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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빌립보서 1:12-21
바라봄의 법칙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중원, 하신주 씨가 지은 「그래도 괜찮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결혼 전에 나는 예수전도단 1기 DTS를 마친 후 스텝으로 섬긴 적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예배, 말씀, 중보, Q.T,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믿음이 좋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결혼 후 남편이 출근하면 종일 혼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나는 Q.T도 기도도 전혀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실망감이 절망으로, 절망이 우울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장독대로 나가 비를 다 맞으며 울다 지쳐 방에 들어왔습니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 데나 펼쳤더니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실망하십니까? 원래 당신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원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맞아! 내가 죄인이지, 교만했구나. 원래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새삼 내게 실망했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건데.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죽으신 건데.’
-출처: 김중원, 하신주, 「그래도 괜찮아」(서울: 두란노, 2013);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19년 8월호), p. 79에서 재인용.
저는 볼일이 있어 가게에 들어가거나 식당에 들어갔을 때, 가끔 가게 주인으로부터 “혹시 목사님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적잖게 당황하게 됩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이 먼저 나를 목사로 봐주니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목사인 저를 다른 사람이 도둑놈으로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부담감도 느낍니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목사로 봐주니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도 모르게 저를 목사 같은 사람, 괜찮은 사람,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들려는 강박관념 속에 가두어두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만족적인 삶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경건한 삶은 자기 만족적인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마치 거울이 빛을 반사 시키듯이,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바울은 만 2년간 로마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교대로 그를 감시하였지만, 바울은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바울의 능력과 기세에 눌려 복음을 전하지 않다가, 바울이 갇히자 마치 자기 세상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수록 바울에게 더 큰 괴로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허영심과 시기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갇혀 있던 바울에게 적잖은 괴로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다(헬, 카이로)”라는 단어는 현재시제이고, “기뻐하리라(헬, 카레소마이)”라는 단어는 미래시제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자기의 괴로움을 더하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시선을 달리하면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변장 된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12절에서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것을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감시하고 있던 로마의 군인들과 로마에 있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다수의 로마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묶었지만, 하나님의 복음까지 묶을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는 진전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 너머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여러분이 현재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 된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매임과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바울처럼 현재에도 기뻐하고, 미래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십니다.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했고, 진실함으로 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각기 다양한 동기와 자세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혹 우리의 눈에 비친 어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18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우리말 성경).”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온전함으로 인해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새로운 생사관(生死觀)을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 안에서 석방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절에서, 버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석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두 가지를 소원하였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어떤 일에도 자신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길 원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늘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우리는 고난으로 인해 불평하거나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내 생각과 계획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바울은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과거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 즉, 학벌, 문벌,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한 나라 코트디부아르는 2002년에 큰 내전이 벌어져 수만 명이 숨지고, 나라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가정이 무너져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곳에서 사역하던 박광우, 고혜영 선교사는 학교에 모여든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생일마다 잔치를 열어주었는데, 꽤 많은 아이가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선교사님 부부는 주님 안에서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성경 말씀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자, 아이들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낙심하지 않고 주님이 창대하게 하실 내일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고, 그들 중에 선교사 훈련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송된 이들도 있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박광우‧고혜영, 생명의 삶 2019년 8월호, 180.)
우리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우리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삶과 죽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이 세상에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더 유익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23~24절).
우리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이 세상에 조금 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풍자화가 가운데 맥스 비어봄(Sir Max Beerbohm, 1872-1956)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은 「행복한 위선자」라는 소설은 비양심적인 악인 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헬은 야비한 마음을 가진 남자로서, 사람들이 그의 얼굴만 보아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헬은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이었던 ‘미어’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서운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며 헬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헬은 그녀를 꼭 갖고 싶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구애에 성공해 드디어 그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위선을 감추고, 참을성 있고 너그럽게 보이려고 주의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끊임없이 나쁜 성질을 감추었습니다.
어느 날, 헬의 옛 친구가 찾아와 아내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가면을 벗겼을 때 어떤 얼굴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거룩한 얼굴이 나왔습니다. 예전의 포악하고 야비했던 헬의 모습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는 인자하고 거룩한 남편의 얼굴이 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사랑의 얼굴이 나옵니다. 그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평화의 얼굴이 나옵니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옵니다. 사랑하면 바뀝니다. 모습도 바뀌고, 성품도 바뀝니다.
-출처: 이성희, 「더 플레이스」(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0);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19년 8월호), p. 61에서 재인용.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매임이 도리어 유익이 된다고 말하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이 자기 생각 너머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가진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21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다.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과 동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