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이나 의미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이다.
諸 : 모두 제(言/8)
行 : 다닐 행(行/0)
無 : 없을 무(灬/8)
常 : 떳떳할 상(巾/8)
(유의어)
일체제행무상(一切諸行無常)
일체행무상(一切行無常)
불교 교리 중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우주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항상 불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무상(無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써 무상을 설명한다. 곧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이란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실의 실상(實相)이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표시되었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천수경' 등 경전에도 '무상한 까닭에 고(苦)인 것이다'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며 무상은 고(苦)의 전제라고 했다.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에 비유되어 불교적 인생관의 특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 하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의(眞意)라고 하는 것이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 모든 행위는 늘 변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음
중국에서 불교를 도입하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도가사상에 빌 공(空)으로 받아들였다. 도가사상에 공(空)과 불교에 공(空)은 다 같은 한문 빌 공(空)자를 쓰지만 그 뜻은 다르다. 도가사상에 공(空)은 집은 지붕과 벽을 제외하고는 방과 거실 등의 공간에 사람이 산다. 또 항아리나 그릇에 공간이 있어야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다. 공간을 말하는 빌 공(空)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빌 공(空)은 일체만물은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 인연(因緣)에 의해 생겼다. 또 인연에 의해 변할 뿐 고정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범어로는 수냐(Śunya)인 공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의 뿌리가 되었다. 260자'반야경(般若經)'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공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체와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한문 '빌 공(空)'은 비었다는 것, 즉 없다는 것이다. 한문 뜻과 다르게 불교 철학적 의미는 우주만물은 항상 시공간의 인연 따라 변하고 변한다는 뜻이다. 인간 또한 같다. 세상모든 것은 있으면서도 없다는 비유(非有)와 없으면서 있다는 비무(非無)라 하겠다. 유와 무가 동시에 성립하는가 하면, 또한 동시에 설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만물은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의 공(空)을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이론으로 증명했다.
무순 말인지 어렵지만 쉽게 찾아가 봅시다. 나를 예로 들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에 의해 무에서 유로 태어났다. 태어난 후부터 몸과 마음이 변하고 변해서 오늘에 나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중년인 지금에 내가 아니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다. 오늘에 중년인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 내가 아니기도 하고, 초등학교 일학년 때 나이기도 하다. 오늘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변해 가는 나임은 틀림없다. 어떻게 변해 언제 죽을 지 아니면 영생의 약이 개발되어 영생할지 나도 모르는 미래다.
대승불교 경전 반야심경에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말이 있다.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는 뜻이다.
이를 또 다른 예로 비유한다면 '박말순'이가 자기 이름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박아랑'으로 개명했다. 옛날 박말순이가 오늘에 박아랑과 같은 사람이고, 오늘에 박아랑은 옛날 박말순과 같은 사람이다. 박말순이 곧 박아랑이요. 박아랑이가 곧 박말순이다. 옛날 박말순이가 박아랑으로 변했듯이 박아랑도 세월(시간의 함수)따라 어떻게 변할지는 모를 뿐, 변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하나로, '모든 행은 무상하다'는 뜻으로,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와 함께 불교 교의의 핵심을 간추려 나타낸 삼법인(三法印)으로 불린다. '행(行)'은 인연(因緣)으로 일어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가리키며, '무상(無常)'은 생멸(生滅)의 변화가 없이 그대로 상주(常住)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곧 모든 현상은 늘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불교 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 흘러가고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해 2세기 인도 중부 지역에 살았던 마트리체타(Matriceta)는 "모든 빚어진 것은 찰나(刹那)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찰나의 현상들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에서 인간의 괴로움은 비롯된다. 이를 '설무상경(說無常經)'에서는 "색(色, 물질)은 무상이요, 각(覺, 감각)과 상(想, 지각), 행(行, 욕구), 식(識, 인식)도 무상이다. 무상은 곧 괴로움(苦)이요, 괴로움은 곧 신(神, 자아의 본체)이 아니다"고 나타냈다.
그러므로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하니, 이것이 생멸의 이치이다. 생멸에 대한 집착을 없애면,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라는 네 구절의 게송(偈頌)으로 나타냈다.
■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 중 하나로, 세 가지 진리라는 뜻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인(印)이란 인신(印信)과 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이 삼법인은 소승불교에 있어서 불교가 외도(外道)와 다른 점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밝힌 교의이다.
① 제행무상인: 온갖 물(物)과 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 변화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과 상존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무상(無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② 제법무아인: 우주 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라 실로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 무아라고 말한다.
③ 열반적정인: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적정의 이상세계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법으로 부처님의 말씀과 외도의 말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삼법인을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세 가지를 말하고, 북방불교에서는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를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십이처나 사대, 오온과 같은 그러한 일체는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라고 한 부처님의 교설을 함축적으로 정리한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고 부른다. 근거가 되는 경전은 "색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 수, 상, 행, 식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1)."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10)."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해 사법인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아함 권18).
●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有爲四相)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불사영생을 실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티끌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異), 없어지고(滅) 만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 수, 화, 풍과 같은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순세파와 사명파에서는 이들을 불변적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했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원소가 원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
인간의 영혼(jīva)이나 자아(ātman)와 같은 존재에 대하여 대개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비록 사멸하여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또는 다른 몸을 만나 재생한다고 한다.
그들은 과연 불변의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그러한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자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우빠니샤드 철학의 자아(ātman)나 생활파의 명(jīva), 이 계파의 영혼(jīva) 등은 모두가 오취온설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불변적 아체(我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그들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렇게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권1)."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말하는 자아나 사문들이 말하는 영혼도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취온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색온인데,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니 오취온의 무상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발생시키는 인과 연이 벌써 무상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색이 어찌 유상하겠는가. 수, 상, 행, 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1)."
이와 같이 십이처로부터 사대, 오온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항구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sarvam anityam)"고 부처님은 단언한다. 이 단언은 '제행무상'이라는 성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말 속의 '행(行, saṃskara)'은 오온 중의 행온을 가리키는데, 무상한 세계 속에서 개체를 유지하려는 행의 작용이야말로 무상함을 가장 실감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이렇게 덧없는 것이지만,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유상하다고 본다.
백 년이나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신의 재산과 권력과 명예는 영원할 것으로 본다. 탐착과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다. 불교의 무상설은 중생들의 이러한 뒤바뀐(顚倒) 착각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코자 하면 먼저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제행무상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교리이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십이처설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곧 육근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인가 고찰해야 한다.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에서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적인 범(梵, 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설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이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ā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 주재성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다는 것은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māma ātman)’라고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했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1)."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들(육근, 사대, 오취온)은 이처럼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성, 주재성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으로 말미암아 대립과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 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은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 판단은 이 무아설(ānātma-vā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 사상(ātma-vā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 인도 철학사 가운데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다. 부처님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1)"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깨달은 자는 생사와 윤회의 일체 고통에서 벗어나 이상의 경지에 이른다. 그 경지는 모든 괴로움이 없어져서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열반적정이라 한다.
열반의 이상경에 이르면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적정(寂靜)하다는 것이다. 열반이란 싼스끄리뜨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역인데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멸도(滅度), 적멸(寂滅), 원적(圓寂) 또는 무위(無爲), 부작(不作), 무생(無生) 등으로 의역한다.
본뜻은 '불어서 끄다',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에 비로소 적정한 최상의 안락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편한,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 諸(모두 제, 김치 저/어조사 저)는 ❶형성문자로 诸(제, 저)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者(자, 제)로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諸자는 ‘모두’나 ‘무릇’, ‘만약’, ‘여러’와 같이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諸자는 言(말씀 언)자와 者(놈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者자는 사탕수수즙을 맛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놈’이나 ‘사람’과 같이 추상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 言자가 결합한 諸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諸자는 글자의 조합과는 관계없이 ‘이’나 ‘저’와 같은 대명사나 ‘~에’나 ‘~에서’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諸(제, 저)는 (1)한자어로 된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여러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모두 ②모든 ③무릇 ④여러 ⑤딴, 기타의 ⑥만약(萬若) ~한다면 ⑦이, 저(대명사) ⑧지차(之次: 맏이 이외의 자식들) ⑨말을 잘하다, 그리고 ⓐ김치(소금에 절인 배추나 무 따위를 양념에 버무린 뒤 발효를 시킨 음식)(저) ⓑ장아찌(저) ⓒ절임(저) ⓓ두꺼비(두꺼빗과의 양서류)(저) ⓔ~에, ~에서(어조사)(저)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봉건시대에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인민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제후(諸侯), 아들 또는 아들과 같은 항렬이 되는 사람의 통칭을 제자(諸子), 모든 섬이나 여러 섬을 제도(諸島), 여러분의 뜻으로 손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쓰는 말을 제군(諸君),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제반(諸般), 여러 선비나 모든 유생을 제유(諸儒), 문내의 여러 집안을 제가(諸家), 여러 가지 기구를 제구(諸具), 점잖은 여러분을 제공(諸公), 여러 나라를 제국(諸國), 여러 고을을 제읍(諸邑), 여러 신하나 모든 신하를 제신(諸臣), 우주에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사물을 제법(諸法), 모든 악이나 온갖 악을 제악(諸惡), 형제 간에 우애가 깊음을 제우(諸友), 의논할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 앉음을 제좌(諸坐), 마음이 속세에 끌리는 여러 가지 요소를 제착(諸着), 어떤 것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제사(諸事), 여러 가지 태도와 맵시 또는 모양을 제상(諸相), 여러 가지 의견이 뒤섞여 혼란하다를 일컫는 말을 제설분분(諸說紛紛),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를 일컫는 말을 십이제국(十二諸國),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그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 나간다를 일컫는 말을 반구저기(反求諸己) 등에 쓰인다.
▶️ 行(행할 행, 항렬 항)은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彳(척; 왼발의 걷는 모양)과亍(촉; 오른발의 걷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좌우의 발을 차례로 옮겨 걷는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네거리, 굽지 않고 바로 가는 일, 나중에 가다, 하다란 뜻과 항렬(行列), 같은 또래란 뜻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❷상형문자로 行자는 '다니다'나 '가다', '돌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行자는 네 방향으로 갈라진 사거리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行자를 보면 네 갈래로 뻗어있는 사거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나 마차가 다니던 사거리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行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길'이나 '도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行자는 한쪽 부분이 생략된 彳(조금 걸을 척)자가 쓰일 때가 있는데, 이는 彳자 자체가 별도의 부수 역할을 하는 경우로 역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行자가 '항렬'이나 '줄'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항'으로 발음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行(행, 항)은 (1)글의 세로 또는 가로의 줄 (2)길을 감. 군자(君子)는 대로(大路) (3)행동(行動) (4)한시(漢詩)의 한 체 (5)당(唐)나라에서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던 동업 상점의 조합, 또는 도매상, 중간 업자 혹은 단순히 상점을 가리킴. 은행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음 (6)어떤 지명(地名)이나 시간 아래에 붙이어 그리로 감, 어떤 곳으로 감의 뜻을 나타내는 말 (7)일체의 유동(流動), 제행(諸行)하며 변화하는 존재. 현상 (8)십이 인연(因緣)의 하나. 과거세(過去世)에서 신(身), 구(口), 의(意) 세 업(業)으로 지은 선악 일체의 본원적 생명 활동. 십이 인연(因緣) (9)수행(修行) (10)실천. 행위. 인간적인 행동(知, 智) (11)칠사(七祀)의 하나. 도로와 행작(行作)을 주장하는 궁중의 작은 신(神) (12)조선시대 때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官職)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위에 붙여 일컫던 말. 가령 종1품(從一品)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正二品)의 관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崇政大夫行李曹判書)라 했음 등의 뜻으로 ①다니다, 가다 ②행하다, 하다 ③행하여지다, 쓰이다 ④보다, 관찰하다 ⑤유행하다 ⑥돌다, 순시하다 ⑦늘다, 뻗다 ⑧장사(葬事)지내다 ⑨시집가다 ⑩길, 도로, 통로 ⑪길, 도로를 맡은 신(神) ⑫고행(苦行), 계행(戒行) ⑬행실(行實), 행위(行爲) ⑭여행(旅行),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 ⑮행직(行職: 품계는 높으나 직위는 낮은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⑯일 ⑰행서(行書), 서체(書體)의 하나 ⑱시체(詩體)의 이름 ⑲장차, 바야흐로 ⑳먼저, 무엇보다도 그리고 항렬 항의 경우는 ⓐ항렬(行列)(항) ⓑ줄, 대열(隊列)(항) ⓒ열위(列位), 제위(諸位)(항) ⓓ항오(行伍), 군대의 대열(隊列)(항) ⓔ순서(順序), 차례(次例)(항) ⓕ같은 또래(항) ⓖ직업(職業)(항) ⓗ점포(店鋪), 가게(항) ⓘ깃촉(항) ⓙ의지(意志)가 굳센 모양(항) ⓚ늘어서다(항) ⓛ조잡하다(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할 위(爲), 옮길 이(移),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지(知), 말씀 언(言), 말씀 어(語)이다. 용례로는 길 가는 사람을 행인(行人), 동작을 하여 행하는 일을 행동(行動), 여럿이 벌이어 줄서서 감을 행렬(行列), 가는 곳을 행선(行先),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행상(行商), 실지로 드러난 행동을 행실(行實), 정치나 사무를 행함을 행정(行政), 체면에 어그러지도록 버릇 없는 짓을 함을 행패(行悖), 법령의 효력을 실제로 발생 시킴을 시행(施行), 관례대로 행함을 관행(慣行), 앞으로 나아감 또는 일을 처리해 나감을 진행(進行), 계획한 대로 해 냄을 수행(遂行), 일을 잡아 행함을 집행(執行), 약속이나 계약 등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이행(履行), 절뚝거리며 걸어감이나 균형이 잡히지 않음을 파행(跛行), 자기의 거주지를 떠나 객지에 나다니는 일을 여행(旅行), 방자하게 제 멋대로 행함 자행(恣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아울러 행함을 병행(竝行), 차량 등이 정해진 노선에 따라 운전하여 나감을 운행(運行), 출판물이나 돈이나 증권 채권 따위를 만들어 사회에 널리 쓰이도록 내어놓음을 발행(發行), 강제로 행함을 강행(强行),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이르는 말을 행동거지(行動擧止),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설 줄도 아는 처신의 신중함을 일컫는 말을 행장진퇴(行藏進退),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을 취하지 아니하고 큰길로 간다는 뜻으로 행동을 공명정대하게 함을 비유하는 말을 행불유경(行不由徑),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다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 그대로 유유히 움직이는 모양 곧 자연에 맡기어 행동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행운유수(行雲流水), 타향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병들어 죽음을 일컫는 말을 행려병사(行旅病死),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로지인(行路之人), 걸어가는 송장과 달리는 고깃덩이라는 뜻으로 배운 것이 없어서 쓸모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시주육(行尸走肉), 그 해의 좋고 언짢은 신수를 일컫는 말을 행년신수(行年身數), 간 곳을 모름을 일컫는 말을 행방불명(行方不明), 일을 다하고도 오히려 남는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행유여력(行有餘力),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감을 일컫는 말을 행안남비(行雁南飛)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常(떳떳할 상/항상 상)은 ❶형성문자로 㦂(상)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건 건(巾; 옷감, 헝겊)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尙(상; 더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도리에 입는 속바지 위에 받쳐 입는 긴 치마라는 뜻에서 길다, 전(轉)하여 오래 계속하다, 항상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常자는 ‘항상’이나 ‘일정하다’, ‘변함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常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巾(수건 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常자는 본래는 ‘치마’를 뜻했던 글자였다. 그래서 常자는 집을 그린 尙자에 ‘천’이라는 뜻을 가진 巾자를 결합해 집에서 항시 두르고 있던 옷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집에서 항시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항상’이나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尙자에 衣(옷 의)자가 더해진 裳(치마 상)자가 ‘치마’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常(상)은 ①떳떳하다 ②항구(恒久)하다, 영원(永遠)하다 ③일정하다 ④범상하다, 예사롭다, 평범하다 ⑤숭상(崇尙)하다 ⑥(변함없이)행하다 ⑦항상(恒常), 늘, 언제나 ⑧늘 ⑨일찍이(=嘗), 애초에 ⑩도리(道理) ⑪법도(法道), 규율(規律), 통례(通例) ⑫평소(平素), 평상시(平常時) ⑬범상(凡常) ⑭길이의 단위(單位) ⑮천자(天子)의 기(旗) ⑯나무의 이름 ⑰땅의 이름 ⑱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떳떳할 용(庸), 떳떳할 이(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눌 반(班)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을 상임(常任), 항상 살고 있음을 상주(常住), 두루 많이 있는 일을 상례(常例), 늘 준비하여 둠을 상비(常備), 늘 고용하고 있음을 상용(常傭),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근무함을 상근(常勤),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을 상태(常態), 임시가 아닌 관례대로의 보통 때를 상시(常時), 일반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을 상식(常識), 날마다 보는 업무나 보통 업무를 상무(常務), 떳떳하고 바른 길을 상궤(常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설비나 시설을 갖춤을 상설(常設), 늘 하는 버릇을 상습(常習),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 또는 맡은 사람을 상임(常任),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심상(尋常), 내내 변함없이나 언제나 또는 자주나 늘을 항상(恒常), 날마다 또는 늘이나 항상을 일상(日常),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정상이 아닌 상태나 현상을 이상(異常),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특별하지 않고 예사임을 통상(通常),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범상(凡常), 괴이하고 이상함을 괴상(怪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인정 또는 생각을 이르는 말을 인지상정(人之常情),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만년이나 오래도록 항상 푸르다는 뜻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말을 만고상청(萬古常靑),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반복무상(反覆無常), 열에 아홉이란 뜻으로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이 된다는 뜻으로 거의 다 됨을 가리키는 말을 십상팔구(十常八九)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