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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4,1-12>
그 무렵 불구자가 치유받은 뒤,
1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3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미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5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와서 아침을 먹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하고 부활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힘을 빼고>
참으로 제가 감탄한 것이 사순절에는 한 분도 <여기밥상>에 손님이 없더니 부활 대축일이 지나자 손님이 생기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이라서 사순절에는 삼간 것이기에 제가 감탄한 거지요.
어제도 부부 세 쌍이 <여기밥상> 손님으로 오셨는데 미사 중에 늘 하던 대로 말씀 나누기를 하였고, 한 분이 어제 사도행전 한 구절을 가지고 성찰하신 것을 나눠주셨습니다.
보통 남자들이 무엇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듯 그 형제님도 당신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힘이 들고 결과도 좋지 않았고,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길 때는 일이 순탄하고 결과도 좋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자주 당신 힘으로 하시곤 한다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지혜로서 자주 힘을 빼라고 합니다.
흔히 어깨에 힘을 빼라는 말도 합니다.
운동할 때도 힘을 빼야 힘이 지나치거나 경직되지 않아서 다치지도 않고 경기 결과도 좋음을 우린 많이 경험하지요.
운동이나 세상사도 이러할진데 구원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치유한 일로 인해 유다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에 베드로는 자기들이 한 일은 착한 일이라고 하고, 불구자가 치유된 것은 구원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심문받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일로 구원을 이뤄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구원을 이루려면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착한 일이라만 주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는 일이지요.
불구자를 고쳐주는 좋은 일일 뿐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할 때는 어른 말을 잘 들었을 때이고, 주님을 선한 목자가 아니라 착한 목자라고 할 때도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칠 때이듯이, 착한 일은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좋은 일 하는 것을 뜻하지요.
일의 시작부터 일의 끝까지 자기는 빠지고 주님으로 시작하고 주님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일을 시작하고, 주님의 힘으로 그 일을 추진하며, 주님의 섭리대로 일을 끝마치고는 결과를 주님께 영광 돌릴 때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사업의 도구인 베드로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 모두 자기 꿍꿍이가 있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무도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오늘 복음에서 보듯 출세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래아로 돌아가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인생도 실패하고 밤샘 그물질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자기의 목적으로 무엇을 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등장하고 주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그가 153마리나 잡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라고 질문을 받는 우리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가 나서지 않고 주님을 등장시키고,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을 힘입어 무엇을 해야 함을 다시 한번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내려놓는 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 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베드로가 기뻤던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물을 던진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유튜브를 하라고 하셨던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부활하셔서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참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죽옷, 그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실패의 밤을 건너온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 위로의 말씀,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 상태에서 임재 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실패한 일이 연상됩니다(마르 9,18).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의 힘을 받아서 해야 하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예수님 없이’ 제자들(신앙인들)만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예수님 없이 한 일이라면 그 성과는 오래 가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냉담자만 대량 생산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영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분의 지시대로 행동합니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또 복음서에는 아무 설명이 없지만, 실패한 후에 예수님을 그리워했거나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라는 질문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라는 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새롭게’ 부르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체험했던 ‘고기잡이 기적’이(루카 5장) 기억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분의 지시에 순종했고, 기적을 체험한 뒤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자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거두신 성과입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협력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일에서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제자들을 마구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쳐 있으면 ‘새 힘’을 주시고, 실망하고 낙담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힘이 빠지다가 결국 모든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어쩌면 배반자 유다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153’은 교회의 ‘완전함’과 ‘충만함’과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그 완전함과 충만함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완전함과 충만함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그 일치도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도 역시 완전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서 겪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고(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믿는 대로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일은 아직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말로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헛된 ‘빈말’을 되풀이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 - 구원의 삶>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편 118,1)
참 아름다운 계절, 파스카의 봄입니다.
때로 초여름에 들어선 느낌이지만 나무는 모두 꽃나무 같고 풀은 모두가 꽃풀 같습니다.
이름없는 작은 풀꽃들이 참 예쁘고 청초합니다.
지상의 아름다움이 이러하면 천상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어제 피정온 분에게 드린 말이 생각납니다.
“자매님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아름다운 분,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파스카의 삶을 살아갈 때 그대로 참 행복한 구원의 삶입니다.”
면담성사차 방문한 이들마다 배즙 한잔씩 대접하며 환대하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마침 어제 수도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 샛노란 민들레꽃들과 애기똥풀꽃들을 보며 쓴 글도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의 구원의 행복을 노래한 '꽃자리'란 시입니다.
“음지든 양지든 상관없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꽃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성전옆 북향
그늘진 외딴곳
늘 거기 그 자리
일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되어 피어난 샛노란 하늘 사랑 별무리
민들레꽃들
애기똥풀꽃들
외롭지 않다
눈물겹도록 고맙다
반갑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꽃처럼 폈다 꽃처럼 지는
인생이고 싶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이다”
오늘 복음은 일곱 제자들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해주고, 사도행전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제자들의 신바람 넘치는 맹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단연코 제자들의 중심에는 베드로가 있고, 베드로의 수제자다운 리더십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 있는 그림처럼 펼쳐지는 복음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전,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다시 예전 일상의 고기잡이 어부의 일터로 복귀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베드로의 말에 “우리도 함께 가겠소.” 화답하며 동행하는 여섯 제자들, 아니 모두 일곱이요, 일곱은 충만함을 뜻하며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들이 고기잡이 하는 동안 밤새 내내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리고 계셨을 예수님의 다음 아름다운 장면이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뭍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얘들아, 무엇을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참으로 삶의 허무만 가득 담긴 빈 그물에 제자들의 가슴은 좌절과 실망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별무소득의 인생임을 뼈져리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순종으로 응답하여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고,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애제자와 수제자 베드로의 반응이 전광석화, 곧장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십니다!”
애제자의 외침에 옷을 벗고 있던 수제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에 뛰어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사랑하던 주님의 발현에 너무 놀랍고 반가워 호수에 뛰어든 베드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153마리의 고기들로 가득했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교회 일치뿐 아니라 미구에 있을 풍요로운 선교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니 말 그대로 이 거룩한 아침 미사식사와 흡사합니다.
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이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풍성한 구원의 삶임을 속속들이 체험했을 제자들입니다.
마침내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놀라운 고기잡이 솜씨를 보여줍니다.
물론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무려 사도들의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고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명이나 되었다니 153마리 물고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공적 선교활동입니다.
심지어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들 모두가 사도들의 그물에 걸린 모습입니다.
성령에 가득 찬 주님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원고도 없이 하는 즉흥적인 강론이 시공을 초월하여 참 감동적입니다.
길다싶지만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무슨 군더더기 말을 보탤 수 있을런지요!
구약성경은 물론 시편에도 정통해 있는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가인 베드로 사도임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파스카의 예수님께 있고 우리가 구원받는 데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이 거룩한 미사축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 부활을 예견한 다음 화답송 시편의 고백이 참 은혜롭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하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시편 118,22-2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펼쳐진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4)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났던 어느날(루카 5,5 참조)처럼,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해 빈 배인 그들 앞에 나타나 물으시지요.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 "못 잡았습니다."
(요한 21,5)
과연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여전히 빈 배인 채로 있을 뿐입니다.
일생을 걸었던 스승을 잃고, 부활하신 그분을 몇 차례 뵙기는 했지만 이내 사라지셔서 딱히 무얼 어떻게 실행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옛 터전으로 돌아와 그때 하던 일에 다시 손을 댑니다.
이상과 의미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려둔 채 떠났던(마르 1,16-20)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때 버렸던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이미 잔뼈가 굵은 익숙한 일에 뛰어듭니다.
'그래도 이건 자신있지' 하면서요. ...
하지만 여전히 빈 배입니다.
예수님의 조언과 순명, 그리고 만선의 놀라움과 기쁨...
이어지는 고백!
"주님이십니다."
(요한 21,7)
뭍에는 "숯불"이 있고 "물고기"가 있고 "빵"이 있습니다.
찬 새벽 공기, 피로에 젖고 물에 젖은 장정들, 타오르는 불길, 생선이 익고 빵이 구워지는 냄새 그리고 스승의 환대와 나눔...
얼마나 따사롭고 행복한 장면인지요.
숯불, 물고기, 빵,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표상이거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물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뭍에서 당신 자신을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먹이려고 차려 놓으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밤새 수고한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새 날을 맞는 모든 이에게 아침 식사는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차려 주시고 또 함께 나누는 아침 식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새 삶을 준비하는 동시에 스승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갱신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 21,13)
젖을 물린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건 단순히 젖만이 아니라 엄마 자신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밥을 벌어온 아빠에게는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곧 자신입니다.
그래서 흐믓하고 뿌듯합니다.
어떤 고통도 수고도 피로도 괜찮습니다.
내 땀과 눈물 피와 살이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 생명이 되고 활기가 되고 행복이 된다면 지옥인들 마다할 리 없습니다.
자식이 곧 나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도 주시고 물고기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또 주셨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미 예수님의 생명은 제자들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되고 그들이 예수님이 되어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현존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누구도 그분이 누구신지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스승 예수님만이 그러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요한 21,14)
신학적으로 3은 완전한 숫자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발현은 나중에 이어질 사랑 고백(요한 21,15-19 참조)까지 합하여 참으로 의미 깊고 완전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다시 한 번 온전히 주셨기에 제자들은 부족하나마 또 다른 예수로 살아갈 영육의 양분을 얻은 겁니다.
이제 그들은 성령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준비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사도 4,7)
불구자를 치유하고 백성을 가르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가 유다의 권세가들, 종교지도자들 앞에 섰을 때 받은 질문입니다.
사실 질문 중에는 답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정곡을 찌르는 '좋은 질문'이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입장에서 꼭 듣고 싶은 질문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고맙게도 그들의 이 물음이 딱 그렇습니다.
그 답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이니까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이 대답은 옛 베드로의 것이 아닙니다.
현재 베드로가 지닌 예수님의 이름이 주님의 일을 한 것이고, 베드로 안에 흐르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 답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미 그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 일이 신나고 기쁜 일입니까?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 보여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 여기고 기쁘게 흔쾌히 일한다면 내가 상상치도 못하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주님의 일로 여기고,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오늘 어부가 한번 되어 보실래요?
물고기를 잡든, 사람을 낚든 만선의 기쁨을 안고 즐거워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을 때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됨됨이를 잘 아셨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하고, 십자가를 포기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능력과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고,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셨고,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셨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표징과 기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알베르트 까뮤는 ‘페스트’에서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페스트가 창궐한 세상에서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스러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페스트가 창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스러움의 또 다른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의사로서 나의 직무에 성실하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 직무에 성실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나는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실함은 곧 성스러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까뮤는 ‘페스트를 옮기는 세균은 어쩌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페스트는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직무에 태만한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규율은 지키지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혼자만의 신앙은 외롭고,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고기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라고 하신 분,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풍랑을 잠재우셨던 분,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던 분’ 과의 기억은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빌딩 숲에 있던 한 그루의 목련처럼 제자들은 외로워보였고, 그 향기가 도시의 화려함에 묻혀버린 것처럼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기운을 차립니다.
역시 주님과 함께 해야 힘이 나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고,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는 외로움도, 두려움도, 쓸쓸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새 충전한 핸드폰의 배터리는 한참을 통화해도 충분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에게는 박해도,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이웃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눔이 있고, 그 안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입니다.
매년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매년 왔다가 가는 행사와 전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술을 좋아하고 담배도 많이 태우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워낙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술도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는데 그 모든 것을 끊어버렸으니 주변에서 다 의아해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졌나 싶었는데, 이 청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
여자 친구가 술과 담배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데,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것을 하겠습니까?
싫다는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술과 담배를 더 사랑했다면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훨씬 커서 불가능해 보였던 금주와 금연이 가능했습니다.
세상 안의 유혹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끊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져서 죄짓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이 너무 힘들 때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커질수록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는 어민들이 낮보다 밤에 출어합니다.
밤에 고기가 더 잘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침에 신선한 상태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전문 어부 출신이지만 그의 고기잡이는 그리 신통하지 못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이번 역시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힘과 재주만으로는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부모가 귀여운 자녀들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시지요.
그때 비로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요한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신속한 행동파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님을 알아봅니까?
또 주님이라는 확신에 곧바로 실천하는 행동파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두 모습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바로 행동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멀리서도 주님이심을 알 수 있고, 사랑하기에 주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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