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래(陳來) 「중용의 학술적 지위와 영향 및 역사적 해석(『中庸』的地位、影響與歷史詮釋)
2026년 9월 12일
최근 한 달 동안 북송 시기 사량좌(謝良佐)의 『상채어록(上蔡語錄)』에서 시작하여 『중용』까지 몇몇 자료와 번역 및 설명을 올려드렸습니다. 발단은 이성두 선생님이 8월 13일에 번역을 부탁하셨고 제가 8월 19일 오전에 보고 오후에 간단한 답글을 올려드렸습니다.
회원 여러분도 관심을 가지시기에 간명하게 설명드릴 수 있는 글을 찾다가 사고전서 제요(提要)가 적절하여 번역하고 설명을 달아 올렸습니다. 마침 청화대학(淸華大學) 철학과에서 가르치다가 퇴임하신 진래(陳來, 1952년생) 교수가 2019년 1월 21일에 청화대학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강연한 글이 있는데 『중용』에 관한 연구 역사를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긴한 부분을 골라서 번역하고 필요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진래 교수는 저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으나 가깝지는 않습니다. 한국 철학과 유학생들이 중국에 가서 많이 찾는 지도교수입니다. 한국에도 자주 오셔서 학술 교류에 힘썼습니다.
진래 교수의 강연 원고는 사고전서 「제요」보다 해상도가 조금 낫습니다. 강연 원고의 내용은 대체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朱熹,1189)에 근거하여 논지를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연구하시려면 더 많은 자료와 연구성과를 읽고 충분히 소화하여야 합니다. 석박사 논문을 쓰려면 진래 교수 강연 원고의 해상도 수준은 부족합니다.
제가 심학을 연구하면서 『중용』에 관한 자료와 논문을 자주 읽어왔습니다. 주희가 출판한 『중용』 여러 서적을 세세하게 읽을 때도 있었고 주희 견해에서 부족하거나 틀린 곳은 수정하려고 생각해왔습니다. 어느 학자 또 어느 학술이거나 조금만 틀리거나 삐끗하면 세상에 큰 해(誤人誤國)를 끼칠 수 있기에 신중하여야 합니다. 주희가 61살(1190)에 『사서장구집주』를 묶어 출판하였으니 벌써 810년이 지났습니다. 옛날부터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고치거나 더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유학에서는 심각한 연구 과제입니다.
왕양명이 44살 남경 홍려시(鴻臚寺)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몇몇 주자학자들과 큰 논쟁이 일어날 뻔하였을 때 『중용』에 관하여 글을 쓰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왕양명은 『대학(古本)』에 관하여 간략히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중용』에 관하여 쓰려다가 포기하였습니다. 일부 왕양명 연구자들은 「수도설(修道說)」이 아닐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왕양명이 44살에는 아직 학술 종지가 성숙하지 못하여 쉽게 붓을 들지 못하였다고 봅니다. 더구나 왕양명은 글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수양공부한 사람이기에 서적 자료를 많이 읽지 못하였습니다.
양송(兩宋) 시기의 『중용』을 연구하여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려면 공부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북송 시기의 『중용』 연구성과를 보면 온갖 헛소리와 바른 소리가 뒤섞여 있고 견해 수준도 천차만별입니다. 또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도 밝히지 않은 견해도 자기 것처럼 써놓았기에 출처도 찾기 쉽지 않습니다. 또 가끔 조금씩 말한 것을 모두 모아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결론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려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양송 시기 성리학자의 저서는 물론이고 당나라부터 청나라까지 불교와 도교에서 말하는 용어와 견해를 잘 이해하고 정좌 공부도 배워서 말귀를 척척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북송 시기 성리학자의 어록을 읽거나 어느 때는 갑자기 선승의 어록을 읽거나 불교 논소(論疏)를 구절마다 따지면서 읽어야 합니다. 물론 도사의 단행본 저서도 읽지만 도교의 영인본 경전도 읽어보아야 합니다. 심할 때는 다 내려놓고 며칠 밤낮이나 몇십 일 동안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다릴 때도 있고 무작정 조용한 길을 천천히 걸을 때도 있습니다. 몸에 피곤이 쌓이지 않도록 합니다. 물론 빨리 이해하겠다고 누구에게 빌지도 못하고 스스로 알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도 괜찮다고 여기고 마냥 기다려야 합니다. 아마도 『논어』 “朝聞道夕死可矣”처럼 조급하게 간절하지도 말아야 하고 『맹자』 “必有事焉, 勿忘勿助”처럼 마음속에 두고 있되 잊지도 조장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냥 떠올라서 이해할 때까지 미련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목차
1、논문 요약문
2、서문
3、선진시기 중용 사상의 발전 (일부)
4、송명시기 도학의 『중용』 (일부)
5、「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朱熹,1189년)
6、陳來,「『中庸』的地位、影響與歷史詮釋」
--------------------------------------
논문 목차
1. 선진시기 중용 사상의 발전(先秦中庸思想的發展)
2. 한당시기 중용 학술(漢唐時期的『中庸』學)
2-1. 경학과 『중용』(經學與『中庸』)
2-2. 불교 도교와 『중용』(佛老與『中庸』)
2-3. 유사 문사의 『중용』(儒士、文士與『中庸』)
3. 송명시기의 『중용』 학술(宋明之『中庸』學)
3-1, 불학과 『중용』(佛學與『中庸』)
3-2. 유학의 『중용』(儒學之『中庸』)
3-3. 도학의 『중용』(道學之『中庸』)
4. 총론
1. 논문 요약문
【논문 요약문】
『중용』은 한나라 시기부터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중용’ 사상은 전승 과정이 있습니다. 『주역』의 중도(中道), 중행(中行), 중정(中正) 관념과 『상서』 「대우모」의 ‘집중(執中)’ 관념은 ‘중용’ 사상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중용을 최고의 덕(至德)이라고 보고 한쪽으로 치우친 두 견해 사이에서 적정한 가운데(中)를 선택한다는 뜻의 ‘집양용중(執兩用中)’의 사상을 내놓았고 이때부터 중용은 실천의 지혜로 분명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한·당 시기에 정현(鄭玄)은 ‘용중(用中)’이 중용이라고 설명하였는데 덕행론 관점에서 중용을 해석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하안(何晏), 대융(戴顒), 양무제(梁武帝) 등이 『중용』 사상에 본체 개념을 새롭게 얹어놓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유학이 도가, 현학, 불학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당나라 시기의 『중용』 논의 주제는 ‘성명론(誠明論)’에 집중되었으나, 이고(李翺, 772-841)가 「복성서(復性書)」(802년)를 써서 ‘성정(性情)’에 관한 인성론(人性論)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수양공부의 경지(境地) 관점에서 중용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관점은 송나라 시기 『중용』 해석의 새길은 터놓았습니다. 북송 초기에 천태종 산외파(山外派) 지원(智圓, 976-1022, 字無外, 號中庸子) 스님은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의 관점에서 『중용』을 이해하였고, 운문종(雲門宗) 계숭(契嵩, 1007-1072) 스님은 『중용』의 핵심 사상이 성명설(性命說)이라고 보았는데 ‘성명설’은 성리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송대의 통치자들도 『중용』을 매우 중시하고 정치 관점에서 『중용』을 이해하려고 관심을 가졌는데 『중용』 안에서 통치이념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송원명청(宋元明淸) 시기의 성리학자들은 『중용』을 해석하는 데 뛰어들었으며 주자가 성공적으로 유학 연구의 방향을 오경(五經)에서 사서(四書)로 바꾸었습니다. 주자는 사서를 유학의 정수라고 여겼고 이정(二程)의 성리학 사상을 계승하여 『중용』 학술에 새로운 방향을 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용』 해석에서 심성학(心性學)과 함께 『상서』 「대우모」에 있는 도심(道心)이 알기 어려울 만큼 희미하기에 성왕(聖王)들이 서로 가르쳐서 전해주었다는 ‘도심유미(道心惟微)’를 결합하여 도통론(道統論)을 세웠습니다. 『중용』의 해석 역사는 대체로 덕행론(德行論), 위정론(爲政論), 성정(性情)공부론, 도통론의 네 단계를 거쳐왔습니다.
【핵심 용어】 『中庸』, 德行, 為政, 性情, 道統
----------------------
2. 서문
도통론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용』의 ‘중(中)’이 아니라 『상서』 「대우모」에 있는 ‘도심유미(道心惟微)’이었습니다. 도심유미는 심성에 관한 철학과 심성 수양을 연구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원·명·청 3대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근대 서양 사상이 전해진 뒤에야 비로소 바뀌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 마지막으로 『중용』을 해석한 대학자는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입니다. 그의 『중용해(中庸解)』는 벌써 새로운 서양 사상을 받아들여 해석하였습니다.
『중용』이라는 책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서한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입니다. 「공자세가」는 주로 공자의 생애와 제자들의 주요 활동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마천은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子思作『中庸』)”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입니다. 사마천은 위대한 역사학자이고 『사기』는 위대한 역사 저작이므로 매우 높은 권위를 지녔습니다. 사마천의 이러한 명확한 기록과 인정은 『중용』의 저자와 저작 시기를 분명하게 확정한 것입니다.
사마천 이후 또 하나의 위대한 역사 저작은 『한서』입니다. 『한서』 「예문지(藝文志)」는 『사기』 「공자세가」보다 더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중용』이라는 서적의 유통 기록입니다. 『한서』 「예문지」에 “『중용설(中庸說)』 2편(현대어 2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관하여 후세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중용』이 당시에는 상·하 두 편이었다고 여깁니다. 『한서』 「예문지」 저자는 두 편으로 된 『중용』을 보았기 때문에, 『중용설』 두 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는 『중용』이라는 진정한 문헌(text)은 『예기』에 실린 「중용」이 가장 이릅니다. 한나라 대성(戴聖, 宣帝 연간에 博士를 지냄)이 『예기』를 편찬하였는데 『소대예기(小戴禮記)』라고 불리며 모두 49편이 실려있고 제31편이 「중용」입니다. 이것이 『중용』의 완전한 문헌이며 가장 이른 것이 『예기』에 있습니다.
『중용』의 저자가 자사(子思)라는 것은 진(秦)나라 말기의 박사 공부(孔鲋)가 지었다는 『공총자(孔叢子)』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공총자』 「거위편(居衛篇)」에 자사의 말이 인용되었는데, 자신의 조상이 공자라고 말하고 “‘조상(공자)은 진채(陳蔡) 두 나라에서 고생하실 때 『춘추』를 지으셨습니다. 나는 지금 송나라에서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아무것도 짓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중용』 49편을 지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①]
(『孔叢子』,「居衛篇」:“‘文王厄於牖里,作『周易』。祖君屈於陳蔡,作『春秋』。吾困於宋,可無作乎?’於是撰『中庸』之書四十九篇。”)
이밖에도 『공총자』에 노나라 목공과 자사의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목공이 자사에게 “네 책에는 공자의 말씀이 많이 실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너의 말이라고 여긴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더니 자사는 내가 기록한 공자 말씀은 “어떤 말은 직접 들은 것이고 어떤 말은 남에게서 들은 것이며 공자 뜻에 어긋나지 않게 따른 것입니다”[②]고 대답하였습니다. 두 가지 기록은 『중용』의 저자가 자사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이후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말을 받아들여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고 여겨왔습니다.
『孔叢子』,「公儀』:“穆公謂子思曰:‘子之書所記夫子之言,或者以謂子之辭也。’子思曰:‘臣所記臣祖之言,或親聞之者,有聞之於人者,雖非其正辭,然猶不失其意焉。且君之所疑者何?’”
그러나 북송 시기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북송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내용에 근거하여 저자에 대하여 의심하였는데 『중용』이 과연 자사가 지은 것인지 의문입니다.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양수는 과거시험 출제하면서 “자사는 성인 공자의 후손이며 자사가 공자 말씀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사실인데 왜 그가 지었다는 『중용』에 몇 구절은 성인 공자의 말뜻과 다른가?”라는 문제를 냈습니다.[③] 왜냐하면 『논어』에서 공자는 15살부터 공부하여 십 년마다 바뀌었다고 말하였고 또 공자 자신은 타고난 성인(生而知之)이 아니며 배워서 성숙하였다(學而知之)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용』에는 “타고난 성(誠)이 저절로 밝혀져서 성인이 된다, 타고난 誠을 밝혀가는 것이 공부 방법이다.(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道)”고 말하였습니다. 앞의 말뜻은 타고난 성인(生而知之)이고 두의 말뜻은 배워서 이룬 성인(學而知之)입니다. 공자 자신이 극구 부인하였던 타고난 성인 이야기를 자사가 말한 것은 공자 뜻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양수는 『중용』의 “자성명(自誠明)”을 의심하며 평범한 일반인에게 적합하지 않기에 헛소리라고 비난하고 『중용』이 공자의 뜻을 전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구양수가 처음으로 『중용』을 의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자사가 지었다는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이 단락과 아래 몇 단락은 직역하지 않고 취지에 맞고 말뜻이 선명하도록 다시 썼습니다. 구양수가 처음에는 불교를 멀리하다가 나중에는 동갑내기 계숭(契嵩, 1007-1072) 스님을 만나고 불교 서적을 보고 만년에는 절간에 가서 정좌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自誠明 뜻은 불교에서 수양공부 없이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뜻이며 당나라 선종에서 자주 말하였습니다.〕
3. 선진시기 중용 사상의 발전
『중용』의 핵심 개념은 중용(中庸)입니다. ‘중용’이라는 말도 ‘중’과 ‘용’으로 나누어 보면 중용의 사상은 자사 시기에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中)’과 ‘용(庸)’ 특히 ‘중(中)’과 ‘화(和)’ 같은 개념은 중국 문화사에서 전승의 역사가 분명히 오래되었습니다.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역』의 중도(中道)입니다. 『주역』에는 자주 쓰이는 개념이 몇 가지 있는데 예를 들어 “중행(中行)”의 행(行)은 행동 또는 행위를 뜻하고, “중정(中正)”과 “중도(中道)” 및 “득중(得中)” 같은 개념도 『주역』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중(中)” 개념이 『주역』에 등장하였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물론 『주역』은 한순간에 한곳에서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되었습니다. 몇몇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는 서주(西周) 시기에서 춘추시기에 나타났고 이 시기에 ‘중’ 관념을 중시하고 이해하였습니다. 『관(觀)』괘 단사(彖辭)에는 “중정(中正)하여 천하를 관찰한다(中正以觀天下)”, 『예(豫)』괘 소상사(小象辭)에는 “중정(中正)으로 한다(以中正也)”고 말하여 중정을 강조하였습니다. ‘중’의 초기 개념은 주로 중정을 뜻하였습니다. 『고(蠱)』괘 소상사에는 “중도를 얻는다(得中道也)”라고 말하여 “중도” 개념을 나타냈습니다.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앞의 몇몇 괘사와 연관 지어 볼 때 그 주요 뜻은 중정의 도(中正之道)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와 ‘중정’의 관념과 연관되어 비슷한 관념들도 나타났는데 비교적 대표적인 것이 ‘중행(中行)’입니다. 『괘(夬)』 구오효사(九五爻辭)에 “중행하면 무구하다(中行, 無咎)”라고 있습니다. 만약 중행한다면 아무런 재앙이 없다. 『태(泰)』괘 구이효사(九二爻辭)에 “중행을 준수한다면(得尙於中行)” 소상사(小象辭)에서 “그것 때문에 크고 빛날 것이다(以光大也)”라고 풀었습니다. 따라서 『주역』에 실린 ‘중행’, ‘중정’, ‘중도’와 같은 개념이 중시되었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가 오경 가운데 ‘중’을 가장 말한 경전은 『주역』입니다. 『동인(同人)』괘 단사(彖辭)에도 “자신을 문명(文明)하도록 유지하고 중정(中正)하게 응대하면 올바른 군자이다.(文明以健,中正而應,君子正也”)”고 말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주역』에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선진시기 『중용』 사상의 근원이 『주역』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책이 『주역』입니다. 다시 말해 『주역』에 실린 중정의 도(中正之道)와 중도(中道) 사상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둘째, 『상서』 「대우모」의 “윤집궐중(允執厥中)”입니다. 맹자는 “탕임금이 가운데(中)를 지키며 차별 없이 어진 신하를 조정에 세웠다.(『孟子』「離婁下」:禹惡旨酒而好善言。湯執中,立賢無方。”고 말하였습니다. 『논어』 「요왈편」에는 “요임금은 ‘자! 그대 순임금아! 하늘의 역수(曆數) 정확도가 그대에게 달려있다. 사해 백성이 먹고 입을 것이 곤궁해지면 하늘에 너에게 주신 임금 자리를 영원히 끝낼 것이다.(堯曰:諮!爾舜!天之曆數在爾躬。允執其中。四海困窮,天祿永終。)” 요순우탕 임금 모두 일찍부터 집중(執中)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여겼습니다. 무엇이 집중 뜻일까? “중(中)” 개념은 앞에서 말한 『주역』의 중정(中正)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상서』 「대우모」에서 말한 “중(中)”은 중정불편(中正不偏) 사상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왼쪽 오른쪽 위쪽 아래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상어』 「홍범」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지 않고 위쪽 아래쪽으로 기울지 않고 선왕(先王)의 뜻을 받든다.(無偏無陂,遵王之義)” “어느 쪽에 기울지 않고 어느 편에 서지 않아 왕도가 넓고 넓게 공평하다.(無偏無黨,王道蕩蕩)”고 말하였습니다. 『상서』의 집중(執中) 뜻은 중정(中正) 뜻을 담았으나 더욱 구체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한쪽에 의지하지 않는다.(無偏無倚)”는 뜻을 구체적으로 나타냈습니다.
4. 송명시기의 『중용』 학술
셋째, 도학(道學)의 『중용』은 성리학자의 『중용』입니다. 송대 유학에서 『중용』은 매우 중요하였고 도학자들은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먼저 북송 초기의 삼선생(三先生 : 胡瑗, 孫復, 石介) 가운데 호원(胡瑗, 993-1059)은 『중용의(中庸義)』를 지었고 광의로 보면 도학자에 속하는 사마광(司馬光, 1019-1086)도 『중용광의(中庸廣義)』를 지었습니다. 장재(張載, 1020-1077)의 학생 여대림(呂大臨, 1040-1092)은 『중용해(中庸解)』 1권을 지었습니다. 남송 시기에는 이정(二程)의 문인 유조(遊酢, 1053-1123)는 『중용해(中庸解)』 5권, 양시(楊時, 1053-1135)는 『중용해』 1권을 지었습니다. 주희의 친구 석준(石墪)은 『중용집략(中庸輯略)』을 편집하였고 주희도 조금 참여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중용』에 관하여 저서가 없으나 그가 지은 “『통서(通書)』는 『중용』의 설명서다.(『通書』者『中庸』之註腳)”라고 평가받습니다. 도학의 『중용』은 송원명청 왕조에서 끊임없이 연구되었고 성리학자라면 거의 누구나 『중용』 주해(註解)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중용』 주석이 전해옵니다. 만약 청나라 말기를 끝으로 잡는다면 최후의 학자 강유웨이(康有爲, 1858-1927)가 『중용해(中庸解)』를 남겼습니다.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에 성리학자와 유학자는 누구나 이와 같은 『중용해』를 남겼을 만큼 『중용』의 영향이 컸습니다.
남송 시기에 이정(二程)의 제자들이 『중용』에 관하여 저술을 지었고 당연히 『중용』에 관한 이정의 견해를 받아 지켰습니다. 이정의 견해는 뒤에 주희(朱熹, 1130-1200)이 세 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견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中)이고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不偏之謂中,不易之謂庸)” “중(中)은 천하의 올바른 정도(正道)이며 용(庸)은 천하의 정해진 도리이다.(中者天下之正道,庸者天下之定理)” 두 구절입니다.[23] 글자 뜻을 풀고 다시 철학적 뜻을 풀었는데 바뀔 수 없는 것(不易)이 상(常)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견해, “『중용』은 공자 문하에서 내려오는 전심(傳心) 방법이며 자사(子思)가 먼 앞날에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적어놓은 서적이며 맹자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말입니다.[24] 이 말뜻은 『중용』이 유학의 도통(道統)을 나타내는 지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용』은 공자 문하에서 내려오는 전심법(傳心法)이며 공자 문하에서도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중점을 국가통치에 두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것에 두었으며 불교에서 마음에만 치중하여 닦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자사가 『중용』을 맹자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말뜻은 맹자 사상에도 『중용』 사상이 담겼다는 것입니다.
셋째 견해, “『중용』의 앞 단락은 일리(一理)를 설명하고 중간 단락 여기저기에서 만사(萬事)를 설명하고 마지막 끝 단락에서는 앞과 중간을 종합하여 다시 일리(一理)를 설명하였다.(其書始言一理,中散為萬事,末復合為一理。)” “넓게 펼치면 사방과 상하를 다스릴 수 있고 말아서 거두면 마음속 깊이 숨길 수 있다.(放之則彌六合,卷之則退藏於密)” “뜻맛(味)이 끝없으니 실제적인 학술 실학(實學)이다.(其味無窮,皆實學也)” 세 구절입니다.[25]
주희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앞에서 이정(二程)의 말을 열거하여 『중용』의 전체적인 사상을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중용』 제1장에서 “앞에서 일리(一理)를 설명한다.(始言一理)”는 관점에서 천도(天道), 천명(天命), 천리(天理) 셋을 설명하고 뒤를 이어 “중간 여기저기에서 만사를 설명한다(中散為萬事)”는 뜻에서 구체적인 일들을 낱낱이 설명하였고 마지막에는 “종합하여 다시 일리를 설명한다(末復合為一理)”는 뜻에서 천도, 천명을 설명하였습니다. “넓게 펼치면 사방과 상하를 다스릴 수 있다(放之則彌六合)”는 말뜻에 따라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구체적인 일들을 설명하였고 “말아서 거둔다(卷之)”는 말뜻은 일리(一理)이며 『중용』 제1장에서 말한 원리를 다시 설명하였습니다.
주희를 말하자면 『중용장구』를 저술하였습니다. 먼저 그의 친구 석돈(石墪)은 『중용집략(中庸輯略)』을 편찬하였고 나중에 주희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을 빼버려서(刪削) 완성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주희는 『중용장구』를 지었습니다. 주희는 일찍부터 『중용』에 관심을 가졌고 『중용장구』를 저술하기 시작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주희는 59살에 『중용장구』를 공개 출판하였습니다. 이때 『중용장구』에 짝을 이루는 『중용혹문(中庸或問)』도 내놓았습니다. 『중용장구』는 『중용』의 구절마다 설명하였고(註解) 『중용혹문』은 『중용장구』 구절에서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까닭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편집한 이유는 『중용장구』에서 모두 설명하면 너무 복잡하고 지나치게 자잘한 것까지 설명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용장구』는 학생을 가르치려는 교과서이며 교재이기에 간명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중용장구』에서 왜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지 않았는지 까닭을 설명하려는 것이 『중용혹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희가 59살 늦은 나이에 『중용장구』과 『중용혹문』을 정식으로 출판하였고 2년이 지나 장주부(漳州府, 현재 복건성 漳州市) 지부(知府)를 맡은 61살에 『논어집주』, 『맹자집주』,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를 합하여 출판하고 사서(四書)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 이것이 『사서장구집주(四書集註章句)』입니다. 이때부터 “사서(四書)” 개념이 생겼습니다.
--------------------------
5. 「中庸章句序」(朱熹,1189):
『中庸』何爲而作也?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蓋自上古聖神繼天立極,而道統之傳有自來矣。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堯之所以授舜也;“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者,舜之所以授禹也。堯之一言(執中),至矣,盡矣!而舜復益之以三言(人心,道心,精一)者,則所以明夫堯之一言,必如是而後可庶幾也。
蓋嘗論之: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己丑,1169,「中和新說」:心統性情),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或原於性命之正,而所以爲知覺者不同(人心之知覺與道心之知覺兩者不同,又如佛敎:凡人之識與聖賢之智兩者不同),是以或危殆而不安,或微妙而難見耳。然人莫不有是形,故雖上智不能無人心,亦莫不有是性,故雖下愚不能無道心。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則危者愈危,微者愈微,而天理之公,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從事於斯,無少閒斷,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而人心每聽命焉(「中和新說」:心統性情),則危者安、微者著,而動靜云爲自無過不及之差矣。
夫堯、舜、禹,天下之大聖也。以天下相傳,天下之大事也。以天下之大聖,行天下之大事,而其授受之際,丁寧告戒,不過如此。則天下之理,豈有以加於此哉?自是以來,聖聖相承:若成湯、文、武之爲君,皋陶、伊、傅、周、召之爲臣,既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若吾夫子,則雖不得其位,而所以繼往聖、開來學,其功反有賢於堯舜者。然當是時,見而知之者,惟顏氏、曾氏之傳得其宗。及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則去聖遠而異端起矣。子思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於是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更互演繹,作爲此書,以詔後之學者。蓋其憂之也深,故其言之也切;其慮之也遠,故其說之也詳。其曰“天命率性”,則道心之謂也;其曰“擇善固執”,則精一之謂也;其曰“君子時中”,則執中之謂也。
世之相後,千有餘年,而其言之不異,如合符節。歷選前聖之書,所以提挈綱維、開示蘊奧,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爲能推明是書,以承先聖之統,及其沒而遂失其傳焉。則吾道之所寄不越乎言語文字之閒(漢唐經學註疏),而異端之說日新月盛,以至於老佛之徒出,則彌近理而大亂眞矣。然而尙幸此書之不泯,故程夫子兄弟者出,得有所考,以續夫千載不傳之緒;得有所據,以斥夫二家似是之非。蓋子思之功於是爲大,而微程夫子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惜乎!其所以爲說者不傳,而凡石氏(石塾)之所『輯錄(原名中庸集解,後改名中庸輯略)』(1173年,朱熹曾作序),僅出於其門人之所記,是以大義雖明,而微言未析。至其門人所自爲說,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然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亦有之矣。
熹自早歲即嘗受讀而竊疑之,沈潛反復,蓋亦有年,一旦恍然似有以得其要領者(1169年,「中和新說」),然後乃敢會眾說而折其中,既爲定著『章句』一篇,以俟後之君子。而一二同志復取石氏書,刪其繁亂,名以『輯略』,且記所嘗論辯取舍之意,別爲『或問』,以附其(『章句』)後。然後此書之旨,支分節解、脈絡貫通、詳略相因、巨細畢舉,而凡諸說之同異得失,亦得以曲暢旁通,而各極其趣。雖於道統之傳,不敢妄議,然初學之士,或有取焉,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
淳熙己酉(光宗元年,1189)春三月戊申,新安朱熹序
6. 陳來,「『中庸』的地位、影響與歷史詮釋」,2019-01-21
【摘要】
『中庸』一般認為是子思所作。“中庸”的思想傳承有自,『周易』中的中道、中行、中正觀念,『尙書』的“執中”觀念都可視為中庸思想的淵源,一直到孔子以中庸為至德,提出“執兩用中”的思想,中庸開始明確成為一種實踐的智慧。到了漢唐時期,鄭玄以“用中”解釋中庸,從德行論角度詮釋中庸思想。魏晉南北朝時期,何晏、戴顒、梁武帝等人開始以『中庸』為載體尋求儒學與道家、玄學、佛學會通的可能。唐代討論『中庸』集中於“誠明論”,不過李翺開始注意到關於“性情”的人性論問題,劉禹錫從境界方面理解『中庸』,為宋代『中庸』詮釋開了先河。北宋智圓以佛教中道思想理解『中庸』,契嵩認為『中庸』的主要思想是性命之說,“性命說”對理學家產生了影響。宋代統治者也極為重視『中庸』,他們從為政方向認識『中庸』,意在闡揚其中的治國理政思想。道學家的『中庸』詮釋貫穿了宋元明清四代,朱子成功促進了儒學從五經到四書研究的轉變。朱子認為四書是儒學的精華,他繼承二程的理學思想,為『中庸』學開了新的方向,即『中庸』詮釋中的心性之學和以“道心惟微”為核心的道統論。『中庸』詮釋史,大致經歷了德行論、為政論、性情功夫論和道統論四個階段。
【關鍵詞】『中庸』;德行;為政;性情;道統
這個道統的核心,在他的講法裡面,最關鍵的不是“中”,而是“道心惟微”,這就轉向心性哲學、心性修養的路子。這樣一個轉變,應該說對元明清三代的影響都是非常之大的。直到近代西方思想傳進來以後,才有改變,這就是晚清的最後一位註解『中庸』的大家康有為,他的『中庸解』已經結合了新的西方思想加以闡述了。
『中庸』這本書的最早記載見於西漢司馬遷的『史記·孔子世家』,『孔子世家』主要是講孔子生平及其弟子的主要活動,司馬遷在這裡明確說“子思作『中庸』”。子思就是孔子的孫子。因為司馬遷是偉大的歷史學家,『史記』是偉大的歷史著作,所以具有很高的權威性。司馬遷這個明確的記載和肯定,對『中庸』的著作者和著作的時代,作了明確指示。
司馬遷之後,另一部偉大的歷史學著作就是『漢書』。『漢書』比『史記』增多的一類記述就是『藝文志』,這是關於圖書流傳的著錄。在『漢書·藝文志』裡面記載“『中庸說』二篇”。對這個講法,後世也有一些不同的分析。有些人認為我們今天看到的『中庸』,在當時應該是分成上下兩篇。『漢書·藝文志』的作者,他看到的是有兩篇的『中庸』,所以他就著錄『中庸說』二篇。那麼真正的文獻,即我們現在看到的『中庸』文本,最早它是見於『禮記』。漢代的戴聖,他編的『禮記』,名叫『小戴禮記』,共四十九篇,其中第三十一篇就是『中庸』。這是『中庸』作為完整的文獻文本,我們最早看到的就是在『禮記』中。
關於『中庸』的作者是子思,『孔叢子』也有記載。『孔叢子·居衛篇』裡面就引了子思自己的話,他說他的祖先是孔子,“祖君屈於陳蔡作『春秋』,吾困於宋,可無作乎?”[①]孔子困於陳蔡作了『春秋』,我困於宋,也要作個東西出來,於是他就撰“『中庸』之書四十九篇”。另外,在『孔叢子』裡面還記錄了魯穆公與子思的一個對話,魯穆公問子思,說你的書裡面記了很多夫子之言,就是孔夫子之言,有些人認為這其實是你自己的話,“或者以謂子之辭”。子思說,我記的那個吾祖之言,“或親聞之者,有聞之於人者”[②],有的是我親耳聽到的,有的是聽別人轉述的,但是總體來講“不失其意”也,它的大意都保存下來了。以上記述表明,『中庸』的作者應該是子思。所以,從漢代以後,一直到唐代,歷代都接受,都認為子思作『中庸』。
但是到了北宋,對這個問題有了不同的聲音。北宋思想家、文學家歐陽修,他從內容開始提出對作者的懷疑,『中庸』到底是不是子思作的。他的理由是這樣的:子思是聖人之後,他是孔夫子的孫子,“所傳宜得其真”,他傳下來的東西應該是真實的,“而其說有異乎聖人者,何也?”[③]可是他這個說法裡面有的跟孔子不太一樣,這是為什麼呢?那麼,在什麼方面『中庸』裡面講的,跟孔子講的不一樣呢?他說,我們看『論語』,孔子是一個聖人,但是他是“學而後至,久而後成”,他是一個“學而知之”的聖人。但是,子思在『中庸』裡面講“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道”,這意味著“自誠明,生而知之也;自明誠,學而知之也”[④],那就是在“學而知之”以外,還有“生而知之”這樣的人。他說,孔子尙且是需要經過學習才達到聖人的,如果說還有“生而知之”者,不用學就能成為聖人的,那誰能當得起?那就沒人當得起了。所以他認為這個講法,是一個“無用之空言”,是一個空話,沒有用。這種觀點,在他看來是有點荒謬的,不像是孔子的話。既然不像是孔子的話,這個作品的作者應該就不是子思。所以,歐陽修對作者是不是子思提出了一些懷疑。宋代以後,就對『中庸』作者有了一些不同的議論,但總體來講,應該說絕大多數的學者還是接受子思作『中庸』這個結論。
先秦中庸思想的發展
『中庸』的核心概念就是中庸。“中庸”這個詞也可以分解為“中”和“庸”,在這個意義上,中庸的思想不是到子思才出現的。在某種意義上,“中”“庸”,特別是“中”“和”這些概念,在中國文化史上,傳承有自,有很古老的歷史。我們可以從以下幾個方面展開來講。
第一,『易』之中道。『易』就是『周易』。『周易』這本書裡面,有幾個概念是常用的,比如說“中行”,行就是行動的行、行為的行;像“中正”,、“中道”,還有“得中”,這樣的概念,在『周易』裡面是常見的,其中都有“中”這個概念出現,這就表示在『周易』裡面,“中”是很重要的概念。當然『周易』成書不是一時一地一下子形成的,經歷一個過程。最早,有些卦爻辭可能在西周時代就已經出現了。因此,『周易』裡面出現的這些與“中”有關的觀點,代表了至少在西周到春秋時期,中國文化對“中”觀念的重視、了解。『觀』卦彖辭說“中正以觀天下”,『豫』卦小象辭說“以中正也”,都強調中正。“中”這個概念應該說在早期,它主要的意義就是中正。『蠱』卦小象辭講“得中道也”,提出了“中道”的概念。“中道”在當時來看,聯繫前面說的一些卦辭,其主要含義應該是中正之道。
那麼與“中道”、“中正”的觀念相連接,還出現一些類似的觀念,其中比較有代表性的像“中行”。『夬』卦九五爻辭講“中行,無咎”,如果你能夠中行的話,就不會有什麼災禍。『泰』卦九二爻辭“得尙於中行”,小象辭說“以光大也”。所以這些在『周易』裡面的內容中,我們看到對“中行”、“中正”、“中道”這些概念的重視。應該說在儒家五經裡面,對“中”提倡最多的一部經典,就是『周易』。『同人』卦彖辭也講“文明以健,中正而應”,等等,類似的表述在『周易』裡還有很多。這是從先秦看『中庸』思想的根源,第一部書就是『周易』。那麼『周易』裡面關於中正之道、中道的思想,最有代表性。
第二,『書』之“執中”。『書』就是『尙書』,『尙書·大禹謨』講“允執厥中”。“允執厥中”,後人就把它簡化為“執中”。孟子說湯“執中”,“禹惡旨酒而好善言。湯執中,立賢無方。”(『孟子·離婁下』)就是說在大禹之後,湯也是講“執中”的。『論語·堯曰篇』載:“堯曰:‘諮!爾舜!天之曆數在爾躬。允執其中。四海困窮,天祿永終。’”所以從堯、舜、禹到湯,很早就開始有這種“執中”的概念。什麼是“執中”呢?這個“中”跟前面『周易』所講的這種“中正”的觀念,應該是接近的。但是在『尙書』裡面講的“中”,它更強調中正不偏。『尙書』特別強調“無偏無倚”的思想,不能偏左,也不能偏右,不能偏上,也不能偏下,『尙書·洪範』說“無偏無陂,遵王之義”“無偏無黨,王道蕩蕩”。可見,『尙書』裡面所講的“執中”,雖然也包含了中正之道的意義,但是它更具體地表達了“無偏無倚”這樣一種“中”的思想。
這種思想在『尙書』裡面,也把它上升為一種德行,就是說“中”不僅是道,而且也是德。道是根本的原則,比如說中正之道,它是治國理政的根本原則。在古代的政治文化裡面,它是一個基本價值。在最近幾年看到的一些出土文獻裡面,在記載上古歷史的時候,都很強調這個“中”,它發揮了價值作用。但是在『尙書』裡面,如『酒誥』篇講“作稽中德”。『周易』講“中道”,『尙書』講“中德”,那就是說“中”,它不僅僅是治理國家的一個根本原則,這個中正之道,它也是人之德,是從天子到庶人的一個基本的德行。在『尙書』裡面,“中”字雖然沒有『周易』裡面出現那麼多,但是從它出現的歷史來看,它是從堯舜禹一直往下相傳,天子都非常重視這個“中”的把握。“執中”的“執”應該是把握的意思,要掌握住這個中正之道,這個根本的原則。這是上古時代,特別在政治領域,對“中”概念的一種重視。
“執中”是從堯舜禹到湯,都已經非常重視的一個觀念。這個“中”不可能跟後來的中庸的“中”沒有關係。比如說“執中”,到了後來,大家更多地把它表達為“執兩用中”,對這個思想作了發展。在『尙書』裡面,雖然有了“不偏不倚”的思想,但是關於“執中”這個表達,還沒有用“執兩用中”。到了孔子這個時代,就開始出現“執兩用中”的概念,“執其兩端而用其中”[⑤],不走極端。當然,這也可以說是不偏不倚。那麼“執兩用中”,當然就有“用中”的概念出現了。從後來的理解,“用中”就是中庸,中庸就是用中。因為庸就是用的意思。所以,中庸也就是用中。我們說從“執中”到“執兩用中”,到“用中”,到“中庸”,它有一個發展的過程。
第三,孔子論“中”。『論語』裡面,孔子明確把“中庸”作為重要的德行,他說“中庸之為德,其至矣乎”(『雍也第六』),至德是最根本、最重要的德行。這可以說是對『尙書』之“中德”作了明確的發展。『堯曰』篇記述了“允執其中”,這與『尙書』可以呼應。那麼『尙書·大禹謨』,後人認為這一篇為古文『尙書』,有可疑之處,不是『尙書』的原本,可能是後人根據一些殘留的片段,把它編成的。但是,『堯曰』篇的“允執其中”,與『大禹謨』的“允執厥中”不是巧合。應該說,『大禹謨』這一篇所組成的資料,它是『尙書』的原始資料的一部分,至少表達了跟『尙書』那個時代的同期思想。所以它能夠跟『論語』有這個巧合。但是從孔子開始,我們看孔門論“中”,還有一個明確的發展,除了把中庸作為至德以外,他強調這個“中”的“無過不及”的一面,如孔子“執兩用中”的思想。『論語』里,孔子還講“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狂者進取,狷者有所不為”(『子路第十三』)。一個是進取,一個是有所不為,“不為”就有點不及,“進取”就有點過。孔子還說“師也過,商也不及”、“過猶不及”(『先進』第十一)。所以在『論語』里,孔子論“中”,不但繼承了『周易』的“中行”的觀念,而且把這個“中行”與“過猶不及”聯繫在一起。什麼是中行?中行就是過猶不及,既不能過,也不能不及,這個就是中行。這也可以說發展了“不偏不倚”的思想。但是比較起來,我們說“不偏不倚”的這種思想,不如“過猶不及”在人生實踐上我們體會得那麼親切。
在孔子的影響下,『禮記·中庸』之外,『喪服四制』裡面說“喪之所以三年,賢者不得過,不肖者不得不及,此喪之中庸也”。這是講喪禮的實踐怎麼掌握,有一個中庸。什麼是中庸?指三年之期。超過了、變成四年不行,兩年不及也不行。所以“賢者不得過,不肖者不得不及,此喪之中庸也”。這也是秉承了孔子的中庸思想,就是用“過猶不及”來顯示“中庸”“中行”的獨立不移、恰好的意義。從『尙書』的“執中”思想,到孔子論中庸的思想,從“執兩用中”,到“喪之中庸”,我們看到,“中”不僅像『周易』和『尙書』裡講中正之道的意義,它開始發展出一個新意義,受到孔門的重視:就是它代表一個恰當合理的標準之度,它已經是對度的一個把握和呈現。它是在我們人的生活實踐裡邊,最恰當、最合理的一個標準。這個實踐,當然包括政治,也包括人生的其他方面。這表明了“中”和“中庸”的概念,到了孔門這個時代,已經明確成為一種實踐的智慧,這是儒家的一種實踐智慧。在『禮記·中庸』篇也講“知者過之,愚者不及”的問題,也明確提出這個思想。
漢唐時期的『中庸』學
這一時期,我們先談一下經學與『中庸』。
東漢時期著名經學家鄭玄,曾給『禮記』作注,因為『中庸』是『禮記』的一篇,所以裡面也包含了對『中庸』的註解。他當時有一個最基本的論斷,說中庸的庸是什麼呢?“庸,用也”[⑥]。如果庸就是用,那中庸就是“用中”,怎麼把“中”這個概念用到我們的生活,用到我們的實踐?鄭玄認為『中庸』是“記中和之為用也”[⑦]。因為『中庸』首章就是講中和,中和怎麼來用,這就是『中庸』這篇文章要講的。鄭玄又說,“孔子之孫,子思伋作之”。這樣,關於『中庸』題解,鄭玄講了三句話,“庸,用也”、“記中和之為用也”、“孔子之孫,子思伋作之”。他實際上是用“用中”來解釋中庸,應該說這個解釋符合孔子以來的思想。
同時,我們要看到鄭玄注『禮記』所帶來的重要影響。鄭玄注『禮記』,因為他是漢代的大儒、最博學的學者,這就造成了一個影響,使『禮記』這部書,與『儀禮』、『周禮』並列為三禮。以前這三部書是各自成立,『禮記』的地位比較低。有了鄭玄注『禮記』,大家就開始有了三禮之說,認為這三部禮書應該是一個整體。這就把『禮記』提高到與『周禮』、『儀禮』同等的地位。因為過去只把『儀禮』看作是古代的『禮經』,因此,五經裡面的『禮經』,在漢代主要就是指『儀禮』。而『禮記』,它叫做“記”,表示它是對經的一種解釋、一種說明,其地位當然是要比經低一些。可是由於鄭玄注了『禮記』,而且注得非常好,這就使『禮記』的影響變大了。所以這個時候,在漢魏之交就開始“三禮”並稱。
到了魏文帝的時候,『三國誌』卷十三『魏書·鍾繇華歆王朗傳』裡面就說“初,肅善賈、馬之學,而不好鄭氏,採會同異,為『尙書』、『詩』、『論語』、『三禮』、『左氏』解,及撰定父朗所作『易傳』,皆列於學官”[⑧]。『禮記』立在學官,這個是西漢時代所沒有的,東漢時代也沒有,到了魏文帝的時候開始有。這是『禮記』第一次列於學官。那麼“列於學官”,當然就要置博士來專門研究。不僅如此,到了東晉元帝的時候,這個變化更大了,鄭玄注的『禮記』置了博士,而『儀禮』、『周禮』不置博士。『禮記』的地位就超過了『儀禮』。置博士就表示朝廷設立專門人員來支持這項研究,但是到了東晉的時候,只有鄭注的『禮記』置博士,連『儀禮』都沒有再置博士。這是鄭注『禮記』帶來的一個重要影響。在古代經學,是不是“經”,能否列於學官置博士,這對經典文獻的影響非常大。到了唐代有『五經正義』的刊行,由國家正式頒佈天下。『五經正義』,其中『禮』就是指『禮記』,不是『儀禮』,也不是『周禮』。也就是說漢人稱為三禮的典籍裡面,只有『禮記』在這時正式確立為經。也可以說,到了唐朝,到『五經正義』的時代,『禮記』正式升格為經。與此同時,『中庸』就隨著『禮記』地位的提升,變成整個經學裡面非常重要的一個文獻。
其次,佛老與『中庸』。
在佛老的影響裡邊,『中庸』也開始受到關注。比較早期能看到的就是南朝的戴顒,『宋書』記載,他曾為『中庸』作注。如果是這樣,我們可以說他是漢代以後,個人為『中庸』作注最早的一個人。此前像鄭玄,還都是把『中庸』作為『禮記』的一部分來注的。但是戴顒,他專門把『中庸』提出來,為之作注,這是有標誌性意義的,表明『中庸』在南朝時代,它在『禮記』各篇裡面受到了特別重視。今天講『中庸』是四書之一,備受重視,那是宋代才有的。宋代以前,一般人把它作為『禮記』四十九篇之一,並沒有特別來重視它。可是在南北朝時代,開始受到特別重視。戴顒還曾經著有『逍遙論』,『逍遙遊』是『莊子』的第一篇。因為那時老莊和玄學很流行,他注『逍遙遊』,說明他應該是在老莊學方面浸潤很深。如果跟這個時代的思潮關聯起來看,他對『中庸』的理解,可能受到道家、玄學思想的影響。可以說,從這個時候開始,『中庸』的傳承全面發展,不再僅僅是儒家自己的事,『中庸』開始發揮另一方面的歷史作用,就是溝通儒學與佛老。老莊和玄學的人士也開始關注『中庸』,力求在這裡面實現一種儒道的融通。所以『中庸』的歷史作用,在南北朝發生了標誌性的轉變,不僅僅是儒家經學傳承它、關注它,而且儒家以外的其他的哲學、宗教思想體系也開始關注它。這是值得關注的。
更突出的是梁武帝蕭衍,他是信佛的人。但是他信佛,主要是在晚年。早期,他還是受儒家思想影響比較大。他曾有詩『述三教』,自述說“少時學周孔,弱冠窮六經”[⑨]。小的時候就開始學習周公、孔子,努力學習六經,用“窮”這個字表示他真正下了工夫。梁武帝是歷史上很有名的君主,主要因為是他對佛教的虔誠態度。他信佛,經常捨身進佛寺。但是朝中不能沒有君主,大臣就得把他贖出來,用很多的錢去贖他,這個錢就歸了佛教。他有一部著作叫『中庸講疏』,這在史書上有記載,但是並沒有傳下來。他的『中庸講疏』,從一定角度來講,比戴顒為『中庸』作傳注更有意義。因為他在歷史上影響大,特別是他跟佛教有很特殊的關係,『中庸講疏』可以說表達了梁武帝蕭衍尋求儒佛會通的一個方式。
梁武帝早年,非常下工夫學習儒學。後來他中年置博士,也還是非常重視儒學的。所以史書說他“洞達儒玄”“修飾國學”。所以他中年以前,對儒學、經學、儒術,非常重視。但是他晚年信佛。我們現在並不能夠確切知道『中庸講疏』是他什麼年代寫的。但大體上可以推斷,他應該不是純粹以佛教的角度去講的,應該也不是一個純粹從儒學方面去講的。在當時佛教、道教、玄學盛行的南北朝時期,把『中庸』提出來,作為溝通儒學與佛教、道教玄學的橋梁,這是當時流行的思想。因此,『中庸講疏』很可能也是儒佛會通融通的一個方式。關於儒家與佛老的思想交匯中,『中庸』發揮的作用和影響,這個課題在漢代以前是沒有的,是『中庸』的歷史地位和影響很重要的一個變化,它開始承擔了一個儒家與佛教、道教、道家思想會通的功能。
在這個時代,還有一些玄學家也很重視對『中庸』思想的闡發,像魏晉玄學的代表人物何晏,他對『論語』作了很多研究,他也很重視中庸的思想。他說庸,什麼是庸?“庸,常也”。“常”就是不變的,常常、經常、常理,“中和可常行之德也”[⑩]。鄭玄把“庸”解釋為“中和之為用”,這是從用中的方面來講。何晏進一步,認為它是用中的一個常行之德。當然在鄭玄的注裡也有類似的意思。但是何晏作為玄學家,更重視中庸作為中和常行之德。這說明這個時期,確確實實有各個方面的學者,都關注『中庸』,它已不僅僅是儒家的經學思想。
第三,儒士、文士與『中庸』。
儒士是一個比較寬的講法,不一定是研究經學的那些儒家學者,而是受到儒家思想重要影響的一些文士。『五經正義』頒佈天下後,科舉考試就用『五經正義』作為出題考試的內容和標準,有很多的試題出自『禮記』,自然『禮記·中庸』篇也成為當時的世人學習的重點。所以當時的學者,要參加科舉考試,就不能不念『禮記』,不能不念『禮記正義』,要學習鄭注孔疏,要熟悉『中庸』。如貞元十九年科舉明經科,明經就是考你經學的學習程度,第二題就是出自『中庸』。這就進一步帶動了大家對『中庸』的關注。『中庸』的思想內容比較特殊,與其他各篇不一樣。『禮記』有些篇是對古代禮經及具體的禮文節目的解釋,比如說規定喪禮要擺什麼祭品,古禮裡有一些規定,闡發為什麼是這樣,作一些具體的發揮、解釋、說明。因此,其意義只能是一種禮節的、儀式的、具體的,就不能夠代表國家所需要的比較高的、普遍的一種人文教養。但是『大學』、『中庸』不一樣,它不是一個關於歷史儀式的細節、一個具體的規定,是用豬還是用牛,還是用羊。『中庸』跟天地、鬼神、德行、實踐相關,它所代表的人文性、人文教養,不是『禮記』一般篇章所能相比的。因此在唐代,任何一個士子,他在關注『禮記』的時候,都會對『中庸』有更多的關注。唐代大文學家韓愈,在貞元九年(793)26歲的時候,他去應考,考題來自『論語』,叫“顏子不貳過”,結果他用『中庸』的思想去答這個題目。韓愈一上來就說:“夫聖人抱誠明之正性,根中庸之至德”[11]。“誠明”出自『中庸』,誠明是『中庸』的重要概念,聖人之性是誠明的正性,他的行為就是中庸的至德,能夠發揮中庸的德行。韓愈接著還說了“『中庸』曰‘自誠明謂之性’”等等一大段話。可以看出,像韓愈這樣的大文豪,他在考試的時候,對『中庸』的如此熟悉,明明出的是『論語』的題,他答的語言全都是『中庸』的表達概念。可見,『中庸』在這個時代,其影響非常之大。
韓愈是中唐古文運動的代表人物,在他前後,也有些人很熟悉『中庸』。如梁肅對天台宗很有研究,又是古文運動的先驅人物,韓愈也是效仿他的。梁肅曾寫過『止觀統例』一文,按說講止觀是與天台宗有關,但他在文章裡面兩次引用『中庸』。韓愈還有一個朋友叫歐陽詹,他曾經寫過一篇文章叫『誠明論』,也是闡述中庸思想,他強調聖人以下要“自明而誠”,相對“自誠明”“生而知之”,“自明誠”是“學而知之”。所以當時古文運動的這些人物,都非常熟悉『中庸』思想,對『中庸』思想有專文闡發。與韓愈齊名的柳宗元,他寫文章也常引用『中庸』。柳宗元有一篇著名的文章,叫『吏商』,他說君子有二道:一個是“誠而明”,一個是“明而誠”,認為“誠而明者,不可教以利”,就是生而知之的聖人,你要想用利益去勸說他,那根本是不可能的;“明而誠者”,“利進而害退焉”[12]。“誠而明”者,聖人是天性,不會跟著利益來走的,而“明而誠”者,能夠通過理性認識,不受到利的損害。可見,當時人們對『中庸』的思想尤其是“誠明”論特別重視。唐人對『中庸』最關注的是“誠明”,與後來人對『中庸』關注的那些點不同,唐人最關注『中庸』的誠明論。因為誠明論也可以聯繫到人性論。比如韓愈的弟子李翺有本書叫『復性書』,這本書完全以『中庸』為宗旨。唐代儒士裡面,受『中庸』影響最大的就是李翺,他通過『中庸』講“喜怒哀樂之未發”等等,闡發了一種性情的問題、人性的問題。李翺對『中庸』所說“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戒慎恐懼”、“慎獨”、“中和位育”等等作了詳細闡發。最後他歸結到性善情昏論,性是善的清明的,但情把善性搞昏了。李翺不僅在『復性書』中貫徹發揮了中庸思想,他還專門寫過『中庸疏』一卷。李翺的『復性書』、『中庸疏』,應該說都代表了唐代儒士關於『中庸』研究的最高水平。李翺與其他隋唐時代的大多數人人不一樣,他關注的焦點已經不是“誠明”的問題,而是已經轉移到“性情”的人性問題。這對後來宋明理學影響很大。宋明理學就不是把誠明論作為焦點,而是把『中庸』首章所講的性情說、人性論作為最重要的理論問題。
柳宗元有一個朋友叫劉禹錫,他對『中庸』也很有研究。他在一首詩的引言中說從前我學習『禮記·中庸』篇,至“不勉而中,不思而得”,“悚然知聖人之德,學以至於無學”[13],一下子好像有一個驚覺,通過這兩句話了解了聖人之德。本來聖人講中庸就是聖人的至德,但是他特別強調“不勉而中,不思而得”。應該說,這也是對『中庸』境界一種新的關注。這種關注應該說跟佛教的影響有一定的關係。所以劉禹錫也特別強調,要把『中庸』與內典結合起來,內典就是指佛教的經典,與佛教結合起來,這樣才能達到『中庸』的最高境界。這種理解超過了當時一般人主要是從誠明論理解『中庸』,他是從境界的方面去理解。這些都開了個頭,為宋代以後『中庸』詮釋的發展,應該說鋪平了道路,開了先河。
宋明之『中庸』學
我們先看這一時期的佛學與『中庸』。
梁武帝的『中庸講疏』,戴顒的『中庸傳』,並沒有完整的文獻傳下來。『中庸』思想通過唐代,開始受到大家的很多關注以後,到了宋代,受關注的面繼續擴大。在北宋前期來看,一個最重要的力量是來自佛教。北宋初年,天台宗僧人智圓給自己起了一個號,這個號就是“中庸子”,用中庸作為他自己的號。這是具有標誌性意義的。一個佛教徒僧人,號中庸子,可見儒家經典『中庸』對他的影響。他曾經寫過一篇自傳體文章『中庸子傳』,他說自己曾“砥礪言行,以庶乎中庸,慮造次顛沛忽忘之,因以中庸自號”[14]。可見,他自號中庸子,是要時時提醒自己,即使在各種顛沛流離之中,行為上、言論上,都要砥礪自己達到中庸的標準。但是有人反問說“中庸之義,其出於儒家者流,子浮圖子也,安剽竊而稱之耶”?他說“儒釋者,言異而理貫也”,儒家與佛家說的話不一樣,道理是一樣的。他還特別講,“莫不化民,俾遷善遠惡也”,都是為了化民成俗,讓老百姓遷善改過。那儒釋有什麼不同呢?“儒者飾身之教,故謂之外典也;釋者修心之教,故謂之內典也”[15]。儒是修飾身體行為,佛主要是管我們的心理行為。一個是修飾身體、行為,一個是修煉內心;修身以儒,治心以釋。那智圓自號中庸子,他講的中庸,其中庸到底是什麼意思呢?跟儒家同還是不同呢?他說“釋之言中庸者,龍樹所謂中道義也”[16],儒家講的中庸,他也承認,但是他還要加上佛教對中庸的理解,就是龍樹菩薩所講的中道思想,就是不落兩邊,非有非無,非亡非存。可以看出,他一方面對中庸的思想非常重視,把中庸作為修身之教,但另一方面,他在中庸的理解方面,用的是佛教的中道思想。
北宋另一位僧人契嵩,也非常重視『中庸』,他有『中庸解』一文。他還給仁宗皇帝寫信,結合『中庸』來講道理,他說『中庸』講“自誠明謂之性”,是講人生下來,本來是有這種天生就有的誠明之性,但“及其染之,遂成人也,物也,乃與聖人者差異”[17],聖人與其他人其實都是天生就有這個誠明之性的,但是聖人能夠保持,一般人不能保持,會受到俗世的染污,這樣就跟聖人拉開距離了。於此可見那一代僧人對『中庸』的重視、熟悉。在『中庸解』,他還提出一個重要思想,認為『中庸』雖然在『禮記』裡面,可是這部書不是講禮的。禮是“序等差而紀制度”[18],禮主要是講等級制度以及這些制度的具體規定。他認為『中庸』是講“性命之說”。這個提法應該說比起智圓中庸子深入了一步。智圓還是把『中庸』作為修身的德行來砥礪自己的,可是到了契嵩,他就認為『中庸』的主要思想是性命之說。而且他在『中庸解』提到很多思想,其中他最後有一個結論,他批評鄭玄注,認為鄭玄注沒有把握住『中庸』的大意,“鄭氏者,豈能究乎性命之說耶”[19],像鄭玄這樣的人,他只是一個文獻學家,他怎麼能夠窮究性命之學呢?所以他對於『中庸』的理解,他對『中庸』的把握,轉到了性命之說,應該說是深入了一步。鄭玄之輩很多還是在德行論,不是在性命論、性情論來解『中庸』。這非常重要,包含了佛教對儒學文獻詮釋的一種積極性。傳統的經學可能更多地從文獻、歷史、德行的角度來看,不會從更深的哲學來看,而性命論已經是哲學了。因為佛教哲學比較深刻,所以他就有另外一個視角、詮釋的視野來看儒家的文獻。『中庸』不應該只從制度去了解,應該從性命去了解。這個思想就打開、影響了宋代的理學家。宋代理學家應該說就是從性命之學這個角度,“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從天理、天道、天命,從人性去發掘『中庸』的深刻意義,所以契嵩還是非常重要的。
此外,契嵩在『中庸解』中還提到很多很有見解的看法。比如他提到把『中庸』與當時北宋經學裡邊特別重視的『尙書·洪範』的皇極思想比較,認為『中庸』的思想與皇極的思想大同小異。在漢代以後的經學裡,多把皇極解釋為大中,皇是大,極是中。那皇極之中,與中庸的中有什麼關係呢?大同小異。他說“皇極,教也;中庸,道也”[20],中庸是客觀的一個根本的原理、法則,皇極是政治上教化所用的一個觀點。從以上可見,從太宗到仁宗的這個時代,佛教徒、佛教學者對『中庸』思想的重視、闡發,應該說這帶動提升了『中庸』的影響。
第二,儒學之『中庸』。從太宗到仁宗這個時代,從智圓到契嵩,與這些佛教大德在推進『中庸』影響的同時,在政治的層面,也出現了一股推動的力量。這個政治的力量是多方面的。科舉考試最高是賜進士及第,從北宋太宗時候開始,皇帝往往要賜文給進士。如太宗皇帝賜給進士及弟的就是『禮記·儒行篇』,他們認為在個人修身方面『儒行』有很重要的作用。可是到了仁宗皇帝的時候改為賜『中庸』,還要宰相在堂上高聲宣讀。賜進士及第『中庸』,然後受賜者,回去要把它書寫在你的壁間,作為座右銘寫在牆上。這是風向性的,皇帝賜『中庸』,當然士子都要學習『中庸』。
在仁宗給進士及第賜『中庸』之前的十幾年,北宋真宗時代的省試已經開始用『中庸』命題。如范仲淹的省試答題就是“自誠明謂之性”,他也專門寫過論“率性誠明”。這個風氣從真宗到仁宗已經形成,非常倡導對『中庸』的學習。當時的儒學者像范仲淹,他不僅在考試裡邊答過『中庸』的卷子,還專門寫過與『中庸』思想有關的論文。所以『中庸』在當時很受重視。北宋道學家張載年輕的時候,很喜歡討論兵法、研究兵書,關心國家邊境的安全。那時候,范仲淹在陝北做官,他就上書去拜見范仲淹,陳述他有關西北用兵的一些主張,結果范仲淹讓他回去好好讀『中庸』。范仲淹讓張載好好讀『中庸』,這不是無緣無故的,不應理解為個人的一種偏好,說明這個時代,『中庸』受到大家的普遍重視。但這也有一定的政治背景,就是皇帝親自來推行。所以到理學家程頤評論以前賜『儒行』,說“『儒行』全無義理”。顯然,他是為仁宗賜『中庸』叫好,認為『儒行』沒什麼義理,『中庸』才講義理。
但是仁宗賜『中庸』出於什麼目的?這個恐怕跟張載,包括程頤等理學家講的『中庸』有所不同。因為理學家講『中庸』是從心性修養這方面講,但是仁宗賜『中庸』,是出於政治考慮。北宋儒臣邢昺在經學上很有造詣,他有一次在崇和殿,就是皇帝讀書的地方,當時是真宗時期,真宗的崇和殿壁上掛的是『禮記圖』,就是把『禮記』畫成畫,有講解,其中就有『中庸』篇。其『中庸』主要取的片段是“凡為天下國家有九經”,說治理國家的大法有九項最重要的措施。所以邢昺在崇和殿跟真宗講話的時候,就指著“凡為天下國家有九經”,“因陳其大義,上嘉納之”[21]。真宗表揚了邢昺,而且接納了他的看法。所以在北宋,從真宗開始,就已經體現了對『中庸』的特別重視。到仁宗賜『中庸』,當時的關注點應該是治國理政的問題,這與道學家後來重視的心性修養角度是不同的。邢昺是很重要的儒臣,他的關注點跟當時君主對『中庸』的關注點是接近的,他們更注意闡揚『中庸』治國理政的思想。
第三,道學之『中庸』,就是理學家的『中庸』。在宋代儒學,『中庸』很重要,對道學家更為重要。首先我們看宋代三先生中的胡瑗,他就有『中庸義』;道學的同路人、廣義的道學裡有重要地位的司馬光,也寫過『中庸廣義』;張載的學生呂大臨寫過『中庸解』一卷。到了南宋,二程的門人遊酢、楊時,都寫過『中庸解』。遊酢寫的『中庸解』是五卷,楊時是一卷,他們都是程門的大弟子。朱熹的朋友石墪,重寫過『中庸輯略』,朱熹本身也參與了一些『中庸輯略』完善的工作。除了這些現成的著作,理學家裡邊,像二程的老師周敦頤,他雖然沒有寫過『中庸解』,但是『通書』裡面貫穿了『中庸』“誠”的思想,所以有人以前也說過,“『通書』者『中庸』之註腳”[22]。道學之『中庸』,貫穿於宋元明清四代,歷代的理學家大都都有關於『中庸』的註解。所以一直到清代傳下來,大概有幾百種『中庸』的註解。如果以晚清作為截止的一個節點,那麼最後一個就是康有為的『中庸解』。所以宋明歷代的理學家和儒學大家,應該說都有『中庸解』這樣的著作,足見其影響之廣之大。
到了南宋,二程的弟子都寫了『中庸』的著作,當然這些也都貫徹了二程對『中庸』的理解。二程的理解,後來被朱熹概括為三句話。第一句話,說“不偏之謂中,不易之謂庸”,“中者天下之正道,庸者天下之定理”[23]。這是講什麼是中,什麼是庸。首先從字義上講,然後從哲學上講。“不易”就是常。這是二程關於中庸思想的第一句話。第二句話,“此篇乃孔門傳授心法,子思恐其久而差也,故筆之於書,以授孟子”[24]。這句話就講『中庸』在孔門道統裡面的地位。首先,它是孔門傳授心法,是孔門專門講治心之法,那就是說它的重點不是治國理政,而是修心修身,但也不是像佛教所講的只是修身的,它是從心上做起。子思寫了這個書,傳授給孟子,所以孟子思想裡面也有中庸的思想。第三句話,說“其書始言一理,中散為萬事,末複合為一理。‘放之則彌六合,卷之則退藏於密’,其味無窮,皆實學也”[25]。朱熹寫『中庸章句』,在前面先把二程的話列出來,作為『中庸』總的思想的發明。『中庸』首章“始言一理”,總的講天道、天命、天理;“中散為萬事”,講很多具體的東西;最後合起來,又講天道、天命。所以“放之則彌六合”,它可以包羅萬象,各種各樣具體的事情全部講到了;收起來,它就是一理,就是『中庸』首章所講的原理。
接下來就是朱熹了,朱熹著有『中庸章句』。先是他的朋友石墪寫了『中庸輯略』,朱熹不是很滿意,替他也做了一些完善的工作。在此前後,朱熹自己作了『中庸章句』,他早年就開始關心中庸,很早就寫成了此書。但是『中庸章句』真正拿出來給大家看,公開刊行,那是到他59歲,快60歲的時候。同時,拿出來的還有他寫的另一本,配合『中庸章句』所寫的,叫『中庸或問』。『中庸章句』是對『中庸』一句一句做註解,『中庸或問』是對章句中每一句話,為什麼這麼解釋,作出理論上的說明。這個說明若都寫在註解裡邊太複雜了,太繁瑣了。因為章句註解本身是要給大家做一個教本、做教材的,最好比較簡明。那在章句這裡之所以這麼寫,不那麼寫,其中的理由,需要用另一本書把它講清楚,這就是『中庸或問』。更重要的就是59歲,他把『中庸章句』、『中庸或問』正式拿出來了。過了兩年,到他61歲,到漳州做知府,這一年,他做了一件大事,就是把『論語』、『孟子』、『大學』、『中庸』合刊,刊印了合刊本,命名為“四書”。朱熹對四書的註解就叫『四書章句集注』。『大學』和『中庸』,他寫的是『大學章句』和『中庸章句』;『論語』、『孟子』,他寫的是『論語集注』和『孟子集注』。合起來就是『四書章句集注』,從此就有了四書的概念。
元代以後,用朱熹對四書的解釋出題,用『四書章句集注』作標準的參考書。在儒家的經典學裡面,四書就成了一個新的經學體系。它在科舉和社會文化,包括在宋元明清儒學發展史上,其地位應該說超過了五經。唐代以前,大家對儒學經典主要關注的是五經。但是到了朱熹,他有一個觀點,認為五經好比粗禾,四書好比熟飯,就是穀子帶著殼,那是粗的,得把殼去掉,最後才有精米,再做熟了,才是熟飯。也就是說在五經的體系裡面,有好多粗糙的殼、麩子,這些都不是精華,四書是精華。他認為四書乃“六經之階梯”[26],人應該先學四書。從他的比喻可以看出來,學五經要費很大的勁,先把皮去掉,最後才得到一點精華,這個太費事了。從四書入手,直接可以學習到精華,就可以吃熟飯,而不是拿一大盆穀子,要去經過一個複雜的過程,最後才能吃上熟飯。所以到了元代以後,四書的地位,就超過了五經,這主要就是宋明理學的影響。而理學家,他們的思想討論,他們的教育,跟學生的談話,主要都是圍繞四書、四書中的義理、概念、詮釋來展開的。所以從南宋以後,其實北宋二程就開始,儒學的重點就已經到了四書。然後經過朱子,到元代,到明代,一直到清代,在這樣一個將近長達八百年的歷史裡,『中庸』真正變成一個獨立的經典,在儒學史、教育史、思想史上發揮了重要的作用。今天講『中庸』的歷史地位和影響,應該說,到了宋代,『中庸』終於達到了它在中國文化裡面最高的地位和影響。到了朱子,『中庸』學又開了一個新的方向。前面我們講在『易』之中道、『書』之執中、孔子論“中”“過猶不及”,這些包括鄭玄“庸,用也”,都講了對『中庸』的一些理解、傳承。那麼朱子,他一生可以說是從『中庸』入手,從關於已發、未發、中和的討論入手,到他晚年60歲,寫定『中庸章句』,他對『中庸』的理解,可以說為『中庸』學開了新的方向。這個新的方向是什麼呢?我們從『尙書』、『周易』講起,重視執中的觀念,就是“允執厥中”。這個“執中”,代表了早期中國文明,發展政治、治國理政的一種文明。在北宋的時候,邢昺和真宗、仁宗一樣,他們對『中庸』重視的焦點,還是在九經,在治國理政的這些根本大道理。但是以朱子為集大成和代表的道學家,他就把它轉向心性修養,這就是我們從李翺開始看到的,已經向性情說轉變。明清的中庸學可以說是宋元的延長,由於時間的限制,就不具體講了。
總結來說,在歷史上人們對『中庸』的認識大致經歷了以下四個階段。第一個階段,它是德行論,這是非常重要的。第二個,就是為政論,我們今天看『中庸』這部書,它前半部主要講德行,早期關注它的德行論,包括一直到智圓,當然是有它的道理,它主要講『中庸』的德行論。可是『中庸說』從二十章開始,它大量講了很多為政論,如邢昺注重對“天下國家九經”的闡發。梁武帝、宋仁宗,他們都是從這個地方來理解它。所以德行論和為政論,這是早期我們看『中庸』和『中庸』思想的兩個重點。第三,唐宋以後,注重性情功夫論,就是從李翺開始,然後到宋代理學,最後講到朱熹。這變成它新的路線和重點,“喜怒哀樂之未發”、“戒慎恐懼”、“慎獨”這些話題變成了中心議題,相關的有“知行論”、“誠明論”、“學思篤行”論,等等,一定意義上說,這也是在回應佛教心性論的發展和挑戰中展開的。
第四,就是道統論。朱熹在『中庸』序裡面講,“子思子憂道學之失傳而作也”[27],因為子思有一種憂患,憂患什麼呢?道學要中斷失傳了。然後他說“道統之傳有自來矣”,這個道統本來有一個傳承,傳承到子思的時候就面臨中斷的危險,所以必須要寫『中庸』這本書,讓它能夠傳下去,不要失傳。所以在這裡面,朱熹就提出“道統之傳”的概念,把『中庸』這本書的寫作放在道統傳承中予以解釋肯定。那麼這個道統之傳是什麼?他說堯之“允執厥中”,舜之“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論語·堯曰』、『尙書·堯典』那幾篇裡面都講了這個,就是堯傳給舜,舜傳給禹,都講這個“允執厥中”。所以照這個講法,這個道統之傳,本來是圍繞“執中”概念來傳。可是,按照朱熹理解,他認為光講“允執厥中”是不夠的,他認為道統之傳,完整的道統之傳是四句話。“允執厥中”是最後一句,前面還有三句,完整的表述就是『尙書·大禹謨』所說“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因此,他寫『中庸章句序』,大量的篇幅是論述道心和人心之辨。所以,以前講『中庸』是以“允執厥中”為重點。可是到了朱熹,是以“道心惟微”為重點。而他所理解的『中庸』之傳,是放在整體的道統觀念裡面來展開的。這個道統的核心,在他的講法裡面,最關鍵的不是“中”,而是“道心惟微”,這就轉向心性哲學、心性修養的路子。這樣一個轉變,應該說對元明清三代的影響都是非常之大的。直到近代西方思想傳進來以後,才有改變,這就是晚清的最後一位註解『中庸』的大家康有為,他的『中庸解』已經結合了新的西方思想加以闡述了。
[①]『孔叢子·居衛第七』,引自『百子全書』(一),長沙:嶽麓書社,1993年版,第256頁。
[②]『孔叢子·公儀第九』,引自『百子全書』(一),長沙:嶽麓書社,1993年版,第257頁。
[③]歐陽修『問進士策』(三),載張春林編『歐陽修全集』,北京:中國文史出版社,1999年版,第232頁。
[④]同上。
[⑤]『中庸』:“子曰:‘舜其大知也與!舜好問而好察邇言,隱惡而揚善,執其兩端用其中於民,其斯以為舜乎?”
[⑥]『禮記正義』(下),『十三經註疏』標點本,李學勤主編,北京:北京大學出版社,1999年版,第1422頁。
[⑦]同上。
[⑧](西晉)陳壽:『三國誌』第2冊,北京:中華書局,1998年版,第419頁。
[⑨](唐)道宣:『廣弘明集』卷三十『統歸篇·述三教詩』,『大正藏』第52冊,第352頁。
[⑩](三國)何晏集解、(南朝梁)皇侃義疏:『論語集解義疏』.『景印文淵閣四庫全書』第195冊,第394頁。
[11](唐)韓愈:『省試顏子不貳過論』,『韓愈全集校注』第三冊,成都:四川大學出版社,第1161頁。
[12]『柳宗元全集』卷二十,曹明綱標點,上海:上海古籍出版社,1997年版,第176頁。
[13]『劉禹錫集』卷二十九『贈別君素上人』引言,上海:上海人民出版社,1975年版,第268頁。
[14]釋智圓:『中庸子傳』(上),『全宋文』第8冊,曾棗莊、劉琳主編,四川大學古籍整理研究所編, 成都:巴蜀書社,1990年版,第289頁。
[15]『中庸子傳』,第289頁。
[16]『中庸子傳』,第290頁。
[17]『萬言書上仁宗皇帝』,『全宋文』第36冊,卷764,曾棗莊、劉琳主編,上海:上海辭書出版社;合肥:安徽教育出版社,2006年版,第115頁。
[18]『中庸解第一』,『全宋文』第18冊,卷772,曾棗莊、劉琳主編,四川大學古籍整理研究所編,成都:巴蜀書社,1991年版,第623頁。
[19]『中庸解第三』,第626頁。
[20]『中庸解第三』,同上,第625頁。
[21](元)脫脫等著:『宋史』第37、38冊,卷四百三十一,北京:中華書局,1977年版,第12799頁。
[22]熊道琛:『鍾祥縣誌』卷21,民國26年版,第8頁。
[23](宋)朱熹:『大學中庸章句』,北京:中國社會科學出版社,2013年版,第22頁。此句為朱子引程子原話。
[24]『大學中庸章句』,第22頁,此句為朱子語。
[25]『大學中庸章句』,第22頁,“放之則彌六合,卷之則退藏於密”為程子語。
[26](宋)黎靖德編、王星賢校點:『朱子語類』(七)卷一百五,北京:中華書局,1986年版,第2629頁。
[27](宋)朱熹:『大學中庸章句』,北京:中國社會科學出版社,2013年版,第21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