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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서울방 교우 34명이 왔고, 어제 피정 온 부산 몰운대 청년들 네 사람 함께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어디 말씀이죠? (에페소서)
상황에 따라 다르죠.
결혼했는데 아기가 안 들어서, 그럴 때는 애 배소서.
그런데 아기를 들어서 10달이 되어 낳아야 하는데 산고가 너무 심해. 그럴 때는 애 빼소서.
그 어렵게 난 아이가 자라서 뺀질뺀질 말을 안 들어, 그럴 때는 애 패소서.
이제 8월 15일 전후로 더위가 꺾이겠죠. 벌써 지금도 여기는 열대야는 없어졌어요.
이곳은 해발 200m 되어 감곡보다도 한 2도 정도가 낮아요.
말복이 언제죠? 그리고 처서가 언제죠?
처서는 모기의 침이 구부러진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모기가 아무리 찔러도 침이 안 들어가.
음력 절기가 훨씬 더 정확한 것 같지 않아요?
왜? 태양보다는 달이 지구와 더 가까워 지구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정확한 거예요.
태양은 너무 멀리 있잖아.
달은 가까이 같이 돌기 때문에 이 세상 어떤 별보다도 지구를 잘 아는 것이 달이에요.
옛날 우리 동양권에서는 음력을 썼잖아요.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보다 동양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보면 열두 제자와 함께한 최후의 만찬 그림이 복사한 것부터 참 많죠.
그것을 그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인데, 그분은 화가만이 아니라 과학자예요.
비행기부터 아무튼 천재였죠.
그런데 이분의 그 최후의 만찬에 보면 아주 역사적인 게 두 가지가 그 안에 담겨 있죠.
첫 번째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원근법이에요.
그전에는 전부 다 평면이었는데 이 그림을 보면 안에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인류 최초의 원근법을 쓴 그림도 역시 과학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11명의 제자를 그려놓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남았어요.
예수님과 유다스를 그려야 해요.
예수님 얼굴은 그냥 얼굴이면 안 되는데, 하면서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는데
맨 앞자리에 어느 청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옆모습이 너무 성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그 청년한테 모델이 돼달라고 부탁했죠.
그래서 그 성당에서 기도하던 청년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 된 거예요.
그리고 이제 누구 남았죠? 유다스.
다빈치가 생각하고 있는, 돈에 욕심이 많고 스승을 배반하는 그 얼굴,
그리고 같은 동료들을 배반하는 얼굴을 찾아야 하는데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지인들과 술집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있는데 싸움이 난 거야.
보니까 한 청년이 병을 깨서 오만 쌍소리를 하면서 막 난폭하게 구니, 사람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해.
결국에는 경찰들 몇이 달려들어 제압했어요.
그런데 다빈치는 예술가니 눈매가 예리하잖아요.
끌려가는 사람의 얼굴을 딱 보고, ‘가만히 있어봐. 내가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지?’
집에 가서 생각하니까 세상에! 예수님 모델을 했던 그 청년이야.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내가 보증을 서겠다고 하니, 그 청년이 네놈이 뭔데 보증 서냐 했죠.
‘여보게 나 어디서 본 적 기억 안 나? 몇 년 전에.’
내가 보긴 언제 봤느냐며 술이나 사 먹게 돈이나 내놓으라는 그 청년에게 설명했죠.
내가 보긴 뭘 언제 봤냐고 돈이나 내놓으라고 술이라도 사 먹게 설명을 한 거예요.
3년 전, 내가 어느 성당 갔을 때 당신을 만났는데 위대한 예수님 얼굴과 당신이랑 너무 똑같아서 당신을 모델로 그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얼굴이 이렇게 되었느냐 물었죠.
들어보니 연애에 실패하고 막 사는 거야. 로또도 사도 안 되고 세상에 성질이 나 있었죠.
그래서 다빈치는 다시 부탁했겠죠. 무슨 모델로? 유다스 모델로.
그 청년은 돈만 주면 다할 수 있다고 했죠.
그래서 놀랍게도 최후의 만찬에 예수님과 유다스는 같은 인물이에요.
오늘 처음 들어보신 분 많죠?
그래서 최후의 만찬 그림은 과학적으로 보면 최초의 원근법이 사용된 것이고, 그리고 또 영성적으로 보면 천사같이
예수님처럼 아름답던 얼굴이 몇 년 사이에 야비하고 비열한 마귀 얼굴처럼 바뀌었다는 거예요.
지금, 이 이야기, 예수님의 얼굴이면서 동시에 마귀의 얼굴처럼 바뀐 예화가 나와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사람 얘기일까요?
이제 이실직고하시라.
여러분들 피정하고 아주 은혜로운 말씀 듣고 또 차에서 치유 성가 듣고 집에 가면
아이들이 ‘엄마 오늘 좋은 일 있어? 얼굴 밝아’하고,
화장대에 앉아서 얼굴을 보면, 그 화장대 거울에 누가 있어요? 천사가 있죠. ‘아유, 내 얼굴이 이렇게 이뻤나?’ 하지요.
그런데 계 모임에 가서 한바탕 싸우고, 또 그런 마음으로 레지오 갔더니 어떤 여자가 내 뒷담화하네.
날씨는 덥고 그래서 성질이 나서 화장대에 앉으면 거기에 누가 있어요?
마귀 하나가 독사눈을 뜨고서 쳐다보죠.
여러분을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는 소설이 있죠.
낮에는 인술을 펴는 아주 유명한 의사로 동네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지킬 박사가
밤이 되면 자기가 만든 약을 먹고 갖은 못된 짓을 하는 하이드라는 사람으로 돌변하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려고 애썼어요.
‘천사와 악마의 중간 존재다.’ 여러 가지로 다 맞는 얘기죠.
또 심리학자들은 ‘본능과 초자아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는 존재다.’
또 어떤 성인은 ‘천사와 동물의 중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도 있고 또 천사의 모습도 있다.’
이처럼 누구나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부인 못 하죠.
그럼, 나한테 질문해 보세요. ‘신부님도 두 개의 얼굴을 갖고 계세요?’
두 개의 얼굴이야 있겠죠.
그렇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려고 기를 쓰고 사는 거죠. 선한 쪽으로. 맞죠?
그게 우리 신앙의 과정이고 여정이라고 생각이 돼요.
내 안에도 보면 두 개의 얼굴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잖아요.
그래도 그나마 평일 미사 가고 주일 미사 가고 어떤 때는 유튜브 강론을 들으면서
자꾸 어둠 쪽으로 가려는 나를 다시 끌어낼 수 있단 말이에요.
이 두 개의 어떤 투쟁에 대한 갈등을 참 기가 막히게 묘사하신 분이 바오로 사도예요.
육과 영으로 구분하면서 육체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육체가 썩으면서 같이 멸망할 것이고,
영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산다. 육에 따라서 사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라고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영과 육의 싸움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고 계시죠.
그분이 그렇게 얘기하셨잖아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귀를 내어버리십시오.’
바오로 사도가 다 이미 겪었던 체험들이었어요.
오늘 복음으로 돌아옵시다. 어떤 내용이었어요?
지난 주 복음에서 사촌 형 요한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프셨죠.
그래서 배를 타고 건너편 산으로 피했어. 그런데 세상에, 군중들이 뱃길이 아니라 걸어서 또 찾아온 거예요.
지지난 주 복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찾아온 거죠.
아무튼 요한복음 6장은 전부 다 생명의 빵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언급돼요.
오늘 빵의 기적을 보고 그야말로 뿅 간 유대인들은 육체의 길을 따르던 무리였나요, 아니면 영적인 것을 찾아왔던 겁니까?
밥 달라고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나 아픈 것 좀 낫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거예요.
영원한 세상을 가게 도와주십시오. 이게 아니에요.
당시 예수님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99%는 거의 다 기복이에요.
저 사람 쫓아다니면 병난대.
그러니까 아이한테 빵 다섯 개랑 물고기 두 마리 허리춤에 차주면서 쏜살같이 가서 그 양반 앞에 가서 뭐라도 잡으라고 하지요.
그렇다고 예수님은 하나하나 불러서 네가 치유 받을 자격이 있다, 없다 심사하지 않으셨죠.
하나하나 불러 ‘꾸르실료 다녀왔니? 교무금은 잘 내고 있니? 묵주기도 하루에 몇 단 하니?’ 이런 거 묻지 않으셨어요.
이 사람들이 다 기복으로 쫓아왔다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았죠.
오히려 도우미 노릇을 하는 제자들은 늘 분노에 차 있었을 것 같아요.
‘아줌마, 새치기하지 마. 아줌마 어저께 왔었는데 왜 또 왔어?’
또 아마 제자들한테 봉투 주면서 ‘아저씨 앞으로 좀 나가게 해주세요.’
안 봐도 비디오야, 돈 찔러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렇지만 예수님은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밤에 산에 가서 성부로부터 힘을 얻어서 새벽부터 쫓아오는 사람들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다 안수해 주시죠.
건성이 아니었죠. 대충이 아니라 정말 한 사람 한 사람한테 필요한 은혜를 다 주셨잖아요.
그게 예수님의 모습이죠.
하긴, 열두 제자들도 다 기복으로 쫓아다녔던 거예요. 그죠?
저 사람 쫓아다니면 뭐라도 생기겠지, 나중에 저 양반이 왕이 될 게 뻔한데.
오죽하면 그 야고보랑 요한 어미가 와 왕이 되면 우리 큰아들은 왼쪽에 작은아들은 오른쪽에
국무총리 자리 하나 부총리 자리 하나 달라고 로비하죠.
또 그 꼴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그냥 성질이 나죠.
만일 성령 강림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 집단은 그걸로 끝났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신부로 살아갈 이유도 없고, 여러분들이 휘발유 태우면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죠.
그만큼 성령 강림이 중요하다는 거죠.
유대인들은 분명히 육체의 길을 따르는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강한 것을 보여달라고 그러잖아요.
보고 내가 뿅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멋있는 기적, 한마디로 기적 중독증 환자들이었죠.
내가 지난주 주일 강론 때도 이 얘기를 했어요.
어쩌면 우리도 더 자극적인 기적을 찾고 있죠.
왜냐? 오늘 내가 하루 살고 잠자리에 든 것도 기적인데 그건 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학교 갔던 아이들이 ‘엄마, 밥 줘’ 하면서 들어오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인데, 그건 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내가 내 손가락으로 코딱지를 후빌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눈 한 번 껌뻑거릴 수 있는 것도 기적인데 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꽃동네 가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 하는데, 그 표현만으로 부족해.
내가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고, 내가 내 두 손으로 양말 신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죠,
우리 조금만 고장 나 봐요. 아무것도 못 하잖아.
내가 작년 겨울에는 퇴행성 관절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녔어.
그때 이렇게 생각했죠. ‘내가 경당을 괜히 2층을 만들었구나. 저길 어떻게 올라가지?’
그런데 아주 명의를 만나 내가 이제는 뛰어 올라갔다 뛰어 내려와.
명의가 누군지 궁금하면 개인적으로 물으세요. 소개하면 내가 3대7 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때도 지팡이를 잡고 다녔죠.
기억날 거예요. 제주도에 순례신자들을 데리고 갔는데 너무너무 쪽팔리고 창피한 거야.
세상에 마라톤을 완주하던 내 다리인데,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우리는 무너지는 몸뚱아리를 대할 때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하나씩 체험하죠.
이 뒤에 500년 된 느티나무 있죠.
거기를 보면 조그마한 애가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있어요.
양팔을 딱 벌리고 있는 곳에도 구멍이 다 큰 게 있어.
그리고 오른팔 쪽 구멍 안에 지금도 부엉이가 자고 있어.
수리부엉이라고 포식자 중에서 제일 상위인데, 발톱 하나가 거의 한 15cm 돼.
솔개 매도 수리부엉이한테 꼼짝 못 해. 얘만 뜨면 다 도망가.
여러분들도 낚아채서 돈 주면 부산까지도 데려다줄지도 몰라.
그런데 고목들이 왜 그렇게 스스로 아내를 비우냐?
이것은 나무 박사한테 들은 얘기인데, 오래된 고목이 속을 비우지 않으면 동강이가 난대요.
속을 비워야만 양분을 조금만 빨아올려도 얘가 산대.
그리고 안을 비워야만 아무리 센 태풍이 오더래도 돌아서 나간대요.
속이 꽉 차 있으면 그만큼 힘이 들잖아, 그걸 먹여 살려야 되니까.
그래서 구멍을 보면서 이게 바로 고목들의 생존 전략이구나.
꽉 차 있는 애들은 단단하기 때문에 뚝뚝 부러져요.
강화도 전등사에 가면 300년 된 느티나무 문화재가 있는데 반이 없어요.
쇳덩이로 지팡이를 세워 놓아야 해요.
이 느티나무에서 이런 지혜를 우리 인간들이 배워야 합니다.
500년 되었지만 얼마나 싱싱해, 가지 끝까지 이파리가 다 있잖아.
그러니까 가서 끌어안고 기를 받아 가라 이거예요.
물론 내가 이 느티나무 바로 앞에 침실을 만들었을 때 풍수학자들은 조금 걱정했어요.
느티나무 기가 센데 신부님 괜찮으시겠냐고,
내가 걱정하지 말아라. 애가 저놈의 기를 쪽쪽 빨아먹으면 빨아 먹었지 안 빨린다.
저 느티나무는 지금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나와요.
내가 수맥 파동 재는 것을 가지고 쟤한테 가면 어마어마하게 돌아가. 그런데 선한 거야.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들은 비워야 해요. 그래야 건강한 거예요. 그죠?
나이 먹을수록 탐욕스럽고 움켜쥐려고 하고 내놓지 못하면 손에는 금덩어리 하나가 더 들어와 있을지 몰라도 육신은 망가져요.
그리고 우리의 영도 망가져 버리고 말아.
난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어요.
아니 이렇게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고개 집어넣으면 뻥 뚫어져 있어서 어떻게 사나 했는데.
그런 지혜가 숨어 있는 걸 몰랐던 거예요.
자기를 비우면서 작은 영양을 가지고도 다 살릴 수가 있는 거야.
불필요한 살을 떼어내는 거야. 서 불필요한 살, 그거 다 병이 되는 살들이잖아요.
영의 사람은 기적 뒤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요.
그런데 육의 사람은 그 기적에만 매달려요.
내가 지난주 강의 때 어느 수사님이 아이가 축구공을 원해서 선물했더니
그때부터 이 아이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기도도 안 하고 수사님 말도 안 들었다는 이야기 했죠.
선물을 준 사람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선물에만 집착하면 선물이 바로 우상이에요.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하루하루 잠자기 전에 ‘주님 오늘도 기적 속에 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늘도 숨 쉬게 해주신 것, 볼 수 있게 해주신 것, 내 손가락에 묵주 걸고 돌릴 수 있는 것부터
우리 가족들 모두 들어와 자는 것을 보니까 주님 이게 다 기적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작은 것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죠.
오늘 예수님이 그랬죠.
‘내가 기적을 통해서 준 이 빵은 잠시 배고픔을 달래줄 뿐이지만 앞으로 내가 줄 영원한 빵은 그런 빵이 아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그렇지만 육신의 빵만을 쫓아다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그냥 이쪽 귀로 들어왔다 반대쪽 귀로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제자들 가운데도 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뭐라 그래요?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면서 제자들끼리도 수군거리죠.
그러니 유대인들이야 더 못 알아들었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강조하시면서 뭐라 그래요?
‘내가 살아있는 빵’이라 그랬죠. ‘살아있는 빵’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 다음이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57절에는 이 얘기가 무려 7번이 나오죠.
예수님의 유언 중 최상의 유언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성체 성사의 증언이 어디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재질을 가지고는 결코 하느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1608년 5월 24일, 이때는 가톨릭이 엄청 많이 흔들릴 때야.
칼빈파 루터파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끌고 갈 당시였어요.
그래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도 ‘내가 믿었던 천주교가 잘못된 데가 아니야? 개신교가 옳은 게 아니야?’ 하면서
칼빈파와 루터파 쪽으로 몰려가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1,608년 5월 24일 정확히 그날, 스위스 국경에서 10km 떨어진 곳에
파메르니 대수도원에서 성령 강림절에 3일 동안 성체를 제대 위에다 현시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 옆에 촛불을 켜놨겠죠.
그런데 수사님들이 제대 앞을 지키고 있다가 잠깐 식사하러 간 사이에 이 초가 녹아서 성체보에 불이 붙은 거예요.
그때는 무슨 감지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불이 활활, 제대가 나무 제대요.
그런데 수사님들이 밥을 먹고 들어오다가 깜짝 놀란 거예요.
제대에 불이 붙어 있는데 성체를 모신 성광이 3미터 위 공중에 떠 있는 거야.
불을 꺼도 안 내려오고 3일 동안을 떠 있었어.
그래서 추기경부터 수많은 사람, 과학자들이 그 밑에 줄이라고 있나 살펴보고.
이제 3일 후에 새 제대로 바꾸고, 수도원 원장이 성체보를 까니, 성광이 그 위에 앉으셨죠.
지금도 파메르니 대수도원 가면은 그때 그 성체가 성광 안에 그대로 있어요.
칼빈 루터파가 천주교 신자를 끌어들이고 있던 그때 3일 동안 수만 명이 와서 그걸 본 거야.
그러면서 개신교로 개종했던 천주교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통회하고
무릎으로 제대 앞에까지 기어가서 잠시 한눈판 것 용서 청했죠.
사실 우리 천주교에는 성체와 관련된 기적들 많죠.
성당에도 불이 날 수 있어요, 전기 합선으로 날 수도 있고 방화로도 날 수도 있고요.
몇 년 전에 그 유명한 파리 노틀담 성당에 화재가 있었죠.
그 성당 안에는 특히 보물이 두 개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면류관, 그것은 무사히 끄집어냈죠.
신부님들은 역사상 박해 때문에도 많이 죽었지만, 또 불탄 성당에 감실 구하러 들어갔다가 죽은 분들도 많아요.
사제들은 성당에 불나면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서 성체를 꺼내 와야 해요.
내가 2010년 배티성지에 부임했어요.
감곡에 있다 가 보니 허허벌판 흙바닥에 아무것도 없었어.
저 꼭대기에 조그만 경단 같은 게 하나 있고 밑에는 조립식 건물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기도회 같은 걸 했었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기도회도 없었고 허물어져 내려갑디다.
그런데 감곡에서 은총의 밤에 왔던 사람들은 계속하고 싶으니까, 배티로 왔죠.
사제관은 저 꼭대기 산 위였는데, 어느 날 보니 저 밑에서 하얀 연기가 막 올라와요.
그래서 군에서 방역 해주는 줄 알았죠.
그런데 몇십 초도 안 됐는데 하얀 연기가 시커멓게 되어 올라오는 거야.
막 뛰어 내려갔더니 수녀님들 셋은 발을 동동거리며 울고 있고.
조립식 건물에 불이 붙으면 그냥 순식간이잖아요.
그때 그 안에 성체는 안 모셨었는데 뭐가 생각났느냐?
시멘트로 된 예수님 예수 성심상이랑 성모님상이 제대 옆에 계셨어요.
그래서 수녀님이 담요 가져다 개울에 담근 것 내가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들어갔죠.
경당은 막 허물어 내리고 위치는 어딘지 알죠
들어가서 예수 성심상은 이쪽 팔에다 끌어안고 성모 성심상을 다른 팔에 끌어안고 나왔어.
나중에 보니 밀어도 꿈쩍도 안 하는 시멘트 덩어리야.
그런데 그 두 개를 내가 양손에 들고나온 거야. 초능력이 나온 거지.
그러니까 신부님들도 성당에 불나면은 자기보다 더 무거운 감실을 들고 나와요.
감실은 보통 50에서 60키로 되거든요.
그리고 타죽은 신부님들은 부지기수고요.
그러니까 성체가 뭐예요? 예수님의 몸이잖아요.
물론 이 유튜브 듣는 분 가운데 개신교 신자들도 많고, 또 목사님들도 많다는 것은 알아요.
저는 개신교 신자들도 사랑하고 목사님들도 정말 사랑해요.
개신교와 천주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얼까?
마틴 루터는 가톨릭 신부였다는 건 아시죠?
성 어거스틴 수도의 신부로 유명한 성서학자였어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마틴 루터는 아무리 박해받아도 교회 안에 끝까지 사제로 머물면서 쇄신을 시켜서 줬으면
참 좋았을 것이에요.
그런데 마틴 루터는 성당 문에다가 ‘고쳐야 할 것’ 딱 써 붙여놓고 그냥 나갔잖아요.
그리고 가타리나 수녀를 자기 부인으로 했죠.
그런데 마틴 루터 죽을 때 유언이 몇 가지가 있었어요.
첫 번째 칠성사 없애지 말아라. 마틴 루터도 사제로 살았기 때문에, 이 칠성사,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가톨릭의 다른 형식은 없애도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없애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밑에 칼빈파들이 전부 다 없애버린 거지.
개신교 교우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나 전부 구원의 문 안으로는 들어와 있어.
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개런티가 없어.
가톨릭은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잖아.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이 7번 반복하신 말씀을 우리는 지키려고 기를 쓰고 살잖아요.
성체가 얼마나 중요했다는 걸 알잖아요.
개신교에는 성체가 없어졌잖아요.
1년에 몇 번 빵 사다가 나눠줘서 재현할 뿐이에요.
우리는 이 성체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걸 믿잖아요.
그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죠.
개신교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신앙적인 목적은 ‘이미타시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는 거예요.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우니타스 크리스티’,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 비슷하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돼서 기도하는 거예요.
얼마나 큰 축복이야?
하지만 내가 묵주 기도하며 졸면 이건 예수님이 조시는 거라고 이용을 해 먹으면 안 되죠.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돼서 봉사하는 거예요.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돼서 순명하는 거예요.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이에요. 이것은 천지 차이야.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돼서 봉헌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 느티나무처럼 다 비울 수가 있는 거예요.
다 내놓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쟤네들은 비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잖아요.
다른 생명으로 채워주잖아요. 여러 짐승이 저 안에 살거든요.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시작으로 생명의 빵, 그리고
다음 주 51절부터 57절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살아있는 빵’이라고 말해도 제자들은 ‘저 양반은 뭐라 떠드는 거? 자기 살을 뜯어 먹어야 한다는 말이 뭐야?’
하며 알아듣지 못하죠. 그러니 답답하신 예수님이 똑같은 얘기를 7번이나 반복하죠.
이렇게 똑같은 말을 7번이나 반복한 것은 요한복음 6장 51절 이하 말고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목사님도 이 구절 때문에 천주교로 개종한 분도 있어요.
이게 너무 부딪히는 거예요. ‘우리가 잘못되어 있다.’
또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이런 게 있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건 세례성사 하나죠.
물론 감리교는 성공해서 나온 것이라, 견진성사까지는 줘요.
‘신부님 그러면 성체 영하지 못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천국 못 갑니까?’
그건 아니라고 봐요. 하느님의 자비는.
그러면 개신교도 안 다니고 종교가 없는데 착하고 나눌 줄 알던 사람들은 천국 못 가요?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200년 조금 넘었는데 그전에 살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물 놓고 치성드리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할머니들은 세례 안 받았기 때문에 다 지옥에 가 있어요?
하느님이 그렇게 쪼잔한 하느님이에요? 아니죠.
다 구원의 대상이죠.
다만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지난번에 선택받았다고 그랬잖아요.
지난주 강론에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죠.
‘이렇게 선택받은 것 기적임을 믿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우시고 성령이 지켜주시고,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나이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그 네 가지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천주교 신자인 것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얘기지, ‘
다른 종교는 구원 못 받아. 우리만 받아’ 이런 흑백 논리는 참 위험한 생각이고 하느님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런 분 아니거든요.
사람을 포악하게 죽였어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에요.
다만 나는 개신교에서 성체를 못 영하는 그것이 안타깝다는 얘기예요.
내가 서운동 성당에 있을 때 나 보러 형님 아는 목사님이 계셨죠.
그 장로교는 청주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예요.
가끔 ‘형님 이번 부활 성당은 초들이 너무 아름답고 예술적인데요.’ 하면 내가 줬어요.
부활 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고 싶은데 빵 큰 것이 없다고 하면 하나 줬어요.
그 목사님이 그걸 들고 그대로 했다고 해서 성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재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마음속으로는 성체성사 없는 우리는 뭔가 조금 보증이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그 제도권 안에서 살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두 개 다 있는데, 개신교는 하나만 가지고 하는 거예요. 성찬은 없애버렸죠.
그러니까 기도하고 성가 부르고 묵도하고 찬양하고 이것만 계속 반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 하나만 가지고 두 개를 가지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이기려고 하니까 열심할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우리는 두 개를 다 가지고 있다고 건방을 떠는 거야.
‘알아서 자기 신앙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십니까?
또 너무 우리는 풍요로운 것을 다 갖고 있죠.
2천 년이라고 하는 기가 막힌 역사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이 주신 그 보물도 우리는 다 가지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 안에는 수많은 성인 성녀라고 하는 보물들이 있잖아요.
하늘에 있는 별처럼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살아오신 모습이 우리에게는 나침판이 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항상 그러죠.
성체 영하고 나서는 자리에 가서 성가 부를 때가 아니라고 그랬어요.
성체를 영하는 즉시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으로 바뀌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대고
‘주님 제 역사 안에 들어오세요. 제가 상처가 너무 많습니다. 저 우리 아버지 아직 용서 못 해요.
저한테 상처 준 사람 모두 해방되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아픈 곳에 손을 대고 ‘주님, 제가 간이 안 좋대요. 저 치유해 주세요.’
또 그 자리에 없다 하더라도 여러분들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이 있잖아요.
심장에 손을 대고 ‘주님. 미국에 있는 오빠가 심장병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치유해 주세요.’
믿는 대로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큰 믿음도 원하지 않으셨어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우리들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없잖아요.
그러니 오늘은 겨자씨가 아니라 해바라기씨 정도 돼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2024년 연중 제19주일 (8/11)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