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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25) 조토의 ‘희년을 선포하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
새로운 시대 ‘100년 전대사’ 은총을 주는 희년을 선포하다
르네상스를 앞당긴 화가, 조토
소개하는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5~1337)가 그린 벽화 ‘희년을 선포하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다. 로마교구 주교좌 라테란의 요한 대성전에 있다. 예전에 있던 성당 벽화 중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의 기록이라 보존해 온 것이다. 이곳은 1300년, 희년을 선포하던 당시 사도좌 성당이기도 했다. 그래서 ‘100년 전대사’인 첫 번째 희년은 여기서 선포되었다.
조토는 피렌체 북쪽 시골 마을 무젤로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양치기 소년이 되어 매일 양 떼를 몰고 들판에서 살았기에 그의 예술적 모델은 자연이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치마부에였다. 치마부에 역시 탁월한 예술가지만, 조토는 곧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되었다. 조토는 중세 미술에서 흔히 보듯 모델을 추상적 혹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의 인간을 모델로 한 첫 번째 화가였다. 신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추함이 가려지고 거룩하고 고상한 것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추함은 물론 춥고 슬프고 아픈 감정까지 가감 없이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를 앞당긴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중세 미술에 (인간의) 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조토와 같은 시대를 살며, 조토가 시각 혁명을 일으킬 때, 문자 혁명을 일으킨 단테(1265~1321)는 “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이제부터는 조토의 시대다”고 했다.
짧지만 행복한 평화의 찰나
야코포 가에타노 스테파네스키(1270~1343) 추기경은 「100년 희년을 기록한 책」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끝없는 인파를 보며, “그날 신자들은 모든 죄 사함을 받고, 100년 전대사를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적었다. 107세의 한 순례자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1200년 1월 1일, 부친과 함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으로부터 ‘100년 전대사’를 받았을 때, 자신은 7살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엄청난 인파가 로마로 몰려왔다는 것은 ‘영원한 도시’로서 로마의 품격을 의미했고, 교황의 우선적(Primario)이고 특수(Privilege)한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을 뜻했다. 더불어, 그만큼 기부금도 도달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역사가들은 교황에게 그 순간은 “짧지만, 행복한 평화의 찰나”였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교황청 재정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의 세속 권력이 크게 상실하고 국가주의가 고개를 들자 제후들로부터 받던 분담금이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경제적인 이유로 희년을 제정했다고도 했다.그러나 역사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작 교황은 제후들의 큰 선물(?)은 받지 못했다. 그 점에 대해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크게 실망했다. 많은 제후가 희년 행사에 불참했고, 참여한 제후들도 이제는 영지를 헌납하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니파시오 8세가 꿈꾸었던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통합, 곧 신권정치(神權政治, theocracy)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림 속으로
교황은 그림 속에서 조토가 묘사한 것처럼, 라테란의 요한 대성전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 앞에서 칙서를 읽었다. 그림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문자로 기록하는 대신 붓으로 기록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벽화를 그린 화가 조토는 서양 미술의 역사를 새로 쓴 사람이다. 최초의 인문주의 예술가로 손꼽기도 한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2층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대기를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이 작고 단순한 그림 속에서도 그의 인문주의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데, 교황이 아주 높은 연단에 올라 권위를 풍기며 칙령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높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높이에서 칙령을 읽고 있는 점이다. 오른쪽 기둥 뒤에 있는 인물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교황의 양쪽에서 복사를 서고 있는 사람은 좌측의 나이 든 사람과 우측의 젊은 사람을 넣어 대희년의 은사가 모든 세대를 아우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6) 드 뇌빌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뺨을 때리는 샤라 콜론나’
뺨 맞은 교황, 무너진 권위
- 드 뇌빌,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뺨을 때리는 샤라 콜론나’, 프랑수아 기조의 저서 「초기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사」(1883), 597쪽 삽화.
보니파시오 8세가 제193대 교황으로 선출되던 1294년, 훨씬 이전부터 추기경들은 극심한 분열을 보였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을 선출할 때인 1268~1271년, 비테르보 콘클라베이다. 3년이 지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자 비테르보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교황궁에 가두고 선출하면 나오라며 문을 잠가버렸다.오늘날 교황 선출을 뜻하는 ‘콘클라베’(Conclave, 열쇠로 ‘잠금’ 또는 ‘감금하다’는 뜻)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황 선출에 관한 사도 헌법, 흔히 ‘교황 선거법’이라고 하는 「위험이 있는 곳(Ubi Periculum)」을 제정했다.
추기경들의 분열은 교황에게는 적지 않은 위협이었다. 베네딕토 카에타니(훗날 보니파시오 8세 교황)가 추기경으로 있던 시절, 그는 4차례나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1292년 성 첼레스티노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인 교황령 밖에서 교황직을 수행했고, 선출된 지 2년 만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교황이 생전에 은퇴한 경우는 최근의 베네딕토 16세 교황(2013년) 이전에는 첼레스티노 5세가 유일했다. 베네딕토 카에타니 추기경이 부추겼다는 말도 있었다.
성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이 물러난 지 열흘 만에 나폴리 누오보성(城)에서 콘클라베가 있었고, 1294년 12월 24일 카에타니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8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단테는 「신곡」에서 반복해서 보니파시오 8세가 부정투표로 선출되었다고 했다.(‘지옥편’ 19장과 27장 참조) 단테를 배반하고,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한 사람이 바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배신을 가장 나쁜 죄로 간주했고,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지옥의 극단으로 보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의 싸움
보니파시오 8세 교황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사람은 단테뿐이 아니었다. 로마의 명문가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 자코모와 피에트로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카에타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의 불편한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미남 왕(le Bel)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도 반대했다. 작은형제회 출신의 시인 다 토디는 시집 「라우데」에서 교황을 가리켜 ‘적(敵)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볼 때 이런 일련의 주장은 모두 이단이 아닐 수 없었다. 충돌은 1297년 5월 절정에 달했다. 그때 교황은 리에티에서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콜론나 가문 출신의 두 추기경과 친척들, 세 명의 프란치스코회 영성가들이 “교황이 부정투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며 “교황직을 몰수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교황의 반응은 격렬했다. 칙서 「잘려진 돌」을 통해 두 추기경을 파문하고 가문의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의 전쟁이 시작되자,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 왕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필리프 왕은 교회 분담금 문제를 마무리하느라 교황과 더 이상의 갈등이나 불편한 관계를 원치 않았다. 결국,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은 무릎을 꿇었고, 조반니 보카마차 추기경의 중재로 겨우 사면되었다. 콜론나 가문의 식구들은 모두 티볼리로 강제 이주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콜론나 가문의 영지 중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트리나 지역을 차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콜론나 가문 소유라는 것을 알자, 교황은 그 도시를 아예 없애버렸다.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땅에 소금을 뿌려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했다. 또 볼로냐 법원에 명해 자코모 콜론나 추기경의 궁을 압수하도록 했다. 교황과 콜론나 가문 간 갈등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1299년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교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300년, 첫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 「옛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과 함께 칙서를 하나 더 선포했는데, 그것은 오로지 교황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것이었다. 물론 같은 날 발표했다. 「최근에 더욱」이라는 이 회칙에는 앞서 선포한 희년 전대사 규정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을 명시했다. 사라센인, 콜론나 가문, 필리프 4세 프랑스 국왕과 시칠리아의 왕 아라곤 등을 언급하며, 이들을 환대해 준 사람까지 과거는 물론, 오늘도 내일도 교회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필리프 4세는 삼부회 총회(1302년 4월)를 열고 기욤 드 노가레를 내세워 적극적인 반(反) 교황 정책을 주도했고, 그 사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군주제 국가로 탄생했다. 같은 해 교황은 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를 통해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 밑에 있고, 교황의 권위는 세상의 모든 권력에 우선한다고 선포했다. 필리프 4세는 분노했다. 열 받은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오랜 숙적 콜론나 가문의 샤라 콜론나(피에트로 콜론나 추기경의 동생 자코모 콜론나. 흔히 ‘샤라, Sciarra’라고 불린다)를 교황이 거주하는 아나니로 보내 교황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는 교황을 체포하는 자리에서 교황의 뺨을 세차게 후려치고야 말았다.
삽화가 드 뇌빌
소개하는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색판화다. 프랑수아 기조(1787~1874)의 저서 「초기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사」(1883)에 들어 있는 알퐁스 마리 아돌프 드 뇌빌(1835~1885)의 삽화다.
드 뇌빌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생토메르라 지방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군인이 되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법학을 공부했고, 결국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리앙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했다. 법률가며 군인이자 화가가 된 드 뇌빌은 신고전주의 역사화가 피코의 화실로 들어가 공부하지만, 얼마 못 가서 나와 들라크루아 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그가 직업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삽화를 그리면서부터다. 헷젤의 「해저 2만리」 삽화에 참여했고, 기저의 「세계 여행」과 「프랑스사(史)」 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에 잘 알려진 우수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마젠타 거리에서 주아브와 경비병들의 공격’(1864), ‘주아브병의 보초’(1865), ‘성 로렌조의 전투’(1867), ‘쵸르나야를 통해 하산하는 기병’(1869)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드 뇌빌 덕분에 우리는 프랑스와 프러시아 전쟁, 이탈리아 독립 전쟁, 영국의 줄루 전쟁 등 당대의 여러 전쟁의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는 188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양쪽 진영의 분위기는 살벌하다. 교황은 권위의 상징인 삼중관에 목장(牧杖)까지 들었지만,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맨 앞줄에 선 샤라는 그런 교황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교황 뒤에 서 있던 수도자와 성직자들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역사상 처음 있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드 뇌빌은 그림 속에서라도 샤라의 장갑을 벗겼다.
아나니의 모욕
흔히 ‘아나니(Anagni)의 모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과격한 성격의 샤라 콜론나가 철장갑을 낀 채 교황에게 귀싸대기를 때렸다고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도덕적인 능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물리적인 싸대기였다. 그리고 교황을 체포하여 교황궁에 가택 연금을 시켰다. 교황은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바로 그해에 사망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불관용적인 태도와 콜론나 가문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 과정에서 행한 각종 배신이 화를 불렀다는 평가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신흥 군주들의 등장을 환호했고,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배척했다. 군주들은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서 위조, 중상모략, 교황 폭행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지만, 그런 환경과 분위기를 자초한 사람은 바로 교황 자신이었다.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1305년 프랑스인 베르트랑 추기경이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옮겼고, 이듬해 아비뇽 궁으로 들어갔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7) 조르조 바사리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70년 만에 본향 로마로 돌아온 교황, 환영하는 양떼들
- 조르조 바사리,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1572/73, 교황청 접견실 Sala Regia, 바티칸.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재위 1294; 1295~1303년) 이후 복자 베네딕토 11세 교황(재위 1303~1304년)은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1305년 새 교황을 선출할 때 필리프 4세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앉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를 대변하듯 새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즉위식은 로마가 아닌 리옹에서 있었다. 1309년 필리프 4세는 위험한 로마보다 안전한 아비뇽의 주교관에 거주하라며 교황을 압박했다. 이로써 클레멘스 5세 교황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고, 1377년까지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고 지내게 되었다.
클레멘스 5세 교황을 기점으로 추기경의 절대다수는 프랑스인이었고, 자연히 그들의 목소리는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비뇽 체류 시절,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교회 요직은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도맡았다. 아비뇽 교황은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년), 요한 22세(재위 1316~1334년), 베네딕토 12세(재위 1334~1342년), 클레멘스 6세(재위 1342~1352년), 인노첸시오 6세(재위 1352~1362년), 복자 우르바노 5세(재위 1362~1370년),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1378년)였다. 교황이 없는 로마는 하인리히 7세(1310~1313)를 시작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차지했고, 교황령에 속해 있던 지방들은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페라라와 우르비노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기의 교황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아비뇽에 머문 일곱 교황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발표했던 교황권 우위의 모든 칙령을 철회했고,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성전기사단’도 해체했다. 성전기사단이 막대한 부를 쌓고 프랑스 곳곳에 영토를 소유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필리프 4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교황은 사사건건 프랑스 왕의 눈치를 살폈고, 왕은 교황이 엉뚱한 생각을 하면 가차 없이 새로 교황을 뽑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요한 22세 교황은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를 강화하고, 교황청 조직을 아비뇽판으로 재정비하며, 그것을 위해 재정 확충에 힘을 쏟았다. 권위적인 성품에 교회의 절대적인 재산 포기가 반드시 완덕의 생활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가난한 교회는 미래가 없다며, 교황청 수익을 증대시키고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의 영성을 사는 프란치스코회는 눈엣가시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영성가들은 물론 신성로마제국 루트비히 4세 황제와 가장 많은 마찰을 빚었다.
베네딕토 12세 교황은 시토회 출신으로 선임 교황과는 달리 개혁을 도모했다. 로마나 볼로냐로 교황청을 옮기려고 했으나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고 아비뇽에 주저앉았다. 그는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수도회들을 단속하고자 회칙을 더 엄격하게 개정하도록 했고, 재속 사제들의 생활 규범을 제시하며 학문 증진을 독려했다. 루트비히 4세와는 마찰을 좁히지 못했으나, 프란치스코회와는 화해했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은 베네딕도회 출신이다. 그는 루트비히 4세를 파문(1346년)하고, 카를 4세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국인 프랑스에 대한 애정 때문에 피렌체 출신의 인문주의 시인 페트라르카와 로마 시민들의 로마 귀환 요청을 거절했다. 페트라르카를 성직자로 임명하고 가까이 두려고 했지만, 시인은 교황청의 부패와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아비뇽을 떠났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아비뇽을 고대 바빌론 유배에 비유하여 ‘서방의 바빌론’으로 묘사했다. 교황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1343년 1월 27일 “100년에 한 번씩 지내던 성년을 50년에 한 번씩 지낸다”는 칙서 「하느님의 외아드님(Unigenitus Dei filius)」을 반포했다. 그리고 아비뇽에 새 경당을 지어 성 베드로 사도에게 봉헌했다. 또 재임 중에 유럽에 불어닥친 흑사병에 직면하여 환자 치료와 사망자 매장,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에 주력했다. 흑사병의 원인을 유다인에게 돌리고, 그들을 향한 집단 학살에 대해 교황은 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칙서 「아무리 불충하더라도(Quamvis Perfidiam)」(1348년)를 반포, “전염병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에게 똑같이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며 성직자들에게 유다인 보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인노첸시오 6세 교황은 아비뇽 시대의 다른 교황들과 달리, 프랑스 국익에 치우치지 않은 개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교황이다. 카를 4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었고, 카를은 로마를 교황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요한 22세와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교황청 재산의 대부분을 선임 클레멘스 6세가 모두 소진하자, 교황청 관리인까지 감축하여 인건비를 아끼고, 미술품을 매각하는 등 재정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공국 간의 전쟁과 흑사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그 돈마저 쓰는 바람에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했던 교황이었다.
우르바노 5세 교황은 아비뇽 시대 교황 중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교황이다. 베네딕도회 출신으로 뛰어난 법률가기도 했던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 규칙을 따르며 수도복을 입고 낮은 자세와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교황청 내부 관료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교회 쇄신을 단행했다. 그가 말한 교회 쇄신은 “복음의 가치와 원칙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는 게 아니라”고 했다. 교육 사업을 후원하여 대학을 설립, 지원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동ㆍ서방 교회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 귀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1367년 10월 16일, 교황으로서 또 로마교구의 교구장으로서 60년 만에 처음 자신의 교구를 찾았다. 목자 없이 60년을 지낸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3년 후 1370년 프랑스 추기경들의 강압에 못 이겨 프랑스로 돌아갔고 얼마 후에 사망했다.
아비뇽 체류를 종식하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프랑스인이지만 아비뇽 체류를 종식한 교황이다. 추기경 시절,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와 수도원의 부패한 관행을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호소와 충고를 듣고 로마 귀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피렌체가 제동을 걸며, 볼로냐, 페루자, 오르비에토, 비테르보 등 교황령 내 40개가 넘는 도시에 반란을 조장했다. 그에 대해 교황은 1376년, 피렌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고,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 환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1377년 1월 7일, 로마에 무사히 당도하면서 아비뇽 체류를 종식 시켰다.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풍 이끈 대가
소개하는 작품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그린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이다. 바티칸 접견실 ‘Sala Regia’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바사리는 아레초 출신으로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풍을 이끌었던 대가다. 화가, 건축가, 작가며 사학자이기도 했다. 16세에 실비로 파세리니 추기경에 의해 피렌체로 와서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그의 제자 로소 피오렌티노와 자코포 폰토르모 그룹에 합류했다. 이후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연구했다. 스스로 미켈란젤로 제자임을 자처했다.
피렌체 베키오 궁과 두오모의 돔 천장화, 우피치 미술관 건물, 바사리의 복도와 바티칸의 접견실 등 그가 남긴 회화와 건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학자로서 미술사적 문헌을 기초로 쓴 최초의 미술가 열전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라는 방대한 책이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썼다. 미술의 역사는 이 책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성벽 높이가 50m, 두께가 4m나 되는 거대한 감옥 같은 성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왕권이 교황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교황들은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아비뇽의 포로’라고 했다. 한편, 교황이 없는 로마는 또 어떠했던가!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콜라 디 리엔조가 민중을 선동해 봉기했고, 교황이 보낸 추기경 알보르노를 통해 회복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교황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어떤 개혁도 작동되지 않았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바로 이런 암울했던 아비뇽 시대 교황의 심리와 과거에서 벗어난 로마를 반영하듯, 애틋하게 표현되었다. 교황의 앞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인도하고, 백성들은 남녀노소 모두 나와서 근 70년 만에 돌아오는 목자를 환영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귀환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런데도 바사리는 그를 폭삭 늙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아비뇽 생활의 고충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시에 당신 양 떼들을 향한 연민의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8)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페스트 광풍이 몰아치다… 해골과 춤추는 사람들
- 베른트 노트케, ‘죽음의 무도회’(일부)(1475/1499년), (에스토니아) 탈린의 성 니콜라스 성당 소장(에스토니아 교회 박물관).
교황청이 아비뇽에 가 있던 1308~1378년 70년 동안 유럽은 실로 엄청난 풍파를 겪었다. 그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이후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을 들면 1348~1351년의 ‘페스트’를 들 수 있다. 그와 관련한 교회사적인 이야기와 흥미로운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이은 대기근, 쇠약해진 유럽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과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는 국가주의가 확산하고 군주국가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1095~1291)의 후유증은 교회를 안팎에서 힘들게 했고, 교황을 지지하던 겔프와 황제를 지지하던 기벨린의 오랜 싸움도 십자군 전쟁 못지않게 유럽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세 봉건주의의 몰락과 도시 국가로의 이행 과정에서 겪는 진통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많았다. 국지적인 많은 전쟁과 함께,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 간 분쟁은 백년 전쟁(1337~1453)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도시 국가들이 탄생했고,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닥친 기후 변화(1310~1346)는 유럽을 대기근으로 몰고 갔다. 1314년 한여름에 내린 폭우는 오랫동안 많이도 내렸다. 농작물은 모두 주저앉고, 열매는 뭉개지고 줄기는 썩어갔다. 늦은 가을걷이는 수확할 것이 별로 없었다. 이듬해 상황은 더 나빴다. 제방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들판과 목초지를 덮쳤다. 몽골인들의 침입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원인 모를 전염병(아마도 탄저병)은 가축들마저 덮쳤다. 각국은 밀 가격의 폭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1316년에도, 1317년에도 비는 다시 내렸고, 유럽은 사상 최악의 기근을 경험해야 했다. 흉흉한 이야기도 나돌았다. 인육을 먹었다는 둥, 유랑하는 농민이 많아 인간 사냥꾼이 생겼다는 둥, 썩은 음식을 오랫동안 먹어 정신병이 생겼다는 둥, 기근이 몰고 온 강도와 무법 상태와 전쟁은 그 시기를 정의하는 단어가 되었다.
대기근의 원인은 온난기에서 작은 빙하기로의 느린 전환으로 진단했다. 그 시기, 농업 생산력은 바닥을 쳤고, 인구는 감소했다. 유럽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진 심각한 영양실조와 기아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리에는 온통 야윈 얼굴들뿐이었다. 동유럽 사람들은 거의 굶다시피 했다. 쇠약해진 건강은 각종 질병에 취약했다.
페스트의 창궐
1348~1351년의 페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불어닥친 광풍이었다. 1320~1330년대 북경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는 1340년대에 이르러 서진하는 몽골군과 함께 감염 지역이 확대되었다. 1346년 크림 반도 교역의 중심지였던 카파(Caffa)는 제노바의 식민 도시이자 유럽 상인들의 중요한 무역 항로였다. 몽골 제국의 군대는 카파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유럽군은 카파 성을 지키기 위해 성문을 닫았다. 몽골 군인들은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안으로 던졌고, 대재앙은 시작되었다.
1347년 10월, 흑해를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 메시나 항구에 도착했다. ‘죽음의 배’로 알려진 이 상선들에 탑승한 선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고, 몇몇 생존자들은 전신이 고름으로, 피부는 검게 변해 있었다. 죽은 선원들뿐 아니라, 정박한 배에서 나온 쥐로 인해 시칠리아 섬은 순식간에 죽음의 섬으로 바뀌었다. 이후 페스트는 피사와 제노바, 마르세유 등 지중해 무역을 전담하고 있던 항구들을 통해 유럽 전역에 신속하게 번졌다. 2500만 명,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의사들은 덥고 습한 기후 탓으로 보고, 감염된 도시를 떠나라고 권했다. 교황은 열흘간의 격리 기간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고, 클레멘스 6세 교황(재위 1342~1352)은 아비뇽에서 백성들에게 참회를 촉구했다. 여기저기서 ‘속죄의 형제단’이 만들어졌고,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행복을 입고 쇠로 된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치며 참회에 동참했다. 민간에서 대응하는 방식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원인이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쥐는 항상 있었고, 침대와 옷장에 이도 항상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병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평소 미운털이 박힌 유다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서 그렇다며 유다인 집단 학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유다인 보호에 나서며 같은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 화가 판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베른트 노트케(Bernt Notke, 1435~1509년)의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다. 14세기 중반 페스트 펜데믹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작가인 노트케는 르네상스 시기, 독일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가, 화가, 판화가다. 강렬한 표현력으로 독일의 조각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독일의 후기 고딕 양식의 조각가 헨닝 반 데르 헤이드(Henning von der Heyde, 1460~1521년)가 그의 제자다. 독일, 체코, 발트 해 연안, 스웨덴 등지에서 살며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이후 북유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많은 전쟁으로 소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알려진 그의 작품들로는 뤼베크 대성당에 있는 ‘승리의 십자가’(1477년, 조각), 덴마크 오르후스의 ‘중앙 제단화’(1479년, 조각에 채색), ‘탈린의 제단화와 프리즈’(1482년, 조각에 채색), 1489년 스톡홀름에서 제작한 ‘용에 맞서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리비아 여왕’(조각)이 있다. 후에 뤼베크(Lubeck)에서 사망했다.
페스트와 신앙
페스트는 이후에도 1300년대가 끝날 때까지 10년 주기로 한 번씩 돌아와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그 결과 종교와 문화, 교육과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유럽을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구 격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농민들의 부역과 과세 부담을 가중해 반란과 봉기를 초래했고, 종국에는 봉건 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년), 이탈리아의 촘피의 난(1378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 등은 그것을 입증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농민들은 도망하여 신분을 바꾸기도 했다. 사회ㆍ경제 차원에서 지위가 향상되고,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며, 독립 자영 농민층의 형성이 뚜렷해졌다.
1300년대의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을 거치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가지 극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타락한 사람들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 속죄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행과 단식, 채찍질과 같은 사적인 차원에서 자선 사업과 기부 등 공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교회에 대한 기부는 성화, 제단화 등의 미술품 기증으로 이어져 미술품 수요가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대재앙에 직면하고 보니, 종교가 너무 무기력하다고 느낀 것이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회의는 맹목적인 신앙보다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이성주의의 발달을 부추겼다.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해지면서 개인으로서 인간상이 제시되고, 현세적인 가치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다.
그림 속으로
‘죽음의 무도회(The Danse Macabre)’로 알려진 이 작품은 기근과 전쟁, 페스트 등 죽음의 불가피함과 공포를 알레고리(개념이나 사실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풍자적으로 표현)로 묘사했다. 죽음으로 표현되는 해골들이 산 자들과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여기에는 교황, 황제와 황후, 추기경과 왕, 주교, 공작, 수도원장, 기사, 수도사, 귀족, 시장, 의사, 고리대금업자, 사제, 상인, 교회 행정관, 장인, 청년, 소녀, 요람 속 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출동한다. 죽음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고귀한 사람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죽음의 보편성’을 말한다.
분위기는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축제하는 것처럼 흥겹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전체적인 주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다. 생명이 얼마나 허무한지, 현세에서 누리는 삶의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일깨우려는 것 같다.
그림이 있던 에스토니아의 성 니콜라스 성당(Niguliste kirik)은 1523~1524년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2년에 있었던 공습으로 성당이 부서지면서 작품도 완전히 사라졌다. 15세기 말에 그린 최초의 30m짜리 그림 중 남은 일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