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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예배자가 되기까지
마가복음 11:15~19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아일랜드 켈트(Celts)족의 전설 속에 나오는 ‘가시나무 새’는 평생 뾰족하고 긴 가시가 박힌 가시나무를 찾아다니다가 그런 가시나무를 찾아내면 그 가시나무에 돌진해서 가시에 박혀 죽어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가시나무 새가 들려줬던 아름다운 노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소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는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입니다. 이 말인즉 ‘값을 지불했다’, ‘완불했다’ 라는 뜻으로 죄인으로 영원한 저주와 사망에 이르게 될 모든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이어지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고, 복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드려 성도들을 살리신 중요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씀드리자면 영원한 예배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찾으시느니라’는 헬라어 ‘제테오’에서 파생된 ‘제테이 ζητεῖ’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능동형으로 ‘the father such is seeking’ ‘아버지가 이렇게 구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는 그때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은 성전 정화에 관한 내용으로 어떻게 예배자로서 세워지는지를 보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12절에서 14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찾지를 못하였을 때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나오고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자들 곧 제사에 필요한 짐승들을 거래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의 경내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짐이든지 내려놓게 되어 있었었습니다. 그러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을 피하고자 성전 뜰을 지름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전 안은 사람들과 짐승들로 떠들썩하고 짐승들이 배설한 오물로 인해서, 성전 마당은 많이 더러워졌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은 막 11:17에서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십니다. 성전의 본래 목적인 제사와 기도의 기능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편리함을 이루려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예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살펴보고 성령의 전으로 세워진 예배자의 모습과 영원한 예배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던 장소가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이 모리아 산에서 솔로몬 왕이 처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을 솔로몬 성전, 또는 제1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여 심각한 수준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인생의 채찍으로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였고, 성전은 파괴되면서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70년이 흘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하게 여시셔서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고 하였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다시금 성전을 회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성전은 로마의 헤롯 왕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기에 성전의 규모가 컸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성전, 또는 제3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성전의 기능은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한 예배가 살아있을 때는 성전이 제대로 보존되었지만 이를 어기고 우상 숭배에 빠지거나 진정성이 사라진 형식적으로 되었을 때 아무리 그럴듯한 성전이라도 파괴되고 쓸모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도 결국 AD 70년경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해 훼파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성전의 진정한 의미는 성령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헤롯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째로 건축된 성전 중 그 마지막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전(Temple 聖殿)이란 다른 이방 종교에서처럼 여러 예배 처소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 백성 중에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B.C. 19년경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그 기초 골격은 완성되었지만, 최종 완공된 것은 A.D. 63년경인 것으로 미뤄 보아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성전이 아직 미완성인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건축하게 된 배경이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 헤롯 왕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규모에 있어서 대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했던 솔로몬의 성전보다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는 각각 60규빗으로 27M, 현관의 높이는 100규빗 약 45M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현관 정면과 동편이 금으로 외관을 꾸며 화려하기가 다른 어떤 성전에 비할 바 아니었습니다. 성전 본체를 비롯하여 헤롯 성전 지대 전체의 총면적은 43,000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서 나갈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고 감동이 되어 예수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막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성전을 헐라는 신성모독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헐면 예수님은 사흘 동안에 다시 세우는 표적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되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에 세우겠다는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공들였고, 화려하고 웅장하였더라도 참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은 쓸모없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전은 의미도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막11: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오직 예배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른 어떤 목적이 있어서도 안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예배가 살아있는 참된 성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몸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깨트리신 것은 그 안에 있는 성령을 믿음의 성도에게 주시기 위한 철저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 20:22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나는 영원한 예배자가 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세상을 이기고 성공자로 우뚝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내게 온 우주를 통하여 모든 시간의 흐름으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이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요, 믿음의 완성은 예배로 귀결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배자가 되기 위한 성전은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이 되기 위하여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왜 성전 안에 동물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유월절이 되면 절기에 참여하는 모든 백성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대부분 동물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였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오는 경우, 동물을 데리고 오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동물을 끌고 왔더라도 동물을 이리저리 살펴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인정한 동물을 사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라는 말씀에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지적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책망하시리라’는 헬라어 ‘엘렝코 ἐλέγχω’로 ‘죄를 깨닫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계 3:19에서는 ‘꾸짖다’(rebuke)로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예배자로 세움을 맏는 것에 방해되는 요소를 지적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전에는 동물이 살아있는 것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산 제물’이라는 말씀은 ‘a living sacrifice’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절정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벽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드려서 사랑은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상의 믿음을 고백하는 예배란 나를 철저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네 생명을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각오로 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순교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 참 예배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성인이라면 매년 다섯 세겔(shekels)의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그 당시는 로마나 그리스 화폐가 주로 통용되던 시대였던 만큼 순례자들은 성전에 와서 유대 은화 반 세겔로 환전을 해서 성전 세를 내야 했습니다. 요 2:15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돈 바꾸는 환전상에게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많은 돈을 바꿔주고 수익을 올리는 데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예배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내 시간을 드리고 예물을 드렸으니 내게 무슨 복은 주실 것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바람직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예배자는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많이 누리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고 있으나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상상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나오다가 처음에는 “소를 드릴까? 아니 내 형편에 그것은 내게 무리야 그러면 양? 그러다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예물이 무슨 상관이 있어”하면서 비둘기를 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배자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신 부요함을 고백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른 예배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영어에 ‘pretend’ ‘~인 척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자가 어찌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가난한 체합니까?
저의 아버지는 늘 돈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협에서 전무의 지위로 계셨으면 제법 월급도 많았을텐데 “돈 전(錢) 없을 무(無)‘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대로 평생을 돈에 풍족함을 모르고 사셨습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언어도 말대로 되는데 하물며 예배를 드릴 때 진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과정에서 자신은 가난하고 돈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대로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고 하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안에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 드릴 제물인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와 성전세를 바꿔주는 환전 상인들이 성전에 발을 들여놓은 관계로 점차 제물을 파는 장사는 제사장이 관리하고, 환전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관리하면서 금전적 이해관계(利吉)가 성전을 두고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뒷전이고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와 돈 바꾸는 자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을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어 쫓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이틀 지난 후 성전에 나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보이신 행동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단히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모습입니까?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주관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에 핵심인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땅에 속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가치를 두게 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 형식에 치우쳐 마귀의 속살거림에 넘어가 참 예배자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경계하고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내 안에서 성령이 계심을 믿고 그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실현하여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우뚝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영원한 성공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크고 화려한 지위와 모든 풍부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실패자입니다.
성공이냐 실패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었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요 이를 이루기 위하여 소원을 두고 주님께 나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예배자로 세움 받아 영원한 성공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