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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아버지의 壽衣
이원우 아우구스티노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을 넘겼다. 중년 부인이 된 셈이다. 직업은 교육공무원. 친정 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아들 녀석 둘을 맘 놓고 두 분에게 맡기고 출근한다. 남편은 회사원이다. 그도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덕분에 ‘안심(安心)’이라는 두 글자, 그 울타리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 그래서인지 아들 녀석들은 무럭무럭 잘 자리고 있다. 각기 중학생과 초등학생이라,
가끔 다툴 수밖에. 걱정이 안 되느냐고? 천만에 말씀이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은 녀석들 둘이서 우애(友愛)를 두텁게 하는 과정을 엮는 중이라며 되레 흐뭇하게 여긴다. 두 녀석의 사이에, 부모들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개입 혹은 관여, 거중 조정함으로써 우리가 좋아하는 말 그대로 만사 해피엔딩이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별다른 사람이다. 이 말을 하면 나더러 불효 아니냐며 오해를 할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겐 그 형용사가 참 어울린다. 물론 당신을 뭉뚱그려 대변(代辯)할 다른 표현이 있을지 모르지만….예를 들어 ‘불굴의’, ‘억척스러운’, ‘외골수’, 등등.
제헌절! 제헌절을 이야기를 서두에 끄집어내다니, 우습긴 하다. 하지만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하는 나를 흉보아도 좋다. 이렇게 잡문 한 편이라도 꾸며내어 내 아버지를 향한 여럿의 의아심에 항변이라도 하고 싶다. 그래 나는 이를 악물고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이다. 참 그날, 코로나 19 환자가 학생 중에 생겨 출근하지 않았다.
남편은 일곱 시 반을 조금 넘기면 집을 나선다. 자기 자동차를 한 시간 반 정도 운전해야 하는 시흥에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그날 새벽 남편의 현관문 여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듣는가 싶었는데, 이어 심상찮은 소음(騷音)이 내 귓전을 파고드는 게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 운동복 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아니나 다르랴. 아버지와 어머니 등 두 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거기서 벌이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는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쓴 채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우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이미 밑바닥까지 깨끗이 닦아 놓았던 군화를 신고 있었다. 한데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잘 안 들어가 고생을 하는 모양이었다.
두 분의 그런 모습이 그러나, 내게는 그런데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해서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애써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지난 삼일절에도 현충일에도 그랬었다. 6월 25일 아침엔들 예외일 수 있었으랴. 여기서 이런 아버지를 두고 주위에서 수군덕거리는 이런 몇 마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아버지는 괴짜이시다.”
이는 이웃이 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제사 때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이런 걸 화두로 삼는다. 아버지 손위인 고모나 큰아버지가 이런 농담을 곧잘 한다.
“자기가 제대한 부대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데, 네 아버지는 그 반대니 정말 희한하구나.”
우리 아파트에 아버지의 동료 소설가가 사는데, 그는 직업 군인 출신답게 이러기 예사다.
“명예 중사 진급 이야기가 육군본부에서 있었는데, 그걸 마다했다니 박 선생 아버지는 어쩌면 실속을 전혀 모르는 한갓 파인(巴人)인지도 모르지, 안 그래?”
내 아버지를 그렇게 폄훼(?)해도 나는 별로 불쾌하지 않다. 그저 예사롭게 그리고 건성으로 듣는다. 왜냐고? 그건 엄연한, 변명 따위로 깨부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재가 부족한 내가 이 ‘아버지의 수의’의 끝 자를 쓰고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읽어 주는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그 당위성을 말이다.
다시 그날 거실 풍경.
아버지는 이윽고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노병이 되어 거실에 서 있었다. 외관상으로 말이다. 게다가 얼굴 군데군데에 적당하게 번진 검버섯은, ‘노(老)’와 ‘병(兵)’ 두 글자로 이뤄진, 결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징표이고도 남았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only fade away!
나는 두 분 앞에서 맥아더 장군, 아니 아버지의 흉내를 기어코 내고 말았다. 글쎄 그 정도의 발음은 나도 본토박이 미국 사람 못지않게 낼 줄 안다. 아버지를 따라 워낙에 많이 부르짖다시피 해왔기 때문이다. 두 분은 흐뭇하다는 표정을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군모를 쓴 상반신 사진이 인쇄된 아버지의 명함을 책상 서랍에서 한 장 꺼내어 거기 쓰인 당신 고유(固有)의 문구를 크게 읽었다.
“노병은 일흔을 넘겨야 새로워진다!”
맞다! 아버지는 일흔 살 때부터 그 복장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군부대에 드나들며 장병들과 부둥켜안거나 뒹굴었다. 그런가 하면 몸은 늙을수록 아버지는 전우들을 위하는 당신 혼자만의 무언가를 마련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승을 떠나는 날엔 군 장병을 위한 특별한 제안이라도 할지 모른다. 아니 그건 추정이 아니라 나의 확신이다. 그건 당신이 항상 주장하는 병영문학(혹은 전쟁문학)의 정착 내지 확산을 도모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전우’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소재)가 되는 문학 말이다. 아동문학이 어린이의 삶을 기리는 어른(작가)들의 글임을 떠올려 보면 내 말에 더러는 긍정을 하리라. 아버지의 주창엔 뚜렷한 근거라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말고!
정말 여기서 잠깐! 당신의 ‘전우’는 생사를 초월해서 적용된다. 먼저 간 임(호국영령 내지 전몰장병)들은 물론, 지금도 총검 혹은 펜을 움켜쥐거나 밤낮 없이 경계 및 작전 임무에 여념이 없는 장병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당신이 어지간한 현충원이나 호국원을 찾는 것은 그 정신을 살리려는 의도된 행동이다.
잠깐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어머니는 곱게 보관해 놓았던 태극기를 봉(棒)째 꺼내서는 게양을 하려 했다. 자못 엄숙한 표정의 두 분을 보자, 나도 얼른 내 방에 들어가 정장으로 바꿔 입을 수밖에. 그런 소란이 아이 둘의 잠도 깨워버렸다. 두 녀석이 어찌 이 거창한 국기 게양식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군부대에 드나들면서 얻어 온 하사 계급장이 달린 군모까지 아들 두 녀석이 쓰고 보니, 그럴싸하다는 분위기에 모두가 동화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곧장 이어졌다. 아버지가 말한 것이다.
“우리 오늘은 정말 제헌절, 기념식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헌절 노래는 부르자꾸나.”
뉘라서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것인가? 큰애가 피아노 앞에 앉고, 나머지 넷은 태극기 수기(手旗)를 각기 들었다.
수기?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당신이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경축식 등에 갔다가 챙겨온 것이다. 내친김에 얘기지만, 우리 집 구석구석에 그 수기가 수십 개다.
드디어 큰애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잇따라 ‘제헌절 노래’. 비구를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 예순 남은 일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 오천 만(*원곡은 삼천 만) 한결같이 지킬 연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 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초인종 소리가 나기에 문을 열어보았더니 앞집 청년이다.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하는데, 한 달만 지내면 제대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군복 차림인 걸 보니 전우(戰友)인 모양이다. 청년의 손엔 삶은 옥수수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청년은 별 놀라지도 않고 쟁반을 내게 건네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그런 청년에게 잠시 들어왔다 가라는 눈짓을 했다. 둘은 군화를 쉽게 벗었다.
아버지는 식탁에 앉은 둘에게 녹차 한 잔씩을 달여서 대접을 했다. 정약용이 갈파한, ‘차를 마시는 국민은 흥한다’는 이야기를 청년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던 터다. 말하지만 아버지의 차(茶) 제자이기도 한 청년이다. 다소곳한 자세로 차 한 모금을 마신 청년은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한마디 했다.
“할아버진 정말 대단하세요. 몇 년째 댁에서 이런 간이(簡易) 기념식 혹은 경축식을 올리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동대(예비군 중대를 말하는 듯)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혹시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진 않는지 모르겠는걸.”
“그러기에는 할아버지의 일상이 너무나 군과 밀착되어 있으세요. 만약 그런 이웃이나 친구가 있다면 그가 정상이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자네 언제 25사단 청파 대대에 갈 텐가? 파주 말일세. 나와의 약속이 있으이. 옛날 ‘장마루촌의 이발사’라는 영화가 있었다고 했는데 기억나는가? 자네가 그 부대에 복무할 때, 면회 가서 점심 사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그걸 못 지켰네.”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시절 이후의 몇 십 년 세월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제대하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그러게나.”
그랬다. 내가 나기도 전, 아버지는 그 영화를 엄마랑 같이 감상했다고 했다. 주인공이 전장에서 싸우다가 척추엔가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를 했는데, 성(性) 불구자가 되었던 것! 그러나 둘 아이엔 약간의 오해만 있었을 뿐 둘은 헤어지지 않았더라나?
참 앞집 청년은 25사단 예하 청파 대에 일병으로 복무할 때, 허리를 다쳐 귀휴 조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정 기간의 치료를 받았다. 예후가 좋아 이번에 군 복무를 동대(洞隊)에서 마치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우리도 그의 부모에게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다.
청년이 군화를 다시 신는 동안 아버지는 동대장 정(鄭) 예비역 소령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수화기를 통해 ‘충성’ 등의 구호가 섞여 들려왔다. 잠시 뒤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을 이었다.
“알아 둬야 할 상식이야. 제헌절 노래는 정인보 선생이 작사하신 거야. 독립운동가요 한학자이셨어, 그분은. 우리가 놀랄 일 하나. ‘삼일절 노래’ ,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글날 노래’ 들 중 마지막 ‘한글날 노래’만 빼고 그분이 작사하셨다는 사실….‘한글날 노래’야 최현배 선생이 작사하셨고. 그 두 분이야말로 의식가(儀式歌) 하나만으로도 우리 국민의 나라 사랑에 깊은 영향을 미치셨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십니다, 특히 정인보 선생님은.”
“그분들에 못지않은 분을 더 들라면 ‘비목’의 한명희 선생이셔. 너희들 알지? 그 가곡 말이야. 우리 국민 애창 가곡 1위에 올랐었던 기간이 상당히 오래였던, 모두의 심금을 적셨던….”
그러더니 당신은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며 ‘비목’을 당신의 목청에 싣는 게 아닌가! 내가 삼가야 할 말이지만, 일찍이 서로 관련이 없는 노래를 열창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의아해 했다. 어머니와 나도 따를 수밖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碑木)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 친구 두고 온 하늘가/ 서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어때 눈물 나지 않아? 아버지가 이윽고 큰일 하나와 맞닥뜨릴 거야. 사람들이 경천동지할 정도란다. 전쟁문학회 홍(洪) 회장과 함께 도모하는….때가 되면 밝힐 거야, 허허. 아직은 아냐. 조금 기다려 보려무나.”
아침을 챙겨 든 아버지는 이발을 하러 미용실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한참 있다가 어머니 휴대 전화의 신호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두 분의 간단한 대화가 바로 이거다.
“여보 나 오늘 머릴 좀 짧게 깎아야겠어.”
“그러세요. 당신 장발(長髮)은 아닌 게 아니라 이 한여름에 남들에게도 무더위 그 자체예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식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으니….당신의 머리카락은 훈련소 신병(新兵)보다 더 짧았기 때문이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아니 어느 정도지 그게 뭐예요? 당신 나이도 생각 않고. 당신이 일등병인 줄 아나 보구려.”
“아버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예요?”
“할아버지 머리 진짜 짧으시네요.”
아버지는 한참 있다가 어떤 사실 하나를 밝혔다. 내일 수원의 ‘더 스토리’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군복 차림’을 약속했다는 게 아닌가? 이왕지사라 마음먹으니 머리까지 부사관 수준으로 다듬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조금 설왕설래가 있었을 뿐, 어머니는 이윽고 옷장을 열고 군복을 챙긴다. 어머니는 침을 뱉어가며 군화에 광을 내었다.
조금 있으려니 등기 우편이 하나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지방에 있는 보병 제5*사단(향토 사단) 부사단장 김 대령이었다. 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으로 봉투를 뜯었다. 먼저 어머니가 내용물이 뭔지 물어 보아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겹겹이 포장한 걸 모두 벗겨내고 보니,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책상 위에 떨어진 것은 놀랍게도 군번인식표와 군번줄이었다. 모두 네 개!
아버지가 설명했다.
“며칠 전에 부사단장에게 부탁했지. 이번에 여섯 번째 큰 행사(한명희 선생 만나는 것을 뜻하는 듯)에 참여하니, 얘들을(군번 인식표와 군번줄)들을 좀 보내 달라고 말이야. 왜 네 개냐고? 내가 이등병 때 군번이 51021281이었어. 하사 계급장을 달자, 80054895라는 군번을 다시 하나 부여하는 거야. 내가 가끔 이걸 잃어버리니까 이분이 아예 두 개씩 만들어 준 거지.”
그러면서 아버지는 군번 인식표를 군번줄에 끼워서는 의기양양하게 목에 거는 거였다. 그러면서 두 개의 모(母)부대 8사단과 26사단의 구호를 외쳤다. 돌격! 공격! 이어 당신은 웃으며,
“우연의 일치 치고는 진짜 몇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우연의 일치야. 26사단이 8사단에 통합되었는데, 26사단의 구호가 ‘공격(攻擊)’이었잖아? 전군(全軍)에서 유일했어. 그런데 8사단은 ‘돌격(突擊)’이란 말이야. 그것도 유일했어. ‘유일(唯一)’ 두 개가 모였으니, 유일무이(唯一無二)라 해야지. 이번에 실은 8사단 본부대 행정 계장 이 중위의 권유대로 본부대 이발관에서 간부(幹部)(?)의 신분에 맞게 이발을 하려 했는데, 코로나 탓에 물거품이 되었지. 하사 이상은 간부야. 예비역 하사가 옛날 자기 모부대의 이발관에서 머릴 깎는다면 그것 또한 기록이겠지.”
그러고 보니 말이다. 아무리 팁 포함 3만원을 치르고, 그것도 미용실에서 다듬은 머리 치곤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늦게까지 거울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튿날 오후 한 시쯤 아버지께 카카오톡 택시를 불러 나는 아버지를 태워 드렸다. 도무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기가 두려워서임은 말하나마나. ‘왕복 교통편과 대담’ 녹화에 네 시간 정도 소요됨을 아버지는 넌지시 우리에게 일러 주고 떠났다.
아버지는 그날 일곱 시가 지나서야 귀가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3천원을 봉사료라며 손에 쥐어 주었더니, 기사는 무척이나 당황해하더란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쾌척’을 하는 손님은 극히 드물다는 말을 그는 덧붙였고. 알고 보니 그는 해병대 출신이라 하더라나? 아버지도 해병대가를 아는 터, 둘은 그걸 씩씩하게 불렀다.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 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 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그런데 기사 아니 그 전우는 정작 현역으로 복무할 때는 ‘해병대가’보다 ‘해군가’를 더 많이 접했다기에 둘은 다시 그걸 제창했다(해병대는 해군 소속이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해병대의 ‘곤조가’라는 그 이상한 노래도 입에 올렸더란다.…오늘은 어디 가서 깽판을 놓고/ 내일은 어디 가서 신세를 지나/ 우리는 해병대 ROKMC/ 때리고 부수고 마시고 싸워라 헤이 빠빠 리빠…정말 애들이 들으면 큰일 날 ‘곤조가’도 애주가인 아버지는 가끔은 흥얼거리긴 했다.
이틀이 지나서였을까? 방송 전량이 영상으로 카카오톡에 실려 아버지의 스마트폰 화면에 떴다. 우리 아버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호탕한 목소리와 풀을 먹인 군복속의 탄탄한 체구-당신은 피트니스에 다닌다- 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역전의 용사에게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하자. 근래 당신은 체중 조절을 한답시고 열심히 걷고 절식을 한 덕분에 살져 보이지도 않았고.
게다가 진행하는 앵커가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갔다. 군번을 끄집어내어 자랑하게 하는 앵커의 재치가 돋보였다. 게다가 말이다. 노래 몇 곡을 몇 소절씩 선보이게 하는 게 아닌가!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채명신 장군 묘역 옆에서 부른 ‘전선 야곡’과 ‘비목’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분 묘역 옆에 유언에 따라 병사들이 같이 묻혀 있는데, 그렇게 목메 설음을 토하노라면 눈물이 흐른다고.
당신의 반주 없는 ‘비목’이 전파를 탔는데, 대단했다. 어떤 성악가보다 우리 식구의 폐부를 파고드는 절창이었다. 대중가요 가수? 조용필은 그 정도 실력이 안 된다. 한데 놀라지 마시라. 당신은 다른 시청자가 봤으면 의아스럽게 여길 몸짓을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지런히 손가락을 모으고 손목 아래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얘야 엄마랑 너는 알지? ‘비목’은 4/4박자야. 셈여림이 ‘강 약 중강 약’이지 않니? 시작 때 첫 소리 ‘초’는 반 박자를 쉬어야 하고, 그다음부터 셈여림을 고려해야 제대로 노래가 되는 거야. 나는 이게 버릇이 되어 하다못해 대중가요라도 박자에 따른 셈여림은 여기 오른손에 의지하게 됐어. 하하.”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장기 및 사체 기증을 서약했었던 게 지켜졌으면 한다고 할 때는 숙연해졌다. 딸로서 아버지의 그 말에 동의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면역이 되어 있어서 백 번을 들어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당신 말씀을 일부 전하려니 새삼 전율을 느끼게 된다.
“내 기도는 이렇습니다.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나되 뇌사(腦死) 상태에 빠지는 과정이 있도록 해 주십사는….오래 이 세상에 머무른다면 내 장기는 설사 뇌사를 거친다 해도 쓸모가 없어져요. 미확인 보도에 의하면, 어느 추기경(樞機卿)의 각막을 이식받은 이가 시력 회복을 못 했다더군요. 기증자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내 장기 중 심장, 신장, 각막 등은 아직 튼튼합니다. 전장(월남전을 뜻하는 듯)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에게 이식하게 하고 싶습니다. 설사 사체(死體)로만 남아도 그게 그런 전우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자료-해부(解剖) 등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로 쓰였으면 합니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는 군을 위하여 모든 걸 바칠,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저승에 있는 당신의 혈육 1촌이 이승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군 시절이었다는 걸 일기에 써 놓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으로 설명을 줄이자. 누구는 죽어서 화장(火葬)을 할 때 자기 시신이 불타는 장연을 생각하면 겁이 난다고 하더라만 아버지는 말한다. 그 사람 참 이상하지 않니?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이 뜨거운 걸 알 턱이 없는데….
우리는 아버지의 시신 및 장기 기증이야기 대목에서 끝내 울었다. 이어 당신이 노래하는 장면이 안 나왔다면, 내 눈물이 방바닥을 적셨으리라. 그만큼 아버지는 노래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상쇄시킨다. 다만 가창(특히 가곡) 기본 요목 중의 하나인 구형(口形) 즉 입모양에 신경을 덜 쓴 듯해서 안타까웠지만. 방송은 ‘멋졌다’는 세 음절로 찬탄(讚嘆)을 받아도 좋을 만했다.
그리고 또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란 말이 있듯이 편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앵커가 빠뜨렸다는 것이다. 아쉬웠다. 아버지의 말씀을 여기 옮긴다.
“글쎄다. 도중에 삭발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그게 시쳇말로 ‘편집’되었지 뭐니? 병사보다 짧은 머리카락! 그걸 사람들이 보아야 놀랐을 텐데. 그동안의 이발관 혹은 미용실에 얽힌 이야기도 한 둘이 아니었으니 그걸 제대로 소개했더라면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었을 거야.”
사실 그랬었다. 아버지는 삭발(削髮)과의 특별한 일화를 수없이 가지고 있다. 결혼식 때도 당신이 스포츠머리를 고집했던 게 필두다. 남들이 배꼽을 잡을 정도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하나의 진화(進化)는 모두로 하여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도 남는다. 이건 결코 강변(强辯)이나 거짓이 아니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전후해 아버지는 머리를 길러 왔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모습이 당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근래엔 군부대와의 행사가 있을라치면 당신은 망설임 없이 바리캉을 머리에 대게 했던 거다,
아버지는 군과 관련된, 아니 당신 자신이 군복을 입은 장면을 녹화한 영상의 조회 수에 관심이 많다. 저 유명한 연예 병사 Y 일병이 조연을 한 어느 프로그램(국방 TV)이 1만 7천여 회를 돌파했음을 당신은 큰 자랑으로 여긴다. 대중가요 ‘임 계신 전선(케이블 방송)’은 3천, ‘야구장 애국가 독창’(정규 방송 라이브)은 5천, ‘어디 가도 하사 모자(국방 TV)’는 1만 7천. 그 외 자질구레한 영상은 1백 회 미만에서 2천 5백 회까지 실로 다양하다. ‘부산노래’와 ‘목포노래’도 수십 곡이다. 그래서 가끔은 당신이 우리 식구들에게 유언처럼 강조한다. 당신이 숨을 거두면 그 모두를 편집하여 하나로 만들어 빈소에서 틀어 달라는 것. 전부 군복 차림이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군모를 쓴 채인 영상은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이다.
이번 방송 영상 조회 수의 증가도 순조로웠다. 꺾은선그래프를 그려 보니 삽시간에 치고 올라가더니 열흘이 안 되어 2,400회를 돌파했다. 당신은 말한다. 그렇게 애태우는 목적은 시청자 나아가 국민으로 하여금 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함양시키고자하는 데에 있다고. ‘나라 사랑’이란 거창한 네 음절 대신, 우리 국민은 모두 군과 관련을 맺고 살다가 죽는다고 아버지가 강조하는 거다.
다시 한 달 반이 흘렀다. 현역 부사관이나 초급 위관 장교들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자랐다. 보기에 참 좋다. 이제 하사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써도 좋고 벗어도 좋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대한민국 간부 예비역의 풍모가 여실하게 드러나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제 아버지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머릴 다시 깎아야 할 일이 생겼어. 이번에야 말로 내 고집의 정점을 찍을 때가 되었어.”
모두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머니가 뭔가 짐작이라도 간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반문하는 거였다. 또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는 모양인데, 그 결심을 뉘라서 꺾겠느냐고.
한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고려해 보라는 거다. 이번엔 바리캉을 대지 말고 가위질만으로 다듬어 달라고 부탁하라는 거다. 미용원 원장에게 말이다.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보름 안이면 가장 보기 좋은 헤어스타일이라고도 어머니는 덧붙였다. 그제야 아버지는 싱긋 웃더니 어머니의 말에 동의를 했다.
각자의 잠자리에 들 무렵 아버지는 말했다, 가족들을 모두 모으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그 순간의 분위기는 워낙 진지해서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하자.
“한명희 선생을 곧 만나 뵙기로 했어. 언젠가 내가 운을 뗐었지.”
“나야 짐작은 했었지만, 그분으로 말미암아 다시 미용실에 간다는 말씀이세요?”
“우리 가족은 막내(초등 1)까지 알다시피, ‘비목’을 작사하신 분이잖아? 남양주 시인협회 명예회장이 주선을 했는데 말이야, 8월 하순 경에 그분 앞에서 ‘비목’을 부르기로 했어.”
내가 끼어들어 거들었다.
“아, 그랬었군요. 정말 영광이에요. 유튜브나 방송을 통하여 그분의 ‘비목’을 수도 없이 시청했었는데, 전설의 노병 우리 아버지가 그걸 부르시다니 동료들에게 홍보해야겠습니다.”
“누가 아니라니? 여담인데, ‘비목’을 그분 앞에서 직접 부르는 것은 내가 처음일지 모른다는 데에 방점을 찍어야겠지. 전무후무(前無後無)라는 사자성어가 있지. ‘후무’는 모르지만 전무 前無)했다는 건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야.”
반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무반주도 괜찮다는 전제를 했다. 아니면 음악 학원 원장에게 피아노 반주를 녹음으로 해서 MR처럼 쓰면 될 거 같다는 대답이었다. 우리 기족들은 아버지의 ‘비목’ 독창에 환희의 박수를 보냈다. 멋도 모르는 막내조차 작은 소리로 ‘야호’를 연발했고. 가정이라는 게 행복의 울타리라는 걸 모두가 느꼈다.
이튿날부터 아버지의 극성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니 여태껏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모두에 그래왔지만, 이번만은 더욱더 열을 냈다. 처음엔 노랠 부를 때마다 ‘ㅓ’와 ‘ㅡ’의 구분이 잘 안 되었던 경상도 출신의 특성(?)에 애를 먹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아버지는 ‘아에이오우’를 피아노 앞에 앉아 다듬어 내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는 고쳐졌고, 음악 학원 원장(대학 출강)한테도 장족의 발전이 있다며 칭찬을 받은 모양이었다. ‘ㅆ’이 자꾸 ‘ㅅ’로 바꾸어져 나오는 바람에 아버진 고생께나 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에서 며칠 동안 ‘슬고 간’으로 소릴 냄으로써 어머니한테 지적을 받기도 했었다. 이내 고쳐졌지만, 하나의 힘든 과정이었고말고.
이처럼 아버지의 노래 연습 열기는 만만찮았다. 게다가 ‘비목’ 구석구석마다 파고드는 아버지의 그 탐구심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니….약속이나 한 듯이 소프라노와 테너들이 ‘양지 녘에’를 ‘양지 녀게’로 잘못 부르는 걸 보고, 아버지는 여기저기 전화를 내는 게 아닌가? 당신에게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공함으로써 가곡을 협연하게 한, 두 교수와 성악가는 물론 국어학자 및 국립국어원 연구사(혹은 상담원) 여럿과 성악가 한둘이 그 대상이다. 가장 정확한 대답이나 유권 해석을 보내 주는 이는 국어학자와 국립국어원 연구사들인 듯, 그들과의 전화가 끝나면 아버지는 무릎을 치고는 했다.
또 다른 비근한 예(例) 두어 개. 그 2절에 나오는 거다.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가 도마 위에 올랐다. ‘천진스런’이란 말은 없는 걸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아버지는 ‘천진스러운’으로 한 음절을 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러운’을 셋잇단음표로 대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상대의 의견은 반반이었지만, 아버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고집은 아무도 말릴 겨를조차 없었던 터, 당신은 선언을 했다, ‘천진스러운’이다! 그러더니 마침내 ‘비목’을 소화해 낸 모든 성악가들의 ‘추억은 애달파’도 ‘애달파’로 뒤집겠다고 아버지는 끝장을 보는 거였다.
여담 하나. 대중가요 가수를 뭉뚱그려 무시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그들이 ‘가곡’을 소화시킨다면 그 결말이 팬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한다는 게 아버지의 소신이다. 그런데 워낙 ‘비목’에 빠지다 보니, 당신의 휴대전화 화면에, 저런!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이미자(李美子)가 KBS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그 곡을 절창(?)하는 영상이 뜨지 않는가? 어떠냐는 내 질문에 당신은 만면에 웃음을 띠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점을 받았다는 아버지의 평인데,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자와 ‘가곡’? 아직 아리송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사실이다.
이런 모든 정황을 거치고 보아도 우리 가족은 염려되는 바가 한두 가지 아니었다. 그런데 주인공인 당신은 너무나 당당하다. 아직 며칠이 남아 있는데, 아버지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곡을 익히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겠다.
그끄제는 성당 교리실에 가서 바이올린에 맞춰 선을 보였던 모양인데 그날 표정으로 봐서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네거리에서 버스킹 형식으로 ‘비목’을 먼저 행인들에게 던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는 건, 아버지의 성격을 아는 우리 가족이 치러야 하는 당연지사다. 하지만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표현으로 대신하자. 네거리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행인들의 입줄에 오르겠지, 노병(괴짜라는 말과 짝을 이룰 것은 명약관화하다)이 또 네거리에 나타났다는….
그건 그렇고.
진짜 디데이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또 하나의 비상수단을 동원했으니, 집에서 걸어 반시간쯤 걸리는 밭 언덕에 거의 매일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주인은 따로 있다. 한데 거기 이웃에 사는 한 트럼펫터가 거기 농막을 짓고 연주를 하는 터라 아버지도 거기서 연습하기가 안성맞춤이어서 그렇단다. 헌 오르간도 한 대 있다. 아버지가 갖다 두었다. 트럼펫과 노래는 음정이 맞지 않으니, 대신 그 오르간 반주로 노래 부르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는 말씀이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의 ‘비목’ 독창은 거의 성공이고도 남으리라. 딸로서 겉치레 칭찬이 아니라, 확실한 예견이요 진단이다. 한데 여차하면 말이다. 당신은 조금 당일 일찍 올라가 근처 노래방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하겠다는 거다. 부산 북구청에서 21세기 아침을 여는 음악회 시작 전, 당신은 일찍 노래방을 1만원에 빌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아직 거기선 회자된다더라.
가장 큰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마침 백선엽 장군이 며칠 전 향년 백세로 기세했다는 부음이 들렸다. 아버지는 착잡한 심경이라며 서울에 조문을 다녀왔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하는데, 찬반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아버지는 가슴이 아프단다. 한데 귀가한 아버지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장군님이 유언하셨다고 하던데? ‘내 죽은 뒤 수의로 말이다. 전장을 누비던 그 시절의 군복을 구해서 입혀다오.’라고.”
난 아버지의 그 짧은 몇 마디가 굉장한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음을 직감했다. 당신 자신도 선종 뒤에 군복을 입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임을 나 자신이 밝혀서 무엇 하랴! 어머니와는 이미 합의가 된 모양이어서 나는 차라리 함구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 ‘수의’의 ‘수(壽)’ 자도 끄집어내지 못 하고 있다. 군복 팔꿈치며 무르팍 근처는 이미 닳아서 노병에게는 진짜 어울릴 정도다.
반드시 코웃음을 칠 수만은 없는 얘기. 어찌 보면 혼란스러운 과거지사인데, 아버지가 기르다가 죽은 애견 다섯 마리에게는 삼베 수의를 입혀 장례를 치렀다. 그걸 어찌 노병의 군복과 비교하랴.
이제 맺자, 끝을. 아버지는 그토록 군 사랑에 몸을 바쳤지만, 서울은 물론 대전 현충원이나 다른 호국원에도 안장되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도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내 시부모)와 내 엄마 아버지(내 친정 부모), 일촌 혈육 옆에서 내외분이 나란히 잠드는 것은 행복하다고 강조하는 당신의 표정엔 슬픔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가 영원히 잠드는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의 ‘비목’ 육성이 들리고, 군복을 입은 군부대에서의 당신 모습을 시청하는 것을 통해 조문객들이 뭔가를 느끼리라. 영상엔 물론 한명희 선생도 보이리라. 그 외의 수많은 전우들의 모습도.
거듭 강조하지만 아버지는 진짜 군인 이상으로 군인답게 한평생을 보냈었다. 내가 불효 여식이 되고도 남겠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좇을 참이다.
한국소필가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 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경기PEN운영위원, <문학과 비평> 운영이사, 경기문학인협회 회원, 대한가수협회 회원/ 前 26사단홍보대사, 명덕초등학교장, 덕성토요노인대학장(21년), 부산북구문인협회장, 부산북구문화예술인 협회장, UNESCO부산협회 부회장/ (저서) 수필집 및 소설집 등 총 23권(개인 저서)/ (수상) 황조근정훈장,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본상), KNN부산방송문화대상, 화쟁포럼문화대상, 부산교육상,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문예시대> 문학대상, 경기PEN문학대상, 부산수필대상, 허균문학상, 부산가톨릭문하상, 부산북구문학상, 부산UNESCO공로패1호, 쿠알라룸푸르한인회장 감사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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