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사부모님께옵서 33세에 (개도 33년 1906년)에 득도하신 이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에서 계룡산 백암동으로 남천포덕하시어 도덕을 설파하시며 제자를 얻으시고 금강대도를 창도하시는 과정에서 교화하신 말씀을 수집 편집하여 성훈통고로 출간하여 인류중생 구제의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3-5-10. 노송 이서우
갑자년(개도51년 1924년 7월에 명령을 받들어 들어와 뫼시니, 이때는 성사께서 동붕교로 일컬어 포덕하실 때라. 성사께옵서 여러 제자를 모아 말씀하시기를 “김정묵(당시 동붕교 주간)이 심히 무례하여 가히 가만히 보아 지날 것이 아니니 이 가운데 바로 잡을 사람이 없느냐?” 하시고 서우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히 당하겠느냐?”
고하기를 “청컨대 한번 시험 하리이다” 하고 곧 출발하니라.
경성 동본원사에 가서 그 일본인(동붕교 총감독) 주지와 협의하기를, 주간 김정묵이 사부님께 무례함을 엄중히 징계하여 그 주간의 직을 파면할 것을 언약하니라. 또한 동붕교의 감독 일본 사람 부전釜田과 협의하고자 하여 한철현, 오희운,장인환 등과 함께 논산 부전의 집에 이르니, 김정묵이 미리 부전과 함께 의논하고 논산 경찰서에 교섭하여 정사복한 경관으로 하여금 좌우에 죽 벌려 앉아 위엄을 보이고 개별적으로 불러들여 김정묵과 화합할 것을 권고하고 아울러 승낙과 다짐을 받는지라.
최후로 서우를 불러 서로 대하여 호령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가 여러 사람을 선동하여 감히 불법을 자행하니 동붕교로부터 출교는 물론이요, 마땅히 준법 처벌을 할 것이라” 하며 사납게 위협을 가하는지라. 서우가 대답하기를 “신앙은 자유인데 어찌 임의로 출교시키며 또한 내가 법에 저촉됨이 없는데 함부로 위협하며 인권을 무시함이 법에 옳은가?” 하여 강경한 태도로 서로 대항하다가 경찰의 중재로 중지하고 즉일 이 뜻을 경성 동본원사 주지에게 전보하여 한번 금천에 출장을 옴으로써 협정하고 총회를 열고 기다리니라.
그런데 부전과 김정묵이 미리 경성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이것이 교도의 총의가 아니요, 이서우 개인의 선동이라” 하고, 또한 일반교도 중에도 김정묵을 옹호하는 파가 있어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성과를 보지 못하고 홀로 정묵과 투쟁하다가 금천을 떠나 귀향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