청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산강을 이루는 물줄기와 바닷물이 합류했던 나주가 쪽 재배지로 적당해서, 조선 시대와 근대 사회 말까지 그곳에서 염료 생산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교역까지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고, 고려 시대 도염서나 조선 시대 경공장 등에서 그곳의 쪽을 원료로 쓰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인디고 덩어리 |
인디고의 주원료인 쪽과 대청 가운데 쪽은 5천 년 전 인더스 강에서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청은 고대 영국에서 전쟁의 염료
였습니다. 고대 켈트 족의 상징이 대청이었고, 로마와 전투할 때 켈트 족의 왕은 푸른
대청을 온 몸에 칠했습니다. 또한 나이지리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대청 문신을 했다는군요. 대청과 쪽의 대립은 재미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대청이 대세
여서, 13세기에 지어진 프랑스의 아미앵 성당 외벽엔 거대한 자루를 들고 있는 대청
상인 두 명이 조각되어 있는데, 성당 홈페이지엔 자기네 성당은 대청상인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지어졌을 거라는 구절까지 있더군요. 당시 아미앵 직물은 이탈리아까지
명성을 떨쳤는데, 그게 다 솜 골짜기에서 재배된 대청 덕분이었고,
‘아미앵의 파란색’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왕의 숙소였던 건물
순례자들의 숙소
시내 구경
아미앵은 솜강과 그 지류인 르아브르강과 셀강 사이에 산재하는 소택지(沼澤地) 위에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시저도 다녀 간 일이 있는 옛 도시이다.
시청 근처에 있는 시계탑
작은 하천들이 집집을 구획지어 주고 있는 마을 외곽 지역
옛날부터 자신의 밭에서 채소나 곡식을 재배하여 개인용 작은 배를 이용해
시장에 들고 나가 팔았다고 한다.
집과 집을 연결지어 주는, 각각 다른 모양의 다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미앵의 옛 시가지에는 아미앵강의 7개 줄기들이 격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다
운하 주변에는 예전의 집들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해 손님을 모시고 있다
물이 많이 차는 근처 저지대(오르티용)의 시장출하용 야채 재배업자들이
조그만 배에 야채를 싣고 와서 시장을 연다
광장으로 올라간 야채들이 30분도 안되어 모두 팔려나간다
파란색
오랫동안 파란색은 폄하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란색은 진정한 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흰색, 검은색, 노란색, 붉은색만을 진정한 색으로 여긴 것이다. 또 염료 기술의 문제도 있었다. 염색공들과 화가들은 파란색을 제대로 염착시키지 못했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만이 파란색을 저승의 색으로 여겼다. 그들은 구리로부터 이 염료를 제조해 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파란색이 야만인들의 색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게르만족 사람들이 유령처럼 으스스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얼굴에 청회색 가루를 바르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파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게르만어 <블라우 blau>에서 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파란 눈의 여자는 천하며, 파란 눈의 남자는 거칠고도 어리석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성경에서는 파란색이 언급되는 일은 드물지만, 푸른 보석인 사파이어는 가장 귀한 보석으로 여겨진다. 파란색에 대한 멸시는 서양에서는 중세까지 이어진다. 빨간색은 선명할수록 더 큰 부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빨간색은 사제들, 특히 교황과 추기경의 옷을 물들였다.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역전된다. 남동석, 코발트, 인디고 덕분으로 화가들은 마침내 파란색을 염착하는데 성공한다.
파란색은 성모의 색이 된다. 성모는 파란색 외투나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성모와 파란색이 연결되는 것은 성모가 하늘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고, 파란색이 거상(居喪)의 색인 검은색 계열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하늘이 검은색이나 흰색이었으나, 이 시대에 와서 비로소 파란색으로 칠해진다. 녹색이었던 바다 역시 목판화 등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유행은 바뀌어 파란색은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 되며, 염색공들은 이 유행을 따른다. 그들은 서로 경쟁을 벌이며 점점 더 다양한 종류의 파란색을 만들어 낸다. 토스카나, 피카르디(지금의 아미앵 지역), 툴루즈 등지에서는 파란색 제조의 원료가 되는 식물인 <대청>이 재배된다. 파란색 염료 산업 덕분으로 이 지역들 전체가 융성하게 된다. 아미앵 대성당은 대청 상인들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것이다.
반면 스트라스부르에서 붉은색의 재료인 꼭두서니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성당 건축 자금을 대는 데 애를 먹는다. 이런 까닭으로 알자스지방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악마를 예외없이 파란색으로 묘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파란색을 좋아하는 지방들과 붉은 색을 좋아하는 지방들 사이에 일종의 문화적 전쟁이 시작된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뱅은 검은색, 갈색, 파란색은 <정직한> 색이고,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은 <정직하지 않은> 색이라고 주장한다.
1720년 베를린의 한 약사는 감청색을 발명하며, 이로 인해 염색공들은 파란색의 색조를 더욱 다양화할 수 있게 된다. 항해술의 발전 덕분으로 대청보다 훨씬 강력한 염착력을 지닌 엔틸리스 제도와 중앙아메리카의 인디고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색의 세계에 정치도 끼어든다. 프랑스에서 파란색은 흰색의 왕당파와 검은색의 카톨릭파에 맞서 일어난 공화파의 색이 된다. 또한 나중에 공화파의 파란색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붉은색과 대립한다.
1850년대 파란색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드높인 옷이 등장하니,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재단사 리바이 스타라우스가 발명한 청바지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설문 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란색을 꼽는다. 유럽에서 스페인은 붉은색을 선호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청색이 아직 발을 붙이지 못한 유일한 영역은 음식이다. 파란 통에 든 요구르트는 흰색이나 붉은색 통에든 것보다 덜 팔린다. 파란색 음식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중에서 - |
샤갈作 Wlndow over a Garden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