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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제 3차 십자군 전쟁 초기(살라딘 탄생부터 예루살렘함락)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미국과 이라크의 분쟁. 이슬람인 들은 제2의 살라딘이 재림할 것이라 꿈꾸며 가혹한 레지스탕스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부터 쓰는 글의 내용은 얼마 전 영화로 개봉된 ‘킹덤 오브 헤븐’의 내용과 상당수가 겹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살라딘의 탄생과 예루살렘 함락까지, 2부는 그 시기의 유럽과 리처드왕의 이야기를, 3부는 두 영웅의 맞대결과 이슬람의 해방을 다룰 것이다.
살라딘의 탄생.
1137년, 살라딘은 티그리트에서 쿠르드계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아들로 태어났다. 살라딘의 혈기왕성한 삼촌인 시르쿠가 문지기를 살해한 일가족은 유수프(살라딘의 아명)가 태어난 바로 그날, 티그리트에서 추방당했다. 티그리트의 영주인 비흐루즈는 나즘 앗 딘의 오랜 친구였지만 이런 살인죄까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슬람 세계는 분열된 상태였고, 두 형제는 모술의 지도자 장기에게 의탁한다. 두 형제는 능력을 인정받고 군대를 지휘하는 요직에 앉게 된다.
1144년,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를 점령하였고, 이것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는 뉴스였다. 시토회의 열정적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유럽의 왕들, 특히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에게 십자군에 참가 할 것을 설교한다. 적어도 프랑스 왕 루이7세는 열성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고(루이7세와 관련된 일화는 2부의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2차 십자군 선단이 유럽을 떠났다. 아랍에선 장기가 죽고 누레딘이 뒤를 이었다. 2년 후에 다마스쿠스에서 십자군은 누레딘에게 대패 당하였다.
1163년에 누레딘은 시르쿠와 살라딘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으나, 파티마 왕조가 혼란상태에 있었는데도 정벌은 무려 6년이나 걸렸다.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십자군의 방해 때문이었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연합한다면 예루살렘왕국은 완전히 포위되어 버린다는 생각을 기독교인들은 잊지 않았다. 6번의 정벌 끝에 결국 시르쿠는 카이로를 정벌했고, 자신의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한지 두 달 후에 독살당해 죽었다. 누레딘은 살라딘을 이집트의 왕으로 임명한다. 그의 아버지인 나즘 앗 딘은 이집느에 온지 2년 후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었다. 누레딘은 몇 년 되지 않아 살라딘에게 이집트를 준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전쟁 준비가 되는 과정에서 그는 죽고 11살의 아들이 계승한다. 살라딘은 손쉽게 시리아를 정벌해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고, 1186년 48살이 되었을 때 살라딘은 주변 아랍지역의 통합을 마쳤다.
예루살렘 왕국
라틴왕국은 1098년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고귀하면서도 잔인한 기사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아랍세계는 분열되어 있었고, 이런 종류의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1131년의 십자군 왕국은 팔레스타인, 시리아의 해변, 에데사, 안티오크, 티베리아스, 예루살렘, 트리폴리, 베이루트, 티레, 아스칼론, 아크레, 하이파, 카이사레아, 야파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왕국의 북부는 안티오크 공국과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으로 봉신되어 있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왕국의 중요한 전투세력이었고, 십자군기사들도 고귀한 인력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에 참가하는 기사란 자들은, 알고 보면 집안에 의미 없는 존재였던 둘째, 또는 셋째 아들이었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 또는 십자군 전사들은 실질적으로 부와 여자, 살육을 탐했다. 진실로, 부용의 고드프루아나 보두앙 4세 같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중동에서 태어나 자라난 2세들은 쾌락에 안주했다. 새로이 유럽에서 이주해 온 전사들은 잔악했다.
악마같이 잘생기고 또 비열한 뤼지냥의 기는 푸아투의 영주였는데, 그는 귀족을 살해하고 추방당하였다. 명예회복을 위해 중동에 도착하여, 그는 보두앙 4세의 여동생이었던 시빌에게 청혼하였다. 보기 드물게 현명한 왕이었던 보두앙 4세는 나병으로 사망하고, 기는 남겨진 왕위를 물려받았다.
전쟁의 시작
케라크 요새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이어주는 좁은 길목에 위치하였다. 삼면이 계곡에 쌓여있고, 사해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요새의 존재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살라딘의 영토를 소통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살라딘은 이곳을 다섯 차례나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187년에 사티용의 레지날드가 이 성의 영주가 되었다. 잔인하고 비열하기로 소문난 자였는데, 대주교에게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약탈한 도시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사지를 절단하는 식이였다. 예루살렘의 여러 왕들도 그를 처벌하고 싶어 했지만, 그는 성전기사단과 강한 결속이 있었기 때문에 번번히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레지날드가 비록 제 멋대로이긴 했지만, 기독교도를 배반하지는 않았고, 또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이것은 당시의 십자군 기사들에게 매우 위대한 덕목이었다. 그는 한때 홍해 해안을 돌아다니면서 해적질을 했다. 술탄은 이 해적들을 격파했지만 아쉽게도 레지날드는 놓치고 말았고 격분한 술탄은 케라크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 공격도 역시 실패로 끝나고 그는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4세와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살라딘의 누이가 동행한 대상행렬이 레지날드에게 습격받고 포로로 잡히자, 살라딘은 끝을 보리라 결심한다.
지하드
살라딘은 성전을 선포했다. 다마스쿠스에 대규모의 이슬람 군대가 결집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케라크 성을 지나치며, 살라딘의 군대는 레지날드를 비웃었지만 레지날드는 그저 지켜 볼 뿐이었다. 술탄은 여기서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티베리아스였다.
티베리아스 백작인 레몽은 고귀한 혈통의 귀족이었고, 매우 능력 있는 영주였다. 많은 예루살렘 귀족들이 그가 보두앙 4세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는 용감했지만 평화를 원했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반대했다. 3년 전인 1184년에 레몽은 살라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레지날드가 협정을 깨뜨리자 그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였다. 살라딘과의 신의협정을 깨뜨릴 수도, 성전기사단의 비난도 해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성전기사단원과 구호기사단원 240명이 이 살라딘의 대군에 무모한 돌격을 가하고 무참히 살해당했을 때 그의 난처함은 결정적이게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기왕과 그의 기독교인 동료들에게 순종을 맹세할 수 밖에 없었다. 레몽은 그의 영토에서 무슬림들을 추방했다.
술탄은 26000명의 군사를 모았고, 그에 대항하는 기독교도 군사는 2만명이었다. 술탄은 레몽이 회의를 위해 예루살렘에 간 때를 틈타, 티베리아스를 함락시키고 레몽의 부인이 지키는 성을 포위했다. 십자군 기사들(특히 프랑스 기사들)은 광분하였다. 영주의 주인인 레몽만이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해 동료들에게 사막의 폭서로 무슬림의 군대가 후퇴할 때 뒤를 급습하자고 조언했으나 동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기왕은 군사를 모았다. 마지막까지도 레몽은 절제를 주장했다. 지금 순간에 술탄에의 도전은 무모하게만 보였다. 또 마지막까지 역시 왕은 고민했으나, 레몽을 증오하는 탐욕적인 성전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르는 왕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겁쟁이로 불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기왕은 그의 군대와 함께 티베리아스로 향했다.
하틴의 뿔
엄청난 폭서 속에서 기독교 왕국 군대는 진군했다. 티베리아스의 영주이자 지리에 밝은 레몽은 선봉을 맡았고, 왕과 성십자가는 본진에, 후방에는 예루살렘의 수비대장이었던 늙은 이블린의 발리앙이 따랐다. 이 지역에는 물이 얼마 없었고 그들은 레몽의 인도로 샘이 있는 투란마을에서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수원은 한참 떨어진 갈릴리 호수에 있을 것이었다. 여기서 기왕은 중대한 실수를 했다. 군대에 휴식을 주지 않고 갈릴리 호수까지의 급한 행군을 명령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머리 속에 티베리아스 귀부인의 안전이 먼저 떠올랐다면, 그것은 왕으로써는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던게 틀림없다.
기독교 군대가 투란마을을 떠나자 살라딘의 기병들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고, 기독교 군대의 보급로는 끊겼다. 레몽이 가장 먼저 이 위험을 감지했고 그들이 ‘하틴의 뿔’이라고 부르는 계곡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재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왕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기왕은 그 곳에서 휴식을 명령하였고 기독교 군대는 물도 없이 사방의 언덕사이에 있는 계곡에서 주둔하게 되었다.
밤이 되자 무슬림 군대가 사방으로부터 접근하였고, 기독교인들이 주둔하는 곳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살라딘은 정오까지 기다렸다. 하루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기독교 군대는 절망했고 보병들은 적군의 군대를 보자마자 패주하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접근한 살라딘의 기병에 기사들은 격파되었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무슬림 군대에 기독교 군대는 완전히 패주했다.
레몽과 발리앙은 탈출하였다. 기왕과 제라르는 포로로 잡혔다. 레지날드는 사지가 처참히 찢겨 살해되었고, 기왕은 포로로써 귀한 대접을 받았다.
예루살렘
하틴전투 이후 살라딘은 빠르게 북쪽을 정벌하여, 아크레, 베이루트를 함락했다. 그러나 티레에서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저항을 받았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술탄은 티레를 생략하고 남쪽으로 행군하면서 카이사레아, 야파, 아르수프, 아스칼론을 정벌했다. 그는 제라르와 성전기사단원들이 주둔했던 가자를 교환했다. 예루살렘은 이제 술탄의 영토 안에 작은 섬처럼 고립되었다.
하틴 전투의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벨린의 발리앙이 이 성의 수비를 맡았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6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북문에 집중되었다. 투석기와 석궁들이 성벽을 두들겼고, 이틀 후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벽의 일부가 점령되자,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과 기독교인의 안전을 교환하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거절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 때문에 겪어온 모든 고초와 이 도시에서 무슬림들이 흘린 피를 생각하고 그는 모든 기독교도를 죽일 것이라고 발리앙에게소리쳤다. 그러자 늙은 수비대장앙은 살라딘이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모든 이슬람의 성스러운 모스크와 모든 예루살렘의 유산을 파괴할 것이라고 저항했다. 섬뜩해진 술탄은 결국 몸값을 받고 기독교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허락했다.
몇은 노예로 팔려갔고 몇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발리안과 총대주교는 끝까지 살라딘과 협상했고, 살라딘은 그들의 요구에 싫증나 하면서도 결국 관용을 베풀었다. 기독교도의 유산은 모두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것이고, 만약 기독교인들이 원한다면 술탄에 충성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남을 수도 있었다. 가난한 기독교도인들은 공짜로 자유를 얻었고, 아르메니아인들도 공짜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순례자들도 자유가 되었다. 죽은 병사와 귀족의 미망인들도 자유가 되었다. 살라딘의 동생은 포로들을 동정한 나머지 그의 전공을 포상하는 의미로 1000명의 포로를 노예로 달라고 간청했다. 살라딘은 그가 포로를 풀어 줄 것을 알면서도 수락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간 뒤에, 노예로 남은 포로는 8000명이었다. 발리앙과 총대주교는 자신들을 포로로 잡고 그들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살라딘은 거부했다.
술탄은 이 도시가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길 바랐다. 살라딘은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 선포는 많은 이산된(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기쁨을 주었다. 살라딘은 이런 관용으로 1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에서 무슬림을 학살하고 건물을 파괴한 기독교인들과 대조되었다. 살라딘은 이곳에서 모스크와 파괴된 성벽을 수리하면서 한달의 시간을 보냈다.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에게 받은 몸값으로 학교를 만들고 사원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른 기독교인 저항지를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
아크레
예루살렘이 정벌된 후, 4년 동안 술탄은 많은 저항지를 정벌하고 티레로 향했다. 몬페라토의 콘라드 때문에 지나쳤던 이 도시만 함락하면 예루살렘 왕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콘라드는 유능했고, 살라딘의 무분별한 관용으로 이 곳에 흘러 들어온 기사는 훌륭한 방어전력이 되었다.
게다가 티레는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했다. 이 도시를 함락하기 위해선 해상과 육상공격을 동시에 해야했고, 콘라드는 완벽한 방어시설을 갖추어놓았다. 해상에는 쇠사슬을 내리고 성벽은 보강하였다. 살라딘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으나 도저히 티레를 정벌할 수는 없었다. 술탄은 퇴각했다.
술탄은 티레를 놔두고 북쪽의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했다. 이 때 예루살렘 함락에 경악한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의 독일의 십자군이 육로로 접근하고 있었다. 재빨리 공격을 서두른 술탄에게 공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케라크와 크라크 데 슈발리에 같은 유명한 요새들도 함락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술탄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다. 기왕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풀어준 것이다. 그는 티레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제라르의 성전기사단과 덴마크, 네덜란드에서 도착한 기사들을 모아 만 명 규모의 군대를 형성했다.
이 대규모 군대는 이미 술탄에 손에 떨어진 아크레를 공격했다. 술탄은 난관에 빠졌다. 아크레의 포위는 풀었지만, 한때는 잔존세력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술탄에게 이 새로운 기독교인 세력은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3차 십자군 전쟁의 영웅인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와 조우할 것이었다.
첫댓글 ~.~
영화와는 세부적으로 많이 틀리네요...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안습 ㅜㅜ
이런글 좋아요~
리포트 제출겸해서..2부와 3부는 그래서 왠지 못 만들거같은 기분..ㅠ
아.. 갠적으로 살라딘 팬이어서.. 아크레만 들으면 짜증이 난다는.. 아크레 공성전.도 짜증나고.어쨋든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 ~ 이븐 ~아이유브~ 왈라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