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헤밍웨이
Cuba Habana
해외기행 | 쿠바 아바나
긴 호흡을 한다. 아득한 밤하늘, 혁명이 서린 땅의 공기를 거칠게 들이켠다. 쿠바 아바나의 음영 짙은 거리에는 1950년대 올드카들이 스쳐 지난다. 낯선 곳, 뛰는 가슴은 이미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방황한다. 한 손에는 럼 한잔, 다른 손에는 시가 한 개비를 든 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jmagazine.joins.com%2F_data%2Fphoto%2F2010%2F03%2F19110436.jpg)
쿠바 아바나는 혁명의 흔적이 서린 땅이다.
혁명 광장에는 체 게바라 등 혁명 주역의 벽화가 건물 한 편을 채우고 있다.
이곳은 쿠바다. ‘자유의 땅’에 대한 환상을 품고 달려왔든, 변해버린 실체에 실망하든. 여행자의 이상향에서 마지막 종착역으로 섬겨지는 땅이다. 늦은 밤 쿠바 아바나(Havana)의 호세마르티공항에 비행기가 내린다. 내려서는 순간 입국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호기심이 솟는다.
코스타리카에서 몸을 실으며 별도의 비자 없이 쿠폰 같은 비자를 구입한 것부터가 미덥지 않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은둔의 땅, 쿠바 아니던가? 적어도 미국에 들어설 때보다는 까다로워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속된 궁금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쿠폰식 비자는 출발 공항에서 25달러에 구입했다.
줄을 서기 위해 10초. 돈과 여권을 건네니 담당직원이 바로 비자를 줬다. 쿠바로 향하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이런 식으로 비자를 구한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대륙을 누비던 체 게바라의 베레모가 떠오르는 고장. 카스트로의 흔적이 서린 혁명의 도시에 다가서는 것 치고는 꽤 간단하다.
길게 도열한 입국심사대의 문은 닫혀 있다. 단추를 눌러야 비로소 문이 열린다. 긴장이 무색하게 심사원의
질문은 간단하다.
“너의 이름이 XX냐?”
쿠바에 온 이유도, 며칠간 있을 것이냐는 질문도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만 하는 데도 오랫동안 심문에 시달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단출하다. 입국심사대의 문이 열린다. 짐 찾는 곳이 어수선하다. 재래시장에 들어선 듯하다.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 피부 여인의 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다.
공항을 나서기 전 피워대는 담배다. 시가의 고장이어서
흡연에 관대한 것인지, 매캐한 연기가 곳곳에 자욱하다. 역시 이곳은 예측불허의 땅 쿠바다.
공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이름이 알도다. 흑인이다. 김일성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북한 억양이지만 한국어가 제법 능숙하다. 스페인어는 기본이고, 체코어에 슬로바키아어까지 구사한다. 관광업에 종사하며 달러를 다루는 사람은 쿠바에서 인텔리 계층에 속한다.
거리의 명물로 남은 올드카
▶1. 아바나의 도심은 거대한 올드카 박물관이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산 차들이 버젓이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2. 여행자들의 아지트인 오비스포 거리. 3. 차량 번호판 색은 소유 주체에 따라 제각각이다. 노란 번호판은 개인 소유다. 4. 쿠바 사람들은
순박한 얼굴을 지녔다. 메크카데레스 골목의 엽서 파는 노인.
알도가 아내 이야기를 한다. 그의 나이 50세. 첫 번째 부인은 백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혼혈이었으며, 지금은 흑인 아내와 산다. 두 번 이혼했다. 의외로 쿠바에서 이혼 절차는 간단하다며 북한 사람이 이혼 없이 평생 사는 것이 신기했다는 말을 넌지시 꺼낸다.
쿠바에는 ‘물라토’라고 불리는 혼혈과 백인·흑인이 공존한다. 인종에 대한 가름은
없지만 도시와 시골은 또 다르다. 혁명도 피부색을 쓸어 담지는 못했나 보다.
공항을 나서니 밤공기가 아득하다. 쿠바의 공기다. 카리브해의 바다향도, 매캐한 매연도 아니다. 동경하던 땅의 아득함이, 형언할 수 없는 벅참이 알싸한 공기에 스며 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어둠이기에 더욱 신비롭다.
어디선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잔잔한 색소폰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구릿빛 피부의 육감적인 여인이 그 선율에 맞춰 룸바를 추며 다가설 듯하다.
쿠바에서
아침을 맞으면 지난 밤의 몽상은 다소 퇴색한다. 혁명이 끝난 지 50여 년, 이곳도 변하고 있다. 아바나 거리의 도심에는 이방인들로 흥청거린다. 깃발이 휘날리던 혁명광장은 관광객의 필수 여행 코스가 됐다.
쿠바는 질곡의 세월을 겪었다. 오랜 스페인의 지배 이후 미국의 군정을 겪었으며,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했다. 세월의 흔적은 아바나의 도심에 깊게 배어 있다.
쿠바인의 천진난만한 표정 위에 이질적 풍경은 덧칠해진다. 쿠바의 중심가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올드카들이다. 박물관에서나 볼 듯싶은, 195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산 차들이 버젓이 거리를 돌아다닌다. 미군정 시절 아바나는 미국 부호들의 휴양지였고, 그들이 남긴 유흥의 흔적은 수십 년 세월을 지났어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퉁불퉁한 겉모습은 고풍스럽고 멋있지만 이 올드카들은 매연의 주범이기도 하다. 아바나의 상징이 된 채 개인택시로도 활용되는데, 외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이 눈독을 들여도 팔지 않는 쿠바의 명물이 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차가 아바나의 도로를 돌아다녀도 쿠바는
아직 미국에는 폐쇄적이다.
힐튼·맥도널드·스타벅스 등 미국산 브랜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미국과 연계된 신용카드도 사용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미국 달러의 가치도 폄하된다. 캐나다달러·유로화에 비해 미국 달러는 80%의 환율만 인정된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달러 대신 캐나다달러로 환전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정책일 뿐이다.
길거리 호객꾼은 1달러에 달려들고, 현지인들은 달러를 벌기 위해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갈구한다. 2008년
카스트로가 50년 가까이 지켜오던 쿠바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하면서 쿠바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고, 외국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혁명과 붉은 깃발 대신 관광산업은 쿠바를 요동치게 하는 새로운 모티프가 됐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jmagazine.joins.com%2F_data%2Fphoto%2F2010%2F03%2F19110841.jpg)
체 게바라, 헤밍웨이와 조우
구시가인 아바나 비헤나에 들어선다. 관광지로 변질한 동유럽의 오래된 골목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투박한 돌길 사이에는 고풍스러운 성당들이 높게 솟아 있다. 아바나에서 발견하는 스페인 지배의 잔영이다. 좌우 비대칭의 대성당 광장에 서면 알록달록한 치마에 꽃과 터번으로 치장한 여인들이 품으로 달려든다.
헤밍웨이 분장에 시가를 빼어 문 할아버지도 어깨동무를 한다. 모두 1달러에 ‘쿠바’를 파는 거리의 사람이다. 여행자와 호객꾼이 뒤섞이는 공간을 할아버지 악단의 하모니카
율이 채운다. 대성당에서 비에하(vieja)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여행자의 아지트다. 오비스포(Obispo) 거리에는 길거리음식점과 바가 즐비하다.
쇠고기·피망·양파를 넣고 끓인 스튜 ‘로파 비에하’나 옥수수가루를 쪄낸 ‘타말’ 등 쿠바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쿠바의 음식은 대부분 조미료를 쓰지 않아 달거나 짜지 않고 담백한 맛을 낸다. 구시가의 골목들은 산프란시스코성당을 지나 비에하광장까지 활기차게 이어진다. 아바나의 가장 오래된 광장인 아르마스(Armas) 광장 주변에는 중고책시장이
들어서 있다.
책 표지의 주요 모델은 대부분 쿠바혁명의 상징인 체 게바라.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처럼, 체 게바라는 아바나의 ‘꽃’처럼 등장한다. 책 표지로, 티셔츠의 디자인으로, 그래피티 벽화 속 주인공으로….
쿠바의 혁명을 이끌었던 영웅은 사후에도 쿠바의 관광산업을 돕는다. 체 게바라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려면 혁명광장으로 가야 한다. 혁명광장 주변으로는 관공서가 밀집해 있고, 내무부 건물의 한 벽면을 체 게바라의 얼굴이 채우고 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그의 대표 어록도 얼굴과 함께 새겨져 있다. 미국 국회의사당을 닮은 카피톨리오나, 혁명박물관 등도 센트로아바나 지역에서 만나게 된다. 구시가와 도심은 방파제 옆 도로인 말레콘(Malecon)과 나란히 이어져 흐른다. 쿠바의 청춘들은 말레콘에서 카리브해의 바람을 맞으며 럼을 마시고 데이트를 즐긴다.
체 게바라와 함께 아바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인물은 헤밍웨이다. 쿠바를 사랑했고, 쿠바의 여인을 사랑했고, 쿠바의 럼을 사랑했던
소설가다. 20년 동안 쿠바에 머물렀던 헤밍웨이의 잔재는 아바나 곳곳에 흩어져 있다. 아바나 동쪽의 코히마르(Cojimar)는 소설 <노인과 바다>의 모티프가 된 한적한 어촌마을이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낚시를 즐기며 소설 속 노인인 선장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해변가 레스토랑 ‘라테레사’는 헤밍웨이의 단골집으로, 그의 사진이 진열돼 있다. 창 밖 바다를 배경으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그가 마셨던 ‘모히토(Mojito: 쿠바의 전통 음료 가운데 하나로, 기본적으로 럼·라임·민트·설탕·탄산수
5가지 재료만으로 만드는 칵테일)’ 한 잔을 기울이는 기분이 묘하다.
코히마르가 가슴 깊이 박히는 것은 단지 헤밍웨이 때문만은 아니다. 아바나의 도심이 변질돼 가는 것과 달리 이곳 어촌마을의 골목에서는 순박한 쿠바인들을 만날 수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성긴 이를 먼저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다. 가난 속에서도 쾌활하고 때묻지 않은 미소와 눈빛. 그 정경이 알알이 새겨진다.
소설 속 감흥을 이끌어낸 헤밍웨이의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의 흔적은 도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오비스포 거리의 암보스문도스호텔에 머무르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해가 저물면 대성당 옆 ‘라보데기타’나 ‘라플로리디타’에 들러 모히토와 다이키리(Daiquiri: 럼을 기반으로 만드는 칵테일)를 마셨다. 살사 음악에 취해 바에서 마셨던 럼 칵테일은 이방인에게는 쿠바에서 ‘가장 마시고 싶은’ 술이 됐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jmagazine.joins.com%2F_data%2Fphoto%2F2010%2F03%2F19111100.jpg)
시가·럼·색소폰 선율에 취하다
럼과 함께 쿠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가다. 럼박물관과 시가공장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은 인기 코스다. 럼 한잔 걸치며 시가 한 개비 피우는 것은 쿠바 여행자의 로망이기도 하다. 쿠바산 시가는 베테랑 숙련공이 직접 손으로 만든다. 카스트로가 나서서 직접 최고급 시가를 만들 것을 지시했을 정도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쿠바의 특제 수제 시가는 1개비에 수십만 원에 달하는데, 도심에서는 값싼 가짜 시가가 나돌기도 한다. 아바나의 거리를 무심코 거닐면 생경한 풍경과
조우한다. 차량 번호판이 가지각색이다. 국가 소유 차량은 파랑, 개인 차는 노랑, 합작회사 차는 분홍, 렌트카는 녹색 등 번호판 색깔만 봐도 소유 여부를 알 수 있다.
국가차량은 근무 후에는 타고 다닐 수 없어 반드시 회사나 공장에 주차한 뒤 퇴근해야 한다. 여행사·호텔 등도 국가 소유여서 모두 파란색 번호판을 달고 있다. 집과 토지는 국가에서 관리하지만 개인 간에 은밀히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대중교통이 부족해 사람들은 히치하이킹을 해서 차를 탄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서 차를 잡으려고 빼곡히 사람이 몰려 있다. 물론 늘씬한 몸매의 미녀는 남보다 1순위로 차에 오른다. 해가 저물면 살사 선율이 흐르는 뮤직홀에 앉아 색소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모히토 한 잔이 축축하게 목을 적시고 넘어간다.
무대 위 무희들의 현란한 룸바 춤 사이로 굵은 시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사회주의의 퇴색한 모습과 만나든, 자본주의에 물든 변질한 모습을 목격하든, 이곳은 분명 쿠바다. 혁명이 숨쉬었고 자유가 뒤엉킨, 여행자의 동경의 땅이다.
여행팁
가는
길 = 미국 입국이 무비자로 바뀐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멕시코시티를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다. 중미 대부분의 지역에서 멕시카나 항공·TACA항공이 쿠바 아바나까지 수시로 오간다. 멕시코시티·코스타리카·쿠바·칸쿤 등을 두루 둘러보는 중미여행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다. 공항에서 아바나 시내까지는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를 타기 전 가격 흥정은 필수다. 현지에서 지도를 구하기 어려워 도심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만만치 않다.
유용정보 = 쿠바 내에서는 달러나 유로를
쿠바 화폐인 페소 콘베르티블레로 환전해 사용해야 한다. 미국달러는 캐나다달러에 비해 80%의 환율이 적용되니 캐나다달러로 가져가 환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쿠바 내에서는 ATM 출금이나 휴대전화의 자동 로밍이 안 되니 유념할 것. 입국 전에 공항에서 비자를 구입해야 하며, 출국 때 역시 별도의 공항세가 있다. 1년 중 11~4월은 건기, 5~10월은 우기다. 기온은 연중 22~28℃를 유지한다.
먹을 것 = 럼을 꼭 마셔본다. 럼은 투명한 것보다 짙은 색이 더 오래 숙성된 것이다. 민트·탄산수를 첨가한
‘모히토’나 콜라와 레몬을 넣은 ‘쿠바 리브레’가 대표적이다. 고기 스튜 ‘로파 비에하’와 절인 돼지고기를 구워낸 ‘레초’ 등이 대표적 음식. 야채와 햄이 섞인 복음밥인 ‘아로츠 프리토’도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월간중앙 201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