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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0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경사로 돌아와서 정릉동에 있는 고 월산 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1월 1일 신해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왜병이 경주 안강현을 노략질하자 명나라 군사가 불리한 형세로 싸우다
왜병이 경주(慶州) 안강현(安康縣)을 노략하였는데, 명나라 군사가 그들과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왜병이 오래도록 해상에 둔을 치고는 강화(講和)의 일을 완결하겠다고 말하면서 수시로 나와 노략질하여 양곡을 거두어갔다. 유정(劉綎)이 행장(行長)에게 서신을 보내어 꾸짖으니, 행장이 답서하기를, "그것은 적왜(賊倭)의 소행이니,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안강현을 분탕하고 창곡(倉穀) 수천 석을 거두어 갔다. 고언백(高彦伯)과 홍계남(洪季男) 등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다만 영적(零賊)을 쳐서 수급(首級)을 바쳤을 뿐이다. 이때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낙상지(駱尙志)·마우경(馬禹卿)이 경주(慶州)에 있었는데, 군사 1천여 명을 내어 성밖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왜병이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장구 직진(長驅直進)하여 포를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였다. 조금 후에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해 왔는데, 명나라 군사가 능히 당해 내지 못하고 일시에 무너져 후퇴하였다. 뒤에 큰 냇물이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건너다가 옷과 갑옷이 다 젖어서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였다. 이에 적이 뒤에서 마구 짖치니,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적이 처음에는 명나라 군사를 두려워하였으나 이때부터는 매우 가볍게 생각하였고, 우리들도 믿을 바가 없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1월 1일 신해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영의정 최흥원을 병으로 면직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삼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2일 임술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임금이 총을 고안하여 유성룡으로 하여금 시험해 보라고 전교하다
상이 유성룡에게 전교하였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닌 데이겠는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윤11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경략 송응창이 탄핵을 입고 원적지로 돌아가니 병부 시랑 고양겸이 대신하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탄핵을 입고 원적지(原籍地)로 돌아갔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고양겸(顧養謙)이 그를 대신하였는데, 그는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사람을 차견하여 왕래시키기만 하였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4일 갑신 7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윤근수가 소서행장이 심유경에게 보낸 서찰을 입계하다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평 행장(平行長)583) 이 심유경(沈惟敬)에게 보낸 서찰(書札)을 입계(入啓)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일본 차래 선봉(日本差來先鋒) 풍신 행장(豊臣行長)은 천조(天朝) 유격 장군(遊擊將軍) 심 노야(沈老爺) 휘하(麾下)에 삼가 아룁니다. 휘하께서 지난해 8월 29일에 평양부 밖에서 만나 약속한 것에 휘하의 말은 변하였어도 내 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건건(件件)을 써서 역람(歷覽)에 갖추고자 합니다.
제 1건은 지난해 평양을 서북으로 경계를 그었으므로 왜인은 경계를 넘지 않았는데, 휘하께서 어떻게 절제하셨는지, 조선은 경계를 넘어서 약속을 어긴 일입니다.
제 2건은 휘하께서 청석령(靑石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진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온다는 기약을 어기셨으나, 오래 의료(醫療)하여 요즈음에는 순안(順安)하시다 하므로 문안도 하고 영접(迎接)도 하려고 나의 소신(小臣) 죽내 길병위(竹內吉兵衛)를 보냈더니, 그를 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고 군사를 내어 평양을 에워싼 일입니다.
제 3건은 휘하께서 두 번째 한강(漢江)에 이르러 강화(講和)하던 날에 제장(諸將)은 다 믿지 않았으나 나만은 믿어서, 휘하의 말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왕경(王京)에서 물러나면서 20여만의 양식을 그대로 남겨두고 태워 없애지 않았고 장도(長途)에 걸쳐 쌓은 왜영(倭營)도 헐어 없애지 못하고서 포포(浦浦)로 군사를 철수한 일입니다.
제 4건은 조선의 두 왕자와 배신(陪臣)들을 한강에서 약속한 바에 따라 돌려 보낸 일입니다.
제 5건은 휘하와 서로 약속함에 따라 전라도에 출병(出兵)하지 않아서 오늘까지 안온(安穩)을 유지해 온 일입니다.
제 6건은 휘하와 서로 약속하기를, 소장(小將) 비탄수(飛彈守)를 데리고 북경(北京)에 가서 석 노야(石老爺)[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의 구두(口頭)로 하는 말을 직접 듣고 다시 대관(大官)인 천사(天使)를 인도하여 오는데 3∼4개월을 넘지 않을 것이며 또 달마다 20일 간격으로 서신(書信)을 통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오늘까지 한 번도 서신을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비탄(飛彈)도 왕경에 오래 머무른 뒤에 평양에 머물면서 북경에는 가지도 못하고 세월만 보냈습니다. 나는 휘하의 말을 믿고 태합 전하(大閤殿下, 풍신수길)에게 아뢰고 비탄을 차출하여 휘하를 따라가게 하였는데 이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7건은 역관(譯官) 법석(法釋)을 차출하여 두 천사를 호송하여 왕경에 도달하는 날로 곧 돌려보낸다고 한 것은 대개 두 천사의 말이었습니다. 필시 귀청(貴廳)에 도달하였을 것인데 어찌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머물려 둡니까. 머물려 두더라도 비탄을 따르게 하는 것이 도리인데 다른 곳에 있게 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위의 7건은 다 휘하께서 약속을 어긴 것이고 나는 터럭끝 만큼도 약속을 어긴 것이 없는데, 누구를 허탄하다 하겠습니까. 이제 담야[[譚爺 : 지휘(指揮) 담종인(譚宗仁)]]가 송(宋) ·이(李) 두 노야(老爺)[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글을 가지고와서 태합 전하의 표문(表文)을 요구하고 또 대마(對馬)로 군사를 철수하라고 하니, 일마다 어지러운데 어느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르란 말입니까. 비록 날씨가 춥고 길이 멀기는 하나 휘하께서 빨리 와서 면대한다면, 전하와 필시 상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야를 내 영(營)에 잠시 머물려 두고 휘하를 기다리거니와, 휘하께서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설사 표문이 있다 하더라도 휘하 말고 따로 누구에게 드리겠습니까. 만사를 시작도 잘하고 끝도 잘 맺는 것이 일본(日本)의 도법(道法)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휘하께서 노고를 꺼리지 않으시는 것이 아마도 천하를 아끼는 일단(一端)일 것이니, 게을리 하지 마소서. 또 휘하께서 오시지 않고 천사도 또한 늦춘다면, 포포(浦浦)에 있는 제장이 어찌 부질없이 날만 보내겠습니까. 병마(兵馬)를 내보낼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때에 당해서 내가 약속을 어긴다고 말하지 마소서. 또 대마도로 군사를 철수하라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휘하께서 다시 천사를 인도하여 오신다면 명하지 않더라도 군사를 철수할 것인데, 어찌하여 천사를 인도하여 오지 않으시고 이렇게 명하십니까. 적어 보인 것은 하나하나가 연자매를 돌리는 소가 전철(前轍)을 밟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일은 거듭 말하지 마십시요. 나머지는 만나는 날로 기약하고 황공돈수(惶恐頓首)하며 이만 줄입니다. 11월 15일, 풍신 행장 배(拜)."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3일 계해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영호남의 민중을 안정시킬 것을 좌상에게 유시하기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윤두수의 장계를 보건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적도(賊徒)가 만연하여 살륙과 분탕을 기탄없이 자행한다.’고 했으니, 체포하는 계책을 한결같이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생업을 잃은 곤궁한 민중들이 서로 모여 도둑이 된 것이어서 실정이 가긍하니, 겸하여 안정시키는 뜻을 보이라는 것도 아울러 좌상에게 유시하여 선포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4일 갑신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충청도를 잘 단속하여 순무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충청도는 나라의 문호(門戶)이므로, 그 방비가 급한 것이 양남(兩南)에 버금갑니다. 충주로 말하면 상류(上流)의 중요한 곳이고 또 양령(兩嶺)[죽령(竹嶺) 조령(鳥嶺)] 이 모이는 곳이니 충주를 잃으면 장강(長江)의 험조(險阻)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또 병란이 일어난 뒤로 도내(道內)의 의병이라 일컫는 것이 무려 50여 진(陣)인데, 비록 적을 토벌하는 데에 별 공효는 없었으나 거느린 군사는 수효가 매우 많고 다 정예(精銳)하고 건장하여 관가의 징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또 승장(僧將) 홍정(弘靖)·성정(性靖)의 군사 각각 1천여 명이 도내에 흩어져 있는데, 다 통속(統屬)하는 사람이 없어서 각각 스스로 진퇴(進退)하는지라, 적을 막는 데에 보탬이 없을 뿐더러 궤산(潰散)함이 없지 않으니, 뜻밖의 염려가 많습니다.
지난번에 본사 당상(本司堂上) 심충겸(沈忠謙)이 무장(武將)으로 하여금 각도를 나누어 맡게 할 것을 청한 것은 그 뜻이 있으나, 당장 눈앞에는 이 책임을 감당할만한 자가 보이지 않아서 이제까지 차출하여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본도(本道)의 일은 날로 점점 근심스러워져 가니, 이일(李鎰)을 충청도 순변사(忠淸道巡邊使)로 차정(差定)하여, 간략하게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본도를 왕래하며 열읍(列邑)을 순력(巡歷)하면서 각진(各陣)의 의병을 점검해보고 용겁(勇怯)을 가려 대략 부오(部俉)를 나누고, 의병장 가운데에 재력(才力)과 담량(膽量)이 쓸 만한 자가 있으면 그대로 거느리게 하고 이내 그 이름을 아뢰고, 일찍이 군공(軍功)이 있는데도 상을 받지 못한 자도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고, 승군(僧軍)도 조금 더 단속을 가하여 준행(遵行)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의병·승군이 죄다 관군이 되어 조련(操鍊)할 수 있고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도내에 좀도둑이 많이 일어 그 수효가 날로 많아져서 낮에도 저자를 공격하여 약탈하면서도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합니다. 이것은 굶주린 백성이 먹을 것을 얻을 길이 없어서 이러할 것이니, 이 또한 널리 초무(招撫)하여 군오(軍伍)에 편입하여 살길을 열어 주고, 참으로 도둑이 되어 사람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자는 엄하게 잡아 없애서 그 싹을 끊도록 따로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시행케 하소서. 또 본도의 형세가 가장 긴요하니, 단양·제천·청풍(淸風)·영춘(永春) 네 고을의 군사는 오로지 죽령을 막고, 충주·연풍(延豊)·괴산·음성 군사는 조령을 맡아 막으며, 청주·보은 등 고을의 군사는 추풍령·적암(赤巖) 등을 막아 지키게 하되, 평시에 담력과 지략으로 이름난 사람을 장수로 하여 미리 조치하는데 지형이 좁고 막힌 데를 조사 강구하여 군사를 나누어 지켜 막게 하소서. 충청도만이 아니라 전라도도 똑같이 감사(監司) 및 방어사(防禦使) 이시언(李時言)에게 알려서 이대로 따라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6일 병술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통제사 이순신 이하 수사를 모두 추고하여 죄줄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원수(都元帥)의 장계를 보건대 ‘네댓 척이 출몰하는 적선(賊船)은 오히려 쫓아가 무찌를 수 있는데, 좌도(左道)·우도(右道)의 수사(水使)가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버려두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이하 수사를 모두 추고하여 죄주도록 명하소서.’ 하였습니다. 수군이 바다에 오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일이므로 조정(朝廷)이 접때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하여 예기(銳氣)를 기르도록 허가하였으나, 지난해 싸움에 이긴 것을 아뢴 뒤로는 한 번도 적을 무찌른 일이 없으므로, 원수가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장계한 대로 추고하여 칙려(飭勵)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