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항쟁’을 무참히 짓밟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암울한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 개인의 안일과 편안함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한 몸을 불 싸르고 장렬히 산화한 친구 최우혁을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활달하고 정의감에 불타올랐던 우혁이의 죽음은 우리를 한없이 숙연하게 만들고, 또한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비극적인 시대가 결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장엄한 과제를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이에 서울대학교 민주화의 길에 조성되어있는 열사의 추모수옆에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담은 추모비를 건립하여 열사를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자하니, 동문 동료 선후배 여러분들의 많은 참석과 격려부탁드립니다
일시 : 2013년 9월 7일 11시 장소 : 서울대 민주화의 길내 최우혁 추모수 앞 ( 인문대 5동에서 중앙도서관 가는 길 좌측에 위치) 점심식사 및 뒷풀이 : 서울대 교내 학군단과 교수회관 옆 솔밭식당 추모비도안 : 홍성담화백 추모비글 : 서양사 84학번 황인욱 추모비글씨 : 서양사 84학번 안혜경 문의 : 서양사 84학번 김치하
최우혁열사 약력 및 추모사업 경과
1) 약력
- 1966년 3월 서울에서 父 최봉규 母 강연임 슬하 3남 1녀중 막내로 출생
- 1984년 3월 서울대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입학
- 1984년 서울대내 '경제법학회' 가입
- 1984년 ~ 1986년 :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서서
전방입소 거부투쟁등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
- 1986년 5.3 인천시위, 5월17일 '헌제의회' 소집요구투쟁참가
-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민족해방제 기간중 이동수열사 분신 목격후 학내진입한
경찰에 맞서 싸우다 전치 10주의 부상을 당함
- 1986년 하반기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위해 현장활동시도등 노동현장으로 이전 준비
- 1987년 4월 28일 학생운동에 참가하다 구류를 살고 부상까지 당하는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강권에 의해 군입대 ( 육군20사단 60여단 )
- 군입대후 대학재학시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하여 보안대등에 의해 관찰대상으로 지목,
지속적인 관찰과 면담을 받음
- 보안대 관찰사실을 안 부대원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유격훈련중 심한 구타로
부상을 입음
- 1987년 9월 8일 민주화 활동에 대한 보안부대의 관찰, 공작 및 부대내의 구타등으로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하신 것으로 잠정결론지어졌으나
여전히 그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되지않은 의문의 상태로 남아있음.
- 2006년 7월 3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보상및 명예회복
결정
- 민주화활동에 대한 공헌과 희생에 대해 명예졸업장수여
( 2008년 8월 27일 인문대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부친(최봉규)이 대신 수령 )
2)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활동과 추모사업
1984년 서울대 인문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서울대내 써클중의 하나인 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 ,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던중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민족해방제 기간중 이동수열사 분신 목격후 학내진입한 경찰에 맞서 싸우다 최루탄에 맞아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10주의 부상을 당했으며,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위해 노동현장
활동을 하는 등 노동현장으로 이전 준비를 하던중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는 부모님의 강력한 권고에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육군 20사단 60여단에 소속된 그는 대학재학시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하여
보안대등에 의해 관찰대상으로 지목, 지속적인 관찰과 공작 및 부대내의 구타등으로 1987년 9월8일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하였음
- 열사의 죽음을 단순한 개인적 고민에 의한 분신자살로 규정지은 군수사기관의 발표에 대해
그 죽음이 민주화운동에 치열하게 투신하며 시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던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려는 군내부기관(보안대등)의 직접적이고
조직적인 공작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확신으로 동료들은 제대한 군동료들과
관계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만남과 조사를 시도하였으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등으로 의혹해소를
위한 결정적 증언확보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 이후 군수사기관, 국방부, 국회, 대통령등 관련기관에 지속적인 진상규명요청을 하면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유가족대책위원회''민주화운동정신계승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등과 연대하여 암울한 억압의 시대에 희생된
의문의죽음에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제도적장치를 위한 법제정 투쟁 및 올바른 법시행을
위한 지속적 활동들을 전개해 오던중
- 2004년 6월 14일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당초의 '진상규명불능'이라는 1기 위원회의
결론과는 달리 열사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보안대의 관찰, 공작 및 군내의 가혹행위등으로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하였으며, 향후 열사를 둘러싼 보안부대의
구체적 공작내용을 조사하여 열사의 죽음에 대한 보다 명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열사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으며
- 2006년 7월 3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보상및 명예회복
결정을 받았음
- 2008년 2월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열사의 민주화활동에 대한 공헌과 희생에 대해
졸업장 수여 권고로 2008년 8월 27일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부친(최봉규)이 대신 수령
- 2009년 11월17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4.19 혁명부터 유신 반독재투쟁, 6.10항쟁까지
첫댓글 비록 육신은 가셨지만 (고)최봉규선생과 (고)최우혁군의 숭고한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있을것입니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최봉규선생님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이제 편히쉬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