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데 허 의원댁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
‘쾅쾅쾅’ 행랑채에서 자고 있던 사동이 눈을 비비며 |
“누구세요? 누구세요?” 고함을 쳐도 |
“어어어∼” 말도 못하며 대문만 쾅쾅 찼다. |
사동이 대문을 열자 두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입을 감싼 젊은이가 |
“어어어∼ 어버버∼” 벙어리 외침만 토했다. |
사동이 보아하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낼 처지가 아니다. |
사동이 신발을 챙겨 신고 대문 밖으로 줄달음을 쳤다. |
그날따라 허 의원은 첩 집에 간 것이다. |
얼마나 기다렸나. 발을 동동 구르며 피를 쏟던 젊은이가 대문간에 주저앉아 |
웅크리고 있는데 허 의원이 동산만 한 배를 안고 뒤뚱거리며 사동을 따라왔다. |
진찰실에 불을 켜고 응급환자를 봤더니 혀가 잘려 덜렁덜렁 한쪽에 매달려 있었다. |
소금물로 피를 씻어내고 아파서 죽겠다는 놈을 형틀에 묶어놓고 |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혀를 꿰맸다. |
“어쩌다가 혀가 잘렸어?” 허 의원이 큰소리로 물어봐야 허사인 것이 |
혀를 굴리지도 못할 뿐더러 너무 아파 기절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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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끄무레하게 동녘이 밝아올 때쯤에야 사동이 찬물을 퍼부어 |
혀가 잘린 젊은이가 정신을 차렸다. 박 진사의 개차반 외동아들 박한이었다. |
지난밤 저잣거리에서 친구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가던 박한은 |
마을 초입 장 초시네 집 방에 불이 켜져 있어 까치발로 들창을 들여다봤다. |
셋째딸 이매가 바느질을 하다가 불을 켠 채 쓰러져 자고 있었다. |
저고리는 벗어 젖무덤이 거의 다 나왔고 속치마만 입어 희멀건 허벅지도 |
그대로 드러났다. |
박한은 정신이 혼미해져 가쁜 숨을 쉬면서 장 초시네 담을 넘었다. |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호롱불을 끄고 이매의 입에 혀를 넣었다. |
“으∼아악!” 그대로 피투성이가 돼 허 의원댁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
박 진사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허 의원을 찾아와 아들이 말을 할 수 있게 |
해달라고 읍소를 했다. 허 의원이 매일 왕진을 했지만 장마철에 덜렁거리던 혀는 |
제대로 접합이 되지 않고 시커멓게 썩기 시작하더니 결국 떨어져나갔다. |
삼대독자 아들이 말을 못하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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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연유야 입 밖에 내기도 창피한 가문의 수치지만 |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말을 못하게 만들다니! |
박 진사는 삼대독자를 빨리 장가보내 대를 이어야 하는데 벙어리한테 |
시집올 처녀가 없는 것이다. |
화병이 난 박 진사는 술독에 빠져 살다가 병석에 눕게 됐다. |
백약이 무효. 박 진사는 일어날 줄 모르고 문전옥답은 한마지기, |
두마지기 약값으로 팔려나갔다. |
박한은 낯을 들고 바깥출입을 할 수 없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다. |
문전옥답 다 팔고 나서 박 진사는 이승을 하직했다. |
사십구재 후 부랴부랴 탈상을 하고 나서 박한은 심마니 당숙을 따라 산속을 헤맸다. |
밀린 약값으로 집도 날아가자 박한은 산속에 귀틀집을 짓고 너와로 지붕을 이었다. |
약초를 찾고 가끔씩 산삼도 캐서 저잣거리로 나가 필담으로 약재상과 흥정했다. |
아는 사람 만날까봐 고개를 숙이고 삿갓을 눌러쓴 채 국밥집에 들어가 |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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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밤, 숲길을 걸어올라 제집에 들어가 벽에 기대어 앉으면 |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
대가 끊어지는 걸 그렇게도 애통해하던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박한은 |
방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처럼 울음을 짜냈다. |
그때 방문이 열리고 쏴∼ 푸른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
여자의 흐느낌 소리도 달빛에 묻혀 함께 들어왔다. |
누군가 들어와 문을 닫아 달빛을 막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
박한을 뒤에서 껴안았다. |
“어버버!?” 모골이 송연해진 박한이 돌아앉았다. |
“소첩, 이매이옵니다” |
“어버버버∼” 박한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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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탈하려다 혀가 잘려나간 박한도 얼굴을 들고 바깥출입을 못했지만 |
이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고함을 쳐서 쫓아내기만 할 걸 삼대독자를 |
벙어리로 만든 회한과 죄책감·수치심으로 두문불출하다 |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가 폭포가 만든 소(沼)에 몸을 던졌다. |
그때 지나가던 탁발승이 이매를 건져내 암자로 데려가 이매는 |
부엌일을 하는 공양보살이 됐다. |
폭포 주변에 벗어놓은 신발이 발견돼 이매는 자살한 걸로 소문이 났다. |
장 초시는 만취한 후 피울음을 삼키고는 딸의 시신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
몇달 지나지 않아 이매는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
이매는 첩첩산중 외딴 암자에서 공양보살을 하며 박한에 대한 |
소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박한은 벙어리였지만 이매는 박한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었다. |
삼년이 지난 어느 봄날 한식에 박 진사 묘소 앞에 술잔을 올리고 넷이서 절을 했다. |
박한과 이매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이었다. |
첫댓글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