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론
권정일
─ 창세기 이후 사과의 세계는 시작되었다
종의 기원
사과는 금단, 신이 내린 붉은 말씀, 전능하신 여호와여 어찌하여 선악을 내리셨나요? 분명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리라는 것을 팜므파탈 이브에게 아담도 넘어가리라는 것을 이미, 여호와여! 사과는 당신의 시제품이었나요? 사과 한입 베어 문 피조물이 아직도 목젖에 걸려 있어요(호기심은 감정의 오래된 유전) 남자는 여자가 경전이라는 사실이죠
황금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기 위한 미인대회가 열리고,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의 기회가 주어지고, 파리스에게 지상에서의 최고 권력을 약속하는 헤라, 전쟁에서의 승리를 구호로 내건 아테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노라 선언한 아프로디테(예나 지금이나 로비는 기본수칙) 자명한 트로이 전쟁, 가장 귀한 전리품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조건을 붙이자면 천사와 킬러의 양면성 여자) 남자는 세상의 주권보다 여자가 대세죠
자유
빌헬름 텔의 사과를 아나요? 민중의 사과 혁명의 사과 아버지는 아들에게 활을 쏘았어요.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이럴 수가 ‘무서워요 아버지’ 미래는 예언임과 동시에 희생이에요 중국고사를 기억하나요?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았다가 결국 죽음을 자초한 실력 있는 원숭이 이야기 말이에요(재주가 승하면 화를 당해요. 아버지,) 사과는 그냥 맛있게 먹어야지 과녁은 아니에요
만유인력
법칙이란 세상을 회피할 때 나오는 법 페스트를 피해 고향에 내려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발견했다는 만유인력 사과는 왜 아래로만 떨어지지? 달은 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있는 거야? 만유, 하늘은 하늘의 것 천국은 천국의 것 땅은 땅의 것 너는 너의 것(사과에 숨겨졌던 신의 비밀)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주 위대한 무한궤도의 사생활
종말
지구의 종말에도 뿌리내릴 수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건너뛴 사과 스피노자가 사과나무를 심는 한 종말은 오지 않죠 지구가 멸망한다한들 심드렁한 인간들 점술가는 말하죠 물가에 가면 물을 조심하시오 사과는 빨간색이오 그래서 망하지 않는 점집, 망하지 않는 행성, 망하지 않는 나, 스피노자여 점술가여 나여! 사과는 영원하죠(종말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낙관주의여 사과를 사러가자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1년 · 하반기 제5호
권정일
충남 서천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지막 주유소』, 『수상한 비행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