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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유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동방사(백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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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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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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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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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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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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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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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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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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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파의 학맥도>
1689년(숙종 15)에 영남 유림儒林이 경광서원鏡光書院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한 소疏에서 경당을 일컬어 “장흥효는 근세 유현儒賢입니다. 김성일, 류성룡 두 사람의 문하에 출입했는데, 일찍이 심학心學의 요체를 깨닫고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습니다. …… 더욱이 역학易學에 힘을 쏟아 일원一元의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추연한 바로써 도설圖說을 만들어 후학들을 깨우쳐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禮曹에서는 회계回啓하여 이르기를, “장흥효는 선정先正의 문하에 출입을 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오로지 정진하고 후학들을 이끌어 지도하여 성취시켰으니 이것은 매우 어질고 훌륭한 일이었던 바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영남 선비들의 중망重望이요, 고을의 선비였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들은 국가와 유림儒林 간의 공적公的 문서들이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성이 높다. 특히 ‘심학心學의 요체를 깨달았다’고 하는 부분과 ‘위기지학에 오로지 정진하였다’는 평가는 경당학의 특색과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라 하겠다.
3. 문중의 인물들
1) 딸 장계향張桂香(1598~1680)
조선시대는 유학儒學의 시대이다. 흔히 우리는 유학적 전통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대단히 미미하고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의 여성상을 소극적 의미로, 때로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일면 그렇게 보일 만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현대’와 ‘전통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이름난 여성으로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 임윤지당任允摯堂을 떠올릴 수 있다. 신사임당은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했으며 종래 전통시대의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허난설헌은 출중한 문학적 자질로써 시대적 한계와 아픔을 뛰어넘고자 했던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임윤지당은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누이동생으로서 우리나라 유일의 ‘여류女流 성리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녀는 남자 형제들의 공부방에서 어깨너머로 공부하다 신광유申光裕에게 출가했으나 일찍 미망인이 되었는데, 평생을 수절하며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로 더 유명한 장계향張桂香은 ‘안동’ 출신으로서 일평생 동안 경북북부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유학적 가치로 충일한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살다간 여인이다. 장씨부인 또한 시ㆍ서ㆍ화에 모두 능했고 심지어 고난高難한 성리이론에도 해박했지만, 그녀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지경持敬의 삶’이다. 장씨부인은 평생토록 경敬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으며, 이러한 실천적 모습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향기를 아름답게 드날렸다.
장씨부인에게 있어서 경敬이 특별히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우선 친정아버지인 경당 장흥효와 관련이 있다. 경당은 퇴계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한 손제자孫弟子로서 평생토록 경敬의 삶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경당의 가르침이 장씨부인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장씨부인의 아들인 존재 이휘일ㆍ갈암 이현일 등에게로 전해지며 이들 집안의 가학家學의 연원을 이루게 된다.
장씨부인의 재주는 일찍부터 영남지역의 많은 선비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왔다. 10세 무렵에 지은 몇 편의 시작詩作을 통해 시재詩才의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고, 당대의 서법가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안목을 놀라게 했던 초서草書 필체 또한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했다. 또한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맹호도猛虎圖의 그림을 보면 시詩ㆍ서書ㆍ화畵 모든 분야에 걸쳐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당의 제자들조차 이해하기 힘들어 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묘리妙理를 독학으로 깨쳤다는 일화를 통해 성리학에 대한 그녀의 이해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의 저자라는 점에서 장씨부인의 성가聲價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장씨부인의 위대성은 시ㆍ서ㆍ화와 관련한 예술적 재주나 그녀의 뛰어난 학문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 자신을 낮추며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모습에서 더 큰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비록 여자였지만 전통 유학과 성리학의 세계관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기본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평생토록 노력하였다. 그녀는 우선 성선性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선을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기 좋아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서 자녀들과 주변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유하고 그녀 스스로 그러한 삶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후대 학자들은 그녀를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렀다.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하나로 하기 위한 끊임없는 지경持敬의 수행 과정이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찍이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공자의 대답이 저 유명한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의 정명론正名論이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장씨부인이야말로 이러한 정명正名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다.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이웃으로서 어디에 있든 누구와 어울리든 한결같은 모습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더불어 선을 실천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장씨부인이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충분히 퇴계 학통의 적전자가 되었을 터인데, 아쉽게도 부녀가 닦아야 할 덕행과 어머니로서의 의범儀範 때문에 규문閨門 안에서만 그 학문이 그치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장씨부인의 위대성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즉 그녀는 ‘여자로서’ 갖는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자각하였을 터이지만 이에 좌절하거나 ‘어설픈’ 남자 흉내를 내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올곧게 가며 그 안에서 지경의 삶을 실천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스스로를 내세우고 싶어 안달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장씨부인의 지경持敬의 삶은 큰 교훈을 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여성이지만 장씨부인을 당당하게 경북북부지역 성리학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최근 경상북도는 장씨부인의 삶과 사상이 가지는 ‘범본적範本的’ 의미에 주목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경상북도 산하단체인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은 주목할 만한 작업들을 일관성 있게 전개해 왔으며, 민간 주도로 ‘장계향선양회’가 경상북도 각 지역별로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사례의 경우에 객관성이 부족하다. 예를 들면 장씨부인의 자작시로 알려져서 인용되고 있는 것 중에서 장씨부인의 작품으로 보기 힘든 것도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그동안 장씨부인 선양사업과 관련하여 앞장서 활동해 온 일부 작가 혹은 강연자의 경우에도 쉽게 발견된다. 이들은 실제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아예 사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한다. 우선 장씨부인과 관련한 각종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그녀의 생애를 정확하게 고증해낼 필요가 있고, 그러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녀의 삶과 사상적 의의를 진솔하게 그려내야 한다.
2) 아들 장철견張鐵堅(1626~1709)
경당의 첫 부인은 권사온權士溫의 딸로서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바로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이다. 그리고 둘째 부인은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다. 맏아들은 철견鐵堅, 둘째는 석견石堅, 셋째는 도견道堅이다. 그 중에서 맏아들인 철견의 자는 약허若虛, 호는 복림伏林이다. 지역 유림 사회에서 학행學行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수직壽職으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경당은 첫 부인에게서는 딸만 하나 얻었고, 둘째 부인에게서도 처음에 딸을 낳게 되자 그 실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계해년(1623년) 10월 8일 일기에서 “해시亥時에 딸이 태어났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 지극한데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속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뒷날을 기약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심정은 당시 여느 부모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던 중 그는 병인년(1626년)에 소원하던 첫아들 철견을 얻게 되었다. 경당의 기쁨이 어떠했는지는 출생 당시의 일기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문집 속집에 ‘아들 낳은 것에 대하여 시를 읊음.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차운함’이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 “태중胎中에 있을 때도 가르쳤고 또 아이 때도 너를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하려고 하거늘 알아듣는지 알 수 없구나.”라고 한다.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태중胎中에 있는 아이에게 어떤 마음으로 소망하고 어떤 가르침을 했겠는가 하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태중에서부터 가르쳤고, 또 아이 때부터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경당이 작고할 당시에 철견은 8세였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가 아버지 경당으로부터 직접 훈도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철견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누나 장씨부인을 따라 가족들과 함께 영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생질인 존재, 갈암 형제와 함께 자형 석계의 문하에서 학업을 연마하였다.
석계는 자식들과 나이 어린 처남에게 특히 ‘경’공부를 강조하였다.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옛 성현을 닮아가도록 가르쳤으며, 아직 어린 사람들에게는 입효출제入孝出悌의 도리를 가르쳐서 궁리수신窮理修身의 공부를 하게 했다. 비록 걸음을 걸을 때나 대답을 할 때, 그리고 음식을 먹거나 옷을 입을 때에도 반드시 정성과 조심스러움을 다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경당이 평소 강조하던 ‘경’공부이기도 하다. 즉 ‘경’공부는 경당을 거쳐 석계, 갈암 형제, 밀암에 이르면서 재령이씨 집안의 가학家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당과 석계를 통해 철견에게로 이어지며 안동장씨 집안의 가학이 되기도 하였다.
철견 형제와 갈암 형제의 우의는 각별했다. 비록 외숙과 생질의 관계였지만 나이가 비슷했기에 마치 한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다. 그들은 숙식을 같이 하고 학업을 함께 연찬했으며,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후에도 친지의 정이 돈독했다. 특히 나이가 비슷했던 철견과 갈암의 우의는 더욱 두터웠다. 갈암은 억울한 일로 귀양살이하던 외숙[장철견]을 찾아 호서지방 안흥도安興島까지 무려 세 차례나 다녀왔고, 바쁜 관직생활 중에도 나이어린 외사촌(禧)의 혼례를 염려하기까지 했다.
철견은 가정을 이룬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고향 춘파로 돌아와 경당의 유업을 잇게 된다. 그런데 그는 30세가 갓 넘어선 1656년(효종 7)에 무고誣告를 입어 태안군 안흥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비록 억울한 일로 누명을 쓰고 고생을 했지만 분노를 품고 운명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는 힘든 귀양생활을 오히려 자신을 성찰하고 연마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기에 석계는 귀근歸覲[집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뵙는 것]을 허락받아 잠시 고향에 온 처남을 위로하며 지어준 글에서 “이제 그의 말하는 품위와 모습을 살펴보건대 옛날의 그가 아니구나. 후일의 성취할 바는 또한 지금보다도 더 나을 것이니, 그런즉 그가 곤궁에 처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귀양에서 풀려난 철견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오직 학업과 제자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경당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고 이를 현창顯彰하고자 애썼다. 그는 1665년(현종 6)에 조석형趙碩亨에게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의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발문의 내용 중에 위선爲先 사업을 위해 애쓰는 철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내가 적적하게 지내던 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 그 사람을 맞이하니 벗인 장약허張若虛였다. 들어와 인사를 한 후 소매 속에서 새로 간행한 그림 하나를 내놓으면서 나에게 발문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것은 그의 경당 장선생께서 지은 ‘일원소장도’였다. …… 자식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어버이를 드러내려고 할 것이다. 약허는 고된 일을 맡아 부지런히 일하여 이 도圖를 간행한 것이다. 무릇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봉록俸祿을 덜어내 조상의 문집을 간행하는 사람은 많지만, 비록 재화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관직이 없는 자가 조상의 문집을 간행한 경우는 드물다. 지금 약허는 일원소장도가 아직 간행되지 못한 현실을 애통히 여겨 자주 양식이 비는 곤궁함 가운데서도 공인工人에게 품삯을 주어 일을 성취시켰으니, 가히 조상의 뜻을 잘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도圖를 보고 경당선생이 살아계실 때 직접 가르침 받지 못한 것을 더욱 한恨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아들 약허와는 타향에서 일시 거주하는 중에 망년忘年의 교제를 했다. 그의 뜻을 훌륭하게 여겨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이 글을 쓴다. 벗의 이름은 철견이요, 약허는 그의 자字이다.
철견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막내 아우인 도견道堅의 아들 ‘희禧’를 후사後嗣로 맞았다. 희禧는 벽암碧巖 우비적禹丕績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철견의 딸 둘은 정필흥鄭必興과 조필대曹必大에게 출가하였다.
3) 외손자 이휘일李徽逸(1619~1672)
이휘일의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이고, 이시명의 아들이다. 13세 때 외할아버지 경당의 문하에 들어가서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설을 배웠다. 또한 주역의 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과 주돈이周敦頤의 태극설太極說을 배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선현들의 인仁에 대한 말을 모아 ‘구인략求仁略’이라 이름붙이고 이를 아침저녁으로 독송하였다. 일찍부터 정자ㆍ주자의 성리학을 궁구하여 깨닫지 못한 바가 없었으나,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는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손자와 오자 같은 병서를 읽어 기정합변奇正合變의 묘리를 연구하고 산천의 험이險易와 주변국가의 정황을 조사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죽은 뒤에는 다시 근사록ㆍ심경ㆍ성리대전ㆍ역학계몽ㆍ주자서절요ㆍ퇴계집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예禮를 존중하였는데, 주자의 가례를 참작하여 상제대요喪祭大要와 절목節目을 정리하였으며 이를 통해 습속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ㆍ구인략求仁略ㆍ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시문집인 존재집은 8권 3책의 목판본으로서, 1694년(숙종 20) 아우 현일이 편집ㆍ간행하였다. 권1에 사辭 1편, 시 110수, 권2ㆍ3에 서書 51편, 권4에 서序 1편, 기記 2편, 잡저 10편, 권5에 제문 5편, 묘지명 5편, 권6에 행장 5편, 권7에 습유拾遺로 시 17수, 서書 2편, 제문 2편, 권8은 부록으로 행장, 묘지명, 애사, 제문 13편, 만사 22수, 상량문, 봉안문, 상향축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성리학의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천리유행天理流行의 이치를 논한 것이 많다. 잡저 중 「서성리략후書性理略後」는 13세 때 「성리략」을 보고 성리학을 공부하여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며 지은 글이다. 「안성유씨우선설변安城劉氏右旋說辨」은 하늘이 오른쪽으로 돈다고 주장한 안성유씨의 설을 여러 선현들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한 것으로서, 곧 그는 좌선설左旋說을 주장하였다. 「일원소장도후어一元消長圖後語」는 경당의 「일원소장도」에 대하여 해석한 것이며, 「계몽도설啓蒙圖說」은 주자의 역학계몽을 그림을 덧붙여 상세하게 풀이한 글로서 존재의 학문적 역량을 짐작케 한다.
존재는 경당으로부터 몸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는 요체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에 대한 설을 들었다. 경당은 특히 그를 아껴서 편지를 보내 대학의 격물치지와 성의정심하는 방법, 그리고 맹자의 수심양성하는 뜻을 일러 주었으며, 존재는 이로 말미암아 학문을 좋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는 제자백가의 책을 모두 물리치고 근사록, 심경, 성리대전, 역학계몽, 주자서절요, 퇴계집 등의 책만을 가져다 깊이 잠심하고 묵묵히 그 뜻을 연구하여, 도리의 근원과 학문의 단계에 대해 요령을 잡고 깊이 이해하였다. 이러한 독서록과 공부법은 그의 외조부이자 스승이기도 한 경당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존재는 몇 사람으로부터 학업을 연마하였다.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여 각각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평소 그는 호양湖陽에 대해서는 경전에 대한 주注를 다는 데 들인 각고의 노력을 장점으로 받아들였고, 매원梅園에 대해서는 풍부한 학식과 온화한 인품을 장점으로 들었다. 그리고 학사鶴沙에 대해서는 청수淸修하고 간정簡靜한 인품을 장점으로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보존하여 성품을 기를 줄 알고, 천하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되 정조精粗와 내외內外를 둘로 여기지 않은 것은 오로지 외조부 경당의 문하에서 발단되었고, 스스로 미루어 넓힌 것이 많았다.
경당이 세상을 떠날 때 존재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15세라는 나이도 어리지만 13세에 입문했으니 배운 기간도 길지 않다. 그렇지만 존재에게 참된 스승은 어디까지나 경당 한 분이었다. 그러므로 존재의 ‘행장’에서는 존재와 심학적 도통의 관계를 이렇게 강조하였다.
처음에 경당선생이 서애와 학봉이 전한 계문심학溪門心學의 지결旨訣을 얻었으나 그 분이 돌아가신 뒤로 은미한 말이 마침내 끊겨 세상에서 이른바 ‘학學’이라는 것이 괴이하고 황당한 데 빠지지 않으면 의장儀章이나 도수度數 따위의 말단만 추구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실천하고 내면으로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게 되었으니, 이른바 ‘존심存心의 지결旨訣’이 거의 민멸泯滅하게 되었다. 존재는 동자 시절에 다행히 경당의 문하에서 배웠다. 비록 요지를 질정質正하여 전해 내려오는 깊은 뜻을 듣지는 못했으나 총명하고 숙성하였기 때문에 상고하고 근거할 바를 알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마침내 만년에 마음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었으니, 그는 “심心이 보존되지 않으면 양성養性과 궁리窮理의 근본이 될 수 없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집을 ‘존재存齋’라 이름 짓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스스로 성찰하여 그 명칭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는 터전으로 삼았다.(존재집권8, 행장)
17세기 영남학파에 있어서 갈암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통상 ‘퇴계-학봉-경당’의 학맥을 곧바로 갈암에게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갈암은 경당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수수授受한 바 없다. 경당의 학문은 존재가 직접 수수하였으며, 갈암은 존재를 통해 이 학맥에 닿게 된다. 존재는 경당의 세거지 금계金溪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상당 부분을 외가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존재가 13세에 경당을 만났다는 기록은 사제 간의 관계로서의 만남을 의미한다. 3년간이라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존재는 경당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특히 경당 사상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성리이론과 역학에 대해 상당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동생 갈암은 존재의 행장을 쓰면서, 존재가 경당의 학문적 지결을 전수받았다고 평하였던 것이다.
4) 외손자 이현일李玄逸(1627~1764)
이현일의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이며, 존재 이휘일의 아우이다. 그는 외조부 경당으로부터 직접적인 대면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학으로 전승되어 온 퇴계학을 학파로 형성시키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666년(현종 7)에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상소를 지었다. 그는 영남 남인의 영수領袖로 인정받았는데, 퇴계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강력하게 지지하였고 율곡의 학설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의 시문집은 총40권 21책(본집 29권 15책, 부록 5권 3책, 별집 6권 3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아들 재栽가 편집하고 문인 권두경權斗經ㆍ이광정李光庭 등 6인이 여러 차례의 교정을 거쳐 정고본定稿本을 완성하였다. 부록 5권 3책도 재栽가 아울러 편찬하고 간행을 시도했으나, 당시 이현일이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죄적罪籍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 별집 6권 3책을 추가하여 21책으로 간행했는데, 이것 역시 정부의 금지로 문집은 회수되고 책판은 소각 당했으며 간행에 참여한 후손 6인이 유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후 1908년 갈암의 신원과 아울러 중간되었다. 1973년에 21책본에 속집 4권 2책, 계축추보癸丑追補 1책, 성유록聖諭錄 1책, 금양급문록錦陽及門錄 1책 등을 추가하여 모두 7종 47권을 상ㆍ하 2책으로 영인, 출간했고, 1987년에는 1973년의 영인본에 존주록尊周錄을 비롯한 몇 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총 50권을 2책으로 영인影印 출간하였다.
시詩는 외조부 경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학道學에 관한 내용이 많다. 「영화왕詠花王」은 9세 때의 저작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독징비록유감讀懲毖錄有感」은 1649년(인조 27) 23세 되던 해에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고서 청淸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와 요동遼東 회복의 뜻을 피력한 시이다. 소疏와 그에 준하는 차箚ㆍ헌의獻議 등이 138편이나 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정치ㆍ경제ㆍ국방ㆍ외교ㆍ예제禮制 등 정책 전반에 걸친 건의이다. 「의론대왕대비복제소擬論大王大妃服制疏」는 영남 사림을 대표해서 자의대비의 복제服制에 관한 송시열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글이다. 「사공조삼의잉진회소辭工曹參議仍陳所懷疏」ㆍ「인재이언사소因災異言事疏」는 인현왕후에게 예우를 다할 것을 건의한 소疏이다. 「진군덕시무육조소進君德時務六條疏」는 진덕進德ㆍ입지立志ㆍ통변通變ㆍ택임擇任ㆍ육재育材ㆍ석시惜時 등 시무의 6사事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강의經筵講義」는 갈암이 경연에서 경사經史와 치도治道를 강론한 내용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당시 경연 운영의 실상과 갈암의 학문ㆍ정치관을 살펴볼 수 있다. 갈암의 문집 속에는 특히 서書가 많이 있다. 150인 가량의 사우師友ㆍ문인門人ㆍ자손들과 주고받은 편지 총 360편이 수록되어 있고, 시사時事ㆍ경학經學ㆍ성리학性理學ㆍ예학禮學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예학에 관해서는 권두경ㆍ황수일ㆍ정만양 등과의 왕복 서신이 두드러지는데, 갈암의 답서는 최고의 예서禮書로 평가받고 있는 유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常變通攷 편저의 근간이 되고 있다. 성리설은 정시한ㆍ이동완ㆍ신익황, 아우 숭일嵩逸 등과의 서신 왕복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특히, 신익황과의 성리설에 관한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 사이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비길 정도로 면밀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니, 학술자료적 가치가 높다. 잡저雜著는 서書와 함께 이현일의 학문, 특히 성리학적 입장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논리이다. 특히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은 그의 나이 62세(1688년) 때에 저술된 것으로서, 율곡 이이가 성혼에게 답하는 「사칠논변서四七論辨書」에서 19조목을 뽑아내어 이를 다시 비판한 것이다.
갈암은 율곡의 퇴계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 비판에 대해 격분했고, 율곡의 이론이 기호 지방에 성행하는 것을 우려하여 이를 재비판하고자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을 지었다. 그는 율곡이 주장하는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리무발설理無發說’, ‘칠정포사단설七情包四端說’ 등을 반박하고, 퇴계의 ‘리기호발설’을 지지하는 한편, ‘리유동정설理有動靜說’, ‘리기이물설理氣二物說’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암의 학설은 그의 아들 재栽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이상정ㆍ이광정 형제에게로 이어져 퇴계학파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갈암은 경당을 통해 전승된 퇴계학을 ‘학파’로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갈암의 학문은 특별한 사승師承관계 없이 ‘아버지(석계)-형(존재)’으로 이어지는 가학에 바탕하였다. 그리고 갈암의 가학적 전통은 경당에 근원한다. 그러하기에 밀암 이재의 ‘행장’에서도 “밀암의 학문은 가정에서 얻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갈암에게 있어서 존재는 형이자 스승의 역할을 하였다. 갈암은 존재의 ‘행장’을 직접 찬하면서 형을 마치 스승처럼 여겼다.
임자년壬子年 새해 첫머리에 내[갈암]가 간소한 술상을 양친께 올리고 우리 형제들이 함께 지내며 종일토록 기쁘게 이야기 하였는데, 마지막에 공[존재]이 한 마디 경계해 주기를 “너는 재주가 있으나 이렇게 할 것인지 저렇게 할 것인지 판단하는 결정력이 부족하니, 이것이 너의 단점이다. 너는 이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바란다.” 하시기에 내가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공경히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날이 1월 8일이니 공이 돌아가시기 겨우 20일 전이다.(존재집권8, 행장)
그러므로 창설재 권두경 또한 ‘유사遺事’에서 말하기를, “선생[갈암]의 중씨仲氏 존재 선생이 경당의 학문을 선생에게 전하였으니, 선생의 형제분은 서로 사우師友의 관계였다.”라고 하였다.
갈암은 율곡의 리기설理氣說을 배격하고 퇴계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시원은 당초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서 비롯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로서의 대립은 갈암에 이르러 두드러졌다. 당초의 퇴고논변退高論辨은 퇴계의 일부 수정과 고봉의 최종 수용으로 귀착되었으나, 후일 이 논쟁은 우계와 율곡 간에 다시 재연되었다.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지지하며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후 기호지역의 율곡학파는 율곡의 이론을 철저하게 계승하였고, 갈암의 시대에 이르러 영남의 퇴계학파 입장에서는 그러한 율곡학파에 어떠한 식으로든 반박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박의 깃대를 가장 높이 든 사람이 바로 갈암이다. 갈암은 무려 19조의 항목으로 율곡설을 비판하고 나서며, 이후 영남 남인의 영수로 등장하게 된다. 율곡설 비판은 갈암에게만 그치지 않고 그의 동생 항재 이숭일, 아들 밀암 이재에게까지 강하게 이어지며, 이후 영남학파의 기본주장이 되었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29세의 젊은 제자 학봉에게 성리학의 학문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요순堯舜 이래 성현의 심법과 연원 정맥을 직접 큰 글씨로 써서 주었다. 갈암은 이것이 곧 퇴계의 학문 지결이 학봉에게 전수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경당을 학봉의 학맥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갈암은 안으로는 영남학파의 학맥을 확립하였고, 밖으로는 율곡(기호)의 학설을 비판함으로써 영남학파의 ‘학파적’ 특색을 분명히 하였다.
5) 후손 장세규張世奎(1783~1868)
장세규張世奎는 경당 장흥효의 6세손으로 초명이 세한世韓이고, 자는 치오穉五, 당호는 칠계재七戒齋이다. 약관의 나이에 유유헌悠悠軒 김진국金鎭國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연마했으며, 승선承宣 김용락金龍洛 등과 더불어 깊이 교유하였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힘써 실행하였는데, 그 정성이 나이가 들어서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동혁東爀, 아들 구봉九鳳과 더불어 삼대에 걸쳐 위선 사업에 진력하였다. 우선 시조 태사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된 것을 가슴 아파하여 지석誌石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러던 중에 모함을 받아 유배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유배 중에 천행으로 지석이 출토되었는데,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는 지석이 출토 된 곳에 제단을 쌓고 그 아래에 재사齋舍를 짓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로부터 시조 태사공의 추향秋享이 시작되어 이백 년 동안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추향 때가 되면 몇백 명의 제관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드는데 그 숫자가 많을 때는 천여 명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칠계재는 선조 경당의 유묵遺墨을 수습하고 유촉지遺囑地를 수리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 면암 이우에게 묘갈명을 받아 비석에 새기고 이를 경당 묘소 앞에 세웠다. 그리고 경당집 원집을 간행할 때에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유묵을 모아 다시 속집으로 간행하였고, 띠지 형태로 헝크러져 궤짝 안에 보관되어 오던 경당일기를 세 권의 책으로 엮어 냈다. 그리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아버지인 김진화金鎭華로부터 ‘경당장선생제월대敬堂張先生霽月臺’라고 쓴 글씨를 받아 제월대 바위에다 새겨 놓고 지역 유림들과 함께 수계修契하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또 1838년(헌종 4)에는 광풍정光風亭을 중건하였다. 광풍정은 경당이 생전에 강도講道하던 곳인데, 그가 작고한 후 지역 유림들이 이곳을 ‘사社’로 만들었고, 그 뒤에 ‘사’를 다시 경광서원으로 옮겨가게 되자 정자는 없어지고 땅 주인도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 땅을 다시 사들이고 여기에 건물을 지은 후에 인재 최현이 지은 ‘광풍정기光風亭記’를 현판에 새겨 당에 걸어두었다.
무엇보다 큰 공헌은 바로 경당의 제사를 불천위不遷位로 승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지역 유림의 종장宗匠 역할을 하던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에게 품의稟議하여 경당의 유림儒林 불천위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광풍정 곁에 사당을 건립하고 종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1848년(헌종 14)에는 오래 전부터 풍수가들의 논란이 있었던 경당 묘소의 이장을 추진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1853년(철종 4)에는 시조 태사공의 재실을 확장하였다. 그야말로 위선爲先 사업을 위해 전방위적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시조 장태사와 경당의 유적들 대부분이 직접 그의 손을 거쳐 수습되고 복원되었다.
그는 평소 후손들에게 제사를 강조하여 말하기를, “가문의 흥망성쇠는 제사를 얼마나 신중히 지내느냐에 달려 있다. 어찌 제사에 공경과 정성을 다하지 않고 복을 누린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형제 간에 화목하고 친척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옛 사람의 언행 중에서 후세 사람들에게 본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글로 써서 벽에다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읽어보면서 자신을 성찰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7가지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자신의 당호堂號를 ‘칠계재七戒齋’라 이름 짓고 평생토록 이 교훈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1.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낼 것
2. 친족과 화목하게 지낼 것
3. 손님이나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것
4. 학문을 부지런히 할 것
5. 농업과 잠업을 중요하게 여길 것
6. 세금을 잘 낼 것
7. 환난을 구제할 것
칠계재의 유고 1권이 필사본으로 전해오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위선爲先 숭조崇祖와 관련한 것들이다. 시詩, 서書, 제문祭文, 고유문告由文, 기記, 지識의 순서로 되어 있다. 시는 차운次韻 형식의 시가 많은데, ‘시조 태사공의 지석을 찾은 후에 지은 축하시’와 같이 위선 사업과 관련된 시가 몇 수 포함되어 있다. 제문에는 경당제문, 갈암제문을 위시하여 연고가 있는 지역 유림들의 제문이 대부분이다. 고유문은 시조묘의 지석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기記는 성곡재사城谷齋舍 추원재追遠齋의 중건기重建記이다. 그리고 지識는 3책으로 편집된 경당일기의 발문跋文인데, 일기의 유래와 내용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하고 있다.
만약 칠계재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태사 장정필을 시조로 둔 후손들은 시조의 제단조차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경당의 후손들은 오늘날 그들의 선조가 도산학맥의 중요한 학자라고 하기는 하나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자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칠계재의 공로는 비단 안동장씨 문중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북북부지역의 성리학이라는 지역학의 범위에까지 확장된다.
일찍이 대산 이상정은 자신의 병이 위급해지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들인다. 그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전하는 말로 “여러분들이 착실하게 공부하기를 바랄 뿐이다. 유학의 일은 다만 평범한 것이다. 평범한 가운데 오묘한 이치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산의 학통을 계승한 정재 유치명도 임종의 순간에 제자들이 한 말씀 해주기를 청하자, “대산 선생께서 제자들과 영결永訣을 고할 때의 말씀에서 더 보탤 것이 없네.”라고 하였다. ‘유학의 일은 평범한 것’이라고 한 대산의 말이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이가 들수록 평범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며 이웃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흔한 일상이 그 어떤 거대한 이념보다 더 중요하다. 유학의 이치는 평범한 곳에 있다.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에게 잔잔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상의 삶이다. 경당과 그 후손들의 삶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유학의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경당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
제4장 문헌과 유적
1. 문헌의 구성과 특징
존재 이휘일은 경당의 행장을 찬하면서 “평소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비록 이치를 논하고 흥興을 붙인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작고 당시에 장성한 자제子弟가 없었기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열 가지 중에 한두 가지도 못된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경당 문헌의 여건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손인 칠계재七戒齋 장세규張世奎(1783~1868)에 이르러 일실된 자료를 상당부분 추가로 수습하고 이를 책으로 묶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경당집(원집, 속집, 별집)과 일기 두 권이다. 그 외에 경당이 손수 짓고 쓴 시詩 몇 편의 유묵이 후손들에게 전해오기는 하나 극히 미미하다. 필자가 몇 해 전에 직접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가에조차 경당의 친필 유묵이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가에서 보관해오다가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일기 두 권마저 경당 친필본이 아닌 후대사람의 필사본 모음이다. 여기서는 문집과 일기를 중심으로 하여 경당이 남긴 문헌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경당집敬堂集의 구성과 특징
(1) 목차
<본집本集>
서序: 권유權愈가 짓다.
권 1. 시詩.
사辭.
소疏: 인조仁祖임금께 올리려고 한 소.
서書: 정한강선생鄭寒岡先生께(2), 장현광張顯光께, 학가산鶴駕山 속에서 글을 읽는 여러 유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아들 낳은 것을 축하해 줌, 외손外孫이휘일李徽逸에게(2), 김시탈金是梲에게, 사위 이시명李時明에게, 류진柳袗에게, 어떤 사람에게.
증언贈言: 표질表姪에게, 배우는 사람에게,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독서를 하는 여러 유생들에게, 이시명李時明에게, 신열도申悅道에게.
제문祭文: 서애西厓류선생柳先生, 류함柳涵.
잡저雜著: 무극태극유무변無極太極有無辨.
잠箴: 새해 잠언, 계유년癸酉年 정월 초하루 잠언.
록錄: 학봉鶴峯과 서애西厓 두 선생의 언행을 모아 기록함, 남행南行 때의 일을 기록함.
습유拾遺: 사덕四德에 대한 잠언, 김용金涌의 죽음에 애도함(2).
권 2. 잡저雜著: 일기요어日記要語,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부록: 행장行狀, 언행록言行錄, 묘지墓誌, 봉안제문奉安祭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아우 장처사張處士의 시詩 4수首를 덧붙임, 발跋.
<속집續集>
권 1. 시詩.
서書: 정한강선생鄭寒岡先生께.
제문祭文: 김집金潗, 표숙表叔 권공權公, 김씨金氏에게 시집간 여동생, 임천서원臨川書院에 학봉鶴峯선생의 위패를 다시 봉안함.
잡저雜著: ‘경당敬堂’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그 기문記文을 구함(‘경당기敬堂記’를 붙여 둠), 경광서당鏡光書堂의 여러 유생들에게 알림, 일기요어습유日記要語拾遺.
권 2. 부록: 만사輓詞, 제문祭文, 묘갈명墓碣銘, 언행록습유言行錄拾遺, 제월대기霽月臺記,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개본改本한 것과 개본에 대하여 설說한 것에 대해 논변한 글, 일원소장도발一元消長圖跋, 춘파리사상량문春坡里社上梁文, 발跋, 광풍정중건기光風亭重建記, 광풍정중건상량문光風亭重建上梁文.
<별집別集>
권 1. 시詩.
서書: 정한강선생鄭寒岡先生께, 홍하량洪河量에게, 정립鄭岦에게, 배후도裵後度에게.
기記: 제월대霽月臺.
증언贈言: 여러 유생들에게, 김시강金是杠에게.
제문祭文: 이모李某, 이임보李任甫, 권희윤權希允.
잡저雜著: 사람됨과 짐승됨에 대하여 분변함, 꿈에 학봉鶴峯선생을 뵈옴, 꿈에 서애西厓 선생을 뵈옴, 권춘란權春蘭 선생의 부고訃告를 실은 수레가 이름에 곡하여 애도함, 류진柳袗에게, 외손外孫 사달四達에게, 일기초日記抄.
권 2. 부록: 만사輓詞, 제문祭文, 여러 학파의 설을 모음.
권 3. 부록: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 문인록門人錄.
권 4. 부록: 광풍정중건운光風亭重建韻, 봉림정사鳳林精舍 짓는 일을 감독하면서 지은 시를 붙여 둠, 발跋.
(2) 해제
경당집敬堂集은 본집 2권, 속집 2권, 별집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집은 외손 이휘일李徽逸이 편집하고, 1693년(숙종 19)에 외손 이현일李玄逸이 간행하였다. 속집은 1818년(순조 18) 7세손 세규世奎가 간행하였다. 그 뒤 1921년 기記 몇 편을 추가하여 중간하였다. 그리고 별집은 후손 세규가 모으고 후손 경식景栻이 교정한 자료를 수정ㆍ보완하여 후손 인섭麟燮이 정서淨書하였고 이를 대본으로 하여 1961년 후손 기섭麒燮이 간행하였다.
이현일은 경당집 발문에서 말하기를, “경당의 학문은 오로지 내면에 힘쓸 뿐이지 문장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그 편록編錄이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저술만으로도 그의 성리 사상의 진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경당의 시문집을 살펴보면 여타의 학자들에 비해 문학류의 글이 적고 순수 성리 이론의 글이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그의 시문집의 특징이자 동시에 사상적 특성이기도 하다.
권1ㆍ2에 시 26수, 부 1편, 사辭 2편, 소 1편, 서書 6편, 답문 4편, 증언贈言 5편, 제문 2편, 변辨 1편, 잠 2편, 록錄 2편, 습유 3편, 일기요어日記要語 1편, 도圖 1편, 부록으로 행장ㆍ언행록ㆍ묘지명ㆍ봉안문ㆍ축문 각 1편, 말미에 아우 흥제興悌[張處士]가 지은 시 4수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속집은 권두에 김굉(金土+宏)의 서문이 있고, 권1ㆍ2에 시 33수, 서書 1편, 제문 4편, 잡저 4편, 부록으로 만사 6수, 제문 6편, 묘갈명ㆍ언행습유 각 1편, 기ㆍ변ㆍ발 각 2편, 상량문 2편, 유묵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성리학적 요체를 읊은 것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퇴계와 학봉의 시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이다. ‘소’의 의상인조대왕소擬上仁祖大王疏는 인조에게 선정을 권유하기 위해 쓴 상소문이고, ‘일기요어日記要語’는 경당일기敬堂日記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을 외손 이휘일이 발췌해 낸 것이다. 무극태극유무변無極太極有無辨은 무극과 태극에 대한 유학의 이론을 선도仙道와 불교의 이론과 비교해 가며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는 성리학과 역학에 관한 이론과 사상을 적은 것으로 특히 학문적 가치가 높다. 그 밖에 학봉과 서애의 언행을 기록한 학봉서애양선생언행록鶴峰西厓兩先生言行錄이 있는데, 이것은 퇴계학파의 사상적 특징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2) 경당일기敬堂日記의 구성과 특징
(1) 체제와 분류상 특징
경당은 거의 평생 일기를 써 왔다. 그렇지만 작고 후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경당일기는 현재 총 2권이 남아 있다. 갑인년甲寅年(1614, 광해 6, 선생 50세)에서 무오년戊午年(1618, 광해 10, 선생 54세)까지가 중권中卷을 이루고, 기미년己未年(1619, 광해 11, 선생 55)에서 을축년乙丑年(1625, 인조 3, 선생 61세)까지가 하권下卷을 이룬다. 그런데 경당의 5세손인 장세규가 당시까지 전해 온 일기日記를 모아 임자년壬子年(1852년)에 간행할 때만 하더라도 총 3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세규는 경당일기를 상, 중, 하 3권으로 편집하였는데, 상권은 경인년庚寅年(1590, 선조 23, 선생 26세)에서 계축년癸丑年(1613, 광해 5, 선생 49세)까지이다.
이 세 책은 선조 경당선생의 일기이다. 그 요어要語를 모아 경당선생문집에 포함시켰으나 원본 초고는 책 상자에 있다. 그 편제를 살펴보면, 경당선생께서 만년에 기록한 것으로 지극히 상세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빠진 해의 조목이 많이 있다. 요컨대 경인년 이상 을축년 이후 기록한 것은 잃어버렸고, 집안에 소장한 것도 고찰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어 항상 애통하고 한스러웠다. 아! 촛불을 밝혀 반우飯盂, 궤장几杖이나 띠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옛 사람의 일이니, 이 한 책에 나아가면 우리 선조께서 평소에 독실하였던 공부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수시로 받들어 완미하고 펼쳐보면 선생의 모든 일용동정日用動靜과 제자나 친구들과 왕래하고 수작酬酌한 것이 마치 지금의 일처럼 여겨진다. 훗날 이 일기를 보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히 완미하며 공손히 외우고, 또 능히 널리 찾아 채우고 보충하기를 바라는 바이다.(장세규張世圭의 ‘발문跋文’)
위 기록에 따르면 장세규가 경당일기를 편집할 당시 경인년(1590)에서 계축년(1613)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었으며, 이 부분이 바로 상권의 내용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당일기 모두가 중요한 기록이지만, 특히 상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생활을 고스란히 기록한 것이기에 그 자료적 가치가 더욱 높다 하겠다.
그런데 경당 9세손 기섭麒燮은 경당집 별집의 발문跋文에서 “가장 흐느껴 슬퍼할 바로는 일기 4책 중에 2책이 병화兵火로 일실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장세규 이전에 원래 일기 네 책이 존재했는데 병란[倭亂과 胡亂] 이후 없어졌다는 말인지, 아니면 장세규 이후 다시 잃어버렸던 일기 한 권이 추가되어 4권이었던 것이 후대의 병란[6.25전쟁] 이후 없어졌다는 말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잘못된 기록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문집 별집의 발문이 쓰여진 신축년(1961)에 이미 일기 상권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경당종가의 현 종손[장성진]이 선친[장석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권이 남아 있어서 총 3권의 일기가 전해왔으나 해방 직후 상권을 일가 사람 누군가가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아 분실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 기억이 맞다면 일기 상권은 해방과 6.25동란 사이에 분실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어딘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기는 갑인년(1624, 광해군 6) 5월 5일에서 시작되고, 을축년(1633, 인조 3) 10월 28일에서 끝난다. 그 사이도 날별로, 심지어는 달별로 빠진 곳이 많다. 하권의 마지막 부분에는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이 기록한 경당의 고종기考終記가 실려 있다. 계유년(1633, 인조 11) 1월 26일에서 임종날인 2월 7일까지의 기록이다. 경당은 이 해 1월 20일 쯤에 자리에 누워 2월 7일에 임종하였다. 그 외에 제자 권원길權元吉이 지은 시 두 편과 배익겸裵益謙이 지은 시 한 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번곡처사권공묘표樊谷處士權公墓表’, 지은이 불명의 ‘단계丹溪 이척李戚에게 주는 편지’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그렇지만 고종기를 제외한 모든 자료는 일기와 함께 편집될 만한 성격의 글이 아니다. 일기 하권의 첫머리에 위치한 김점운金漸運의 만사挽辭 또한 부적절하게 편집되어 있다. 추정컨대, 주변 사정에 능통하지 못한 후인들이 전승되어오던 몇 가지 자료를 일기와 함께 책으로 묶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올바른 편집이 되기 위해서는 일기 중권, 하권, 고종기, 장세규가 쓴 발문의 순서로 재편집되어야 하며, 그 외 자료는 모두 삭제해야 한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출간된 국역 경당일기는 필자의 의견에 따라 제대로 편집되었다.
통상 일기는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쓰여진 문자에 따라 한문일기漢文日記와 국문일기國文日記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기와 사적인 일기로 구분할 수도 있다. 공적인 것으로는 승정원의 기록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으며, 개인 문집에 포함되어 전해오는 경연일기經筵日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쓰여진 기간이나 대상에 따라 생활일기와 특수일기로 나눌 수 있다. 생활일기는 다시 그 내용에 따라 관료생활 일기, 농가農家 일기, 선비의 일기, 기타 생업일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수일기에는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일을 기록한 사행일기使行日記, 풍랑으로 인하여 표류되었다가 돌아와서 쓴 표류일기, 여행일기, 전쟁일기, 피난일기, 유배일기 등이 있고 또한 서원이나 향교의 수리를 기록한 영건일기營建日記 등이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경당일기는 한문일기, 사적인 일기, 생활일기, 선비의 일기로 분류될 수 있다. 경당일기는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평생을 바친 순수한 학자의 일기로서, 학문생활의 고뇌와 즐거움이 함께 녹아 있고, 저자가 속한 향촌사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양반이나 서민층의 생활사 자료로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 사상사의 큰 맥을 이은 큰 학자가 남긴 ‘공부일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 의의가 크다.
3) 경당급문제현록敬堂及門諸賢錄의 구성과 특징
통상 ‘급문제현록’이라 함은 말 그대로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들의 간단한 신상정보를 모은 자료이다. 그렇지만 급문제현록은 단순한 기록적 의미를 넘어서서 어떤 학자 또는 학파의 지적知的 계보도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자료가 된다. 즉 일련의 학문적 연계선상에 있는 학자들과 학파의 모습을 입체적ㆍ유기적으로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 자료가 된다. 비중 있는 한국 전통 성리학자들의 경우 대부분 별도의 급문제현록이 있다. 현존하는 경당급문제현록은 문집 별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문인록에는 총 221명의 제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범례’에 의거해 볼 때, 급문록의 최초 작성자는 경당의 외손인 이휘일이며, 3백여 년 동안 별도의 기록물로 전해오다가 별집을 간행하면서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범례에서 밝히고 있듯이 별집에 수록된 급문록은 원래 미완성본이었던지라 부정확한 기록도 많고, 무엇보다도 이름만 있고 구체적 내용이 결여된 곳이 많아서 후속 작업을 필요로 하였다.
경당의 문인들은 경당이 거주하던 안동 서후를 중심으로 한 향반鄕班의 자제들이 주를 이루며, 이 지역을 동심원同心圓으로 하여, 안동부 전역 그리고 경북북부지역 일대에 고루 포진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형제 간뿐만 아니라 부자 간도 경당을 함께 스승으로 삼은 경우도 있으며,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이 집중적으로 그에게 배움을 구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즉 퇴계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영남 남인학파가 이후 사승관계를 교호적交互的으로 계승하면서 스스로의 ‘학파적’ 특색을 공고히 해나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특징에 유념하여 경당급문록을 보완하였다. 즉 경당의 문인들이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역의 향반 자제라는 점, 그리고 이들이 살았던 시대배경이 주로 17세기에 걸쳐 있다는 사실, 이들 대부분이 서로 간에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등을 중심적으로 고려하였다. 우선, 경북북부지역에 종가宗家를 두고 있는 주요 성씨들의 족보와 경북북부지역의 향토지를 검토하고, 또한 지역출신 인사와 유림의 협조를 얻어 경당문인록을 보완하였다. 보완한 문인록은 필자의 저서인 경북북부지역의 성리학(심산출판사, 2013년)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2. 경당종택과 유촉지
경당은 평생 동안 안동 서후 지역에서 살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안동부중安東府中에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있는 그의 유촉지 또한 그의 세거지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는 경당 자신의 유촉지와 주손의 거처인 경당종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답사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동선을 제시해 보면 대략 다음 순서가 편리하다.
①경광서원, 경광서당, 경당묘소 → ②광풍정, 제월대, 유허비, 칠계재고택 → ③경당종택 → ④장태사묘, 성곡재사 → ⑤봉림정사
1) 경광서원鏡光書院
지역 유림에서는 1649년(인조 27)에 춘파리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이종준李宗準과 장흥효 두 사람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1662년(현종 3)에 ‘경광정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배상지, 이종준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1686년(숙종 12)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장흥효의 위패를 배상지, 이종준과 함께 제향하였다.
2) 광풍정光風亭
광풍정은 원래 경당이 지은 정자로 수많은 문인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경당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현재 남아있는 광풍정은 1838년(헌종 4)에 이 지역의 유림들이 다시 지은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광풍정에는 여러 종류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재訒齋 최현崔哯이 지은 ‘경당기敬堂記’이다. 경당은 자신이 살던 집 남쪽에 정자를 지은 다음 서재와 정자 그리고 집 뒤에 있던 바위로 된 절벽에 이름을 짓고 그 취지를 알리며 친구인 최현에게 ‘기문’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 기문에는 ‘경당敬堂’, ‘광풍정光風亭’, ‘제월대霽月臺’의 이름에 얽힌 유래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나의 벗인 장행원張行原[行原은 경당 선생의 字]은 영가永嘉[안동의 옛이름]의 학산鶴山[학가산을 말함] 남쪽에 산다. 젊어서부터 군자君子의 문하에 나아가 고인古人의 도道를 배웠는데, 왜란을 겪는 중에도 그 뜻은 변함이 없었고 집이 빈한했으되 그 뜻은 더욱 굳세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우졸迂拙하다고 보아 냉소했지만 장군張君은 이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계축년(1613, 광해 5) 겨울에 나는 권준보權峻甫 등 여러 벗들과 함께 학봉선생 유고를 거두어 모으느라 한 달여 동안 금계마을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장군도 함께 그 일을 했었다. 당시에 나는 그의 마음이 확고부동하여 흔들림이 없고 말과 웃음이 느슨함이 없는 것을 보고 안[內]을 수립한 바가 견고함을 알았다. 그가 하루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정이천程伊川의 뜻을 취하여 ‘경敬’자로써 당堂의 이름을 짓고 이것을 자호自號로 삼았습니다. 또 주염계周濂溪의 기상을 사모하여 ‘광풍光風’으로써 정자의 이름을 짓고 ‘제월霽月’로써 대의 이름을 삼았습니다. 감히 그러한 경지에 가깝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소반과 사발에 쓴 명문銘文으로 삼아 자리모퉁이에다 걸어두고 수시로 스스로를 경계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무릇 경敬이 아니면 그 길[道]이 두세 갈래가 되어서 한 몸을 주재할 수 없으니, 비록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있다한들 한갓 이목耳目만을 즐겁게 하고 심지心志를 방탕하게 할 뿐입니다. 경敬이란 것은 이 마음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니 광제光霽의 연원되는 것이요, 광제란 것은 쾌활 유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敬의 공용功用이 되는 것입니다. 체體와 용用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겉과 속이 간격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것들을 두 가지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러한 뜻에서 이름을 지었지만, 내 마음이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마음이 느슨하여 어지러운 때가 많았고 정제엄숙整齊嚴肅한 때가 적었기에, 마음속의 바람은 흔들리고 일렁이어 안정되지 못했고 가슴 속의 달빛은 어두워지고 가리워져서 밝지 못했습니다. …… 당신이 나를 위하여 기문을 써준다면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읽어보고 스스로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낙동강 동서東西로 200리 먼 곳에 서로 떨어져 있지만, 저는 매일처럼 당신을 같은 당堂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옷깃을 여미고 거듭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 이름 지은 뜻이 지극하고 지극하여 당신께서 말한 것에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왜란 중에서도 뜻한 바가 변함이 없었으며, 가난하되 그 뜻이 더욱 굳건하였으니 …… 이것은 거경居敬의 공功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혹 방심하여 마음속의 바람이 일렁이고 마음속의 달빛이 어두워질까 두려워하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은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널리 보고 들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수양하려면 반드시 경敬해야 할 것이요, 학문을 향상케 하려면 앎을 투철케 하는 공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홀로 이 당에서 스스로 경계하여 깨달은 마음을 주인으로 삼을 뿐, 바깥 사물을 깨닫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활연豁然한 경지에 이르지 않겠으며, 광제光霽의 기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 불교인들의 죽은 경敬, 이것을 서로 경계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경당기敬堂記」)
3) 제월대霽月臺
제월대는 광풍정과 짝개념을 이룬다. 경당은 자신의 강학처소를 광풍정이라 이름하였고, 틈틈이 휴식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던 휴식처를 제월대라 하였다. 그는 광풍정에서 강학하였고, 제월대에서 휴식하였다. 지금도 제월대에 오르면 눈앞에 마을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멋지게 펼쳐진다. 우리 눈앞을 갑갑하게 했던 마을의 공간구조가 이곳에서는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곳에 서면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뻥 뚫리며 온갖 세상사 시름을 잊게 된다. 비록 수행 정도가 얕은 초학자일지라도 ‘호연지기’의 기상을 읊조리며 광풍과 제월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게 된다.
제월대 바위 앞에는 ‘경당장선생제월대敬堂張先生霽月臺’라는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학봉의 후손인 김진화金鎭華(1793~1850)의 글씨이다. 그런데 ‘경敬’을 강조한 퇴계학단에서는 퇴계선생 이래로 단아한 해서체의 글씨가 주류를 이룬다. 경당의 서체도 그러했고, 경당의 유적지에 새긴 김진화의 글씨도 그러하다. 조금의 방만함이나 흘림도 없이 단정하고 꼿꼿하게 선현의 유적을 표기하였다. 경당의 행적과 일치하는 서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경당문집 속집에는 안동사람 권직양權直養(1574~?)이 1596년(선조 29)에 지은 ‘제월대기霽月臺記’가 수록되어 있어서 경당 당시의 풍광과 주변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경당종택敬堂宗宅
경당종택은 경당 장흥효 선생의 종택으로 ‘口’자 형식의 전형적인 영남의 전통가옥이다. 원래 경당종택은 ‘광풍정’ 부근에 있었는데, 60여 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40여 년 전에 중건하였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처음 이건移建 당시에 옛날 형태를 따라 지었기 때문에 건축학적 의의가 깊다. 현 종손[장성진]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9세 되던 해에 현 위치로 옮겨 왔으며, 처음에는 ‘口’자 고택이 있어서 여기에 그대로 살려고 했으나 집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옛날 종택의 형식을 따라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집이 낡게 되어 40년 전에 다시 중수하였다. 종택은 건물의 전체 면적이 70평이며, 사랑채 7칸, 안채 8칸, 행랑채 4칸, 대문채 2칸, 별장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묘우廟宇는 3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택 이건 당시에 광흥사 절집을 사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묘우는 사랑채 건물의 동쪽 뒤편에 있으며,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경당종택은 특히 후원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데, 300평 규모의 잔디밭에 기암요초가 가득하다. 후원을 둘러싼 소나무 숲으로 인해 은은하게 풍겨나는 솔향기를 사철 맡을 수 있으며, 약간 경사진 언덕 위에서 앞마을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채의 바깥쪽에 ‘경당고택敬堂古宅’이라는 한자로 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은 안동 지례출신인 의성김문 남정南井 김구직金九稷의 글씨다. 현재 경당종가에서는 고택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종택을 제공하고 있다.
5) 봉림정사鳳林精舍
봉림정사는 1593년에 경당이 시묘살이를 했던 장소인데, 그는 이곳을 강학講學의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후일 6세손 장구봉張九鳳이 건물을 다시 지었다. 봉림정사는 종택 좌측편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상산商山 중턱에 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상산商山은 일명 상산上山이라고도 하는데, 안동시 서편 20리쯤에 있다. 천등산天燈山에서 굽이쳐 서남 방향인 서후면 성곡동으로 뻗었는데 두 봉우리가 수려하다. 남쪽 기슭에 금지촌金地村, 즉 서후의 금계金溪가 있다. 상산은 안동장씨의 문중산이지만, 원래 봉림정사의 터는 ‘봉림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봉림정사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봉림사지삼층석탑, 경북문화재자료제69호]이 남아 있다.
건물은 사람이 살아야 오래간다. 한옥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안동 지역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고택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답사를 할 때마다 생기를 잃고 퇴락해 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의 경우에는 지자체에서 기본적인 유지 보수비용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것도 겨우 지붕과 벽을 수리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보존한다 하더라도 건물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결국 죽은 건물이 되고 만다. 건물 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더운 계절에는 서늘하게 해주고 추운 계절에는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곳에 사람의 온기와 정성을 더해야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건물을 개방하고,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이 그곳을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선현의 향기를 직접 맡고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종손과 문중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