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신사참배 반대운동
(1) 신사참배, “덴노”(天皇,tenno)제 국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의해 “덴노”(天皇,tenno)제 국가를 확립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가속화 하였습니다. 덴노라는 명칭은 나라시대(奈良時代,710~784) 때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중국 천황에서 유래하여 종전의 “미카도”(御門) 대신에 사용하였습니다. 일본 전설에는 일본 왕실이 BC. 660년경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직계자손 덴노 진무(神武)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3세기 전후 왕실가문은 부족장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일본의 중앙과 서부지역에서 종주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왕실의 음모와 계략에 의해 덴노가 살해되는 수모도 있었지만 왕실제도는 2천년 동안 굳건하게 지속되었습니다. 12~19세기에는 귀족과 무신들에 의해 덴노의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지도자들은 왕실의 직접통치를 주장하면서 덴노를 민족통일의 상징으로 중앙집권적 민족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덴노에게 실질적인 정치적 권한과 책임은 없었지만 덴노에 대한 충성은 신성한 의무로 인식되었습니다. 일본 덴노는 신도와 신적가문의 최고 사제로서 신성 불가침의 영혼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1882년, 덴노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종교적 국가신도에서 종교적인 분야를 제거한 국가신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덴노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전국민을 일치통합하고 전국민적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계도관료로서 국가기구내에 설치하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신도행사를 중지하고 국가신도 시설과 국가신도종사자들의 활동도 제사집행에 한정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을 1889년, 제국헌헙에 의해 명문화하였습니다. 1890년, 교육칙어가 공포되었고, 1891년, 교육칙어 낭독,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중요행사로서 제도화 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이후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적 규칙화, 신직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국가통합이념으로서 신사제도가 확립되었습니다.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 정치원리, 국민통합이념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행사로 정착되었습니다. 1893년, 교파신도의 일파인 천리교(天理敎)가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또다른 교파인 신리교(神理敎)도 부산포교를 시작하여 1912년, 5,312명, 1916년, 8,553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재한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한국에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인들에게 덴노제 이념을 교육하는 기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공표하여 신사의 정비와 증대방안을 추진하였습니다. 1925년, 조선신사가 남산지역 20만평 규모로 확대하며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고,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가 위기에 봉착하자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 하면서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고 신사참배는 가장 중요한 실천사항으로 규정되었습니다. 1935년, 국민 사상통제를 시작하여 신사중심의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 등 월례행사가 강요되었습니다. 또한 한국민의 모든 가정에 신붕(神棚)을 설치하고 신궁의 부적이 강제로 배포되었습니다. 경찰내부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에 밀정조직을 설치하여 신사제도의 이행여부를 감시하였습니다.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단위로 524개가 신설 정비되었으며 1945년, 1,062개로 세포조직화 하였습니다. 신사참배가 강제화 하기 시작하자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단체들이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참배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박해와 위협과 체포와 강제구금이 시작되자 유교와 불교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굴복하였습니다. 그후 이단종파들을 중심으로 굴복하였고, 1938년 2월6일, 기독교 단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노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결의하여 9월20일, 학교에 무기한 휴교조치가 내려졌습니다. 평양신학교 학생운동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 집단적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평안남도의 주기철 목사,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 이주원 목사,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성도들의 집단적 반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노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노회를 결성하였으며, 참배거부자들과의 상호부조와 가정예배와 기도회 확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40년 2월, 지역별로 참배반대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불참운동자 연합회”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확산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저항세력에 대하여 참혹한 수준의 고통과 고문을 가하여 주기철 목사 등 수많은 교회 지도자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결국 1945년, 일본은 패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 신사참배와 기독교 박해 1919년, 3.1운동의 탄압에 비교할 수 없는 박해가 한국교회를 시험대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세속권력을 절대화 하고 인간을 신격화한 일제의 천황제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전례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조상제사문제가 기독교의 개인적인 신앙문제였다면 신사참배는 기독교 전체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조상제사를 엄격하게 거부하고 설날과 추석명절을 주저없이 철폐하였다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은 의외로 쉬웠을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을 다 죽인다 해도 신사참배는 단 한사람의 기독교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사다(Masada)의 교훈을 잊어서 않될 것입니다. AD.72년경,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진 후, 마지막 남은 유대인, 1천명은 사해 남동해안 마사다에서 2년간 투쟁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를 정복하는데 6개월조차 걸리지 않은 로마 기병대는 6일작전으로 마사다 점령계획을 세웠지만 1년동안 1만5천명의 군사들이 한 일 이라고는 그저 바윗돌을 수없이 날려 대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반년동안 서쪽 경사면에 토담을 쌓아 마사다를 점령했을 때, 유대인들은 모두 자살을 하여 단 한사람의 유대인도 죽이거나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죽을 용기조차 없었습니다. 성도와 개인에게 조상숭배는 죄라고 정죄하며 가문에서 추방되는 한이 있더라고 신앙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던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일본의 총칼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비겁함을 선택하였습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신사에 가서 참배를 드린후 예배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공립학교에 천황예배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일요일 행사실시와 일요일 교사시험, 일요일 자격시험 등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주일을 무력화 하기 위한 시도를 추진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였습니다. 한일합방이후 내선일치의 나라가 된 이후의 입장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심, 국가 지도자로서의 권한과 지위에 대한 순종은 도의일수 있으나 천황을 신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세대를 흐르면서 왜곡된 역사의식과 일본식 사고를 갖게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 서사 강요, 1938년, 육군지원병제도 도입, 1938년 3월, 조선어 사용금지, 1939년 7월, 국민징용령 시행, 1939년 11월, 일본식 성명개명 강요, 1943년 5월, 해군지원병제도실시, 1943년 8월, 징병령 포고 등 식민지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습니다. (3) 기독교 교육기관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1913년, 공립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이후 1920년, 미션스쿨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1920년 9월, 선교회는 조선총독부 총독에게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신앙함으로서 천황폐하에게 경례하고 얘배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거부한다”는 서신을 제출하였습니다. 1924년 10월, 충남 강경보통학교에서 기독교학생 26명이 집단결석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출석학생 40여명도 참배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신사참배를 유도하던 조선총독부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강압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을 주도로 하는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만주국경지대 항일의용군이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서 자극을 받은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일전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일본은 일본국내 기독교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1932년 9월, 죠치대학 학장 호프만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거부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일본군부는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신사참배를 강행하였습니다. 이로서 일본의 천주교와 종교계가 신사참배에 굴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한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32년 9월, 조선총독부는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 여행을 명령하였습니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와 기독교 학교는 대립을 계속하였습니다. 총회(장로교총회장, 남궁혁)는 교회학교는 신사 및 제식에 참배할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차재명, 유억겸, 마펫 선교사 등 3인의 교섭위원을 임명하고 총독부와 타협점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선교사와 총독부는 사이토총독이후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1931년, 우가키 총독은 세브란스병원 설립자 에비슨에게 일본 천황명의의 훈4등을 수여하였습니다. 또한 교육분야의 공헌으로 마펫은 천황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1935년 10월1일, 서울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강제신사참배를 시작으로 민족의 성지 평양에 까지 강도 높은 요구를 감행함으로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평양숭실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거부하는 교장은 직위를 박탈하고 학생은 퇴교조치를 하며 학교는 폐쇄될 것이라고 협박하였습니다. 1935년 12월13일, 북장로교선교회 실행위원장 홀드 크로프트(허대전), 솔터(소열도), 해리로즈(노해리), 매큔(윤산온) 교장은 교장사택에서 희의를 개최하고 신사참배거부를 결정하였습니다. 1936년 1월20일, 매큔 교장은 해임되었고, 숭의여자중학교 스눅 교장의 인가도 취소하였습니다. 1936년 9월21일, 평양숭실학교는 결국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원한경)는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의 후학을 통하여 선교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신사참배 반대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는 신사참배의 최경례가 종교행사가 아니라 국민의례와 같은 애국행사라는 이유로 학생들의 참배를 허용하였으며 이로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1918년과 1931년, 신사참배를 십계명1계명 위반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교황청과 한국천주교회는 1936년 5월25일, 돌연, 태도를 바꾸어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라 애국행사라고 매도하였습니다. 1937년 6월17일, 한국감리교 해외선교부 또한 신사가 애국적이며 비종교적이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이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할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 학교를 폐쇄하여 얻는 불이익보다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하였습니다. 1939년, 장로교 가운데 캐나다장로교선교회는 신사참배와 기독교미션스쿨의 생존에 관한 두가지 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해석하고 신사참배와 기독교육을 함께 지속해 나가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총무 풀톤(C.Darby Fulton)은 조상숭배사상을 포함하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신사 비종교성은 기만정책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일본의 언어, 문화, 종교에 정통한 풀톤은 1937년 2월2일 전주에서 개최한 남장로교선교회 총회에서 기독교 학교가 전폐되고 한국선교지 철수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1937년 9월6일, 남장로교선교회는 신사참배일에 전국 10개의 미션스쿨을 일제히 폐쇄하였습니다. 광주의 숭일남자중학교, 수피아여자중학교, 목포의 영흥남자중학교, 정명여자중학교,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군산영명학교 등 10개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바른 신앙정통을 이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중단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미국 남장로교선교회의 영향을 받은 북장로교선교회 역시 1937년 10월29일, 자진 폐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숭실전문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실중학교,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재령의 여신학교, 선천의 신성학교, 보성학교, 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 정신학교가 차례로 폐교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동안 참배라는 입장보다 신사앞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타협점을 찾았던 호주장로교 또한 1936년 2월, 특별위원회를 개최하여 참배거부를 결의하였습니다. 1938년, 보수주의신학 요람인 평양신학교가 폐쇄된후 1940년, 신학지남도 강제 폐간되었으며 선교사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학교를 떠났습니다. 일본유학파인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목사는 김대현 장로의 기부금 25만달러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39년 3월, 채필근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 설립을 주창하였습니다. 1939년, 제28회 총회(윤하영목사)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인가가 윤허되었으나 1940년 2월, 조선총독부가 평양신학교 설립인가를 하여 조선신학교는 1940년 3월, 승동교회 지하예배당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학원장에는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목사, 이사에 김영주, 함태영, 조희염, 한경직, 윤인구, 김관식, 오건영 목사, 교수에 윤인구, 김재준, 강사에 전필순, 이정로, 현제명, 김창제, 갈홍기, 야마구찌가 각각 임명되었고 후에 일본인 이사장이 새롭게 취임하여 친일신학교로서 확고한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평양신학교 역시 친일적인 학교로 변질 복교되었습니다. 1939년, 총회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개교하였습니다. 선교연합공의회와 남장로교해외선교회 등 해외선교부와 선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총회는 채필근 위원장을 새롭게 임명하며 개교를 강행하였습니다. 이문주, 이승길, 함태영, 윤하영, 김선환, 이영희, 김석창, 이인식, 이춘섭, 고한규, 김관식, 김형숙, 김만일, 이수현, 허덕화, 정찬유, 양윤묵, 허담, 장홍범, 정상인 등 13명을 신학교 이사에 임명하는 등 정통성을 상실한 친일 어용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유로 폐쇄되었던 신학교의 자긍심에 수치감을 주었습니다. 1940년 6월, 감리교신학교 격문에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이에 서대문경찰서 형사대는 신학교 남녀 기숙사를 급습하여 라사행, 전종옥을 비롯한 10여명을 체포하고 변홍규 교장을 구속하는 등 강경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신학교육이 불가능해진 감리교신학교 정춘수 감독은 1940년 10월3일, 신학교 무기휴교를 결정하고 1941년 3월, 본과 3~4학년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우편으로 발송하였습니다. 그러나 6월, “결전태세, 종교보국”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감리교신학교는 재개학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2월, 조선신학원(윤인구), 감리교신학교(김인영), 경성신학교(이명직) 등 3개 신학교 12명의 대표들은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통합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와해로 3개학교는 다시 환원되었지만 1944년 5월, 교육전시비상조치령이 공포된 후에는 신학교로서의 위상은 완전히 추락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평양 인근지역에서 중노동에 동원되는 등 온갖 치욕적인 일들에 충원되어졌습니다. 감리교신학교는 “황도정신교사양성소”로 변경되었고, 신구약과 묵시록, 바울서신 등이 학교 교과목에서 제외되고 신도학, 신도역사, 유교학, 불교학이 추가되는 등 신학교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일반학교들도 이와 같은 맥을 따라 조선총독부의 입맛에 맞는 학교로 전락했고 학교의 모든 자산은 일본 국고로 환수조치 되었습니다. 조선의 청년 332만명 가운데 남자는 광산과 공장과 군사시설에 동원되었고, 여자는 위안부 등 일본군인의 성노리개로 동원되는 등 일본의 잔악함과 패악함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4) 총회의 배도와 신사참배 거부운동 미션스쿨의 폐쇄 결정을 한 뉴욕선교부는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와 같은 미션스쿨 지속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30년만에 이룬 성과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미련이 문제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내 선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틈을 이용해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강제화를 가속화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8년 2월, 한국최대의 장로교단 평북노회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로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배도를 결정하였습니다. 제27회 총회 2주전, 평남경찰국장은 해외선교사들을 도경국장실로 불러 선교사들의 총회 관여를 금지하였습니다. 1938년 9월9일, 평양 서문외예배당에서 개최된 제27회 장로교 총회는 수백명의 일본경찰의 포위속에서 평남 경찰부장 입회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총회장내 좌우와 후면에는 고위무관경관 수십명이 일본도(日本刀)를 가지고 위협하는 자세로 서 있어서 그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반대자인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등은 이미 구금되어 있었고 만주4노회를 포함 전국 27개 노회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206명이 참석한 총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라는 긴급제안, 박임현 목사(평서노회)의 동의와 길인섭 목사(안주노회)의 재청, 총회장 홍택기 목사(평양노회)의 가부문답, 10명정도의 “예”와 침묵자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일본의 위협이 얼마나 두려웠던지 “아니면 아니라 하십시오”라는 부(不)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블레어(방위량) 선교사와 브루스 헌트 선교사 등이 총회결정에 반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였고, 권찬영을 비롯한 25명이 총회의 결의가 하나님의 율법과 장로회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경남노회)와 각 노회장 등 23명은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였습니다. 10월, 3,000명의 장로회 임회원은 시국대응 기독교장로회대회를 개최하고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과 일본기수와 시가행진, 조선신궁참배, 신도대회까지 개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총회는 1938년 7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를 탈퇴하고 일본주일학교연합회에 가입하였습니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선교사는 총회결의후 평남경찰부장에게 신사참배결정에 대한 축하인사를 나누고 신사참배를 정당화 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하였습니다. 캐나다선교회 맥길 선교사는 1938년 10월21일, 함남경찰부 고등과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신사참배 참여와 함께 교육기관의 지속적인 운영을 언급하였습니다. 1938년 10월5일, 제3차 감리교연회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내선일체 운동에까지 참여 결의를 함으로서 돌이킬수 없는 배도의 길을 향하였습니다. 1938년 12월12일,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등 기독교 각교파 대표들은 일본 이세신궁(가시하라신궁)에 참배하기 위해 총집결하였습니다. 1939년 9월, 제28회 장로교총회(윤하영목사)는 궁성요배로 식순을 시작해야 했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독하며 일제의 신민화 정책에 협력할 것을 선언한 다음에 총회를 개회할 수 있었습니다. 1942년 10월, 제31회 총회(김응균목사)는 총회에 앞서 평양신사에 참배한 후 평안도 고등경찰국장의 시국강연으로 총회를 개회하였으며 일제의 패권주의를 위한 국방헌금이 시행되었습니다. 1939년, “종교단체법”을 규정하여 각도에 한 개의 교회만을 허락하고, 새롭게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통해서 가미다나설치, 국민의례, 궁정요배, 신사참배, 국방헌금, 애국헌금, 항공기헌금, 위문대강요, 근로봉사, 성경과 찬송가가사 수정과 같은 죄악중의 패악이 교회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채필근목사는 “국민정신총동원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때에 이것을 이단이라고 말한다면 그사람이 바로 이단”이라는 가룟유다적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민족의 희망으로 불리웠던 윤치호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직에 실질적인 주도자였으며, 3.1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정춘수와 정인과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명명되었던 교회당의 철문과 철책과 교회종탑과 종이 전쟁의 도구로 전향하였고,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이 전쟁물자공급원으로서 사탄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돌이킬수 없는 극악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1942년, 복음교회 최태용 목사는 조선의 일본지배를 예찬하고 징병제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지지하며, 신을 섬기듯 일본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했다고 하여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신사참배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양노회 주기철,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평북 신의주 이기선 목사, 경남지방 한상동,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목사, 만주 헌트 선교사 등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50명의 교역자가 순교하고 2천명의 성도가 투옥되었으며 200여 교회가 강제 폐쇄조치를 당하였습니다. 김린희, 김형락, 박신근, 김화준, 고홍봉, 서정환, 장두희, 양대목, 조수옥, 이현속, 최덕지, 채정민, 안이숙, 이광록, 방계성, 오윤선 등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고초를 겪고 탄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는 기독교 유일신 원칙과 함께 타협점이 전혀없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바탕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 로버츠(나부열) 교장과 윌리엄 블레어(방위량) 재단 이사장과 북장로교선교회 실행위원 홀드크로프트, 로즈(노해리), 솔터와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 목사후보생 장홍련은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등 평북노회의 결정에 매우 반발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은 평양신학교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도한 한창선, 장홍련, 김양선, 안광국, 장윤성, 지형순, 조윤승, 장윤홍, 김인준 교수, 박형룡 교수를 체포하고 불구속 입건하였으며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구속하였습니다. 1939년 1월, 영변교회 “박관준” 장로는 보성여학교 교사 안이숙과 일본 고베신학교 재학생인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중앙정부 문부대신 “아라키야다” 척무장관을 면담해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일본 중의원 신종교법안 상정일, 박관준 장로가 단상에 올라가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며 그 분의 살아계심을 시험하라”고 선포하는 등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32일간 투옥되었습니다. 귀국한 후에도 신사참배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6년간의 고문과 탄압속에서 1945년 3월, 옥중 순교를 하였습니다. 박관준 장로는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신사참배 거부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본토 정부를 상대로 하는 반대운동이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이례적인 활동이었습니다.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가장 치열하게 반대한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1935년 12월, 평양신학교 사경회에서 설교한 “일사각오”는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보여준 순교자적 정신을 선포한 것으로 오늘날에 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938년 2월, 일본경찰에 의해 검속된 이래로 10월에 다시 체포되었고, 1939년 8월, 농우회 사건연루자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1940년 5월, 마지막으로 체포되어 1944년 4월21일, 옥중에서 순교하기 까지 그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지킨 위대한 별이었습니다. 1938년 6월, 일본기독교회대회의장 “도미타”가 평양집회에서 신사의 비종교론을 주창하며 신사참배를 옹호하였을 때 주기철 목사는 도미타 의장의 신앙관을 의심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뜻을 함께하며 줄곧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박형룡” 박사는 이 시기에 도미타 의장과 만남을 가진후로 그와 함께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박형룡 박사가 신사참배를 옹호하는 도미타를 왜 만났으며, 그후 왜 일본으로 떠났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도미타 의장의 회유가 있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전혀 배제할수 없지만 알려진 바로는 “표준성경주석”을 계속 간행하기 위하여 일본에 간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를 결정한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정부의 부탁을 받고 한국에 입국한 어용 기독교 도미타 의장과 함께 일본에 건너간 사실은 결코 기독지성인 다운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1940년 3월, 이기선, 김형락, 박의홈,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목사는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하지 말 것, 신사불참운동 확산으로 배도한 교회를 해체할 것, 가정예배를 통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등 신사참배 반대 3개항을 결의하였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남북을 오가며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8년 10월24일, 한상동 목사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였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현재의 노회를 해체하고, 신사참배를 한 목사의 수세를 금하며, 새로운 노회조직과 가정예배를 통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경건생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나병원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 또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손양원 목사는 1940년 10월22일, 여수경찰서에 체포된 후 해방될 때 까지 5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안식교의 최태현, 동아기독교의 전치규, 감리교의 이영한 목사는 대표적인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도한 남장로교선교회와 북장로교선교회가 한국선교지에서 철수한 후, 남아서 한국기독교를 지원하였던 선교사들은 독립선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해밀톤, 말스베리(마두원)와 1941년 10월,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헌트(한부선), 바이램(배의남) 선교사는 해방될 때 까지 운동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동참하였던 총회는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며 반대운동가들을 축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정치적인 이유로 제명하거나 자격정지하고 노회에서도 자격을 박탈하는 등 조선총독부와 결을 같이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최초에는 총칼이 두려워 시작한 신사참배 결의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심령이 무뎌지고 강퍅해져 감에 따라 자신들의 결정이 기독교를 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는 측면에서 정당화 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들의 화인맞은 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미나미는 제국회의 보고에서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40만명의 십자가 군병이 있다고 전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을 투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강하게 단결하였다고 보고함으로서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의 신앙심이 불신자들에게도 의심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신앙인들에게는 전천년주의 종말론과 성경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중심의 신앙은 고난과 시련의 역경을 이겨내야 할 한국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요구였습니다. 전천년주의 신앙은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되는 1935년을 기점으로 1945년, 해방의 순간까지 한국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기독교 박해의 칼날이 예리해 질수록 종말신앙에 대한 염원은 더욱 더 간절하게 밀려왔습니다. 1930년대 중반 한국교회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세워질 천년왕국의 갈망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살 소망까지 끊어진 순교자들을 지탱하는 신념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느냐, 국가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조상숭배사상을 금지한 한국교회가 천황숭배사상은 허가한다는 논리자체가 모순이며,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강행한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조상숭배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했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천황숭배에 있어서는 너무나 관대하였다는 점에서 배도의 위험성을 알수 있었습니다. 신사참배문제는 한국교회의 신앙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1900년대, 대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양적으로 팽창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민낯을 들여다 볼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는 중요한 정신운동이었습니다. 신사참배는 한국인에 대한 정신개조 차원에서 일본정부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핵심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50명이 순교하였고, 2천여명이 투옥되는 등 반대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되어 갔습니다. 순교의 순번을 정해 놓은 듯 차례로 이어지는 반대운동에 일본은 결국 패망의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신사참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부끄러운 행위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27회 총회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총회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반대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을 교단과 노회에서 제명하거나 축출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그들이 새롭게 총회의 지도자들이 되어 여전히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1945년 12월, 북한5도연합노회는 신사참배의 과오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한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1946년 6월, 남부총회는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는 불법적이었으며 이로서 이를 취소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결의에 대하여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없는 노회와 총회의 결의는 더욱더 불신의 벽을 높여 갔습니다. 1954년 4월, 제39회 총회는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제명과 처벌의 취소를 결의하였습니다. 또한 과거 총회가 저지른 배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5) 성결교단의 강제해산과 동아기독교의 박해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1943년, 교단이 해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북선지방의 이건과 남선지방의 배문준, 남덕규, 천세봉, 김규호, 손갑종, 박봉진, 김정호, 황경찬, 오영필, 이진우, 황성주, 김용은, 정재학, 최헌, 김창근, 김유연, 백신영, 일본의 김기삼, 만주의 장두원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철원교회 방봉진 목사, 함흥교회 김호 목사, 군산성결교회 정태희 장로, 신안주교회 김지봉 집사는 옥중에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성결교단의 신학지 “활천”이 228호를 마감으로 강제 폐간되었습니다. 성결교회당은 강제 매각을 당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남아있는 교인들이 다시는 교회당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공장용도로 변경하는 등 극악한 탄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결교단이 신사참배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왕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천황을 군주로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이 일제의 식민정책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며 세상의 심판자로서 재림하신다는 재림신앙은 일본천황의 존엄성과 일본 국체를 위반하는 내용으로 조선총독부를 매우 자극하였습니다. 1941년 8월6일, 강원도 금화교회의 한정우, 박윤상 집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재림신앙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성결교회원의 불경사건”으로 알려졌습니다. 1942년 6월26일, 일본성결교회 목사들을 체포하고1943년 4월7일, 일본 성결교회가 시온주의(Zionism)로 인하여 결국 강제 폐쇄조치되었습니다. 1943년 5월24일, 박봉진, 정재학, 최헌, 천세광 목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성결교회 지도자 300여명이 일시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였습니다. 경성신학교 교수들도 전원 체포되었고, 신학생 가운데 김은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신앙을 배도하지 않은 이유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함흥의 김호, 김하석 목사, 신안주교회 김지봉 집사도 순교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 평신도를 중심으로 개교회에서 예배를 중단하지 않자 1943년 9월, 조선총독부는 성결교회에 대하여 주일저녁, 삼일, 야간집회중지령을 선포하였고, 성결교회당을 군수공장, 가마니공장, 새끼공장, 가구공장, 경방단사무소 등으로 강제 징발해 갔습니다. 이러한 강제수탈과 체포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가 재림신앙과 예수왕의 뜻을 굽히지 않자 1943년 12월29일, 결국 성결교단과 교회 전체를 강제 해산하였습니다. 이명직 목사 등 7명의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일본경찰의 수탈적 위협과 타의적 신체의 위해를 통하여 성결교해산성명서에 날인하도록 하여 강제 서명되었습니다. 성결교 해산이후 석방된 성결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고문과 굶주림과 질병으로 순교자가 되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강제노역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1940년, 동아기독교는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반대하며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서 조선총독부의 감시속에 있었습니다. 말콤 펜윅이 오직 성경중심으로 성경대로만의 원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문화된 별도의 교회규약이 없었습니다. 원산교단총부는 조선총독부의 교단규약 제출요구로 15장36조에 이르는 규약을 만들어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원산사건으로 알려진 동아기독대 박해사건은 이종근 감목을 비롯하여 32명의 교단지도자를 강제 구속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2년 6월10일, 조선총독부는 신약전서와 복음찬미 등 6500권을 불온서적으로 압류하고 재림신앙, 천년왕국신앙 등 일본에 위협적인 사상에 대하여 이종근 감목, 전치규 안사, 김영관 목사를 차례로 구속하고 원산교회의 집회를 금지하였습니다. 9월, 전국의 동아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전원 검거령이 내려졌습니다. 9월4일, 충남 강경교회 김용해 목사를 시작으로 5일, 노재천 목사, 6일, 박기양, 신성균 목사, 이덕상 교사, 김주언, 이덕여 감로, 8일, 백남조, 문규석 목사, 정효군, 박병식, 박두하, 전병무 감로, 10일, 김해용, 문재무 감로, 11일, 방사현, 박성도, 김재형 목사, 한기훈 , 박성은, 한병학 감로, 위춘혁 교사, 박성홍, 강주수 등 32명의 동아기독교 지도자들이 원산구치소에 구금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치규 안사는 옥중 순교하였으며, 이종근 감목을 중심으로 노재천, 김영관, 백남조, 장석천, 박기양, 신성균, 박성도 등 8명은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어 굶주림과 추위와 득병과 구타와 고문을 감내하지 못하고 석방된 후에도 정신적, 육체적 장애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끝끝내 신앙을 지켜내었던 동아기독교는 1944년 5월10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였습니다. 전국 동아기독교회당은 강제 매각당하여 국방헌금에 납입되었고, 교회종각은 국가환수되었으며 강경교회는 신사부지로 조성하는 고난의 긴 여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1945년 2월, 출옥한 이종근 감목은 간도로 이주하여 교단재건의 날을 기대하였으며 1946년 2월, 교단재건작업의 순간까지 고통을 더욱더 감내해야만 하였습니다. 성결교단과 동아기독교는 신사참배 강요와 강압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교단이 해체되고 예배당 한 곳 없는 광야에 나오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역사하심은 이들이 새롭게 복원해 갈 교회의 지평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교단은 살아남았지만 치욕적인 역사를 갖게 되었고, 배도와 분열과 은폐의 늪에 빠진 장로교와 감리교는 영원토록 의심의 꼬리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면 천황은 멸망한다는 선언을 공포한 안식교 또한 강제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1941년 4월, 조선총독부는 안식교의 신학지 “교회지남”과 “시조”를 강제 폐간하였으며 안식교의 모든 집회에 일본경찰을 파견하여 설교내용을 일일히 감시하였습니다. 안식교는 “재림신앙”을 더욱더 강조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43년, 안식교 지도자 최태현, 오영섭, 이성이, 김성의, 김상칠, 박창욱, 김예준을 구속하고 12월27일, 안식교 교단을 강제 해산하였습니다. (6) 조선감리교혁신교단과 조선장로교단 일본의 최종목표는 천황 이외의 모든 종교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에 신사참배를 요구한 일본은 그 후에 한가지씩을 추가하며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무력화하였습니다. 명분조차 없는 기독교를 유지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철저한 불신감을 유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시작된 이러한 방침은 1941년, 치안유지법을 개정한 후 더욱더 가속화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미농선교회, 일본 자유기독교회, 안식교회, 성결교회, 성공회가 차례로 일본에서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➀ 일본기독교의 해체와 배도 1926년 9월, “아카시”에 의해 조직된 “여호와의 증인”은 일본의 패권주의를 부인하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과 조선침략전쟁이 하나님 앞에서 대범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결코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등 제국주의 사상에 깊이 빠진 일본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매우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1939년 6월, 월간 “기쁨의 소리”와 “순복음” 등 여호와의 증인의 인쇄물과 출판사가 압수당하고 1940년 8월, 전국교회는 강제 폐쇄당하였습니다. 1942년 6월, 성교회 41명, 장로교파 44명, 동양선교회 11명이 도쿄경시청에 의해 구속되었고 1943년에도 이러한 구속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계 지도자를 잃어버린 일본 기독교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가 북미선교회에 의해 발현하였다는 측면에서 선교회와 완전히 결별시키려는 정부의 치밀한 계획속에 이루어진 기독교 완전제거 정책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1939년 4월, 종교단체법을 공표한 일본 정부는 1941년 6월24일, 관변단체인 기독교연맹을 모태로 하는 “일본기독교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종교단체법은 교단과 목사가 천황제 국체 질서에 대한 부정적인 언행을 하든지, 천황에 대한 경배불충 할때에 즉시 교단인가 취소, 목사 자격박탈, 징역형이 주어졌습니다. 1941년 6월, 34개 일본내 교파단체가 참여한 일본 기독교단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초대 통리사에 “도미타”가 선출되었고,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 천황제 국체에 대한 충성과 선서로 진행된 기독교단 창립총회는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 여호와 신앙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 천황은 종교지도자 400명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천황과 대일본제국의 흥왕을 위해 전시 적극동원과 참여, 헌금과 기부독려를 주창하였습니다. 이러한 천황의 천명에 대하여 일본 기독교는 군수공장 자원봉사대를 설치 운영하고 군용기를 헌납하는 등 천황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1945년 5월, 일본 문부성 교학국장 곤도가 현인신인 천황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천황에 대한 불경이라고 하여 일본기독교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관을 삭제함으로서 완전한 배도의 종착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➁ 일본기독교에 흡수통합되는 한국기독교 일본기독교를 천황제 부속기관으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제국은 한국의 기독교를 통합재편하려는 시도를 추진하였습니다. 1932년, “일본조선 기독교 유지간친회”를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이후 1938년 5월8일, 일본조선 기독교 유지간친회가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 개편하는 등 일본의 종교정책이 실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1938년 6월21일, 한국주일학교연합회가 재미연합회에서 탈퇴하여 해체되었고, 27일, 서울YMCA가 세계YMCA를 탈퇴하고 “일본기독교청년회조선연합회”로 개편하였습니다. 1938년 10월18일, 정춘수 감독체제하의 감리교는 양주삼, 윤치호, 정춘수, 신흥우, 김영섭, 이윤영, 류형기 등 7명의 대표를 구성하여 일본 아베 요시토모 감독과 함께 한일감리교회의 단합을 결정하였습니다. 1940년 10월2일,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는 민족주의배격, 일본정신함양, 일본감리교회와의 통합 등 감리교회의 일본화를 위한 혁신안을 결의하였습니다. 정춘수 감독의 혁신안은 1941년 2월3일, 양주삼과 윤치호의 강력한 반대로 부결되었으나 3월1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불법적인 특별총회에서 내선일체를 한층 강화하는 차원으로 전격 강행하였습니다. 1941년 10월28일, 일본감리교회와 한국감리교회가 통합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제1회 교역자 전시대응강습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조선신궁참배와 궁성요배가 필수적인 행사로 진행된 기독교단 강습회는 찬송가 19곡을 삭제하고 9장과 47개를 부분삭제와 부분수정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적인 색채를 제외하였습니다. 1942년 10월14일, 정춘수 통리사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규칙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구약성경 전체와 신약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사용불허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12월2일, “변홍규” 통리사로 출범시킨 감리교 총회는 내세, 심판, 재림 사상을 미신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태사상을 복음서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외국선교사와 한국기독교와의 단절을 위해 1937년, 한국인들이 외국인 스파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1940년 10월2일, 한국감리교가 외국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감리교와 연합을 결정하자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였습니다. 감리교선교회와 조직한 연회를 해체함으로서 선교사들과의 관계단절을 가속화하였습니다. 1940년 11월10일, 한일병합된 조선장로교회도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서 강제자진철수를 종용하였습니다. 1941년 11월28일, 만주지역 성결교, 침례교, 감리교, 장로회, 조선기독교회등 5개 교파 또한 “만주조선기독교연맹”으로 단일조직되어 270개 장로교회와 36개의 감리교회, 16개의 침례교회(대한기독교), 12개의 성결교회(동양선교회), 12개의 조선기독교회 등 346개 교회가 통합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의 후신이라고 명명된 봉천신학교에는 박형룡박사가 교장으로 재직하였지만 자신의 신앙만 지킬수 있었을 뿐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떤 것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봉천신학교에는 박윤선 교수와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하던 대표적인 보수주의 학파들이 있었지만 극단적인 신신학도 함께 어우려져 있어서 만주의 영적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10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는 주한미국영사 마취(G.March)를 통하여 미국선교사의 완전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11월16일, 160명의 장로교 선교사와 49명의 자녀들이 메레포사 호를 타고 한국선교지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2월25일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1941년 2월20일, 미국 감리교선교본부도 선교사들의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하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귀국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1941년, “드 캠프 가미다나 처리사건“은 선교사들의 해외추방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 캠프 선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동경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1939년, 청주에 부임하여 2세대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1월15일, 드 캠프는 로메와 함께 선교구 관내 한국인 성도의 집에 심방을 하던 중 그 집에 가미다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철거하여 경찰에게 반납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은 한국인 각 가정마다 천조대신이라는 부적을 배포하며 가미다나를 만들고 그것에 매일 기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인 성도가정에서 철수한 가미다나에 대한 불경죄를 적용해 드캠프와 로메 선교사를 체포하여 대전형무소에 감금하고 징역2개월 집행유예 2년형을 확정하였습니다. 1941년 2월28일, ”세계평화기도일 사건“ 또한 반전기도라는 이유로 22명의 선교사들을 체포하고 13명을 국외추방이라는 선고로 강제 귀국시켰으며 나머지 체류인원에 대해서도 강제퇴거의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사실상 정지되었고 1942년 4월, 한국에 마지막까지 체류중이던 40명의 선교사들과 6월1일, 언더우드 선교사까지 한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던 시기, 한국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지시와 감시속에서 1942년 1월,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16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나님의 교회, 예수교회, 나사렛교회 등 6개교파 대표 80여명이 회집하여 합동계획안을 제출하였습니다. 9월7일, 도미타 일본기독교단 통리가 서울에서 교파대표 17명과 간담회를 개최한 후, 1943년 1월12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본기독교조선교구 등 5개교파가 “조선기독교 신교파합동각파대표자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감리교 통리사 변홍규를 중심으로 하는 감리교혁신파들이 주도하려던 통합작업은 부결되고 감리교 대표들의 퇴장으로 합동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후 1943년 5월, 장로교 전필순은 경성노회를 해산하고 감리교 통리사 변홍규와 갈홍기, 이동욱 등과 규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을 창설하였습니다. 통리사에 전필순, 총무국장 이동욱, 교육국장 윤인구, 재정국장 최거덕, 연성국장 갈홍기가 각각 취임하여 형식적인 합동교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성노회 김영주 부노회장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총독부 지시가 아닌 교회 자의적으로 설립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경성노회를 긴급소집하여 전필순 등 장로교회 5명을 제명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로서 전필순은 통리사에서 해임되어 혁신교단은 더 이상 존치가 불가능하였습니다. 1943년 5월6일, 채필근 목사를 중심으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채필근을 통리로 하고, 5월7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이에 이규갑, 조신일, 송정률, 김광우 등 감리교도 집단반발하며 1943년 7월2일,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하는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총회에서 선출된 김영섭 통리사가 인정을 받지 못해 바로 사임하고 10월3일, 임시총회에서 전진규 통리사를 선출하였으나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해 다시 퇴임하고 말았습니다. 1943년 10월14일, 다시 임시총회를 개최한 감리교단은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을 배격하고 4복음서만을 교리로 하는 헌법을 제출한 후 통리에 정춘수를 임명하였습니다. 정춘수 통리사 체제하의 감리교회는 신도세례식인 ”미소기하라이“가 거행되었고 감리교신학교 또한 일본신민화 교육수련장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각 교회 예배당내에는 ”신명봉안전“을 설치하고 교인의 가정에는 가미다나를 설치케 하여 대마봉대를 강요하였습니다. 급격한 교세 급감으로 교회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조선총독부는 비행기 헌납 특별헌금을 강요하여 정춘수 통리사는 지방교회를 통폐합하는 등 교회재산매각대금으로 비행기 헌납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비행기 헌납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를 비롯한 39개의 예배당이 매각되고 공주영명실수학교 등 학교유지재단 등이 불법매각되는 등 사적용도로 전용한 사례가 발각되기도 하였습니다. 힌국기독교는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선택한 배도를 넘어 조선총독부에 충성을 경쟁하며 신민화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1945년 2월, 일제의 신사지도자는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를 모두 한강에 집결시켜 집단적인 신사침례식인 미소기하라이를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조롱하고 배도한 지도자들을 수치스럽게 하여 참 신앙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실망하게 하고 좌절에 빠뜨리려는 음모였습니다. 8월1일에는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관여속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창립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초대 통리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부통리에 김응태, 총무국장에 송창근을 각각 임명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통하여 국방헌금, 신사참배, 동방요배, 구약성경 금지, 요한계시록 금지, 교회종각과 철제문 헌납, 2월의 모든 주일 휴무령을 지시하며 교회를 유린하고 농락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주도한 지도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향상되었던 한국기독교는 배도의 길을 넘어 배악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배도자들에 대해서 일본 군부는 한국기독교인들이 연합국을 응원하는 또다른 배신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려한 군부가 8월18일, 교회지도자 2만명 학살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3일전에 해방됨으로서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려 했다는 명분과 회개를 하였으니 면죄받았다는 것이 자신들의 자비라면 한국교회는 여전히 신사참배로부터 자유로울수 없을 것입니다. 조상숭배사상이 만연했을 때, 그것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게 대처하고 설날과 추석명절까지 철폐하는 경험을 하였다면 신사참배에 대한 배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숭배사상에 있어서도 완벽하지 못했고, 설날과 추석에 관하여서도 망설였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라는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상숭배사상으로부터 신앙을 지켜야 했던 개인적 신념처럼 신사참배 문제도 기독교 전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지켜내야 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명분은 요원하다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