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을 떠나며...
2024년말 나라가 위태로운 고비를 한나 둘 넘길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깊은 슬픔가운데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지만 언제 새해가 왔는지 모를 정도로 시국은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다.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내게는 노천이란 곳이 또 하나의 영혼의 고향이었다. 몇 달 전 수십년 만에 켐퍼스 노천을 다시 밟았다. 학창시절 꿈꿨던 비탈진 잔디밭은 계단식으로 바뀌었고 돔형태의 무대는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옛날 옹기종기 앉아 모임하던 때를 추억하며 묵상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화요모임과 사랑방에서 후배들을 만나 노천에서 꿈꿨던 삶, 그때 이런 기도를 했고 지금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다고 삶을 나누고 도전을 주고 받고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았다. 대학때 서원했던 기도가 수십년을 지나 응답되었고 이로인해 인생의 한 chapter 가 마무리 된 것이다.
노천은 특별한 곳이다. 거기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곳이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메시지는 내 맘속에 간직된 영원히 잊지 못하는 문장이다. 85년 86년 당시 켐퍼스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한쪽 한구석에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라다니고...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하며 운동권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 노천강당에서는 한 길 밖에 없네 예수 밖에 없네 다르게는 살길이 없네 예수는 살아 있네 예수는 다시오시네 푸르른 생명의 계절 넘치는 사랑의 물결 이강산에 부는 바람 성령의 바람... 하며 풀밭에 앉아 찬양과 기도가 울려퍼졌었다. 전혀 다른 영의 세계가 펼쳐졌고 그렇게 영적인 전쟁은 지속되었다. 복음이냐 주사파냐 갈림길에서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순모임, 여름수련회, 거지순례전도등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 운동을 펼쳤고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을 이끌어 왔다.
그러한 운동을 통해 한국대학생선교회, 엑스폴로 74, 80, 전국 나사렛모임, 성시화운동, 실업인 선교회, 직장인 선교회, 국가 조찬기도회등 수많은 모임이 생겨났고 세상이 변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주사파이론 추종자들은 전대협, 한총련을 거쳐 사회 곳곳에 들어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조용한 혁명을 70년동안 준비하고 실천해왔다. 오늘날 윤대통령의 비상계엄을 통해 드러나는 좌익 사상에 물든 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전교조, 언론노조, 국회, 경찰, 사법부, 심지어 군까지 요소요소에 곰팡이처럼 퍼져 버린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반면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했다. 온누리교회, 지구촌교회, 사랑의 교회등이 다 학생 복음운동을 했던 분들이 세운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울때 주님을 의지하고 "할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는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온 복음의 원동력이 어느순간부터 변질되기 시작했다. 배가 불렀다. 등이 따뜻해졌다. 그러자 조금 더 갖자, 조금 더 성장하자, 조금 더 성공하자 하며 성공을 위해 복음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회는 비지니스가 되었고 어떤이는 교회와 교인을 팔고 사기까지 한다고 한다.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자 도덕적 타락이 찾아왔고 성도들이 세상법정앞에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고 성직자들의 타락, 이단의 횡횡으로 개독교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또한 로마 교황의 영이 교회에 침투해 성직자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앉아 명예를 얻고자 교회정치를 했다. 잘못을 해도 책임지지 않고 제식구 감싸기는 하면서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기 보다 타협하다 보니 좋고 좋은게 좋은 거라고 동성애가 판을 치고 마약이 증가하는 사회적 병리가 생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거짓과 위선은 더욱 번져가고 성공제일주의와 만모니즘에 빠져 성도들은 귀머거리 장님이 되어 버렸다.
얼마전 학창시절 함께했던 신앙인들이 모이는 단톡방에서 시국의 위험한 것을 놓고 기도하자고 글을 올렸더니 아니 왜 정치 이슈를 가지고와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냐 냉소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점잖게 꾸짖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를 뿐 아니라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번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정치적인 내용을 카톡에 올리니 안타깝다 정치구호가 아닌 삶에서 밀알로 썩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자 다른 분은 정치적 견해를 강요받는 느낌이라 말하고 또 다른 분은 맞장구치며 역시 오랜 연륜과 철학이 있는 조언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그 공간에서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에 대해선 말할 공간이 없음을 깊게 느꼈다. 꽉막힌 감옥같은, 정치는 하나님이 관여 못하는 치외법권지대 같은 느낌...
플라톤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급한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 말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나치가 미친듯이 독일을 2차대전으로 몰고갈 때 미친자에게 운전대를 맡길수 없다. 목사란 것은 신도들이 죽은 후에 장례를 집행하며 관에 꽃을 놓는 자가 아니요 죽기 전에 죽지 않도록 조치하는 자이다 라고 말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어 히틀러 자살하기 몇일 전에 감옥에서 순교당했다. 그는 복음을 삶속에 심고 열매를 맺고자 적극적으로 자신이 믿는 믿음을 현실세계속에 가져와 실천한 것이다.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국가 의식이라 권력에 머리숙이고 일본 천왕에게 엎드린 자들이 무수히 있었는가하면 주기철 손양원 같은 소수의 분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그 다수는 소수의 신앙을 지킨 자들을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리고선 일이 진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임진왜란때 민초들이 성을 지켜놨더니 도망갔던 관리가 여기 있던 내 보따리 내놓라 하고 민초들을 겁박하고 그 영광을 가로챘던 것과 같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 만왕의 왕이시다. 퓨리턴 정신은 삶의 모든 영역이 다 주님의 주권하에 둔다. 결코 정치도 예외가 될수 없다.
조선시대는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사람이 금수로 취급되니 어찌 법이라 할것인가(人類而處以禽獸, 豈法也哉) 하고 노비제도를 개탄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국민의 거의 절반이 노비였다. 1633년 한성 호적부에는 73%가 노비였다. 말을 알아듣는 짐승이였던 것이다.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민낯은 奴婢告訴禁止法(1422), 從母法(1432)을 만들어 노비의 수를 확대시켰다. 이처럼 조선인 속에는 노비 근성이 있다. 나는 약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바쁘다, 나는 힘이 없다. 그러니 니가 도와줘라. 난 그냥 시키는 것이나하며 주인이 던져주는 국밥이나 먹고 쎄쎄 하겠다.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고 나라가 위험하고, 국가 체제가 붕괴되려 해도 남이 싸워 달라, 난 안 싸울것이다, 미국이 도와 주겠지, 혹은 미국 우리때문에 있는거 아냐? 오만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미국 믿지 마라. 소련 속지마라. 이게 어른들 교훈이다. 지금 자유대한민국에 살면서도 동일한 종의 의식, 거지 근성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주 안에서 스스로 자립하는 독립정신을 갖은 자가 자유인이요 그렇지 못한자는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종인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 버린 교인들은, 영원한 스승 김준곤 어르신의 경고도 무시하고 아 난 몰라. 왜 시끄럽게 해, 왜 계엄령을 발령해서 귀찮게해..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종으로 살려고 한다. 오죽하면 어르신이 유언으로 국회의원 2명만 만들어 국회에 넣어 국회가 썩지 않게 하라는 간절한 부탁을 자기가 가르친 제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소천하셨을까.... 천국에서 지금 어르신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 보고 계실까?
부정선거가 날뛰고 거짓과 죄악이 가득차도 나라가 망해도 그냥 뒤에서 기도만 하면된다. 세상은 정치구호로 바뀌지 않는다 밀알로 썩어져야 한다고?...복음을 세상에 접목시키지 않고 과연 그것이 썩어지는 것일까? 성령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네가 의롭게 살고자 하는냐?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내 삶에 핍박이 있는가? 불의와 싸우지 않고 굴복하는데 핍박이 있을 수 없다. 존재는 세상의 빛과 소금 아닌가? 평화를 얻기 위해 진리를 쉽게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같아야 하고 선지자 같아야 하고 제사장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주님은 내게 도전을 주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믿는자라 하면서도 머리만 발달한 웰빙성도이고 왕처럼 위엄도 없고 선지자처럼 죄를 지적하지도 않고 그저 짝퉁 제사장처럼 신앙이란거 붙잡고 밥벌어 먹고 살며 남을 좀 도와주며 스스로 믿음을 지킨다 착각하고 산것은 아닌가 돌이켜 본다.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 기회주의자가 될 듯싶다. 눈치는 빨라 어떻게 하면 살아남고 어떻게 하면 이익을 얻고 성공할까에 집중하게되고 복음과 멀어질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요구해도 아멘했던 자들, 김일성이가 서울에 진격할 때는 발빠르게 움직여 환영예배를 드린 300명의 목사들, 문재인이가 코로나19 펜데믹 핑계로 예배드리지 말라 공갈을 칠때도 벌벌 떨며 대부분 무릎꿇고 아멘했던 자들 그런자들이 될 것이다. 너는 네 본토 친척아비집을 떠나라.
하지만 코로나 펜데믹에도 어떤 성도들은 교회가 폐쇄됨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방역을 잘 지켜가며 주님께 예배를 드렸던 진짜 신앙인들이 있다. 쫓겨나면 거리에 2미터씩 떨어져 앉아 예배를 끊지 않고 여느 때와 같이 드렸다. 눈보라가 오고 비바람이 와도 그들은 모여 기도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며 믿음을 실천했기에 그 믿음의 열매가 맺힌 것을 보았다.
2025년 새해 존재는 지금까지 무엇을 믿었는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묵상해 본다.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네가 날 사랑 한다면 내 어린양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