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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인도에서 부처님 성지를 찾아다니던 중 버스가 멈춰 서 고치는 중]
오늘은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 해 보도록 하자.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와 우비고뇌라는 괴로움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사유해 보았더니, 당연히 그 원인은 생(生)에 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노사라는 괴로움의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태어난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노병사라는 괴로움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태어남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有)다. 즉 어떻게 태어날지에 대한 업이 있어야지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업이 없다면 더 이상 윤회의 생을 받을 아무런 이유도, 원동력도 없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업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마다 업이 다 다르다. 태어남을 받으려면 업이라는 어떤 생의 원인이 ‘있어야(有)’ 하는데, 바로 그 업유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욕유, 색유, 무색유는 저마다 다른 업유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찌 유의 종류가 세 가지만 있겠는가. 존재의 숫자 만큼 많은 유의 방식이 있다. 즉 업은 일체 모든 중생이 다 다른 것이다. 그것은 생의 원동력, 생의 원인이 되는 업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의 원인이 업유에 있다면, 그 유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취에 있다. 즉 집착, 취착심이 있을 때 그 취착하고자 하는 대상을 취하려는 행위인 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려는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함으로써 신구의 삼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신구의 삼업은 모두가 대상을 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다.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행동으로 구애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그녀에 대한 취착심이 생겨나야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꽃도 사다 주고, 쫒아 다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엔 얼마나 아름답고 잘생긴 이성이 많은가. 그렇다고 그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걸거나, 쫒아 다니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대상을 집착하고, 내 것으로 취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비로소 저질러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직업을 가지는 것도 돈과 직장을 취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고, 공부하는 행위도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을 취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운동하는 것도 건강한 몸을 취하려는 취착심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모든 행위, 즉 모든 업의 원인은 취착심에 있다.
그렇다면 취착심은 어디에서 올까? 취의 원인은 애에 있다. 애욕,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좋아하는 욕망, 사랑하는 욕망이 있을 때 그 대상을 내 것으로 취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애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에 있다. 대상에 대해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 좋은 느낌에는 애욕이 따라오는 것이다. 대뜸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앞서 좋은 느낌이 먼저 일어난다. 좋은 느낌에는 애욕이 따르고 취착심이 따르는 것처럼, 싫은 느낌에는 미움과 증오 같은 싫은 마음이 따르고 연이어 거부감이 일어난다. 좋은 느낌에는 애욕이 생기면서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취착심이 따르고, 싫은 느낌에는 미움, 증오가 생기면서 내 바깥으로 보내버리려는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내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집착이나, ‘내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집착이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취착심’에 다름 아니다.
느낌, 즉 수의 원인은 무엇일까? 수의 원인은 촉에 있다.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려면 대상과 접촉해야 한다. 내 앞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느낌이 일어나야 그것에 대해 좋거나 싫은 느낌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접촉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앞의 십팔계에서 이미 배운 것처럼 육내입처와 육외입처, 그리고 육식이 화합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래서 촉의 원인은 차례로 육입과, 명색, 식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접촉을 하려면 당연히 우리 안에 감각기관, 감각기능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 기능, 감각활동을 육입이라고 한다.
육입의 원인은 명색이다. 대상이 없다면 감각기능이 있을지라도 감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활동은 감각의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난다. 육입의 대상은 육외입처인데, 엄밀히 말하면, 육입이 감각적으로 접촉하는 대상은 육외입처만이 아니라, 육내입처도 포함된다. 눈을 외부 사물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바라보고, 귀 또한 외부의 소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소리도 듣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입의 원인은 육외입처라기 보다는 명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름과 모양을 가진 안팎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명색은 식으로 인해 일어난다. 물론 식 또한 명색으로 인해 발생한다. 식과 명색은 순환 연기의 관계에 있다. 눈귀코혀몸뜻 육입이 그 대상인 명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육입에 들어온 대상인 명색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여 아는 것이다.
그러면 식의 원인은 무엇일까? 식의 원인은 행에 있다. 오온에서 이미 배웠듯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이 최종적으로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수온과 상온의 기초자료를 가지고 행온이 의지작용인 업을 일으켜 유위를 만들어낸다. 앞에서 업이 유위를 만들어내면 식온은 행온이 만들어낸 유위를 인식한다고 했다. 그리고 식이 그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를 인식할 때 이름과 형태를 부여해 명색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이 과정이 바로 ‘행-식-명색’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또한 일방적인 직선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순환되고, 되먹이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식이 있으면 식이 인식할 유위를 만들어내는 행의 작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가 업을 짓는 원인은 앞에서 취착과 애욕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직접적인 업의 원인을 탐구함으로써 그러한 취착과 애욕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원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애욕을 일으키고, 취착을 일으킬까? 그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어리석음, 즉 무명에 있다.
오온무아에서 본 것처럼, 본래 실체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안다면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려 하거나 애욕심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오온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바로 무명이다. 즉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줄 모르고, 나에 집착하고, ‘내 것’을 취하려하며, ‘내 생각’이 옳다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무명, 어리석음은 ‘나’를 실체화하려는데서 시작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 세상은 연기법으로 돌아가며, 그렇기에 이 세상은 무아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연기와 중도와 무아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이처럼 연기와 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바로 무명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이처럼 십이연기는 노병사라는 근원적 괴로움이 어떤 원인에서 일어나는지 원인을 보여준다. 그것은 12연기의 전체 지분이 그 원인이 되고, 그 중 핵심은 무명과 취착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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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12연기에 대해 `붓다수업 `책에서도 읽고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도 듣고 다시 듣기도 하며
이렇게 또 글로 읽으며 공부 해 가고 있습니다.
방금도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의 목탁소리 들으며
몇년전에 읽었던 스님 책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라는 책이 스쳐갑니다.
아마 세네번은 읽었던것 같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목탁소리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바로 지금이 모든 것이 법신.. 부처.. 내마음.. 그자체임을 알고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