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④물레방아-우리사랑 농익는다
으스름달밤이다. 간신히 윤곽만이 보이는 남녀가 물레방앗간으로 다가온다. 사방을 경계하는 눈길로 두리번거린다. 그들 외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먼 데서 개 짖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온다. 서로를 확인한 두 사람은 재빨리 방앗간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서로의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되어 뒤얽힌다. 그때쯤 두 사람을 좇던 카메라가 방앗간 밖으로 옮아간다. 돌확을 찧고 또 찧는 공이의 힘찬 운동을 클로즈업한다. 이른바 토속 에로 비디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작품에 따라 인물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물레방앗간이 남녀의 밀회의 장소로 즐겨 쓰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째서 그러할까?
이격성(離隔性)과 역동성이라는, 물레방아가 지닌 두 가지 성질을 그 까닭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레방앗간은 대체로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지어지기 마련이다. 마을이란 강이나 개울과 같은 수원(水源)에 의지해 형성되지만 동시에 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해야 하는 물레방앗간이 마을에서 떨어진 자리에 세워짐은 당연한 일이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남녀의 만남이 일쑤 물레방앗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물레방아는―물레방아뿐만 아니라 디딜방아나 퉁방아, 연자방아 등도 마찬가지로― 구멍이 파인 확과 그 구멍에 든 곡식을 찧어 빻는 몽둥이 형태의 공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구멍과 그 구멍을 드나드는 몽둥이라는 요소가 남녀간의 성적 교접의 비유로 즐겨 동원되는 것 역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경기 민요 <방아타령>에 “이 방아 저 방아 다 버리고 철야 삼경 깊은 밤에/우리 님은 가죽 방아만 찧고 있네”라는 노랫말이 들어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나도향이 1925년에 발표한 단편 <물레방아>는 물레방앗간이 지닌 에로틱한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소설은 마을 최고의 부자인 신치규가 자신의 집 머슴인 이방원의 처를 유혹하여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방원이 처의 미색에 혹한 신치규와 치규의 재산에 구미가 동한 방원이 처는 방원이를 내칠 흉계를 꾸미는데, 두 사람이 방앗간에서 나오는 장면을 방원이에게 들키면서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격분한 방원이는 치규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치도곤을 안기고 자신은 순검에게 끌려 가 옥살이를 한다. 석달 뒤 출옥한 방원이는 그 사이 치규와 같이 살게 된 처를 찾아가 둘이 함께 도망치자고 제안하지만, 그의 마음이 이미 자기를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여자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옥에 갇힌 방원이가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러운 재앙을 돌이켜 보면서 “그것이 모두 자기가 돈 없는 탓인 것을 생각”하는 데서 보듯, <물레방아>는 경제적 불평등이 성적 불평등과 박탈로 이어지는 양상을 포착한 작품이다. 더 나아가 식민 치하 농민들의 구조적 가난과 전통적 성윤리의 붕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 작품을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원이 처를 중심에 놓고, 그의 선택의 자유와 그것을 착취하거나 가로막는 치규와 방원이의 욕망을 비판하는 식의 페미니즘적 독해도 물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더 중요한 것은 물레방앗간이라는 공간이 주인공들의 욕망이 만나서 야합하거나 부딪쳐 길항하는 장(場)이 된다는 사실이다. 치규와 방원이 처의 색욕과 재물욕이 물레방앗간을 매개로 만남은 물론, 두 사람의 일치된 욕망과 방원이의 자존 및 순정이 맞부딪치는 장소 역시 물레방앗간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방원이가 처를 납치해다가 설득하던 끝에 여자도 죽이고 저도 죽는 장소 역시 물레방앗간이라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물레방아>가 밀회의 피해자인 방원이의 시점을 빌려서 서술되는 반면,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밀회의 당사자가 과거의 아련한 추억으로서 물레방앗간에서 이루어진 만남을 회고하고 있다. 게다가 그 추억이 어디 보통 추억이던가.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이라는 표현은 그 추억이 지닌 유일성과 절대성의 무게를 담보하고 있음이다. 치규와 방원이 처의 밀회가 비참한 파국으로 귀결되는 반면, 얼금뱅이 떠돌이 장꾼 허생원이 성씨 처녀와 나눈 스무 해 전의 사랑은 달빛을 받은 메밀꽃밭처럼 추억의 광휘로 번뜩인다. 그런 점에서 <물레방아>가 사실주의라면, <메밀꽃 필 무렵>은 낭만주의에 가깝다. 허생원이(그리고 아마도 작가조차도) 아비 없는 젊은 동무 동이가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를 성씨 처녀가 낳은 자신의 자식으로 간주하는 식의 설정이 용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물레방앗간은 나그네나 거지들이 하룻밤 묵어가는 간이 숙소 구실도 하였다. 김유정의 단편 <산골 나그네>는 병이 깊은 데다 거지 신세가 되어 물레방앗간에 기거하는 젊은 부부를 등장시키고 있다. 나그네의 처지로 산골 주막에 찾아든 젊은 여자가 그 집 모자의 환심을 산 끝에 아들과 혼사까지 치르지만, 결국 남자의 새 옷을 훔쳐서는 물레방앗간에서 기다리던 병자 남편과 함께 도망을 치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여자의 욕망이 주막집 모자의 욕망을 착취하고 배신한 셈이다.
오늘날 물레방아는 관광지가 아니면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이문재의 시 <농업박물관 소식―허수아비가 지키다>는 물레방아며 원두막, 허수아비와 같은 풍물들이 다만 재현, 전시해야 하는 과거의 유물로 전락한 현실을 반어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농업이 한창입니다/연못도 있고 물레방아도 돌아가고/원두막 한 채도 번듯합니다/밀이며 목화 콩 토란에서 꽃잔디 자두며 벼/없는 농업이 없습니다/벼가 익어가자 농업박물관 앞뜰/작은 논에도 허수아비가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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