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떠억 들어 보임으로서 법을 전하신 ‘영산회상의 거렴화(擧拈花)’
또 다자탑전에서 자리를, 누더기를 입은 제자
가섭존자에게 자리를 노나서 앉히시는
‘다자탑전의 분반좌(分半座),
또 열반하셔서 곽 밖으로 두 다리를 써억 내미시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이렇게 해서 3차례에 걸쳐서 법(法)을 전하신
법문을 하셨습니다.
영산회상에 꽃을 드는 도리나,
다자탑에서 자리를 노나 앉으신 것이나,
또 열반회상에서 곽(槨) 밖에 두 다리를 내보이시는
도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 도리'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아! 이것은 이러한 뜻이로구나’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신 뜻은
이것은 바로 불교의 진여의 체(體)를 전하시고
또 분반좌 하신 것은 용(用)을 전하시고,
곽시쌍부 하신 것은, 체와 용을 한목 전하신 것이다.’
이런 등속(等屬)으로 아무리 따져서 수긍을
해봤자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결과 밖에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참다운 진리가 될 까닭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서 깨닫기를 바란다든지, 이래가지고서는
공부를 기껏 잘해 나가다 중요한 고비에 있어서 자기의 공부를 그르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반드시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한 공안에 일여하게 참구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모든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며
우주법계에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차기를 발원합니다 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