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운명은 얼마 전부터 쇠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들이 있다.”
이것은 서기전 28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판에 새겨진 글이다. 세상에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것은 현대 사회만의 일이 아니었다. 종말론은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학문 중 하나로, 서기전 고대부터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 특히 현실이 극도의 불안이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현존하는 세계와 인간 및 만물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모두 멸망하게 된다’는 종말론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었다.
지금까지 다양한 종말론들이 있었고, 어떤 종말론은 ‘내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말의 긍정적 효과처럼, 더 나은 삶의 태도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지만, 어떤 종말론은 두려움을 이용해 포교와 개종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들의 종말론들을 소개하고, 일부 종말론이 낳은 혹세무민의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종말론은 동서고금에 걸쳐 존재해왔고, 문화와 문명마다 각자의 종말론을 믿는다. 사람들은 천문학 등 과학적 증거를 이용하거나, 선조로부터 내려온 예언을 믿거나, 선조들의 기록을 해석하거나, 직접 예언을 듣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자의 종말론을 주장해왔다. 이 중 종교들에서 주장하는 종말론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세상이 말세다’라는 표현의 ‘말세’는 불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죽은 후의 시대를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세 시대로 나누는데, 이때 말법의 시대가 말세인 것이다. 정법 시대는 부처의 가르침이 세상에 구현되는 불교에서 완벽한 세상, 상법 시대는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긴 하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정도까진 아닌 세상, 말법 시대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세상이다. 말세가 오면 세상이 혼탁해져 정치와 도덕과 풍속이 타락하고 악법만이 성행하며 정의가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쾌락을 좇고 성적으로 문란해지며 사회가 혼란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종말 때에는 미래의 또 다른 부처인 미륵보살이 와서 세상에 새롭게 불교를 세우고 무지와 증오와 세속의 고통이 없는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세상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
북유럽의 여러 신들을 믿었던 북유럽 문화권에서는 라그나로크라는 종말의 날을 믿었다. 북유럽의 전설에 의하면 혹독한 겨울이 3년간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싸우며 일말의 도덕심까지 팽개친다. 늑대들이 태양과 달을 삼켜버려 온 세상은 암흑에 빠진다. 수탉 3마리가 울면서 신과 거인들을 부르고, 죽은 자들이 깨어난다. 엄청난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산들이 무너지고 바다에는 세찬 파도가 치고 해일이 일어난다. 위험을 감지한 빛의 신은 나팔을 불어 신들을 소집한다. 북유럽 최고신 오딘, 천둥의 신 토르, 오딘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천국의 영웅적인 신들이 황금 갑옷을 입고 아름다운 백마를 타고 전장에 도착한다.<사진1> 계속해서 모든 신들과 거인들과 악귀들이 죽음의 전투를 위해, 저주받은 노르웨이 광야에 도착한다. 격렬한 싸움으로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이 죽었고, 온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 아직 살아 있던 것마저 불에 타 죽고, 지구의 모든 땅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세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두 명의 인간과 몇몇 신들이 있었다. 악이 사라지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정화된 새로운 세상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살아남은 이들은 평화로운 조화 속에 번창하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죽었던 이들의 영혼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착하게 산 사람들은 신들과 함께 호화롭게 살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악몽과 같은 지하 감옥으로 추방된다.
다음은 이란(고대 페르시아)의 민족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이다. 서기전 600년경,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이자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종말과 최후에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 의하면 종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000번째 겨울이 끝나고 (…) 태양은 점점 볼 수 없게 되고 (…) 1년과 한달과 하루가 점점 짧아지고 (…) 땅은 메말라가고, 작물은 씨앗을 생산하지 않고 (…) 사람들은 점점 더 거짓말과 나쁜 짓을 한다.” 마지막으로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선이 승리하고 하느님은 무쇠와 신성한 불로 세상을 정화한다.(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사진2>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영혼의 심판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동정적인 신이므로 죄인이라도 영원히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3일 후 용서를 받고 부활할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정화하면 모든 고통이 끝나고 세상은 완벽해진다.
힌두교는 서기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 고대 인도 북부에서 발생해, 서기전 1,500년에 주요 경전인 베다를 정립한 인도의 민족 종교이자 최대 종교다. 힌두교 역시 종말론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것은 무가 되었다가 다시 유로 태어나는 순환을 되풀이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의 최고신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있는데, 브라흐마가 세상을 창조하고 비슈누가 세상을 관리하며 시바가 세상을 파괴하면, 브라흐마가 처음부터 다시 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 주기는 42만 7,000년이며 한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시대에서 완전히 타락한 시대까지 네 시대가 있다. 가장 타락한 네 번째 시대는 칼리 시대로, 문명의 정신적인 쇠퇴, 폭력, 역병, 자연재해로 점철되다 인류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칼리 시대에서 악과 혼돈이 한계에 달하면 비슈누가 백마를 타고 칼을 든 영웅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모든 악을 멸해 새로운 세계를 쌓아 올린다고 한다.<사진3>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이자 아브라함계 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도 종말론이 있다. 유대교에 따르면 종말 때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망명자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이스라엘은 북쪽 이방인들과 아마겟돈이라는 전쟁을 한다. 이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묻는 데만 7개월이 걸릴 것이다.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이스라엘의 적들이 모두 멸망한다. 신이 내려준 메시아가 올 것이며 그의 지휘하에 새로운 7번째 천 년을 시작할 것이다. 그 메시아는 다윗 왕의 후손일 것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올 것이고, 신실한 유대교 신자일 것이며, 악과 폭정은 그의 존재로 인해 소멸하고, 전쟁과 굶주림, 고통, 죽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가 모든 문화와 국가를 포용하고 전 세계가 하느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종말론들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종말론을 파생시켰으며, 현존하는 종말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유대교의 이단인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그들의 경전인 성경에서 근거한다. 성경에는 종말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모두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리라 예언했다.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날이 올 것’이라며 경고했다.
“그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 누가복음 21장 25~35절 (공동번역 성경)
신약 성경의 절반을 저술한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쓴 서한의 일부이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공동번역 성경)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임한다는 예수 재림의 날, 신도들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예수를 만난다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교에서는 ‘휴거’라 부른다
첫댓글 잘보고가요
잘 읽고갑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