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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최후 공세(5.6월 공세), 휴전조인 노력
제 1 절 국제정세의 변화와 휴전조짐
1. 국제정세의 변화
가. 국제적십자사의 부상포로 송환 촉구
쌍방간의 휴전, 특히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국제사회에서는 휴전에 대한 열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52. 12. 13일 국제적십자사 집행위원회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과 제네바 협약에 따른 부상포로의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15 : 2로 통과 시켰다.
나.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조치 해제
한편 미국은 선거공약에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고 선언했던 신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53. 2. 2일 국회에 보낸 연두교서에 "미 해군의 대만해협 봉쇄를 철회한다"고 결정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중공을 압박하였다. 이는 장개석 대만정부의 본토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별로 부담을 갖지 않고 모든 군사력을 한국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미국의 중립정책 포기의 천명으로 군사적 및 심리적으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었다.
다. 소련 스탈린의 사망과 그 영향
'53. 3. 5일 소련의 스탈린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스탈린의 사망은 국제사회와 한국 전쟁에 대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사망한 후 소련의 국내정세는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답습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1) '53. 3.19일,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부합되게 한국전쟁 종결
2) '53. 3.21일, 미국과 영국의 역할 인정 및 북한에 억류된 영국인 외교관과 선교사 석방교섭 시사
3)이 무렵 북한-소련 간 비밀전문에 북한 김일성도 "우리측이 한국전쟁의 종결과 평화달성에 관한 주도권을 잡을 때가 왔다"고 하여 소련 노선에 따를 것을 밝혔다.
2. 부상포로의 교환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 장군은 '52. 12. 13일에 있었던 국제적십자사의 결정에 따라 부상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을 '53. 2. 22일 공산군측에 전달했다.
이에 대해 공산군측은 '53. 3. 28일 부상포로 교환할 준비가 되었다고 화답하며 휴전협정 전반에 걸쳐 회담할 준비가 되었다고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냈다.
가. 공산군측의 계속되는 포로숫자 줄이기 공작
하지만 그후 속개된 상호 의견조율 과정에 공산군측은 포로 교환 숫자에 있어 믿기 어려운 내용을 내밀었다. 부상 포로가 600명으로 한국군 450, 기타 150명이 유엔군 포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군측은 지난번 포로교환 회담시 주고받은 숫자 12,000명(사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유엔군의 실수였다. 실제로는 120,000명 선이었다)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다고 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반면 공산군측은 유엔군의 5,800명 숫자(북한군 5,100, 중공군 700)에 만족감을 나타냈다.(이미 유엔군이 그들 포로를 132,000명이라 했다)
나. 부상포로 교환 협정 조인 / 교환 : '53. 4. 11일 / '53. 5. 3일
'53. 5. 3일을 기해 쌍방이 부상포로 교환을 끝냈을 때에 유엔군측은 6,670명(부한군 5,194, 중공군 1,030, 민간인 446)을 보내고, 공산군측은 684명(한국군 471,미군 149, 영국군 32, 기타 32)을 송환하였다.
이는 계속적으로 국제사회에 번지는 종전의 요구와 반전사상에 미 행정부가 여론에 밀려 결국 공산군측에 끌려가는 모습이었으며, 공산군측은 이런 국제사회의 여론을 등에 업고 최대한 시간을 벌고 많은 수의 포로를 교화하여 그들의 병적에 올려 숫자를 줄이는 공작이 성공하게 되었다.
3. 포로교환 협정과 반공포로 석방
가. 포로교환 협정
지금까지 휴전회담에서 접촉선, 즉 휴전선 문제는 이미 해결이 났다. 현 접촉선으로 하되 해상에서의 휴전선은 당시 유엔군이 재해. 재공권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동.서해안의 모든 도서(38 이북 도서 포함)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의 동서 연결선에서 서쪽은 최초 38선 이남의 도서는 유엔군의 관할을 인정하는 것(지금의 NLL)으로 결말이 났었다.
다만 문제는 포로 교환 문제로, 특히 본국송환거부 포로에 대한 처리문제로 지금까지 공산군측은 무조건 본국에 송환하라는 것이고, 유엔군측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처리해야 한다고 맞서다 결렬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반공포로는 원래 북한군이 아니고 국군이거나 남한 출신이 대부분으로 북한군일 수 없다고 하고, 유엔군이 여기에 동의해서는 안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북한군측에서 위장포로를 수용소에 내려보내 폭동을 일으키고, 내부 결속을 다지며 수용소 실태를 낱낱이 북측에 정보를 보내어 유엔군측을 곤욕스럽게 하고 있었다.
(1). 유엔군측의 주요 주장
가) 포로는 한국에서 수용해야 하며, 한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송환불원자의 이송은 고려될 수 없다
나) 송환불원자는 중립국가에 의해 정해진 기간(60일 또는 90일) 수용된다
다) 송환불원자에 강압을 가하지 않도록 보호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
라) 만일 송환불원자가 마음을 바구게 되면 중립국은 그를 신속히 송환한다
마) 송환불원자는 합의된 기간이 만료될 때에 중립국가가 마련한 절차에 따라 석방한다
(2) 공산군측의 주장
공산군측은 대부분 유엔군측의 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종전의 즉시 강제 송환"에서 물러나 "정전 후 즉시 송환을 원하는 송환자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를 중립국으로 이관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산군측은 한국내 포로수용소에 있는 132,000명의 포로중에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없다고 강박하고, 거부하는 포로가 있다면 이는 유엔군측에서 협박이나 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 인원에 대해서는 중립국으로 이송하여 당사자국에서 실질적인 면담을 통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며 그 기간을 60일 혹은 90일 동안 계속적으로 설득하여 송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공산군측은 '53. 4. 25일 다음과 같은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1) 휴전 협정 후 2개월 이내에 양측은 귀국을 희망하는 모든 포로를 송환한다
2) 그 익월에는 송환불원하는 모든 포로를 어느 중립국에 보내어 그 나라의 사법권에 인계한다
3) 그 다음 6개월의 기간을 정해서 소환불원자들의 소속국들은 그들과 대담 및 설득을 할 수 잇는 기회와 시설을 가져야 한다
4) 기간중 마음을 돌리는 포로는 바로 본국으로 송환한다
5) 6개월의 설득 기간 말에도 송환불원자는 휴전협정에서 마련한 정치회의에서 결정한다
6) 중립국에 체제하는 포로들의 모든 비용은 그 포로 소속국에서 부담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유엔군측의 핵심내용을 거부하는, 즉 송환불원 포로를 중립국으로 이송하는 문제와. 6개월의 설득기간. 또한 그 후에도 남는자는 정치회의에 붙인다는 것은 결국 모든 포로의 강제송환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에 중립국으로 거론되는 체코나 스웨덴, 스위스, 인도, 폴란드 등이 소련의 영향력에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특히 인도의 중립국 선정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게 반대의사를 명백히 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5월 13일 수정안을 공산군측에 전달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 하지만, 우리측 의견이 반영되어 중공군 포로 중 송환불원자는 중립국으로 이송하여 관리하되 한국인 포로(남북한포함)는 휴전 후에 스스로 안주할 곳을 결정할 자유를 보유한 채 일반인의 자격으로 석방되어야 한다는 것과 중립국의 포로 경비 병력을 오직 인도군만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산군측에서 유엔군측안이 협정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라며 반대하였고, 이에 대해 유엔군측은 더이상 양보는 없다며 개성 등 주요지역에 대한 공중폭격 등의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을 은연중 외부에 흘렸다. 하지만 이미 미 행정부는 포로 교환 협정이나 휴전 협정에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결국 '53. 6. 8일 쌍방은 대한민국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포로교환 협정에 서명하게 되고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싯점에 동시에 이행되도록 하였다.
합의 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송환거부 포로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 및 인도의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통제를 받되, 인도가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군대와 운영요원은 인도에 의해 제공된다
2)송환거부 포로는 한반도에 설정된 지점의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이관되어야 하며 그 기간은 60일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3)중립국위원회에서 포로수용소의 관리권이 장악되고 나면 억류국측 군대는 그곳에서 철수해야 하며 인도군이 통제한다
4)송환위원회는 90일 이내에 소속국이 포로들과 대면을 허용하고, 그 소속국의 대표는 포로 1천명당 7명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5)90일이 되면 소속국의 포로 대담은 종료되며 송환거부포로들은 정치회의에 이관되고 모든 되고 120일 이내에 정치회담에서 처리에 합의를 보지못하면 해당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 선언에 의하여 전쟁포로의 신분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된다
나.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열리기 전부터 분단이 되는 휴전의 반대와 특히 포로송환에 있어 반공포로는 휴전과 동시에 즉시 석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이나 친공 중립국으로 인정되는 국가는 송환위원회로 돼서는 안되며 따라서 인도는 절대안된다고 누누히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변화와 미소의 지도자의 바뀜 등에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협상은 진핸되고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국 '53. 6. 8일 포로교환협정이 공산군측 요구안에 근접한 안으로 서명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틀 전인 '53. 6. 6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휴전회담이 우리의 의사와는 반대로 진행됨에 다라 북쪽으로 가기를 반대하는 반공포로를 인도군의 심사에 맡겨서 교환한다고 하니 그렇게 놔둘 수 없다고 대응책을 강구하라 지시하였다.
당시 우리는 작전통제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어서 포로에 관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포로수용소 경계에 투입된 부대나 인력은 미 제8군사령관 통제하에 있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원용득 당시 육.해.공군 헌병 총사령관은 제네바 협약 중에 "포로 교환은 의무적이 아니다"라는 것과 "전쟁 포로는 그들을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규정에 착안하여, 설사 국군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다 해도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고 은밀하게 반공포로 석방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육군 헌병 경비부대가 실력으로 수용소를 접수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로 하고 '53. 6. 18일 24:00시를 기해 일제히 10개 반공 포로 수용송에서 석방을 하여 수용포로 35,698명중 27,388명이 자유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 제8군 경비대와 일시적 물리적 충돌이 있어 사망 61명, 부상 81명, 체포 931몀, 미탈출 7,236명이었다.
이에 공산진영보다 미국측이더 당혹스런 입장을 나타냈다. 자유진영의 많은 나라들이 고대하고 있는 휴전의 희망이 무너지는 것으로 판단, 미 대통령이 즉각적으로 유감을 나탄내고 미 제8군사령관은 하루빨리 탈출 포로들을 재 소집하여 수용소로 보내도록 우리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따라서 일부지역은 미군이 수색활동을 벌여 976명이 재수용되면서 한국군 경비는 모두 미군으로 대치되었다.
공산군측은 이 문제를 유엔군측이 한국측과 각본에 의한 것이라 몰아붙이며 자유인이 된 27,388명의 재수용을 요구하고 그렇지않으면 협정이 무효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은 전쟁 당사국으로서 주권행사이며, 인도주의적 행위라고 클라크 사령관에게 정중히 설득하고 전선의 부대지휘권과는 별개 임을 강조하였다.
4. 정부의 반휴전정책과 한미회담
가. 정부와 국민의 반휴전운동
이 무렵 우리정부는 일관되게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 사항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유엔군측에 요구하였다.
1) 한국에서의 모든 중공군 철수
2) 북한 공산군의 무장해제
3) 어떠한 제3세력도 국제적 회의에서 북한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규정
4) 대한민국의 주권과 영토 보존을 완전히 인정하고 보장
이에 대해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본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승만과 한국정부의 차후 행동에 관한 공동평가서를 제출하였다.
1) 휴전에 대해 한국정부는 확고히 반대하고, 통일을 강력히 소망한다
2) '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침략에 대한 기억, 종.소의 힘과 정치적 압력에 대한 인식, 장차의 피침시 미국의 원조가 없을 것이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3) 이대통령은 군사력을 독립적으로 운용하여 자신의 장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4) 이대통령은 미국이 전후 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이며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국 통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란 약속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보장한다면 무마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 대통령은 '53. 4월 초에 기자회견과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우리는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해야 하며, 만일 유엔군이 유엔군이 압록강 이남에 중공군의 잔류를 허용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부에서 철수하여 싸울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4월 27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방문하여 휴전협정문제를 협의할 때에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 문제에 결부하여 한.미방위협약 체결과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원조 보장, 그리고 평화가 확보될 때가지 해상봉쇄와 공중 방어의 계속 및 국군의 증강 등 안전보장 장치가 강구되어야 유엔군의 철수에 동의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미국은 유엔군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려 "휴전협정에 협력시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지원을 보장하겠다고 하엿으나 이대통령은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우리의운명은 우리가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사워 달라고 누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나는 지금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내가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나. 한 . 미 회담
한.미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을 대 미국은 한국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미 대통령은 로버트슨 차관보를 한국에 보내 클라크사령관 등과 이 대통령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대통령이 휴전안을 거부하면 유엔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의견에 합의를 보고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미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이대통령과 회담에 들어갔고, 이 대통령은 다음 세가지를 요구하였다.
1) 나머지 한국인 반공포로는 비무장지대로 이송,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
2) 정치회담에서도 시한을 90일로 한다
3) 미국은 한국에 경제 원조를 제공하고, 한국 육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데 지원을 계속한다
4)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즉각 보장한다
이에 대해 미국은 '53.6.27일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회신을 이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대부분 수용하는 것에서 상호방위조약은 상원의 인준이 필여하기에 대통령이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휴전협정 조인 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야 하며, 정치회담이 결렬될 시는 중공군이 북한에서 철수하지않는다면 전투를 재개하여 유엔군사령부가 전쟁을 승리로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미 협상자들은 당혹감을 나타내고 한국을 배제한 휴전협정을 추진할 것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공산군측에 회담재개를 하자고 응답하게 된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정치회담이 결렬되면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특사에게는 이런 권한이 없었다.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때가지 휴전협정 조인을 미루기를 원하였지만 로버트슨 특사는 최대한 노력하겠다고만 했다.
결국 몇번의 비공식 조율이 이루어지며 '53. 7. 12일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1) 휴전성립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협약을 체결한다고 약속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국무장관 덜레스가 조약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갖도록 상원 의원을 설득한다
2) 미국은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2억 달러의 제1회 원조를 공여한다. 그밖에 유엔군사령관은 휴전이 조인되는 즉시로 95만 달러에 해당하는 1,000만 파운드의 식료품을 한국민에게 공급한다
3) 90일이 경과하여도 휴전 후의 정치회담에서 어떤 구체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때는 한.미양국은 동 회담에서 철수하여 한국 통일에 대한 장차의 행동을 토의한다
4) 이미 계획된 대로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이에 적당한 해.공군을 증강한다
5)정치회담 개최 이전에 공동목표의 모든 국면을 토의하기 위해 고위 한미 회담을 개최한다.
로버트슨 특사 일행은 12일 서울을 떠나 귀국하였다.
제 2 절 최후의 군사작전
1. 전쟁 세 돌의 군사상황
'53년 초,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쌍방은 '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 후 전선정비를 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하되 자신들의 입장 관철을 위한 영향력의 행사,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와 새오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모색에 분분하였다.
공산군측은 5월부터 하계공세, 즉 휴전전 "최후의 공세"라 칭하는 대공세를 취하였다. 반면 유엔군은 전쟁의 조기종결을 도모하려는 목적에 군사작전의 확대를 스스로 억제함으로서 수세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측이 휴전회담을 지연하며 군사력을 줄곧 강화하자, 유엔군도 군사력으로 단호한 대응을 시도하여, 국군의 20개 사단 증강계획 추진과, 만주폭격을 포함한 확전계획을 검토하였다. 여기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교착상태를 타개할 방안으로 핵무기의 사용을 포함한 다각적인 압박전략을 신중히 모색하였으며, 결국 포로교환관련 회담에 응하게 하여 타협을 이루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가. 유엔군측의 압박전략
1953년도에 접어들어 유엔군사령관은 기존의 제한목표공격전략으로부터 확전전략으로의 전환과 항공압박작전의 확대를 추진하였다.
미국의 기존대한정책은 1951년 12월 20일에 채택된 NSC 118 / 2로서 "소련, 대만 또는 중공의 유엔의식과 관련하여 미국의 입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한국전쟁을 종결한다"는 목표하에 휴전은 한국정부가 38도선 이남까지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국군을 북한군의 재침을 억제할 수 있도록 증강하는 한편 외국군의 점진적 철수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이룩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만일 휴전협상에 실패할 경우 미국은 확전가능성에 대비하고 가용부대 범위내에서 군사작전 규모를 증대하며 북한으로 전진 제한사항을 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공 공군기지 폭격은 대통령 승인사항으로 유보하였으며, 중공 해상봉쇄도 재검토 대상으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52. 12. 2~5일 전선을 방문한 후에 "조그만 고지에 대한 소규모 공격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라고 말하고 "지상작전의 계속이 무익하다"라고 확신하고 새로운 방책의 선택과 적용을 원하였다.
따라서 '53. 2월부터 새 대한정책, 전쟁의 조기종격을 위한 방책의 강구노력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전선에서는 공산군의 전력이 현저하게 증강되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53. 2. 11일 전선의 위협 증가에 미 합동참모본부의 관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날은 테일러 중장이 밴풀리트 대장의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날이기도 하다.
특히 적이 중립지역인 개성을 군사 작전기지로 이용하여 서부전선의 병력과 장비, 군 지휘소 등이 위치하고 있고, 만주기지에 공군력이 증가됨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이에대한 대응방안을 합동참모본부와 협의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이미 수립되어 있는 작전계획 8-52의 실현가능성에 의문시 된다고 하며 확전조치를 통해 적으로하여금 유엔군의 휴전조건에 응하도록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전쟁을 종결짓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1)전선을 평양-원산선까지 추진하고
2)중공과 만주를 폭격하며
3)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를 실시하고
4)특히 핵무기 운용에 대한 제한사항 제거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무엇보다 가용부대로써 강력한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병력과 장비 및 군수품이 완편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병력증강과 관련하여 유엔군의 증원이 현실적으로 제한사항이 많으므로 국군의 20개 사단 증편안이 탄력을 받아 '53. 4. 22일에 이를 확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3. 5월 1일, 국군 제3군단이 재창설되고 6월 18일 제26. 제27사단의 창설로 전쟁 세 돌까지 8개 사단이 추가 창설되어 국군 3개 군단 18개 사단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공산군의 공군력 증가와 개성지역의 위협에 대한 대책으로는, 공군력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만주지역에 대한 공격 권한을 유엔군에 부여 할 수는 없었으며 적의 공중공격 능력이 유엔군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한반도 외의 적 공군기지 공격 필요시는 건의하여 승인받도록 통제하였다.
개성지역에 대해서는 공산군측이 분명히 개성 제한지역에서 1개 사단급 규모의 공세를 취할 경우 이를 안전협정의 위반으로 해석하고 반격할 권리를 갖도록 한다는데 합동참모부가 동의를 하였다.
특히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공군력의 증가와 개성지역의 성역 남용에 관심을 갖고 정책의 대안을 검토하게 되었다. '53. 3. 27일 미 합동참모부가 검토한 6개 방안 중에 A.B.C 3개안은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는 것이고 나머지 3개안은 중국 본토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방책 A : 적에 대한 압력은 본질적으로 현행 수준으로 하는 한편 한국군을 증강시킨다
방책 B : 지상작전의 확대를 고려하고 북한에 대한 공세적인 해 . 공군의 작전을 계속한다
방책 C : 지상작전으로 한반도 허리부분(평양 - 원산)에 방어선을 설치하되, 이와 더불어 공세적 해 . 공군작전을 계속한다
방책 D : 만주와 중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공격과 해상봉쇄를 포함하여 군사작전을 단계적으로 확대 강화한다. 지상작전도 강화환다.
방책 E : 방책 D에 추가하여 한반도의 허리부위로 지상작전을 전개한다
방책 F :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와 공중공격을 포함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하여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구축한다
이러한 방책은 '53. 5. 20일 합동참모부가 최종적으로 휴전 협정안이 실패할 경우 한국에서 공산 군사력을 파괴해야 하며, 극동에서의 또다른 침략능력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판단함으로써 결국 핵무기운용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특히 '53. 2. 11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아니젠하워 대통령은 개성에 대해 전술핵무기운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기 때문에 더 탄력을 받게 되었는데 실제 공산군측은 개성이 중립지대란 점을 악용하여 병력과 장비. 물자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소련 스탈린의 시망('53.3.5)과 언론보도를 통해 흘러나간 미국의 전쟁종결을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 검토되고 있다는 압박이 작용하여 결국 공산군으로 하여금 회담 테이블로 돌아오게 하여 하였고 유엔군은 계속하여 공군력으로 북한의 수풍댐 등 발전시설 뿐만 아니라 자산 저수지 등 주요 저수지마저 폭파하여 그 물이 군우리-순천-평양 간의 3개 철교를 휩슬어 병참선이 차단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항공압박 작전 등의 영향으로 적이 휴전협정에 조인을 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나. 중공군의 하계공세전략
중공군 '53. 1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제2차세계대전시 연합군 사령관이던 아이젠하워의 특성상 전쟁이 확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엔군이 지상전에서의 확대는 많은 출혈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에 해 . 공군력으로 동서해안에서의 상륙을 실시하고, 정면 공격과 배합하여 작전을 수행할 것으로 판단하여 '53년 최우선 과제로 해안방어, 특히 서해안의 방어를 강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들은 '53년 3월 말까지 4개군 제1,16,54군 제130사단과 개편한 제33사단 및 제138사단을 투입하고 1개 전차사단과 8개 포병연대 규모를 한반도로 이동시켜 대상륙 및 대공수 방어에 중점을 두고 해안지역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또한 5개 철도 공병사단과 5,000명의 철도요원을 투입하여 철동듸 건설과 수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들이 대상륙작전 준비를 완료한 '53년 4월의 전투력 규모는 총병력이 180만으로 그중 중공군이 19개 군 135만 명, 북한군이 6개 군단 45만명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5월에 들어서 하계공세를 취하게 되는데 전역의 목적이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휴전을 목전에 두고 유리한 전선의 조건을 갖추기 위한 다목적용으로 3단계로 구분하여 시행하게 된다.
제1단계는 금성돌출부 전선정리 목적으로 '53. 5.13~5.26까지 주로 전초전 성격으로 중공군에 의해 진행된다.
제2단계는 금성돌출부 우견부를 탈취할 목적으로 '53.5.27~6.23까지 중공군과 북한군 일부가 참여하여 진행되며 6월 공세였다.
제3단계는 금성돌출부 전지역에서 '53.6.24~7.27까지 철원돌출부를 확보하려 7월 최후공세를 벌이게 된다.
2. 중공군 최후공세 1단계 : 전초전('53. 5.13~5.26)
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
중공군의 최후 하계공세는 '53. 5~7월에 전개되지만 그들은 이미 3월부터 수세로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52년 동계에는 진지보강과 전투력 증강에 주력하다 '53. 3월 봄부터 양호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전초, 특히 서부전선의 유엔군 진지에 제한적이지만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1) 사미천 부근전투
'53. 3. 3일 중공군이 미 제2사단의 전초인 사미천 부근의 후크고지에 공격을 가하고 이어서 3월 하순에도 공격해 왔다. 3월 17일에는 중공군이 역시 미 제2사단이 방어중인 355고지 고왕산을 공격해왔으며 미 제9연대는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방어했다.
사미천 지역도
임진강
고장리 베티고지
마량산
고왕산 황산리(태풍전망대)
차탄천
사미천 나부리 연천 종자산
후크고지 한탄강
전곡
*117
베티고지 지역도
*대노리고지
*소노리고지(1개소대) 15연 12연
고장리 10중대
*닉키고지 *69(1개소대)
*텟시
고양대 *버들고지(1개소대)
*105 *베티고지 임진강
마량산(315) 10중대
영1사 = 국1사 1대대 2대대 임진강
(2)불모고지. 포크찹고지 부근 전투
'53. 3. 23일 중공군이 미 제7사단이 방어주인 역곡천 남안의 불모고지와 포크찹고지를 공격하여, 불모고지의 콜롬비아 대대(미 제2사단 배속)가 혈전으로 분전했으나 결국 미 제2사단의 사단 역습에도 피탈되고 말았다. 반면 포크찹고지의 미 제7-31-3대대는 적의 공격을 시한폭탄공격을 퍼부으며 역습의 재탈환하였다.
이곳 전투에서 불모고지 콜롬비아 대대는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이었으며, 미 제7사단은 30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중공군은 600~800명이 손실되었다.
효성산
내석교 역곡천 역곡천 백마고지
395
화살머리고지
역곡천 281
*290
티본고지
*265 *191 아스널 *324
*187 *에리고지 *야월산
*255 포크찹고지 천덕산
*275 불모고지 *347
(3) 판문점 북동 16km 지점의 베가스. 레노. 카슨 부근 전투
3월 26일, 중공군이 미 해병1-5연대가 방어중인 이곳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28일까지 피의 혈전이 역습에 재역습으로 이어지며 상호 자존심 대결을 벌여 결국 레노전초는 피탈되고 베가스와 카슨전초는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은 118명이 전사하고 801명이 부상했으며 실종 98명이었으며 중공군은 1,30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되었다.
평촌
개성 하리 사시리
*122
*철모고지 *89 매현리 (네바다 전초군)
*두매리고지 고랑포 사미천
*무명고지 임진강
*대덕산 237 *104
*124 *181
*229백학산
일월봉 임진강
***
고랑포
혼비고지 판문점 백학산 임진강
대성동마을
임진강 장파리
사천강 자유의 다리
문산 법원리
임진강
[영웅, 레클리스 일화], 몽고 말로서 이곳 전투에서 엄청난 보급물자를 고지로 날라준,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명예 하사진급
"레클리스" 이야기 (당시 몽고 말로써 신설동 경마장에서 미군 중위가 구입하여 네바다전초전투간 보급품 수송)
나. 중공군 최후공세 1단계 : 전초전('53. 5월전투)
(1) 개 요
중공군의 전초진지 공격은 3월 말 베가스고지 전투 후에 4월이 지나고 5월 중순경에 다시 시작되었다. 3월은 주로 서부전선 미 제1군단지역에서 탐색전을 실시하고, 5월은 주로 중부와 중동부전선 미 제9군단, 국군 제2군단, 미 제10군단 지역에 지향되었으며 특히 금성돌출부에 집중되었다.
금성돌출부란, 당시 전선이 한강하구-장단-판문점-수옥시-철원백마고지-김화저격능선-금성(남단)-교암산-관망산-949고지-내곡-황기(북)-남강-동해안의 감호를 연하는 선으로 중부전선 화천 북방선이 금성쪽으로 불거져 이 부분의 전선을 금성돌출부라 칭하였다. 이 돌출부는 김화저격능선-금성 남쪽 중치령. 회고개-교암산-지형능선-수도고지-949고지-973고지-883고지를 연하는 좌우로 40km폭으로 북으로 10km가 불거져 있었다.
이 전선은 아군이 1951년 추계공세 때에 확보한 후 1952년 적군의 추계공세 때도 격전을 치르며 고수한 지역이다. 이 돌출부중 금성 남단으로부터 883고지선은 국군 제2군단이, 금성 회고개 서측은 미 제9군단의 국군 제9사단 일부와 수도사단이 담당 중이었다.
국군 제2군단은 적의 하계공세가 시작될 무렵, 주접근로인 회고개-교암산(17번도로 축선)에는 제6사단, 지형능선-수도고지-북한강(103번 도로축선)에 제8사단, 그리고 그 동쪽 949-973-883고지에는 제5사단을 배치하고 제3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국군 제2군단의 좌익인 미 제9군단의 국군 수도사단은 회고개-하소리를, 제9사단은 그 서측 저격능선을 방어하였다.
국군 제2군단의 우익 동측에는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20사단이 병행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반면 금성돌출부의국군 제2군단과 수도사단 미 제20사단의 정면에는 중공군 제20병단 예하 제67군과 제60군이 배치되고' 국군 제9사단의 정면에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24군의 제72사단이 대치하고 제23군은 철원 서북 역곡천변에 전개하였다.
(2) 전투 경과
(가) 택사스고지(973고지 북 1.5km) 전투('53.5.12~17)
북한강
○중현 금강천
▶ 금강산댐
○달전리 금강천 금강천
북한강
금강천 금강천
북한강
북한강 금강천 ○주평 ● 송거리천
금강천
북한강 ▲572 ●노평 금강천
독수리고지
어운리 오봉능선
▲748피의고지 ▲689 택사스고지
북한강 ▲삼각봉 ▲두경봉 승리봉
북한강
▲949 ▲973
제8사=제5사 북한강
북한강 북한강
북한강 북한강 ▲883
구대
통선곡
제5사=제20사
황병동
후동
북한강
참고 지형도 : 금성천 부근의 결전('52.6~12월) 북한강
○가둔지
금성천 ▲533
▲화대봉560 ▲용학산867 ○중현 금강천
금성천 ▲옥녀봉
북한강 금강천
금성 ▲573 쌍령등 ▲742
▲A ▲B ▲724
▲373 돌고지 중방평 여호고개
▲407 ▲575 ▲747 북한강
★지형능선 ♧수도고지 ▲472
▲봉화산 금성천 ▲690 독수리고지 ▲770교암산 ▲612 ▲663 ▲관망산 ▲572
회고개 ▲748
상산리 북한강 피의고지
금성천 ▲548 ▲949
제6사 =수도사
▲529
금성천 북한강
죽동 금성천 금성천 수도사=제3사
북한강
▲482월봉산
[작전요약(백숏작전) ]
제2군이 '52.4.5일 화천에서 재창설되어 미 제9군단으로부터 금성-북한강 동안지역 인수하여 제6.수도.3사단을 배속받아 중동부 전선 방어중이었다. 당시 군단의 주저항선은 금성 남쪽 3KM 봉화산-교암산-663-북한강 동안 어운리-949-973-통선골로써 이미 '51. 추계공세 때 주로 국군이 제한공세작전에서 확보한 선이다.
당시 쌍방이 주로 진지강화와 정찰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나, 국군 제2군단장(백선엽 중장, 7월 23일부터는 유제흥 증장)이 6월 10일에 각 사단으로 하여금 적정탐지와 적진 파괴 및 교란을 목적으로 한 제한목표공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전투, 주로 전초진지 쟁탈전이 재연되었다. 이 작전에는 1개 대대규모를 초과하지 않는 부대를 운용하도록 하였다.(이 작전을 'BACK SHOT'작전이라 칭했다)
이 선제공격에 적의 하계 및 추계공세가 이어짐으로써 '52년 후반에는 군단 전역에 전초진지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수도사단 전초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제3사단의 949고지 북쪽 전초 독수리고지(572) 및 피의 고지(748), 그리고 제6사단의 정면이며 금성 동측 2KM 지점의 A, B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 되었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수도사단)
당시 적은 중공 제12군 에하 제35사단으로 그들 진지의 대부분은 동굴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적의 일부 전초가 지형능선 하단, 여호고개 남쪽 621고지까지 추진되어 아군의 방어에 전자는 가시와 같기도 하고 후자는 비수와 같기도 하였다.
이에 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52.7. 8일, 제1연대 1개 대대가 지형능선 하단을, 제26연대 1개 대대가 621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8월 초까지 교착상태가 계속 되었다.
[수도고지 전투]
그러던 중에 '52. 8월 5일에 적이 수도고지로 공격을 해와 663고지로 철수하게 된다. 그리하여 8.6일부터 8일까지 수도고지를 놓고 쟁탈전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사단장 이용문 준장(7월 9일부)은 수도고지가 주진지에 너무 근접한 점을 고려하여 제1연대 제2대대를 제26연대에 배속시켜 주진지를 강화하였으며, 제26연대장은 이 제1연대 제2대대를 역습부대로 투입하여 수도고지를 재탈환하였다.
다시 9월 6일에 적이 1개 대대로 수도고지를 공격해와 제26연대 제5중대는 제1소대장 홍창원 소위이하 전원이 전사하는 비운을 맞는다. 연대는 6차레에 걸쳐 탈환전을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제1연대가 탈환임무를 받고 9월 9일 제5, 6중대가 공군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하여 탈환하고 적의 수차례 역습을 물리치고 진지를 사수하였다.
[지형능선 전투]
지형능선은 690고지의 동쪽 끝자락이다. 당시 이곳은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방어중이었다. '52. 9월 6일 적이 제5중대가 배치된 지형능선과 제6중대가 배치된 575고지에 공격을 해와 수명의 생존자만 철수하면서 적에게 내주었다. 이에 연대는 6일 6차례의 역습에도 실패한다.
이에 9월 14일 제1연대가 투입되어 제9.10중대가 7차례의 치열한 역습으로 탈화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9월 20일까지 수차롕의 적의 역습을 격퇴하여 진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단은 9월 6일부터 2주간의 전투에서 적 사살 2,406명이었으며, 아군도 전사 455명. 부상 1,419명, 실종 61명이었다.
결국 수도사단은 그후 10월 6일부터 4일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애서 재격돌하여, 결국 8일, 기갑연대가 575고지를 상실한 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25일 주저항선을 국군 제8사단에 인계하면서 미 제8군 예비로 전환된다. 적도 많은 피해로 10월 제67군 예하사단으로 교대된다
[참전용사 증언]
●고은식(수도사-기갑연-통신중) : '52.3.25일 입대하여 교육 수료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수도고지에서 기갑연대 제1대대를 지원하여 중공군과 전투를 했으며,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목격하였다. 당시는 상황이 긴박하여 아군 전사자들을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김규칠(수도사-1-3-9-3소) : '51.12.4일 입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52.7월부터 수도고지전투에서 엄청난 피해가발생했다. 당시에 교암산 밑 금강산으로 가는 철길 밑 냇가에 나지막한 고지에서 전투를 했고 적 포탄에 아군피해가 컸고 전사자를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우리 사단은 '52.10월 말에 양구로 내려가 재편성하고 12월 말에 다시 화천북방에 들어가 휴전 때까지 오성산 우측에서 금성지구 전투를 했다.
●김두영(수도-1-2-6-3소) : '52.2.1일에 입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52. 여름에서 가을경으로 넘어가는 시깅에 수도고지-지형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다. 당시 고향인 광양 출신 윤재회.김이섭 등이 전사했음벼 중대 당 생존 인원이 1개 소대 미만일 정도로 피해가 컸다. 미처수습하지 못한 전사자가 많다
●김백순(수도-기갑연-1대대 작전과) : '49.7.24일에 입대했다. 기갑연대 작전과에 근무시 '52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게절ㅇ에 수도고지-지형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 참여한 중대는 1/2이상이 피해를 보았다고 들었다.
●♨박하주(수도-1-2-7-3소, 영현계원) : '52년.2.1일 입대하여 수도고지에서 전초기지 소대로 참여 중, 중공군이 1분 만에 3천발의 포탄을 퍼부어 대대원 생존 인원이 1/4도 안되었다. 당시는 군인뿐만 아니라 노무자들도 피해가 상당히 컸다. 당시 대대 영현계원으로 전사자가 맣아 사체중 일부를 절단하여 수습하지 못한 전사지 이름의 마대에 담아 군단으로 후송하기도 했으며, 당시 수습하지 못한 인원이 상당히 많았다.
●정용표(수도-기갑연-2-6중) : '52.2.1일에입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를 중공군과 하였으며, 특히 난초고지에서 소대 당 생존 인원이 5~6명밖에는 안되었고 정황상 시신을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한성택(수도-1-3-9-1소) : '47. 6월에 입대하였다. 기계-안강전투를 거쳐 '51.1.10일에 현지 임관하여 '52년도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간에 소대장으로 전투르르하던 중에 중대장이 전사하였으며, 본인 생각에 아군 전사자가 전쟁 기간중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다. 아직도 현지에 수습하지 못한 아군 전사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피해현황 : 아군 전사 971명, 부상 3,120명, 실종 167명이며 적군사살 2,286명. 추정사살 3083명. 포로 4명이다(국방부 전쟁사 10권 P444
▷금성 동측 A. B고지 전투(제6사)
수도사단이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를 치르고 있을 대, 좌인접 제6사단(백인엽 준장)은 제2연대가 6월 11~12일ㅇ에 중공군 제31사단 전초인 금성 동측 2.5KM A고지와 2KM B고지를 탈취하여 아군의 전초를 설치하였다. 이들 두 무명고지는 적으로서는 금성 동측방을 방호함은 물론 17번도로를 방어하고 차후 공격의 발판이 되는 중요 고지였다.
이후 적은 여러차례 역습을 가해왔으나 제6사단이 이 전초를 계속 확보하였다.
[000 헌병 참전용사님의 백사단장 용병술 술회]
☞전장의 함흥차사?
돌고지나 A.B고지일대는 바로 기차길도 있고 역도 있고 피아간에 접근이 용이한 곳이다. 그러니 말이 전초진지지 이곳에 올라가는 병사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에 차출되지 않으려 갖은 인맥을 동원하여 빠져나가려 했다. 이러다 보니 과연 그 전초진지까지 실제로 올라가는지 상부에서는 궁금해졌다.
[독전대 운용]
이래서 나온 것이 백사단장의 독전대 전술이다. 간부 한 명에 헌병요원으로 독전대를 편성하여 현장까지 인솔하고 올려 보낸 다음에는 뒤에서 아닌 말로 도망치는 병사를 잡는 역 매복을 서야 했다.
[독전대가 다 죽어 간다]
그러다 보니 중공군의 수색조에 노출되기 쉽상이라 독전대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독전대로 투입된 인원도 대다수가 죽어갔다.
☞우리 같이 살자
이러다 보니 결국은 존초에 올라가는 인원과 독전대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합작이 벌어지게 된다. 실제로 고지를 올라가지 않고 은폐엄폐가 가능한 곳에 서로 숨어 있다가 교대시 내려가던지, 아니면 적의 기습 공격시 쉽게 후퇴가 가능하여 살아 날 수가 있었다. 이러다 보니 전초가 자주 피탈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사단에서 순찰대를 편성하여 사단 참모부와 직할대 간부로 불시에 전초진지를 점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보병보다 더 많이 희생당한 헌병?
이렇게 제6사단이 '52.7월 초에 들어가 10월 말까지 이곳 교암산 북방 돌고지와 A.B고지 전초를 점령하던 시기에 우리 헌병이 전투병보다 더 많이 전사했다.
☞보이지 않는 비전투 손실, 자해사고!
사단장이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누가 언제 전초진지로 나가서 함흥차사가 될지 전전긍긍했다. 결국은 그 전투공황을 이기지 못한 인원들이, 병이고 간부고 피로에 지치면서 사실 보이지 않는 자애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후방 의무대로 실려오는 환자가 많았는데 보면 안다.
이래서 결국 전투현장에서 자애 사고자는 현장총살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발가락이나 손가락 하나 정도 다치는 것은 후방에서 빨간 약 바르고 압박붕대로 감고 다시 전투현장으로 올려 보내게 된다. 사단장의 엄명이다.
사실 나도 독전대에 편성하여 올라간 적이 있으며 결국 살아서 내려왔다.
▷독수리고지 및 피의 고지 전투(제3사단)
수도사단의 우익 제3사단은 북한강 동안의 어운리-송정-통선골까지의 전선을 방어하며, 주저항선은 440-949-973-780고지군을 연하는 선을 형성하고, 그 전방에 많은 전초를 운용하고 있었다.
당시 제3사단은 '51. 10.19~11.23까지 가칠봉 전방 1052고지 및 1,211고지 공격을 하다 양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한 후 '52. 1. 7일 미 제9군단 지역으로 들어가 국군 제6사단의 금성천 우측지역 인수한다. 그러나 후방에서 공비토벌작전 중이던 백야전사가 전방으로 추진되어 들어와 와 제2군단('52. 4. 5일)으로 승격하면서 제2군단의 우익 사단이 되었다.
북한강 동안 방어 부대인 제3사단 22연대는 949고지에 대한 적의 공격을 조기에 경고하기 위하여 어운리 572고지(독수리고지)와 949고지 북족 748고지(피의 고지)까지 전초를 추진 배치하였다.
사단과 대치 중인 적은 제68군 제203사단으로 그들은 949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각종 포 77문을 이 일대로 집중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52. 9. 28일 야간에 집중 공격을 실시하여, 결국 양 고지에서 29일 철수하게 된다.
이에 사단장 (백남권 준장)은 제18연대를 투입하여 바로 29일 05:00시에 피의 고지에 역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역습에도 적은 물러나지 않았다. 10월 2일 다시 제22연대 제1대대가 제3대대의 진출선을 초월하여, 적의 자동화기 거점을 수류탄으로 제압하면서 돌격하여 19:15분에 주봉을 점령하게 된다. 그 즉시 역습부대인 제18연대 제1대대를 추입하여 적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3사단은 5일간의 전초진지 쟁탈전에서 전사 109명, 부상 384명의 손싥과 적 사살 664명, 추정사살 161명의 전과를 달성하였다. 다만 572고지의 피탈은 휴전화담시 휴전선의 설정을 고려한다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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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의 '1년 춘계 공세시(4월,5월) 주로 소양강 남안, 신남지역에서~풍암리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원통을 거쳐 서화리로 진격한 후 '51. 7월 19일, 하계 제한작전간 개머리고개 전투후 국군 제8사단에 인계후 8월 18일부터는 수리봉, 피의 능선전투를 참여한다. '51.9.4~10.14까지 가칠봉 전투후 '51. 10.21일에 국군 제3사단에 지역을 인계하고 부대훈련을 하였다.
'52. 1. 11일, 거진으로 이동하여 제11사단으로부터 국군 제1군단 우측방을 인수하여 '52.7.10~11.10까지 동해안 351고지전투 후, '53.1.29일에 제15사단에 인계 후 간성에서 정비 및 부대훈련을 실시하고 '53. 4. 10일 김화로 이동하여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다.
중공군은 '53. 5. 12일 제180사단이 국군 제5사단 전초 689고지(택사스고지)공격을 시작으로 5월 13일부터 금성돌출부 정면의 전초진지에 공격을 중대급 소규모로 개시하여 휴전회담을 지원하는 한편 본공세의 기도를 은폐하는데 있었다.
이 택사스고지는 국군 제5사단이 '53. 5. 12~17일 어간에 중공군 제180사단의 공격을 받아 결국 방어하였는데, 제5사단이 이 지역을 인수하기 전인 '53. 4.2~12일에도 국군 제3-18연대가 1개 소대로 전초를 운용 중에 있었는데 이때도 중공군 제181사단 제542연대의 공격을 받아 8번이나 쟁탈전을 반복하며 결국 지키어 냈었다.
(나) 오봉능선 전투(973고지 북 1.5km, '53. 5.12~17)
택사스고지와 같은 시기에[ 제5사단은 973고지 북쪽 1.5km 위치에 있는 오봉능선에서도 중공군 180사단의 공격을 받아 전초진지를 방어하였다.
(다) 삼각봉 전투(949고지 서북 4km, '53. 5.13~15)
국군 제5사단이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라) 마제형고지 전투(북한강 서안, '53. 5.13~17)
북한강 서안 과호리 271고지는 국군 제8사단의 전초진지다. 국군 제8사단은 '51. 2월 초에 횡성지구에서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 사단이 재편성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대구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후에 '51. 4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후에 7월 20일 원통으로 복귀하여, '51. 8.8~9.18일까지 노전평지구 전투에 참가한다.
사단은 854고지까지 진출한 후, '51.9.28일에 미 해병제1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9월 28일 백석산지역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7사단과 교대 투입되어 백석산을 탈환하고 이어서 1090고지(크리스마스고지)를 확보한다. 다시 국군 제7사단에게 11월 20일,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다시 호남지구로 내려가 백야사에 배속되어 호남지구 공비 토벌작전을 수행한 후에 '52. 2월 7일 부평리로 이동하여 부대 교육훈련을 받고 '52. 3.24일 다시 서화지구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812. 854지역을인수하여 9월 28일까지 전투를 실시하여 주저항선을 지켜냈다.
'52. 9. 25일 미 제4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52.9.28일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훈련을 마치고 10월 19일부터 미 제9군단에서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되어 10월 25일부터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수도고지, 지형능선 등 주저항선을 방어했다.
이렇게 하여 북한강 서안에 들어온 제8사단은 '53.5.13~17일까지 과호리지역 271고지 마제형진지를 중공군 제201사단이 공격하여 결국 피탈되게 된다.
(마) 샛별고지 전투('53.5.14~16, 470고지, 금성서남 7km 직목동) / 회고개 전투('53.5.23~24)
북한강
평강 회고개 금성천
● 샛별고지 470
오성산 월봉리
저격능선 금성천 북한강
수도사단이 '53. 5.14~16일까지 중공군 제199사단의 공격을 물리친데 이어 다시 5.23~24일에 회고개지역에서 중공군 제199사단의 공격을 격퇴했다.
수도사단은 '49. 6 . 20일 독립 제17연대, 제2연대, 기갑연대를 기간으로 서울 용산에서 창설되어 '49. 10월에 수도경비사령부 산하에 옹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임무를 수행하다 '50. 3 . 1일 육본직할로 예속변경 후 수도 경비만을 전담했다
그 당시에 제18연대는 '48. 11. 20일 포항에서 창설되었으며, 전쟁전에 서울로 올라와 옹진지구에 가있는 제17연대와 교대로 옹진지구 방어에 참여하다 직전에 서울로 들어오고 제17연대가 옹진지역을 방어하는 가운데 전쟁이 발발했다.
사단은 전쟁 발발시 의정부지구 전투와 한강 및 시흥지구 방어전투에 이어 평택-진천(봉화산-문안산 잣고개 전투, '50. 7월 초)-청주 고은리전투-보은-안동전투(제8사단 좌익)를 거쳐 안강.기계전투('50.8.9~9.20)후 북진작전간 영양.춘양.영월.평창.서림.양양으로 진출하여, 10. 1일 제3사단과 같이 38선을 돌파 양양-간성-양구-화천-회양-신고산-안변을 거쳐 10.10일 원산에 입성했다.
수도사단은 10.1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영흥-함흥-성진-길주-청진-부령까지 진출후 중공군 개입으로 12.1~12.17일 후퇴하여 흥남으로 철수, 17일 흥남에서 배로 묵호항에 해상상륙 후 양양으로 진출, 제9사단의 서림-양양선을 방어한다
'50. 12. 26일 제26연대(당시 3사단 소속)를 배속받고, 당시 18연대는 3사단따라 흥남-구룡포로 철수하여 12월 10일 제3사단으로 배속되어 홍천고개 전투에('50.12.14~28)에 참가하게 된다.
제26연대는 '50.8.24일부터 제3사단에 편성되어 포항지구 전투에 참여하다 '50.9.2일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안강지구 전투를, 다시 9월 10일부터는 다시 제3사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형산강 돌파작전과 흥해-인구리 진격작전, 원산탈환-함흥진격작전을 벌인다. '50. 11. 9일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수동-장진호진격작전, 다시 11월 25일~12.5일까지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단천-풍산-혜산잔-북청-신흥리전투를, 다시 12월 7일 국군 제3사단으로 청진-백암철수작전을 하고 12월 10일, 함흥에서 묵호로 수도사단과 들어와 수도사단에 배속된다.
(바) 저격능선 전투('53. 5. 16~19)
제9사단이 중공군 제72사단과 전투를 벌여 격퇴하게 된다. 저격능선은 국군 제2사단이 '52. 10. 14~11. 24까지 전투를 실시하고 이어서 국군 제9사단이 인수받아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군 제2사단은 '48. 5. 12일 5연대(대전),16연대(청주),25연대(온양)를 예속받아 대전에서 창설되어초기전투시 의정부 일대에 축차 진지투입으로 전투력발휘를 제대로 못하엿다. 이후 7월 24일 충북 황간에서 미 제25-27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게하고 사단이 해체되었다. 그러다 11월 7일 서울에서 제17. 31. 32연대로 재창설되어 포천-평강 지구의 후방지역 차단작전에 참여
중공군 신정공세시 '52.1.3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청평~예천으로 이동, 일월산.보현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 '51. 2.13일 육본직할로 들어왔으며, '51. 5. 2일 양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작전지역을 인수(노네임선)
중공군 5월공세 이후에 '51. 5월 중순이후 청계산-백운산-광덕산-대성산-삼천봉으로 진격, '51. 8.2~9.3까지 734고지전투와 10월부터는 492고지 전투를 벌인 후에, '52. 3. 30일 작전지역을 미 제40사단에 넘기고 사창리로 들어와 6월 15일까지 부대훈련 및 정비를 마치고 다시 6월 28일 전선으로 복귀하여 미 제40사단 지역을 인수한다.(저격능선 좌측에 삼각고지에는 미 제7사단이 방어 및 공격중, 10월 25일에 이 삼각고지 지역을 국군 제2사단이 접수하였으며, 국군 제9-30연대가 31일 배속해 왔다)
제2사단은 '52. 10월14~11월 24일까지 저격능선 및 삼각고지 전투 후에 국군 제9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미 제9군단의 예비가 되어 교육훈련 및 부대정비를 마친후 '52. 12월 27일 철원지구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이 방어중인 백마고지 및 화살머리고지 일대를 인수받아 휴전때까지 전투를 했다.
[저격능선 / 삼각고지 전투사] ※전투일자 순 기록
가. '51.10월에는 미 제25사단이 중공군 제72사단과 전투
나.삼각고지 전투는 '52.10.14~10.25까지 미 제7사단(배속:에디오피아대대)이 중공군 45사단과 전투
다. 삼각고지 및 저격능선 전투 : '52.10.14~1.25까지 국군 제2사단 (배속 국군 제9-30연대)이 중공군 제15군(제29.45.31.34사)과 전투
라.저격능선 전투 : '53.5.16~5.19까지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72사단과 전투
'52. 후반기 전선 상황('52.9.1일부)
중공군 1개군(†) 중공군1개군( †) 중공군1개군( †) 북한군 1개군(†)
중공군 3개군 철원 평강 저격능선 금성 지형능선/수도고지 .949 X-고지 / 812/854고지 월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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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1기.영1사.미3.미2 ‡ 미3.미7.국2 ‡ 국6. 수도. 국3 ‡ 국7. 미25. 국8 국11. 국5
미1군단 미9군단 국2군단 미10군단 국1군단
※국1사:연천 군단예 ※미40 가평 군단예 ※미45 양구 군단예
'53. 중공군 최후 공세('53.6.1일부)
중공군 4개군 철원 평강 저격능선. 회고개 금성 지형 및 X-고지/ 812/854고지 월비산
수도고지.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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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전.영1.미25.미1기.국1.미7 ‡ 국2. 미3. 국9. 국수도 ‡ 국6. 국8. 국5 ‡ 국20. 미45.미40.국12 ‡국11. 국15
미1군단 미9군단 국2군단 미10군단 국1군단
※국1사:연천 군단예 ※미2 가평 군단예 ※국3사 군단예 ※국7 군단예→국2군단지역에 투입
(사)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참전용사님 증언으로 대치
●유인수(제6-19-3-9중) : '51. 11월 경에 949고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중공군과 했다. 당시 소대원 중에 본인만 생존하였고 제19연대가 전멸하였으며 본인도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뒤에 포로 교환시 귀환하였다
●이경도. 이동석(제6-2-1-3중) ; 휴전 막바지에 교암산이역에서 국군과 노무자들이 많이 전사했다. 전쟁 종료 후에 중대원 중 생존자가 몇 명 않되었다.( 이 외에도 6사단 전 연대에서 교암산지구 지구 전투에 대해 많은 증언이 있다.)
[제6사단 제19연대 진격상황]
'51. 5월 용문산전투('5.20~28)에서 승리한 후 북진하여 가평 북배산.지암리 신포리경유 파로호 신화를 창출한다. '51. 6월 8일부터는 취봉-수리봉-백암산 전투와 10월에는 금성천-교암산 전투를 수행한다. '51.10. 31일 교암산을 미 제24사단에 인계후 11월 5일 등대리에서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지역을 인수하여 949고지 전투를 한다.
'52. 1월 초에 미 제9군단에서 배속 해제 되어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 인계 후 양구로 이동항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3월에 다시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40사단 진지를 인수하여 765-교암산지역을 방어한다.그러다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된다.
'53. 3월 에 575고지, A / B 고지 전초진지 쟁탈전 등 금성천 부근 전투를 시작으로 계속하여 금성돌출부 지역 방어를 하다 중공군의 7월 공세로 교암산으로부터 금성천 남안으로 지연전을 실시하며 후퇴하고 제11사단이 7월 15일 초월 공격을 들어온다.
.
●김종솔(제8-본부중대 부관부) : '53. 2월에 입대하여 제8사단 부관부에 갔다. 6월부터 노무자 지원이 없어서 사단 본부대 및 신병 중 40명을 차출하여 수도고지-지형능선 쟁탈전에 포탄 운반을 지원나갔다가 적 포탄으로 전멸을 당했다. 이후에도 40여 명식 지원나갔는데 약 절반인 20여 명만 생존해 돌아 왔다.
●김용덕(제6-2-1-1-2소) : 본인은 '51. 10월에 입대하였다. 금화역 앞 돌고지 방어중 식사보급 중이던 군인과 노무지들이 적 박격포 공격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군인은 고지에서 노무자들은 골짜기에서 많이 전사했다.
●연봉희(제6-2-1-2-1소) : '51. 7. 13일에 입대하였다. '52. 6월 12일 오전 8시경 금성지구 열차 터널 옆 돌고지 8부 능선에서 적과 전투 중 중대원이ㅐ87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고 후송된 뒤에 들엇다. 본인은 이전투에서 부상당하여 명예 전역하였다.
●황덕관(제6-2-1-3-3소대장) : '52.7월에 갑종간부 28기로 임관하여 제6사단에 배치되었다. 당시 소대장으로 휴전 직전에 금성지구 교암산 인근 전투에서 남쪽이 뾰족한 돌고지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금화역 앞 돌고지에서 야간 전투중 생존 인원이1/3에 불과했다. 소대원 중에는 부상자를 후송 중에 적 포탄에 3명이 전사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나 수습할 여건이 안되어 철수하였다.
●박재춘(제8-21-3-9-3소대장) :본인은 '51.12월 1일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8사단에 배치되엇다. 특히 휴전 작전에 수도고지 우측에 능선 663고지에서 사단 병력의 피해가 상당히 컸으며, 소대원 중에 2명 밖에 생존하지 못했다.
●함은식(제8-21-2-7-1소) :'52. 2. 18일에 입대하여 8사단에 배치되었다. 수도고지 전투를 치른 수도사단과 교대 투입시 난초고지 교통호 내에 아군 전사자가 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이후에 제20사단 제62연대로 옮겨 양구 벅방에서 전투 후에 55년 4월에 전역했다.
3. 중공군 최후공세 2단계 : 6월공세
'53. 중공군 최후 공세('53.6.1일부)
중공군 4개군 철원 평강 저격능선. 회고개 금성 지형 및 X-고지/ 812/854고지 월비산
수도고지.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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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전.영1.미25.미1기.국1.미7 ‡ 국2. 미3. 국9. 국수도 ‡ 국6. 국8. 국5 ‡ 국20. 미45.미40.국12 ‡국11. 국15
미1군단 미9군단 국2군단 미10군단 국1군단
※국1사:연천 군단예 ※미2 가평 군단예 ※국3사 군단예 ※국7 군단예→국2군단지역에 투입
가. 공세작전 방침
중공군은 1단계 공세를 종료한 다음날인 '53. 5. 27일부터 하계공세로 제2단계(6월공세)로 전환하였다. 적의 2단계 공세작전의 기본개념은 공격목표를 대대급진지로까지 확대할 뿐만아니라 전선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6월공세는 '51년 춘계공세 이후 최대규모가 되었다. 5월 27일 금성돌출부의 국군 전초진지에 공격을 감행함과 동시에,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의 전초 네바다고지군과 후크고지, 중동부 미 제10군단의 우익 812-854고지, 그리고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 351고지를 공격하여 전 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난제인 포로교환문제에 있어 공산군측 제안을 수용하는 유화제스처에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격렬히 벌어지고 이어서 반공포로 석방이란 큰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국제적인 전쟁 혐오에 대한 반전운동이 심화되면서 미 행정부의 입지가 약화되고, 나아가 이 시기를 이용하여 휴전당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는 공산군측의 대규모 전재은 익히 판단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유엔군측은 공세적이기 보다는 수세적 입장에서 제해. 재공권으로 북한지역을 초토화시키며 필요시 만주지역에 대한 전술핵무기 폭격같은 전략적 뉘앙스를 주변국에 흘려 중공이나 소련으로 하여금 유엔군의 휴전 협정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 중공의 팽덕회는 북한강 동서에 있는 국군 제8. 5사단 등 한국군 위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나. 전초고지 전투
공산군은 '53.6.10일 금성돌출부 우견부에 대한 본공격에 앞서 계획대로 5월 27일부터 전 전선에서 국군의 전초에 대한 공격위주로 본공세를 위한 양동작전을 실시한다.
(1) 돌고지 /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 공격(국6사)
중공군 주공인 제20병단 예하 제67군의 200 및 제201사단이 '53. 5. 27~ 6. 4 어간에 국군 제6사단 돌고지(B고지)와 제8사단의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를 공격하여 제6사단의 돌고지와 제8사단의 지형능선 끝의 난초고지를 점령하였다.
(2) 피의 고지, M1능선, 두경봉 전초 공격(국5사)
또한 같은 기간에 중공군 제60군의 제181사단이 국군 제5사단의 949고지 전방의 피의고지, M1능선, 두경봉 전초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격퇴한다.
(3)네바다 전초군 공격(미25사. 배속된 터키여단)
평촌
개성 하리 사시리
*122
*철모고지 *89 매현리 (네바다 전초)
*두매리고지 고랑포 사미천
*무명고지 임진강
*대덕산 237 *104
*124 *181
*229백학산
일월봉 임진강
판문점 북동 16km 지점의 베가스. 레노. 카슨 부근 전투는 1차로 3월 26일, 중공군이 미 해병1-5연대가 방어중인 이곳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28일까지 피의 혈정이 역습에 재역습으로 이어지며 상호 자존심 대결을 벌여 결국 레노전초는 피탈되고 베가스와 카슨전초는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은 118명이 전사하고 801명이 부상했으며 실종 98명이었으며 중공군은 1,30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이어서 '53.5.28일부터 다시 중공군 제46군 예하 제120사단이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의 네바다고지군이라 불리는 전초, 베가스. 엘코. 카슨을 맹렬히 포격을 실시한 후에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이에 터키여단은 29일 저녁까지 베가스 전초를 5회의 공방전 끝에 탈환하고 카슨전초는 상실하였으며, 엘코는 그후에 미군에게 인계되었으나 결국 피탈 되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이 계속되고 피해가 커지자 미군은 전술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명령을 내림으로서 네바다 전초군은 모두 적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미 제25사단장의 철수 명령으로 베가스도 적에게 넘겨주었고, 2일간 전투에서 터키군은 전사 151명. 부상 239명에 2명이 실종되었고 중공군 3,000명을 살상하고 5명을 생포하였다.
같은 때에 중공군 제46군 예하 제133사단이 영연방 제1사단이 방어 중인 네바바고지군 우측 후크(150)고지를 28일 3차례에 걸걸쳐 공격하다 170명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난다.
후크고지(150고지)전투
임진강
고장리 베티고지
마량산
고왕산 황산리(태풍전망대)
차탄천
사미천 나부리 연천 종자산
후크고지(150) 한탄강
전곡
(4) 812-854고지 전투(국12사)
812-854고지 전투
무산 1320
*791 *503
*1190 남강 남강
*802 삼재령 *591
*884
*556 52연
간무봉 *854 12사 21사
*1052 *812 *무명 (쌍용) *578 *924
서화천
31연 51연 52연 소라지
*1031
노전평 고성제
중동부 전선의 북한군 제3군단은 미 제10군단지역 소양강 상류 금강산-서화 접근로상의 양견부 812-854고지를 서부 전선보다 2일 늦은 '53.6.1일 공격해 온다. 당시 고지는 국군 제12사단이 '52.11월 8일 창설되어 최초로 12월 30일에 진출하여 3개 연대를 전방에 배치하였다.
북한군 제3군단 예비인 제45사단이 전방에 배치된 제1사단을 초월 공격하여, 854고지는 지탱하고 812고지는 피탈되어 제37연대 예비인 제1대대(박정인 중령, 종전 후에 제3사단장으로 북한군 진지를 공격하여 사단장 해임된 강골의 군인임, 812고지 탈한 후에 병사들의 총구를 검사하니 사격을 실시한 병사가 51%에 불과했다. 수류탄 투척사도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지는 전쟁 공포증에 걸린 병사들을 보았다)고 증언)가 역습을 했으나 탈환 후에 다시 역의 역습으로 실패하고 이어서 부대를 교대하며 역습도 결국은 854고지는 유지, 812고지는 피탈되고 바로 남서방향의 쌍용고지는 확보하여 현재에 이른다.
[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당시 제37-1대대장 박정인 증언(예)준장.
얼마전 작고) : "풍운의 별 박정인 회고록('90. 홍익출판사)"
나는 함남 신흥출신으로 육사 6기였다. 북진 작전간 제6-19연대 작전주임이었다. 신령전투 후에 북진작전시 사단은 함창-충주-원주-횡성-춘천을 거쳐 화천-김화-금성-회양-신고산-원산-양덕-성천을 거쳐 순천으로 좌회전하여 평양으로 가다 국 제1사와 미 기병사단이 들어와 우리는 순천-개천-희천-온정-고장-초산으로 진격했다.
평양으로 횡단케하는 당시 명령은 많은 문제가 있었다. 아니 제8사단도 신계-곡산-양덕으로 북상하여 평양으로 서진하게 되는데 먼저 양덕을 점령하는 사단에게 양덕-평양간 도로 사용 우선권을 주겟다고 한 것이다. 당시의 모든 사단장들이 먼저 평양을 입성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1)양덕의 사격전
문제는 양덕 교차지점에 우리 6사단 선두와 제8사단 선두가 거의 동시에 들어와 중대장끼리 옥신각신 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대장 이어서 제6사단장 김종오대령과 제8사단장 신상철 대령간의 싸움으로 확대되어 사격전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강인한 제8-10연대장 고근홍 대령이 불문곡직하고 도보행군으로 앞장섰다. 그러나 제6-7연대는 차량화하여 도보행렬에 길을 비켜주지 않아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사이에 국군 제1사단(백선엽대령)이 평양에 입성햇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제6사단은 순천으로 진격하여 공수작전을 하는 미 제187공정연대와 연결하라는 것이다.
2)우릴 보고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
이래서 결국 10월 22일 순천으로 들어가 공수부대와 연결되었지만 벌써 적이 아군 포로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벗어나 별 효과가 없었다.
순천까지 진격하면서 북한군 권총을 노획하게 되는데 미군들이 좋아해서 북한군 둰총 1정에 미군 권총 5정을 바구는 촌태가 벌어져 연대에 때아닌 미군권총 사태가 일어났다.
얼마나 빨리 진격하는지 북한주민들이 우리 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하여 "인민군 마세"를 부른다. 그래서 우리도 장난삼아 같이 "인민군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 순천 북서쪽 9km지점 명우점이란 터널에 근처 주민들이 미군시체가 많다고 하여 현장에 가 본 결과 미군시체와 영양실조의 미군들이 우굴거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를 외치는 그들을 보고 눈물이 나왔다. "우리를 지키려 와서 저런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에 고맙고 미안해서~!"
3) 북한군 내무상 박일우의 짚차를 발견하여 노획 /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를 인지하다.
계속하여 짚차를 이용하여 수색정찰을 하며 전리품을 획득하고, 진격하여 10월 22일 영변에 들어섰다. 여기서 포로 2명을 획득하여 들어보니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왔다고 하여 상부에 보고 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4)드디어 희천에 들어섰다
제6-19연대는 10월 24일 희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소련제 트럭을 발견하여 집중사격으로 멈추게 하여 접근해 보니 북한군 소장이 선탑자석에 죽어 있다. 그래서 그 계급장을 떼어서 발목에 달고 다녔다. 철모는 소령('50.10.20에 진급)인데 발목은 소장이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50.10.25일 사단 작전처의 호출로 들렸더니 제2연대가 중공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것이 한국전에서 최초의 타격을 받은 경우다. 그러나 초산으로 돌진한 제7연대가 무혈입성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5) 연대장의 교체 / 박일우 짚차 선물
다음날 아침, 늦가을의 찬비가 억수로 내리는데 제19연대는 태평을 향해 북진의 길에 올랐다. 언제 중공군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연대장 김익렬 대령이 제11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이 나서 나는 노획한 박일부 차를 선물로 주었고 그는 이걸 타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6) 중공군에 포위되다/ 연대장의 전사/ 포로가 되다
곧 온정리의 제2연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미 중공군이 우릴 포위했다. 이미 그들은 멀리서 제19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위망속에 우리는 들어가 있었다. 사단 지휘소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다.
나는 연대장(박광혁 대령)을 모시고 약 20여명 정도의 연대본부 요원들과 탈출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다 적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주저앉았다. 이때 적탄이 날아와 연대장 복부를 관통하여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사하고, 뭐가 터지는 소리에 놀라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
7) "동무 반갑소. 이제 동무는 해방되었소!"/ 1차 탈출 !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떠서 보니 중공군이 노려보고 있다. 간부인듯한 중년이 한국말로 말하였다. 나는 물. 물. 물하고 소리치자 한명이 수통의 물을 주었다. 그들은 이미 다른 포로에게서 나의 군적을 확인했다. 본부 중대장, 작전과 선임하사관도 있었다.
유엔공군기의 폭격이 이어지니 수시로 옮겨 다녀야 했다. 벌써 땅이 얼기 시작했다. 북한군 정치보위부 군관이 우릴 인솔했다.
11월 10일 압록강변 벽동에 이르러 그곳 인민소학교에 수용되었고 이곳에서 미군 포로 약 50명도 보았다. 이어서 다시 벽동 인민중학교로 이동했는데 여기서 운산지역에서 포로가 된 미 제1기병사단 제8연대의 포로 약 500명이 도착하였다.
'50. 11월 중순경 압록강변 포로수용소에서 물을 기르러 간다는 핑계로 탈출이 시작되었다. 11월25일 경, 어느 산간에서 민가를 발견하여 쉬고 있는데 인민군 제45사단 제3연대 소속 보급소대원들에게 걸렸다. 식량을 징수하러 왔다가 우릴 발견한 것이다. 함께하고 있던 젊은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바로 한쪽으로 끌고가 죽여버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포로생활은 힘들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8) 국군의 못된 행동
당시 북한주민은 처음에는 국군에 호의적이었지만 점점 국군의 약탈, 강간 등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사병출신 장교들은 중국과 만주에서 저지른 범위 행위에 이골이 나있어 그 버릇이 전장에서 발동되어 북한지역에서 약탈과 강간 등을 서슴치 않았다.
반면 중공군이나 북한군은 선무공작적 차원에서 정치교육이 철저히 진행되어 대민 접촉에 신중하였다. 그들은 가령 민가에 숙영할 때도 사랑채나 웃방, 심지어 헛간에 머물고 주인이 안방에 자도록 하여 선심을 샀다.
인민군은 중공군보다는 못해도 원칙만은 지키는 편이었다. 남한땅에 와서 저지른 살인 약탈 강간 등은 주로 정치보위부, 내무서, 지방 빨갱이들이 짓이지 인민군은 선무공작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국군 중에서 일부 몰지각한 장교들은 평양이나 원산 등 도시의 공공시설이나 창고에 쌓아둔 피아노나 올갠, 그리고 값나가는 물건 등을 싣고 후방까지 수송하여 착복하기도 하면서 국군에 대한 민심은 차차 멀어져 갔다.
9) 2차 탈출 / 사망 조의금 54만원을 받다
우리는 다시 압록강변 어딘가 벽동 수용소에서 화목을 미끼로 '51. 1. 23일 탈출을 하여 민가 등에서 공산군 행세를 하며 구정을 위해 빚은 떡을 얻어 먹기도 하며, 원산을 거쳐 신고산을 빠져 나오며 치안대 가족들이 보안대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되는모습을 목격하며 계속 걸어서 고랑포를 지나 의정부, 3월 14일 서울에 들어왔고 민가에서 잠을 자고 한강변에 도달하여 미군 뉴스촬영대에 부탁하여 모터보트롤 강 남안으로 넘어왔다.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육본에 도착하니 동기들이 조의금을 챙겨서 거둬둔 54만을 받아 쥐고 몸을 추수렸다. 그리고 다시 '51. 4월 육본 작전국 작전상황실장으로 새 보직을 받았다.
10) 국민방위군 사건 / 거창 신원리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족한 병력보충을 위해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장정을 동원하기 위해 '50. 12월 21일 국민방위군설치법이 발효되어, 전국 각지의 장정들이 후방으로 집단적으로 수송하게 되는데 간부들이 장정에게 분배되어야 할 식량, 장비, 의료품을 떼어먹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천리길을 걸어서 이동하고, 구포. 부산. 김해, 대구, 제주도 등지에 완전 거지 상태로 대부분 학교.공장.창고 등 차디찬 마루방이나 땅바닥에 가마니 몇개로 포개 자야하는 상태에 장피푸스 돌림병이 돌아 엄청난 인원이 죽게 된다.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부식물 하나 없이 찬밥 덩어리에 굶주림과 추위, 질병이 만연하여 비전투손실이 컸다. 방위군 간부들이 사복을 채우느라 혈안이 되었다. '51. 5 7일 국회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모두 50여 억원(당시 쌀한가마에 2만 5천원)을 횡령한 것으로 밝혀져 김윤근 사령관 등 주범 5명이 처형되게 되었다.
거창사건은 거창군 신원리에서 발생한 양민 대량학살사건이 세상을 놀라게 되었다. 육군 제11사단이 '50.10월 4일부터 '51.3.31까지 경남지역과 전남북지역에서공비토벌 작전간 '51.2.1~3.31사이에 제9-3대대가 지역주민들을 공비토벌이란 명분으로 대량학살한 사건으로 국방,내무,법무장관이 해임되고 관련자는 군법에 회부되었으며 얼마후에 일부는 석ㄷ방되고 일부는 현역으로 복귀하기도 했던 사건이다(##신원면 지역은 '50.9.27일 수복되었지만 신원지서는 11월 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다)
당시에 일부 군의 곳곳에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부하들의 부식비를 데어 사복을 채우고 살이나 휘발유를 팔아 유흥비로 쓰기도 했다. 나는 이 시기에 혼돈과 좌절을 느끼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도대체 나의 상관들이 부하가 전장에서 죽어가는 마당에 사리사욕에 파묻히다니---
11) [직사포, 박정인]
이 시기에 나는 부정부패에 빠진 나의 상관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쏟아부었다. 이때부터 나에게 색다른 별명이 붙었으니 그것이 바로 "직사포"다. 내 입에 오르내리는 부정부패에 관련된 자 모두 내 직사포를 맞아야 했다.
12) 60mm 박격포를 메고 대구까지 도망친 군인!
한가지 일화가 있다. 중공군 4월공세에서 국군 제6사단이 운산에 이어 사창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단이 와해되는 비극이 또 발생한다. 이때 얼마나 놀란는지 60밀리 박격포 포수가 박격포를 맨 채 대구 육군본부까지 후퇴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전투경험이 없는 장교들은 처벌을, 전투경험이 있는 장교들은 포상을 주어야 한다고 맞서며 결국 이 포수는 가평 후방에서 재집결중인 6사단으로 보냈다.
13) 중공군 4월 공세 / 5월공세 회고
중공군은 4월 14일 새벽에 무려 4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대대적인 공격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의 주공격 목표는 서울이고, 이를 위하여 고랑포-서울 축선과, 중부전선의 금화-사창리-가평 축선으로 주공을 지향시키고, 조공을 인제-홍천 축선에 투입하여 4월 22일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도하하여 국군 제1사단(강문봉준장)과 영국군 지역을 돌파하게 되는데 제1사단은 미 제3사단과 함께 서울 4km북방 골든선에서 적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부전선의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적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가평선으로 철수하고, 동부전선에서는 4월 29일 인제를 점령하지만 현리 북방에서 적을 저지하게 된다(골든-노네임선, 수정된 노네임선)
중공군은 5월 16일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10군단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국군 제5. 7사단이 무력화되면서 제7사단과 인접한 국군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부대가 들어와 오미재를 점령하여 후방을 차단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국군 제3군단이 속수무책으로 철수하면서 용포, 현리일대에서 중공군ㅇ 북한군에 포위되어 제3군단의 국군 제3사단과 9사단은 모든 장비를 유기한 채로 방태산을 넘어 창동-을수재를 거쳐 대관령 하진부리로 5월 19일 철수하면서 수습된 병력은 40%수준이었다.
이 당시 작전실패 책임을 물어 연대장 2명이 대령에서 소령으로 강등되었다
14) 육본 작전상항실장에서 전방 제9사단 작전처 작전과장, 제37연대 1대대장이 되다
이 당시에 제9사단은 미 제1군단 지역인 연천북방(고대산)까지 진출 중에, 미 제25사단으로부터 '51. 6. 19일 계웅산지역을 인수받아 김화지역 방어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저격능선일대에서 낮에는 아군이 밤에는 공산군이 진지를 점령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입교하게 되고 1년이라는 기간에 제1훈련소 교관을 거치며 '52. 11월 10일 독립 제37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한다.
저격능선지역은 국군 제2사단이 '51. 5월 중순부터 청계산-백운산을 거쳐, 6월 중순에는 광덕산-대성산-삼천봉으로 진격하고, 8월부터 '52. 3월까지 734고지-492고지 일대 전투를 치른다.
'52. 3. 30일에 미 제40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부대훈련 후에 '52. 6월 28일 전선에 복귀하여 미 제40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10.14~11.24일까지 저격능선 전투를 실시한다. 이후에 국군 제9사단과 교대되어 11. 25일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훈련 후에 12. 27일 미 제3사단으로부터 철원지구(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를 인수받아 휴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저격능선 전투간 좌측의 삼각고지를 미군이 국군에게 작전지역을 넘기면서 독립 제37연대가 제2사단에 일시적 작전 배속되는 것이고 '52.11월 8일 국군 제12사단이 창설되면서 기간 연대로 거듭나게 된다.
제12사단은 '52. 12. 30일 미 제45사단이 방어 중인 812-854고지군 지역으로 들어와 미 제10군단의 우익이 되어 오른쪽에는 국군 제1군단 제11사단이 , 왼쪽에는 미 제40사단이 미네소타선을 방어하였다.
15) 아군 병사와 적군 병사
나는 작전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중대장을 대동하고 전방지역 정찰을 매주 실시했다. 어느날 812고지군에 갔는데 아군병사와 북한군 병사가 대화를 하고 있다.
[우리 쫄병끼리 무슨 원수냐, 그러니 포를 쏘면 진지 내에 들어가서 다치지 않아야 하니 우리가 사격시에는 미리 알려 줄테니 너희들도 우리에게 알려달라]한다.
그래서 해당 제2대대장에게 알려주고 적사병의 언동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계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주의하라 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의 핵심을 포착 못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며칠 후에 적이 야간에 포격을 가하면서 "진지 속으로 숨어라, 포격한다"고 해놓고 기습을 감행해 파괴조가 교통호에 휘발류를 뿌리고 방화하여 호에서 뛰쳐 나오는 병사들을 사살하고는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하는, 어처구니없는 수모를 당했다.
우리 1대대가 역습명령을 받고 812고지를 탈환했다. 정상에 올라가니 적의 기관총 사수가 쇠사슬로 묶어 도망 못가게 한 상태로 아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포로를 심문하니 그들은 후방지역에서 1개 대대가 비슷한 지형에서 1개월간 공격훈련을 하고, 국군 사병들에게 대화로 유도하여 기만케하였다는 것이다.
16) 812고지 탈환간 총을 쏜 병사는 51%였다 / 그리고 부상당하다
812고지를 역습으로 탈환하고 총구검사를 했더니 사격을 실시한 병사는 5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겁이 나서 숨어서 따라 올라온 것이다. 고지에 머무는 동안 적의 역습에 포병지원 사격을 요청했더니 한번은 포탄이 아군 머리에 떨어져 1개 분대가 희생되었다. 동기생이 155밀리 대대장인데 달려 갔더니 그는 도망쳤다.
그 후에도 역습은 실패하고 '53.6. 8일 저녁에 총소리가 대대 OP 밖에서 나더니 잠시후 수류탄이 터져 작전하사관 외 3명이 전사하고 나는 복부관통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의식불명상태에서 인제의 미 제47이동외과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고 미 제10군단장이 내준 헬기로 서울 중앙청 동쪽 제36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
17) 썩을 대로 썩은 군의관들의 영리 행위와 죽어가는 전우들, "이놈들을 당장에 포살하라"
당시 군의관이란 자들은 일과 시간에는 환자를 치료하고 일과 후가 되면 개업이 허용된 당시의 제도적 결함에 편승하여 개인병원으로 돈벌이를 하기위해 퇴근했다. 하루에도 100여 명의 환자가 전방에서 오는데 병실이 모자라 복도에 그대로 방치하여 피.똥.오줌이 범벅이 된 상황에서 환자의 신음소리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런 어느날 이승만 대통령이 병원에 왔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싸웠습니까. 전상을 당했으면 약을 써서 치료를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약은 훔쳐다 자기 개인 병원 환자에게 팔아먹고 우리는 고쳐 주지않아 이 동물 속에서 전우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항변에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중환자들을 모두 외국병원에 보내어 살리라는 엄명이 내렸다. 그래서 나는 부산에 제5육군병원에서 다시 미 제21후송병원을 거쳐 스웨덴 야전병원으로 입원하여 대수술 끝에 목숨을 구했다.
당시 병원장 김대령은 면직되고 육군 의무감 윤치왕 소장이 해임되었다.
18) 기억되는 아픈 이야기
제주도 훈련소에 있는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아들을 면회케 하면서 그 짧은 동안에 후사를 얻기위해 시아버지가 담요를 가지고 와 씨받이를 하는 광경이다
제5육군병원에 있는데 병실 옆방에 매일 싸우는 남녀가 있었다. 알고 보니 결혼 1주일 만에 전선에 나가 전투중 중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가 된 유모 중위가 자기 아내에게 '나를단념하고 딴 곳에 출가하라"커니 안가겠다커니 하는 다툼이었다.
[9사단 소개]
제9사단은 '50. 10. 25일 28연(대전), 29연(공주), 제30연(청주)를 기간으로 서울 청계국민학교에서 창설되었다. 10월 30일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위해 국군 제3군단에 배속되어 전북 대둔산.김천.상주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다 '50. 12. 18일 평창으로 이도하여 제2군단에 배속되고, 다시 12월 26일 제1군단에 배속되어 서림-현리-부평리간 38도선 방어(설악산-오대산의 적 유격대 섬멸)를 하다 '51. 1. 2일중공군의 공격으로 현리-속사리-춘양으로 철수하였다.
'51. 1. 19일 제3군단으로 배속되어 하진부리로 진격하다 중공군 2월 공세시 하진부리에서 정선-창리로 철수하였다가 3월 6일 제1군단에 배속전환되어 송계리지역 북한군 소탕작전을 수행하면서 하진부리-구산리-강릉으로 진출, 캔사스선 진출
중공군 4월 공세시 창촌리로 이동하여 제3군단에 배속되고, 다시 용평리-인제 우측으로 진출하여 군단 좌익으로 임무수행중에 '51. 5. 16일 중공군 5월 공세로 현리에서 포위되어 방태산을 넘는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살아남은 인원들이 결국 대화에서 재반격으로 전환하여 하진부리-광원리로 진격, '51. 6. 2일 미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되어 보개산-고대산 공격에 참가하여 철의 삼각지대로 진출한다(와이오밍선)
'51.6.18일 작전지역을 캐나다 제25여단에 인계하고 김화로 이동하여 6월 19일 미 제25사단으로부터 계웅산 지역을 인수받아 6월 24일 터키군 진지를 초월하여 계웅산을 점령하고 김화지역을 방어한다.
'51. 8. 1일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에 인계하고 포천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부대훈련을 실시한 후에 미 제1군단으로 배속되어 철원으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의 방어진지(백마고지와 화살머리 고지가 포함, 제임스타운선 방어)를 인수한다.
'51. 11.3일부터 고지쟁탈전을 반복하는 가운데 '52. 4. 5일 미 제9군단으로 배속전환되고 이어서 '52. 10.6~10. 15일까지 백마고지 전투를 한다. '52. 10. 26일 작전지역을 미 제3사단에게 다시 인계하고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훈련을 하게 되면서 제30연대는 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저격능선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52. 11.23일 국군 제2사단으로부터 저격능선을 인수받아 '53. 7월의 중공군 최후공세시 저격능선을 피탈당하고 이곳에서 휴전을 맞이하게 된다]
[참전 용사 증언]
●장기표(제12-52연) : 본인은 15살에 입대하여 제12사단 소속으로 인제 854고지 전투에 참가 하였다. 당시 장승리 골자기에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강병창(제8-21-2-7중) :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인제 854고지 전투로써 당시 수도사단이 전멸한 후에 8사단이 교대 투입되었다. 당시 아군의 전사자가 많았다. 수도사단과 8사단, 그리고 12사단이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원다고 보며 본인의 소대원도 전투 후에 보면 생존자가 20명 미만이었다.
●심재혁(제8-21-3-10중)외 다수: '51.3.1일에 입대하였다. 특히 인제 북방 854고지 전투에서 당시 구덩이에 아군 전사자 100여 명 이상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 아군의 희생이 컸으나 미처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52.9월 전투로 판단됨)
●이우목(제12-52-1-3중) : '52년도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제12사단ㄴ에 배치되었다. 휴전이 임박하여, '53.6-7월경으로 기억되며 인제 북방 854고지 전투중 1차 후퇴할 대에 소대원 42명 중에 생존인원이9명 밖에 안되었다. 노무자들의 희생도 많았다.
(5) 351고지 전투(제11사-제5사로 방어임무가 인계)
정리동 고성
남강
*148 *187
월비산 *261
*351
*208
*37
남강 *240 *339
보현리 *345
*154 *263
351고지는 월비산과 더불어 '51. 추계공세 대 수도사단이 점령한 이래 제11사단, 제5사단으로 방어임무가 인계되는 동안 쟁탈전이 계속 되었다. 국군 제5사단으로부터 국군 제15사단이 '53. 1.28일에 351고지군을 인수받아 방어하고 있었다.
전면의 적은 북한군 제7군단 예하 제3 및 7사단이었으며 당시의 351고지는 동굴화된 벙커ㅏ. 분대 단위 대피호. 교통호로 연결된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53. 6. 2일 북한군 제7-13연대가 국군 제15-38연대 9중대가 방어 중인 351고지를 강타했다. 동굴진지를 제외하고는 적에게 피탈되고 동해안의 함포와 항공기 폭격을 지원받으며 역습이 진행되지만 실패하고, 제50연대-1대대를 투입하여 '53.6.4일 역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동굴진지의 제38연대 9중대는 버티고 있었다.(11명을 제외하고 모두 복귀한다)
다시 6.5일 야간에 제50연대 3대대로 역습을 감행했지만 그 무수한 폭격에도 적이 버티고 있어 결국 탈환을 실패하게 된다 6.2~6.5까지 전투에서 무려 222명 전사에 부상 537명, 실종 11명이었다.
이후에도 제21사단 제63연대를 배속받아 사단 좌전방에 투입하고 제39연대를 예비로 뽑아 예행연습까지 시켜서 역습을 감행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7월 공세시 339고지까지 피탈되면서 휴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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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비산 : '51.10.12~15어간에 수도사단이 탈취하고, 11. 19일 제11사단에게 하고 12.2~'52. 3.14일까지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을 하고 '52.3.18일 화천으로 이동하여 금성천 미조리선 방어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를 하고, '52. 10. 25~12.10일까지 부대훈련을 실시 한다. 이후에 '52.12.12일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사창리로 이동에서 금화 서북지역에 들어가 금성지구 미조리선 방어를 하다 휴전을 맞이한다.
351고지는 인수받은 제11사단이 '50.10.14~'51.3.31일까지 공비토벌 작전을 실시하고 신원리 사건이 터지면서 전방으로 추진되어 4.16일 양양으로 이동한다. 중공군 4월공세에 주문진으로 철수한 후 다시 군단의 우일선으로 '5.7~17일까지 설악동 서북쪽 마등령-미시령간을 방어하다 중공군 5월공세시 다시 강릉으로 철수하였다.
'51. 5. 26일부터 향로봉-건봉산으로 진격하여 8. 18~27일까지 844고지전투를 하며 9.7~11.15일까지는 수도사단 제1연대 지역을 인수받아 건봉산지역을 방어하고 11.16일부터 수도사단 작전지역을 인수, 동해안 27km 정면을 방어하였다.
'51. 11.18~24일까지 월비산 전투로 월비산을 적에게 빼앗기고 351고지는 사수하였다. 그러다 '52. 1. 13일 작전지역을 국군 제5사단에게 넘기고 양양에서 부대훈련을 실시한다. 이후에 다시 국군 제1군단 좌익으로 건봉령일대로 들어온다. 이때 제20연대는 후방지역의 포로수용소 경비를 위해 내려왔다. 이곳에서 계속 '53. 6.9일까지 건봉산지역 전초선을 방어하다 '53. 6. 12~14일에 화천으로 이동하여 부대훈련 및 정비 후에 '53. 7. 13일 적근산 및 삼현지구에 들어와 휴전을 맞이한다.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월비산은 제11사단이 방어시 상실하였으나, 351고지는 확보한 채 1953년 1월 30일, 새로이 이곳으로 투입된 제15사단이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5사단은 '48.6.15일 수색에서 창설된 제5여단이 증강되어 사령부를 광주로 옮긴 후 '9.5. 12일 제5사단으로 승격(제15연, 제20연)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봉일천, 창동에서 제1사단 및 제7사단을 지원하면서 오류동-시흥으로 철수하고 7월 17일 마산에서 사단이 해체된다.(사단은 전남 광주에서 이동)
그러다 '50. 10. 8일 제27연(대구), 제35연(마산), 제36연(부산)을 근간으로 재창설하여 제3군단에 배속, 포항.지리산.김천.영주 등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10.16~11.17일까지 수행한다. '50. 11.22일 서울로 이동하여 중공군 개입과 동시에 가평.청평.춘천지구 경비업무를 하다 1.4후퇴 당시에 춘천-홍천-원주로 철수하면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되어 충주-점촌-영주로 이동했다.
'51. 1.31일까지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51.2.1일 영주-횡성 학곡리로 이동, 라운드업 작전시 미제 10군단의 우익으로 횡성 우측방 포동리 일대에서 중공군 2월 공세시 새말-주천-단양으로 이동, 단양-풍기 간 보급로 경계하다 '51. 3. 3일 단양에서 일선(안흥-운교)으로 진출하여 미 제2사단과 교대한다.
'51.3.3~4.19에 안흥-태기산전투에서 소양강을 도하 원통리까지 진출하다 중공군 4월 공세에 아야리로 후퇴했다. 그러다 다시 소양강 남안 음양리-어론리선까지 진출했다 중공군 5월 공세로 풍암리선까지 철수한 후에 다시 '51. 5. 26일부터 원통리선(캔사스선) 진출하여 서화리의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개고개 일대까지 진출한 후 개고개 일원에서 국군 제8사단에게 '51. 7. 19에 인계하고 예비가 된다
다시 '51.8.18일부터 피의능선 전투, 펀치볼의 가칠봉 전투를 '51. 10. 14일까지 하고 10. 21일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양양에서 부대훈련을 실시했다. '52. 1. 11일 거진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1군단 우익으로 제11사단과 교대하여 '52. 7.10~11.10일까지 351고지 전투를 실시한다.
그 후에 '53.1. 29일 제1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간성에서 부대훈련을 실시한 후에 '53. 4. 10일 김화로 이동,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6.10~6.14일까지 883-973-949고지 전투를 하고 후퇴하여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7.14일부터 백암산 전투에 참여한다.
국군 제15사단은 '542. 11월 8일 양양에서 창설되고 독립연대인 제38연, 제39연, 제50연대를 기간으로 창설되어 '52. 12. 10~ '53. 1. 10까지 부대훈련 후에 간성으로 이동후 '53. 1. 28일 제5사단의 351고지 등 책임지역을 인수하여 351-339고지를 피탈당하며 휴전에 이르게 된다.
(가)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참전용사 증언]
●김수환(제15사) : 본인은 제2국민병으로 제주도 훈련소에서 교육받다가 '51.2.12일 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부산 통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대구 보충대에서 1개월 근무하다 제5사단에 편입되었다. 그러다 '52.11월 초순에 제15사단 창설 멤버로 수색 중대 통신병이 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사단은 351고지에서 치열하게 전투했다.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으며 같이 싸우던 전우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나도 이 전투에서 좌측팔 관통상으로 강릉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박해창(제15-38-2-6중) : 본인은 문관으로 군 피복 제작 업소에 근무하다 '51.10월에 제6사단 제7연대 소총수로 임무를 했다. 그러다 '52. 3월에 장교를 지원하여 9월에 임관, 제15-38연대로 배치받아 전투에 투입된다. 특히 351고지 전투에서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교통호나 개인호 주변에도 많았다. 아군복장을 하고 벙커에 숨어있는 적을 사살하기도 했으며 이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사단 의무대에서 치려 후에 연대본부 특공대로 배치되어 있다 휴전을 맞았다.
●정태화(제15-통신대) : '50.12.3일에 입대하여 7사단 통신대 소속으로 '51.1.4후퇴 당시 북한지역 덕천에서 사단이 포위되어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부상으로 후송되어 치료 후에 다시 '52.7월에 제15사단 38연대로 전출가서 휴전이 임박할 무렵 동부전선 351고지 전투에서 아군 38연대와 39연대가 피해가 컸다. 당시 미 순양함이 동해에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정면에 보이는 돌산이 모래사장으로 변할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다.
● 구자선(제2전차대대 제3중대) : '51.3월 강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기갑학교에서 교육받고 제2전차대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특히 제15사단의 351고지 전투에서 화력지원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공격에 투입되었다가 돌아온 병사는 2개 대대 규모도 안되는 것으로 보아 이 고지 주변에 많은 전사자 유해가 있을 것이다.
● 이재춘(제15-38-3-9중) : '51.12.29일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제15사단에 소총병으로 전투 참여했다. '53년도 휴전을 얼마남겨 두고 351고지전투에서 아 중대원 대부분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생존자는 본인을 포함하여 10여 명 미만이다.철조망에 걸린 전사자. 교통호에 묻힌 전사자 등 헤아릴 수 없는 전사자가 많았으나 미처 수습되지 못했다.
● 조태언(제15-39-3-9중) : 포로 경비대에 근무중에 '52. 제15사단 창설 인원으로 올라가 중대 선임하사로 화기소대장 대리로 351고지에서 적과 전투했다. 특히 '53.6.13일 아군 집결지에 적 포탄 사격으로 중대원 180명 중에 108명이 생존하고 약 80여 명이 전사 및 부상했다.당시 집결지는 교통호 옆이었으며 351고지 전방 돌산고지에서 적의 직사포 피해를 입었다.
● 송기만(제15-38-수색 중) : '53.6.1일 새벽에 적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이전까진 없었는데 이날 새벽 1시 이후로는 휴전때까지 계속 되었다. 351고지에서는 수샙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351고지 바로아래 무명고지에서도 육박전까지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351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이후에 재탈환 공격에 신병들이 많이 투입되어 많은 피해가 컸다. 당시 351고지는 정상 8부 능선에 터널식으로 굴을 뚫어 총구만 밖으로 내놓은 채로 경계를 하였는데 동굴안에 다수의 전사자가 있을 것이다. 특히 351고지 재탈환을 위해 아군의 포격이 치열했는데 제때에 대피하지 못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 김정완(제15-50연) : 본인은 제50연대 소속으로 351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가 워낙 치열하여 1개 대대 전체가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노무자들이 전사자를 트럭으로 운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특히 351고지 골짜기 지역에 전사자가 많이 있을 것이다.
● 김종대(제15-38-1대) :'52.12월에 입대하여 제15사단에 배치되어 휴전에 임박하여 동해안에 위치한 351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교통호와 능선 게곡에 전사자가 많이 목격되었다. 전투가 한번 끝나고 나면 중대원의 1/3이상이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기걱된다. 인근 해금강 옆에 돌산고지에서도 피해가 컸으며 교통호 내에 전사자가 있었다.
● 김헌조(제15-50-1대) : '52.1.16일에 입대하여 제15사단에 배치되어 휴전에 임박하여 351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철수하면서 중대원의 1/2정도인 70여 명이 사상자가발생하는데 전사자 수습을 제대로 못한 채 철수하였다. 당시 교통호 내에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가 많이 함께 있었다.
● 홍ㅇ녀식(제15-38-2대) :'52.1.16일에 입대하여 제15사단에 배치되었다. 휴전에 임박하여 351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당시 교통호내에 1개 소대 규모가 있었는데 적이 기습하여 \소대원 중 1/2정도인 약 20여 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처리도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당시 교통호 안에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많았다.
다. 949-973-883고지 전투(국군 5사)
'53.5.27~6.4일, 중공군 제181사단이 국군 제5사단의 949고지 전방 피의고지, M1능선,두경봉전초를 공격하였으며 모두 격퇴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53.5.27일부터 주로 금성돌출부 국군 제2군단 전초진지에 대해 탐색전을 벌이는 동시에, 한편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서 첨예하게 대결을 벌여온 네바다 고지, 812고지, 351고지에 대해 인명을 아끼지 않는 공격을 펴서 6월 초순에 이들을 점령했다.
이후 중공군 제20병단은 최후공세 2단계를 게획대로 6월 10일 북한강과 금성천 합류지점의 아군 주저항선 공격에 주력을 투입하였다. 중공군 제60군은 북한강 동안 국군 제5사단의 주저항선인 949-973-883고지를, 제67군은 북한강 서안 국군 제8사단의 지형능선-수도고지를 공격했다. 이들 고지군은 '51. 추계공세시 확보하여 지금까지 방어해 오고 있었다.
국군 제5사단(준장 최홍희)은, '53.4. 15일에 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여 이곳에 진출하여 제36연대(+)를 좌반부 548-949(우두산)에, 제27연대를 우반부 973-883고지에 뱇치하고 이들 전방 연대로써 삼각봉-두경보에748(피의 고지)-689(텍사스고지)-오봉능선-승리봉에 소대규모의 전초를 운용하며 적과 대치 중이었다. 사단 예비 제35연대(+)는 낡은 터와 황병동에 각각 1개 대대씩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사단 지역 주보급로는 북한강 동안에 개척된 강변도로가 유일한 것이었으며, 낡은 터 북쪽에 작전용 교량으로 도보교와 철판교가 가설되었으며, 이곳 강변과 629고지간에는 보급추진용 케이불카가 설치 되었다. 그밖에 후동-황병동간에는작전용 교량이 설치 되엇으며, 제901부교중대가 당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181사단은 '53.6.10일 20:00시부터 10,000여 발의 포격을 퍼부으며 21:00를 기해 1개 연대 규모로 973고지 전방의 전초소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저항선은 물론 전초진지까지도 휴전을 앞둔 시점이어서 고수방어개념으로 방어하였으나, 전투 정면이 넓어서 주요 고지에 1개 중대 밖에는 배치할 수 없었다. 여기에 중공군의 1개 연대 규모가 파상공격을 가해오니 지탱하기란 역부족으로 23:40분에 973고지가 이어서 883고지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무렵 제27연대를 방문한 사단장은 지체업시 사단예비인 제35연대(-)로 973고지를 , 제27연대는 제35연대 수색중대를 배속받아 883고지를 탈취하도록 하여 6월 11일 04:30분에 역습이 진행된다.
제27연대는 2대대(-)로 883고지 역습을 감행했지만 실패하고 07:30분에 각 부대에 현 접촉선에서 부대저입를 명한다.
이에 앞서 6월 11일 03:00시경 제2군단장은 보고를 받고, 군단 예비 제3사단에서 제22연대를 제5사단에 배속조치하고 피탈된 지역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제5사단장은 제35연대(-)로 973고지를, 황병동에 집결중인 제3-22연대로 883고지를 탈환하게 하였다.
제35연대는 어렵게 당일 15:40분에 973고지를 탈환하고 제2대대와 3대대의 연결작전을 시도했으나 973고지 서측 500m지점의 '마의 돌출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적의 저항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목표점령 3시간 후인 18:50분경 적의 역습으로 방어선이 무너져 주봉에서 물러나 급편진지를 구축하고 야간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배속부대인 제3-22연대는 11:30분에 2개 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날따라 가랑비가 내려 항공지원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역습은 실패하게 된다. 사단은 역습 중지와 제27연대로 사단의 좌일선 진지를 인수하도록 한다.
※당시 제3-22연대는 11일 황병동에 집결한다. 그러나 군단 예비로 있을 시 연대장(최병순 대령)도 새로 부임햇고, 대대장 2명. 중대장 7명. 사병 1/3이 휴가 또는 외출중에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다
●사단의 저지선 붕괴
제27연대는 13일 16:00시까지 제36연대 진지를 완료했다. 제36연대는 황병동에 집결하여 예하 대대로 973-883고지 공격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중공군이 14일 02:00시에 선제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제22연대 중앙과 좌익을 돌파하려 함으로써 제6중대가 고립된다. 날이 밝으면서 관측에 의한 포병지원을 받으며 제6중대는 귀환하였으나, 결국 883고지에서 1~1.3KM를 물러나게 되고, 이 당시에 생포된 포로의 진술로 적은 수시로 공격부대를 바꾸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사단장은 역습을 중지시키고 연대의 직후방 복도시-널우골에서 방어종심을 강화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3개 연대는 이미 3끼 이상을 굶고, 중공군의 공격에 수면을 취하지 못해 극도로 피로한 상태에서 많으 전우를 잃어 사기가 저하되고, 노무자들 식사와 탄약 보급은 물론 환자 후송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은 사기유지에 일조가 되었다.
중공군은 제180사단과 증원된 제203사단 제609연대를 투입하여 6월 14일 18:00시부터 사단 전 정면에 압도적인 우세한 병력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좌측(548-739)의 제27연대는 저지선이 무너지고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부대가 일시에 혼란에 빠져 북한강가 교량을 향해 내려갔다. 우익(973-883)의 제22연대는 적 5개 대대를 맞아 선전했지만 20:00를 넘기면서 저지선이 무너진다. 중앙(949-805)의 제35연대도 야간에 결국 저지선이 무너진다.
사단은 상황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단 역습을 중지하고, 저지선을 형성한 제36연대로 북한강상 교량으로 이동하여 교두보를 구축하고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한다. 6월 14일 23:00시에 사단의 전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고 병력은 중공군의 추격을 피해 황병동으로 밀려들고, 사단장은 629고지에 설치된 케이불카를 폭파토록 하고 공병대대장으로 하여금 북한강가의 교량폭파 준비를 하지만 자정무렵 사단의 상황은 수습불가 였다.
●신방어선(IceIand Line)으로 철수
제2군단장(정일권 중장)은 이 무렵 우전방 사단이 방어선을 지탱할 수 엇다고 판단하고, 제5사단을 그 남쪽 성천과 북한강에 연하는 아이스랜드 선으로 철수시켜 양지촌(462)-후동-널우골(748)을 점령하도록 조치한다. 제5사단장은 15일 00:50분부로 신방어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여, 제27연대는 북한강 서안 양지촌(462-후동)에, 제36연대는 북한강 도안 황병동(3190-널우골(748)에 방어선을 편성하고, 제35연대는 군들-감우리에 집결하여 사단 에비가 되게 하였다. 제3삳4 ㄴ제22연대는 북한강 서안으로 철수하여 원대복귀 준비하도록 했다.
[제3의 한강교 폭파사건 발생 : 북한강상 작전용 교량 사전 파괴]
사단명령에 따라 야간에 각 연대는 새로운 진지로 철수하고, 제1103야공병단은 낡은 터 북동쪽과 후동에 가설된 북한강상 작전용 교량을 02:00~03:00시에 폭파시켰다. 이 폭음은 철수하는 병사들을 더욱 놀라고 두렵게 하였다. 중공군에 추격하에 분산된 체로 북한강에 도달한 병력은 이미 교량이 파괴된 뒤라서 일부는 헤엄을 치고, 일부는 보조물을 이용해 강을 건너야 했다. 물론 중장비의 철수도 불가능하여 지원된 미군의 중박격포대대도 박격포를 모두 파괴하였다.
마치 개전초기 한강교량 파괴와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면서 사단은 6월 15일 07:00시까지 신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이날은 다행히도 날씨가 개여 유엔 공군기가 한국전쟁 사상 1일 최고 출격횟수를 기록하며 2,143회나 출격하여 중공군을 강타하여 적의 돌파구 확장과 추격을 차단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3사-22연 참전용사 증언]
우리는 황병동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어디인지도 모르고 행군으로 883고지란 곳으로 갔다. 그러나 도착도 하기전에 이미 중공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그 선발대가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역습이란 말도 안된다. 새벽도 지나 대낮에 공격도 하기 전에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과 어디서 날아오는지 기관총에 혼비백산하여 많은 동료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다음날은 새벽에 또 역습을 감행하였다. 또 다시 우리는 엄청난 인원이 희생되었는데 점심도 거르고 미군이 박격포를 지원하면서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들리는 이야기가 미8군사령관(테일러 중장)과 군단장이 보고 있다며 독려했다.하지만 목표 직전방에서 밀려나고 피해만 발생하여 결국 공격한지 얼마 안되어 공격중지가 되고 우리는 무명고지에 방어로 돌아섰다.
그러나 중공군이 다시 밀고 내려와 철수를 하는데 다리가 있던 곳으로 새벽에 왔는데 다리는 없었다. 3일이 지나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실 역습이라 지만 중공군은 높은 고지에서 우리를 보고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고 어딘지 모르지만 기관포로 우리를 갈려대는데 무슨 돌격인가.
그런데 5사단 수색대들이 총을 집결시켜 놓았는데 인원들이 없었다. 아마도 맨몸으로 북한강으로 뛰어들은 모양이다. 우리는 이곳으로 진출한 경험이 있기에 강을 건너 중공군의 추격을 벗어났다. 살아 있는 것이 죄인같다. 당시에 죽어가는 전우들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지만 미안하다.살아서 미안하다.
참고 지형도 : 949-973-883고지 전투
북한강
▲572
북한강 여운리 오봉능선
▲748 ▲689 ▲승리봉
북한강 ▲삼각봉 ▲두경봉 제27-1대
제35-1대 제36-1대 / 3대 /2대
▲739 ▲949 ▲973
북한강 제27-2대
국8 =국5 제36연 =제27연
북한강 6.12일 04시에 27연이 36연 진지 인수, 제36연 황병동 집결
북한강 국3-22연이 11일부터 973-883지역 역습실시, 실패
국5-35연(-1)이 973, 국3-22연이 883 역습
▲883 제27-3대
북한강
복지동
구대 재35-3대 통선곡
제35연지휘소
황병동 국5 =국20
제72포병대대 후동 북한강
북한강
도피막
북한강
가는대 국5사지휘소
[제8사단의 전투경로]
강릉에서 '49. 6. 20일 제10연대를 기간으로 창설되어 동년 7월 5일 제21연대(삼척주둔)가 편입되고, 철수과정에 안동에서 제16연대가 사단에 예속되었다.'50. 9월 초에 영천지구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반격작전으로, 의성-안동-영주-단양-양평-동두천을 거쳐 38도선을 돌파하여 구장동으로 진출하여 영원-맹산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다시 철수하여 연천-서울(청량리)-춘천-홍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51. 2월에 횡성에서 다시 중공군에 포위되고 무력화 된다. '51. 4월 대구에서 재편성하여 금산.부인지구 공비터벌 작전을 수행하고 '51.5월 말 원통리로 이동하여 8월부터 인제북방 노전평지구 전투를 한다. 854고지를 점령한 후 미 제1해병에 인지를 인게하고 양구로 이동하여 '51.9월 28일 국군 제7사로부터 백석산지구를 인수받아 10월 말까지 1090고지를 점령한다.
이후 다시 국군 제7사단에 1090고지 지역을 인계한 후 미 제10군단에서 백ㅇㅇㅇ야전사로 배속되어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52. 2월에 전방으로 이동하여 '52. 3월에 다시 서화리로 들어가 미 제1해병으로부터 812-854지역을 인수받고 9월 말에는 다시 미 제45사에 지역을 인계하고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한다.
'52.10.19일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수도고지. 지형능선 지역에서 전초 전투 및 주요고지 쟁탈전을 하다 '53.6월 중공군 6월 공세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에서 철수하며 휴전시까지 전투한다
[제6사단의 전투경로]
'48. 4. 29일 서울에서 제4여단(채병덕 대령, 제7.8.10연대)으로 창설되어 동년 11월 20일 충북 청주에서 제6여단으로 개칭된 후, '49년 5월 12일에 제6사단으로 승격(대령 유재흥, 제2.7.9연대)하여 사단사령부가 충주에서 원주로 이동했다.
북진 작전간 초산까지 진격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철수하여 '50.12. 14~31까지 동두천 북방에서 전투 후, 동두천-창동-광주-안성으로 철수 후에 다시 재진격간 '51. 2. 14~4. 6어간에 마석우리-가평으로 진격했다.
중공군 4월 공세에 사창리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무력화 되어 다시 철수하게 되고 홍천강을 끼고 중공군 5월 공세를 맞이하여 용문산지구 전투로 대승을 거두어 명예회복을 한다.
재진격간 가평-춘천/화천을 경유하여 '51.6월 7일 백암산으로 진격하고, 8.30~10.30일까지 백암산-동대리-여문리로 노메드선선으로 진출 후, 10월 말에 교암산 지역을 미 제24사단에 인계하고 우측으로 작전지역을 변경하여 '51. 11. 5일 북한강 동안의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가 진출한 949고지로 진출하여 11월 17일부터 949고지 전투를 하며미조리선을 확보하였다.( 당시 8사단은 '51. 9.28일에 서화리 북방 854고지를 점령한 후 미 해병에 인계하고 제7사단의 백석산지역을 인수하여 10.28일까지 백석산 탈환 및 북방 어은산 바로 밑의 1090고지(X-머스고지)로 진격한다. 그후 이 지역을 다시 제7사단에 11월 20일 인계하고 백야전사로 배속되어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한다. 이 당시에 제21연대가 사단의 좌측연대로 통선골 지역으로 진출했다)
'52. 1. 9일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가서 부대훈련을 실시했다. 미 제9군단 배속이 해제되어 군 예비로 다시 '52. 3. 21일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교암산 고지군으로 들어와 미 제40사단으로부터 진지를 인수받았으며 575고지전투, A.B고지전투, 교암산전투를 치르며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한 후에 다시 우측방 국군 제5사단지역으로 들어가 휴전에 이르게 된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모두가 지금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들이다. 참전용사 증언으로 실상을 기록한다.
●박영근(제5-36-3-11중) : '51.2. 20일에 입대하였다. '52년도 351고지 전투에서 아군 중대원이 1/2이상이 전사했다. 당시 교통호에 전사자들이 많아 남아 있었다. 이전에 양구 피의능선전투에서는 끝날 무렵 5일간 있었으며 아군 피해가 전사상자를 포함 1개 엿다고 했다.
북한강 동안 949고지 전투(텍사스고지 전투)에서 아군 소대장 노소용이 전사했고(949고지 밑 북쪽 능선에서), 당시 임시 호안에는 아군 전사자들이 많았다. 지금도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전우야 나좀 살려줘"라고 소리치는 것을 잊을 수 없으며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승진(제5-27-1-1중) : '52. 12.24일 입대했다. 강원도 금화지구 북한강 건너 973고지 전투에서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53.6월경에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소대원중 생존 인원이 17명이었다. 결국 973고지를 피탈당하고 예비 중대로 전환하여 전사자를 후방으로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후송지점이 기억에 잘나지 않는다.
●박상남(제6사 공병대대) : 제6사단 공병대로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575고지 전투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1달여 동안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 일부는 차량으로 후방으로 수습하였지만 많은 유해가 현지에 방치되었다.;
●신흥균(제6-7/19연) : '53. 7월에 휴전이 임박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가용 전투력을 총동원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했다. 당시 7월공세에서 교암산이 피빛으로 물들 정도로 피아 전사자가 맣았다. 당시는 제19-3-11-3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소대원 42명 중에 생존자는 나 혼자 였다.
●이판남(제8-공병대) : 수도고지에서 먼저 수도사단이 녹았다고 들었다. 우리가 투입되었는데 주저항선 전방 전초진지 고지에서 수많은 수도사단 전사자를 목격했다.
●김일상(제6-19-2-5중) : '52. 11. 4일 입대하여 휴전이 임박한 시기에 교암산 부근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햇다. 당시 1개 연대가 20여 명만 생존했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로 피해가 컸다. 당시 나도 관통상으로 후송되었다.
●김종남(제6사 제96포병대대) : '52. 10월 2일 입대하여 포병학교에서 교육받고 '53. 2월에 포병 96대대로 배치되어, 화천 북방에서 교암산에서 전투 중인 제6사단을 화력지원 했다. 나는 측량병으로 임무를 수행했는데 전방에 아군 전사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개울가에 특히 많았다. 또한 수색대원들이 들어갈 때는 3-40명이 되었으나 나올 때는 몇 명 안되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다.
●박수동(제6-7-3-10중) : '50.10.8일에 입대하여 '51.1.4일 동두천 인근 인도교 옆에서 적과 교전하여 소대원 중에 생존 인원이 4명이었다. 특히 교암산 인근 575고지 전투에서 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한 것으로 기억되며 훙에 사단이 녹았다고 들었다.
●김창호(제6사) : '53. 3. 20일경 화천북방 A고지 정상(중대 OP)을 2연대가 접령 중 적에게 탈취당하여 미군 폭격이 있었는데 7연대가 재탈환하여 정상에 가보지 정상 주변에 2연대 수십 명이 전사하여 매몰되어 있었다.
●남용근(제8-21-2-6중) : '50.11. 29일에 입대했다. 소총병으로 '51. 2월의 횡성전투에서 피해가 컸다. 특히 휴전이 임박하여 '53. 7월 수도고지 일대에서 당시 분대장으로 있었으며 소대장도 통신병도 없었으며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으나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
●김선린(수도사-26-2-5중) : '50.9.3일 당시 제3-26연대에 입대하여 형산강 돌파 작전간 당시 물속에 빠져 전우들이 많이 전사했다. 이후에 수도사단이 되어 '51년 여름 경 향로봉 북방 924고지 전투시 아 연대병력의 1/2이 손실되어 재편성해야 했다. 당시 제1연대는 방어하고 제26연대가 공격작전을 시행했다.
또한 '52년도에는 수도고지전투에서 2대대 전사자만 50~60여 명이 발생하였으며 중대원 중에도 10여 명이 전사하여 실종되었다. 휴전 이후에 실종됐던 중대원 5명이 포로 교환시 복귀하였다.
라. 1090고지. M1고지 전투
어은산 *1297
문등리
*1218 *984
*890
암동 *B 내동
*A
*크리스마스고지
*1090(북) M1고지
내리
*1090(남) 양구
*938
*1220
백석산
북한강 동안 국군 제5사단 방어지역을 공격하던 '53. 6. 10일 중공군 제60군에 배속된 제33사단이 미 제10군단의 좌견부인 국군 제20사단의 1090고지를 중심으로 한 938고지. M1고지를 공격하였다.
국군 제20사단은 사단의 모체인 제1교육여단이 '53. 1. 1일 제60. 61. 62연대를 기간으로 양양에서 창설되어 2월 6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현리로 이동하면서 2월 9일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53. 5. 15일 양구로 이동하여 국군 제7사단의 책임지역인 크리스마스고지 지역을 인수하여 '53. 6. 18일까지 크리스마스고지와 M1고지 전투를 치룬 후에 '53. 7. 4일 작전지역을 미 제45사단에게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했다가 '53. 7. 9일 미 제40사단의 작전지역인 가칠봉 지역을 인수하여 휴전에 이르게된다.
사단이 방어하게 된 지역은 '51. 추계공세시 점령하여 고지쟁탈전을 계속 하고 있는 곳으로 938고지는 883고지에서 1220고지로, 1090고지(북)는 어은산에서 1220-백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의 요충지로 M1고지는 1090(북)고지 동쪽 능선에 딸린 무명고지다
1090(북)고지와 M1고지에는 당시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중공군이 6월 10일 공격하여 M1고지가 피탈되었다.이에 제61연대는 제1대대로 역습을 감행, 12일 진지를 되찾았다. 그러나 다시 적의 역습에 밀려나고 13일 다시 역습으로 고지를 탈환하였으나 적의 재역습에 피탈되기를 반복하게 된다.
이에 직접 대대장이 병력을 지휘하여 6. 13일 14:30분에 공격을 개시하여 탈환하여다. 그러나 다시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이후 적은 14일 938고지(선우고지)와 1090(북)고지 일대로 공격을 해왔으며 백병전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피탈되고, 15일 피탈되었던 938고지는 회복하였다.
이처럼 전 전선에서 적의 압력이 강해지자 미 제10군단은 군단 예비로 편입된 국군 제7-8연대를 투입하여 938고지로 투입하고 이곳의 제62연대를 1090(북)고지 탈환작전에 투입, 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오후에 적이다시 역습을 해와 남1090고지로 내려서야했다.
제62연대는 다시 '53. 6. 18일 재역습으로 1090(북)고지를 탈환하고 작전지역을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였다. 제7사단은 938(선우고지)-1090(북)에서, 제20사단은 M1고지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 제7사단은 '51. 6월 화천저수지 남안에서백석산 남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다 백석산 전투에서 국군 제8사단이 탈환하여 진격하는 동안 양구에서 9.30~11. 17까지 부대훈련 후에 다시 국군 제8사단으로 부터 이곳 1090고지군 일대를 인수받는다.
그러다 '52. 11. 15일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에게 인계하고 양구에서 교육훈련 후에 '53. 2. 1일 전선에 복귀하여 미 제25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았다.
다시 '53. 5. 18일 작전지역을 국군 제20사단에게 인계하고 양구에서 부대정비 중에 '53. 6. 16일 전선에 복귀하여 이곳 국군 제5사단의 철수에 따른 938고지(선우고지)군에 들어와 전투를 하다 '53. 7. 17일 작전지역을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금성천 남안으로 들어와 제11사단의 우일선, 제8사단의 좌일선으로 들어와 휴전선 근 방 425고지 전투 등 수행후 휴전을 맞는다]
제20사단은 10일간 M1고지에서 제61연대가 쟁탈전을 16회 반복하고 21~22일 사이에 제60연대를 투입하여 M1고지 쟁탈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3. 7. 4일날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53. 7. 9일 가칠봉의 미 제40사단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휴전에 이르게 된다.
(가)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참전용사 증언]
●고일주(제20-62-3-1중) : 본인은 '53.6월의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당시에 최후 공격 중대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중대원 200여 명 생존자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김정남(제20-62연) : '51.5.14일에 입대하여 최초 제7-3연대에서 전투했다. '53. 1월, 제20사단 창설 인원으로 제62연대에 전속 되어 1090고지 전투에 참가한다. 이 전투에서 몇 번에 걸쳐 공방전이 게속되었지만 많은 전사잔느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
●배금석(제7-3-3대) : 본인은 '50.8.30일에 입대하여 제7사단 제3연대 중화기 중대에 배치되어 백석산 전투를 했다. '52년 말에는 어은산 남반 고지에 방어 임무 수행중에 아군 연대가 새로운 부대와 교체하는 취약시기에 적이 기슺하여 아군 연대에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김복규(제20-61-2-8중) : 본인은 '52.8.14일에 입대하였다. 양구 북방 M1고지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다. 휴전 임박 직전이라 각종 화력이 총동원된 가운데 피아간에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특히 소총 중대원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쌍방간에 전사자를 수습할 상황이 안되었다.
●정성호(제20-62-1-1중) : '52.11.21일 제20사단에 입대하여 양구 북방 M1고지와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 했다.당시 제2중대와 3중대가 적에게 뚫리어 예비인 우리 1중대가 투입ㄷ되었다. 당시 소대 공격후에 4명만 살았다. 후에도 사단 전체가 피해가 컸다.
●이규태(제20-61-2-7중) : '52.12.20일에 갑종간부 34기로 임관하였다. 휴전이 가까워진 '53.여름에 M1고지 전투에서 당시 미 제40사단이 전투를 하고 있었으며 낮에는 아군이 밤에는 적군이 주인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우리는 '53.6.10-6.23어간에 전투를 했다. ※ 크리스마스 고지일대에서 총 16차례의 혈투가 진행되었다. 전사 140명, 부상 802명, 실종 81명이고 적사살 980명이다.
마. 수도고지. 지형능선 쟁탈전 *742
금성 *714
*373 B A *747 *748
돌고지 *575 난초고지
지형능선 수도고지 북한강
과호리 *572
*271 독수리고지
교암산 마제형진지 오봉능선 *748 * 삼각봉 두경봉 피의고지
평강 회고개 금성천 *949 텍사스고지
관망산529 689 샛별고지 470 *973
오성산 월봉리 *883
저격능선 금성천 광대골 북한강
국8사 국5사
*462
'53. 6월 적의 공세가 금성돌출부로 지향될 무렵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의 중앙사단으로 금성돌출부 중 교암산 동쪽 765고지로부터 지형능선 남쪽 690고지-수도고지 남쪽 663고지-북한강(가리치)에 이르는 주저항선을 방어중이었다. 좌로는 국군 제6사단이, 우로는 제5사단이 병행 방어하였다.
[국군 제8사단 전투 경로]
제8사단은 '51. 9.18일 노전평지구 전투에서 854고지를 탈환한 후에 9월 22일 작전지역을 미 제1해병사단에게 넘기고 백석전투로 이동하여 9.30~10.28까지 백석과 1090(크리스마스고지)를 탈환한 다음, 국군 제7사단에 넘겨주고 전주.남원으로 이동하여 백야사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한다.
'52. 2.6일 다시 전방으로 추진하여 부평리에서 부대훈련 후에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어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812-854고지군('52. 9.21~22)을 인수받아 미노리선 방어를 하다 10월 4일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훈련 후에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수도사단의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선을 주저항선으로 전초진지 쟁탈전을 계속했다]
이때 제8사단은 제16연대가 지형능선을 포함하여 좌전방에, 제21연대가 수도고지를 포함하여 우전방을 담당하였고, 제10연대는 광대골 일대에서 예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미 5월 중순부터 6월 4일까지 전초진지에 집요한 공격을 계속하였다가 일시적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6월 10일, 우인접 제5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하던 날, 사단 정면에 1,300여 발의 포격을 가하고 수도고지에 이중 800발이 떨어졌다.
사단장(이명재준장)은 적의 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고 철저한 대비태세를 요구하였으며 적이 12일 대대적인 공격을 한다
[수도고지 피탈]
이때 수도고지(610)는 제21연대 제11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수도고지(610)는 '52. 10월, 적의 공세시부터 피아의 전투의지를 시험하는 결전장이 되어왔다. 따라서 고지는 동굴진지로 구축되었다.
수도고지는 적 주저항선 714, 748고지로부터 감제관측을 당해 주간에는 진지공사나 보급추진이 어려웠고 지상활동이 불가능했다. 당시 비가 억수로 내려 항공지원이나 포사격에 많은 제한사항이 발생했다.
적은 수도고지에 대대(-)규모, 바로 밑의 663고지에 2개 대대규모로 공격을 개시하여 6월 12일,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전초진지 제11중대장 전호철 대위도, 주저항선 663고지 제10중대장도 백병전과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결사항전 하였다.
결국 폭우로 인한 유개호 붕괴와 유무선 두절에 중과부족으로 수도고지는 적에게 피탈되어 대부분 동굴에서 전사하고 중대장 등 일부는 포로가 되었다. 663고지에서도 백병전이 벌어지고 중대장은 수류탄 공격을 받아 실신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에 절벽아래로 굴러 생환하였다. 고지는 피탈되어 사단 우측방이 뚫렸다
이에 사단은 예비인 제10연대(-)로 즉각 역습을 진행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지형능선 피탈]
중공군은 '53. 6. 13일 수도고지를 탈취한 여세를 몰아 이날 저녁 제16연대의 지형능선을 공격하게 된다. 지형능선은 교암산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일련의 횡격실 능선 중 2.5k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손가락 모양의 능선이다. 이 지형능선은 시발점인 주저항선상의 690고지, 능선 중앙의 730고지(최고봉), 끝부분에 해당하는 710(지형고지)의 3개 고지로 이어져 있다.
당시 제16연대는 좌일선에 제3대대, 우일선에 제1대대, 중앙에는 배속된 제10-3대대를 배치하였다. 제10-3대대장은 690고지에 2개 중대, 중앙 최고봉 730고지에 1개 중대, 우측 지형고지에 1개소대를 배치했다. 이 지형고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난초고지"가 있는데 적의 전초진지가 있었다.
'53. 6. 13일 21:25분부터 575고지에서 침투한 중공군이 사단 수색중대 진지를 공격하고, 이어서 난초고지에서 지형고지로 전초를 공격하고, 22:00시경에 690-최고봉(790)고지를 공격함으로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적의 진내돌입, 동굴진지에서의 육탄전, 진내사격 형태로 전투가 벌어져 좌일선 690고지는 확보하였으나 좌측 최고봉730-지형고지선을 피탈당했다.
'53. 6. 14일 제16연대는 최고봉에 대한 역습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적은 우측 수도고지와 연결하여 돌파구를 확장하려 기도하는 가운데 결국 제8사단은 지형능선을 상실하고 축차방어에 돌입하게 되었다.
[신방어선 아이슬랜드선 전환]
이렇게 하여 '53.6.15일 00:50분 제2군단은 현 주저항선을 지형능선-북한강 남안 462고지를 잇는 새 주저항선(아이슬랜드선)을 점령하도록 하고 군단 예비로 배속받은 국군 제3사단을 제5사단 좌측에 투입, 제8사단의 우전방 연대지역을 인수하고 아이슬랜드선을 점령하여 전방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제3사단 전투경로]
'51. 5월 중공군 5월 공세이후에 특별한 전투 없이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간성-거진지역에 있다가 '51. 9.13일 양양에서 부대교육훈련 후에 10.19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가칠봉지역의 국군 제5사단 전투지역을 인수받는다.
'51. 11. 23일 미 제7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 국군 제6사단의 북한강 동안지역을 인수받아 석장리-932-949-739고지를 연하는 주저항선에서 피의 고지(748)와 독수리고지(572)에서 '52. 9.28~10.3까지 전초진지 쟁탈전을 했다.
다시 '53. 1.1~4.12에 필승, 텍사스, 오봉능선에서 전초진지 쟁탈전을 하고, '53. 4.13일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 넘기고 '53. 6. 3~6. 15에 화천상리, 연천 동송으로 이동(이때 제22연대는 6.10일에 제5사단에 배속되어 883고지 전투를 하고 6.15일 북한강 서안으로 밀려나 제3사단에 원대복귀한다)했다가 제8사단의 작전지역 일부를 인수하여 '53. 6.25~7.3까지 529고지 관망산 전투를 실시하고 7. 13~7. 15에는 금성천 연안 여문리 전투를 하고 7. 29일 화천 동막동으로 이동한다
'53. 6. 15일 제3사단의 제2군단 배속으로 군은 국군 제2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미 제10군단의 책임지역을 북한강 동안가지 확장함과 동시에 국군 제5사단을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전환하여 국군 제2군단의 방어부담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3사단이 북한강 서안을 담당하게 되고 제5사단은 북한강 동안의 제36연대 방어지역만 담당하게 하였으며, 군은 6월 16일부로 국군 제1군단에서 제11사단을 뽑아 제2군단 예비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6. 15일, 국군 제5사단의 우익에는 미 제10군단 예비로 있던 국군 제7사단이 전방으로 투입되어 제20사단의 좌전방 주저항선인 938-1220고지를 인수하여, 제5사단과 제3사단이 아이슬랜드선을 점령함에 따른 돌출부가 생겼는데 이를 방어하게 된다.
이 무렵 '53.6.15~16일 제8사단 정면에 대한 적의 공격은 소강상태로 전환되는데 아군의 끝임없는 지상포격과 항공폭격이 적의 공세기도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이 기간에 북한강 서안의 수도 고지군과 동안의 949-973-883고지군을 빼앗겨 '51. 추계공세에 탈취한 방어선이 정면 13km에서 4km를 후퇴하게 되었다.
이 8일간의 6월 전투에서 국군은 7,30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적 손실도 확인사살 6,604명, 포로 26명, 추정사살 7,200명으로 총 13,000여 명에 달했다.
[국군 제7사단 전투경로]
'51. 5월, 중공군 5월 공세시 자은리-풍암리-창촌으로 철수, 5. 30~6. 3어간에 내평리로 이동, 미 제1해병사단의 화천저수지 남안 진지를 인수하여 진격, '51. 8.6~9.19까지 백석산 남쪽 양가래 고지와 883고지 전투, 백석산지역 국군 제8사단에 인계, 제8사단이 백석산을 탈환하고 1090고지 크리스마스고지까지 진출하자 '51. 11. 18일 양구에서 교육훈련을 마치고 제8사단지역을 인수하여 크리스마스 고지군을 방어한다.
'52. 11. 15일 미 제25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 다시 '53. 2. 1일 미 제25사단과 임무교대하여 전장 복귀, '53. 5.18일 작전지역을 국군 제20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 '53. 6.16일 중공군 대공세로 국군 제5사단과 국군 제20사단 사이로 전장 복귀하여 '53. 6. 25~30일 어간에 938 선우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53. 7. 17일 작전지역을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금성천 남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수도사단 이동경로]
'51. 5월에 설악산 일대에서 5.16일 중공군 5월 공세시 대관령 선으로 철수한 후 반격작전으로 6월 초에는 향로봉전투와 8월에 서화리 924고지 전투를, 10월에는 월비산을 탈취한다. 11월 19일에 제11사단에 인계한 후 해상으로 마산과 여수로 이동하여 '51.12.2~'52. 3.14까지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다 '52.3.17에 화천으로 이동하여 미조리선에 배치된다. '52.7.7~10.14까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전투한다. '52.10.25일에 제8사단에 인계후 격기 양주에서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후 다시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사창리로 이동하여 미조리선에 '53.1.1~7.27간에 배치되어 금성지구 전투를 수행했다.
(가)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참전용사 증언]
● 박재춘(제8-21-3-9-3소) : 휴전 직전 수도고지 우측 능선 663고지에서 병력의 피해가 컸다. 소대원 중 생존 인원은 2명 밖에 안될 정도며 사단 전체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53.5.27~6.12)
● 함은식(제8-21-2-7-1소) : '52.2. 18일에 입대하여 제8사단에 배치되었다. 수도고지 전투를 실시한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투입시 난초고지 내 교통호에 아군의 전사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동준(제8사) :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8사단 맹호부대(수도사단)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52.7.7~10.14일 사이 수도사단이 전투를 하며 1개 대대가 전멸당했다.
[교통호 안이 스펀지로 변해 있었다]
●이상희(제8-10-2-6중) : '52.3월에 입대하였다. 제8사단에서 '53. 7월 초에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되어 교통호에 들어가니 지면에 발을 내딛으면 스펀지와 같이 푹푹 들어갈 정도로 전사자가 발생하여 방치되어 있었다. 특히 7월 13일 적이 공격해 오면서 주저항선 전방에 전초진지에서 적 포탄이 낙하하여 벙커에 김종배 소대장 등 4명이 전사하여 매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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