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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 제2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1,9-11ㄴ.12-13.17-19>
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는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토마스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여드레만에 완성된 부활 공동체>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를 보며 열등감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나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키나 외모의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고, 공부나 노래를 잘못하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며, 집안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모든 열등감 중에서 영적인 열등감이 가장 딱하고 안타깝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영성 강의를 다른 사람은 다 알아듣는데 나만 못 알아들으면 얼마나 안타깝고, 모두 하느님 체험을 하였는데 나만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의 경우는 더 안타까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만난 부활의 주님을 자기가 만나지 못했으니 같은 제자로서 그 열등감과 그 안타까움이 너무도 컸을 겁니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토마스 사도는 세련되고 노련한 사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약점을 노련하게 감추거나 숨기는 사도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 아버지께로 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을 테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가 나서서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자기의 모름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죽이려 들지도 모르니 주님께서 병든 라자로가 있는 유다로 가시지 말라고 말리는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하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토마스 사도는 자기 속 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고, 잘 모르면서도 어물쩡 넘어가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 그이기에 주님 부활에 대한 의심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이 주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믿고 싶은 것이고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 보고 싶습니다.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실히 믿고 싶은 거라면 이것이 나쁜 겁니까? 왜 나쁩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의심하지도 않고 그래서 확고히 믿지 못하는데도 대충 믿으며 어물쩡 넘어가는 우리 믿음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큰 깨달음을 위해 큰 의심을 하라고 하지요.
아무튼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불신을 숨기지 않고 또 영적 열등감도 감추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기의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주님께서는 주님을 눈으로 꼭 보고 싶어하는 그의 열망과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제 생각에 다른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 간의 여드레 부활 체험의 차이는 영적인 열등감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열망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에서도 열등감이 꼭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열등감은 성장과 열망의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늦되었지만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제자들의 공동체 밖에 있지 않고
완전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제 아무런 이탈자 없이 똘똘 뭉친 공동체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우리 공동체에도 토마스 사도처럼 영적으로 늦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동체와 완전히 합류하기 위한 여드레가 필요합니다.
여드레는 그들이 합류하기까지 그들을 위해 공동체가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정직한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합니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하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 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변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토마스 사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머지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토마스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나머지 동료들이 바보이고 그래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한 명의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에게 죄의 용서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코린 15,17)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을 죄 없으신 어린양이요, 하느님으로 믿지 못하면 나에게 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토마스도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는 상황이 많이 바뀝니다.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주님도, 하느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찌른 사람이 죄가 없음이 판명되었을 때 그 사람의 수준만큼 깨끗해집니다.
상대가 죄가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2021)은 경찰관을 살해한 이유로 감옥에서 20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루스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루스는 다섯 살인 동생 케이트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케이트는 단란한 가정에 입양되고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케이트는 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케이티의 양부모는 20년간 루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지만, 케이티를 위해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루스는 차이나타운의 허름하고 낡은 집에서 생활하며 생선 공장과 목공 일을 병행합니다.
그러나 케이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이전 집에 사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접근금지 명령을 넘어서 동생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변호사는 케이티의 양부모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케이티에게 관심을 끊을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편지를 다 감추었다는 것을 안 루스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렇게 변호사도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루스는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합니다.
거기서도 경찰관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루스를 좋아하던 남자도 루스가 경찰관을 살해한 사람임을 알고 등을 돌립니다.
루스에게 살해당한 보안관의 두 아들은 루스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럴려고 하지 않았지만, 루스가 사회에 적응을 잘해 나가자 열을 받은 것입니다.
케이티의 양부모의 딸인 에밀리는 부모가 하는 말을 엿듣고 루스가 보낸 편지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루스를 만나 케이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곳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죽은 보안관의 두 아들은 에밀리를 케이티로 착각하고 그녀를 납치합니다.
한편 동생을 만나도 되는지 허락받기 위해 변호사의 집을 찾은 루스는 변호사의 아내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그러자 루스가 말합니다.
그때 케이티는 다섯 살이었다고.. 다섯 살이 무엇을 알았겠느냐고..
루스는 동생을 위해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에밀리를 유괴했던 스티브는 루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릅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루스는 그곳으로 가고 스티브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려고 뒷문을 따고 들어오던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말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입니다.
이에 스티브도 후회하고 총을 내려놓습니다.
나중에 케이티는 아무 말 없이 언니 루스를 안아줍니다.
루스가 출소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루스를 보던 이들은 모두가 그녀를 용서 못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루스는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의 죄를 밝혀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다행히 영화에서는 그녀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죄인 취급했던 이들이 뉘우쳤습니다.
케이티도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케이티도 어쩌면 언니가 살아있으면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언니가 출소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는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활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찌른 이가 부모의 죄 없음을 깨달으면 부모처럼 되려고 합니다.
인간을 찔러서는 인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된다면 그분 죽음이 내 믿음이 없는 탓이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3대 테너로 불리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중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유명한 앙숙 관계였습니다.
1984년 당시 카탈로니아 지역은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 지역으로부터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출신의 카레라스 역시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순회하는 공연을 하면서 서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공연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카레라스는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 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레라스는 매달 골수이식과 수혈 등 고통스러운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생존 확률은 10%였습니다.
막대한 치료비로 인해 재정이 곤란해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경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그는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르모사(Hermasa)라는 재단의 도움으로 카레라스는 치료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재단에 가입하려던 카레라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준 재단의 설립자이자 후원자가 도밍고이며, 애초에 그 재단을 설립한 목적이 카레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밍고는 도움을 받는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익명으로 재단을 운영해왔던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크게 감동하여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도밍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라스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도밍고처럼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도밍고처럼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모습 자체로 우리가 죄인이고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찔렀다는 죄책감에 그분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고, 또 그 부활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찌를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렇게 닮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그리스도처럼 순교하여 온전한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복음 20장 28절)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무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과 토마스>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우리 교회의 ‘공식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에 도달하기까지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부활 후의 이야기들을 보면, 모든 사도들과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보더라도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토마스 사도 한 사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고 의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최초로 한 사도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은 믿지만 그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혹시 유령이었는지, 아니면 ‘영적인 존재’였는지 의심스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기 때문에(루카 24,37) 토마스 사도만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은 ‘안 믿겠다.’가 아니라 ‘믿고 싶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강하게 희망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신 일은 토마스 사도를 위한 ‘특별한 배려’인데, 토마스 사도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배려입니다.
(희망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믿고 싶은 희망’은 ‘믿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그 노력은 믿음으로, 다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확신은 신념이 되고, 신념은 순교로 이어집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서 사도들의 증언만 듣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과정은 다르지만, 믿어서 누리게 되는 ‘복’의 차이는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이 받는 구원과 보지 않았지만 증언만 듣고서 믿는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은 ‘같은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0-31)
이 말은 ‘부활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이시며 메시아시라는 ‘증언’이고, 동시에 그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이고, ‘초대’입니다.
이 권고와 초대에 응답하거나 안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사도들이(교회가) ‘당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 이어서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고,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혼자서만 신앙생활하고 혼자서만 구원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더러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 갖지 않고 혼자서만 살다가 혼자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없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고해성사를 세우신 말씀이고, 사도들에게 고해성사 직무를 맡기신 말씀입니다.
(용서는 권한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으로 보이는데, 진짜 뜻은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해 주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의 여정 - 하느님을 닮읍시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방금 부른 자비하신 하느님을 노래한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더불어 언젠가 신나게 불렀던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라는 화답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이런 짧은 성구를 끊임없이 노래함도 기도의 생활화에 참 좋은 수행이 됩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참으로 오늘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봄꽃 만발한 신록 눈부신 파스카의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집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미사전례 중 가장 아름다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소원이자 기쁨은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복된 우리의 존재들입니다.
애당초 자비를 선물로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사랑함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함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훈련', 얼마나 멋진 말마디입니까!
깨닫고 보면 영성생활에서 모든 수행은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훈련입니다.
운동선수의 훈련과 흡사한 우리의 영성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의 여정’이고, 우리의 신원은 주님 ‘자비의 전사’이며,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는 일입니다.
과연 날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워지는 자비의 여정, 하닮의 여정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아버지는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이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분이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갈 때 참행복도 참기쁨도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결정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의심하던 토마에게 주님께서 발현하셨을 때 토마 사도의 고백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을 통해 환히 계시된 자비하신 하느님을 체험한 토마의 고백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이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정말 우리 모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토마 사도만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파스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주님은 동시에 하느님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바로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숙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선물들을 하루하루 최대한 활용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모두가 파스카의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문득 행복기도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평화, 기쁨,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저는 요즘 가끔 이런 묵상을 합니다.
지상에서의 파스카 봄철의 꽃들과 신록이 이렇듯 아름다우면 우리가 장차 갈 천상의 천국에서의 아름다움은 어떻겠는가.
천상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지상의 아름다움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그 많은 선물 중 참 좋은 선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참 좋은 선물들입니다.
첫째, 평화와 기쁨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자 명약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평화와 기쁨을 지닌 이들이 정말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재물 다 지녔어도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삶의 허무와 무의미, 무지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파스카의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두려움의 벽은 사라져 평화의 문이 됩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담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반가운지요!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바로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서시며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마침 어제 면담 고백 성사를 보고 간 분께 다음 ‘말씀 처방전’에 “웃어요!” 스탬프를 찍어 드렸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가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엄베드로는 행복하다.
엄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 5,9 참조)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나타나실 때 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우리의 평화가 주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갈망하는 평화의 선물인지요.
주님의 평화의 선물 역시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일주일 후 세 번째 토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선 당신의 평화를 선물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몹시 기뻐했다 합니다.
바로 두려움의 벽을 평화의 문으로 바꾸시는 주님이요 평화의 문을 통해 선사되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 살 수도, 빼앗아 올 수도 없는, 또 누구도 앗아 갈수도 없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평화도 기쁨도 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깨어 부단히 평화롭게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영성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 역시 평화와 기쁨의 영성훈련시간입니다.
둘째, 성령과 용서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하나의 선물을 선택하라면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선택하겠습니다.
성령 안에는 온갖 선물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까다롭지 않습니다.
성령을 갈망하며 마음을 활짝 열 때 주님은 아낌없이 성령을 주십니다.
평화와 기쁨의 선물에 이어 성령과 용서를 선물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숨을 불어넣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숨을 불어 생명을 넣어 살게 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이 은혜로운 미사 시간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용서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신적 사랑입니다.
참으로 성령을 통해 용서 받을 때 비로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새삼 용서는 은총이지만 또 훈련이기도 합니다.
용서의 훈련입니다.
하루하루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용서의 훈련에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은총과 훈련과 더불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셋째, 믿음과 치유입니다.
믿음도 치유도 파스카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이 신바람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무수한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십니다.
백성은 사도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납니다.
파스카 주님을 통한 믿음의 선물입니다.
믿음이 부족합니까?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사 간청하십시오.
이런 믿음의 선물에 따른 치유의 선물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자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 들었고 그들은 모두 나았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을 상징합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치유보다는 요즘 회자되는 영어 힐링이란 말이 실감나게 와닿습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물론 우리 천주교야 말로 힐링의 원조입니다.
힐링을 찾아 엉뚱한 곳을 찾지 마십시오.
믿음을 지니고 참 좋은 힐링 센타인 교회나 수도원을 찾는 것이 치유의 첩경입니다.
무엇보다 미사전례보다 영육의 힐링에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의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들과 신록의 파스카 봄날에,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전례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하느님의 은총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자발적 사랑의 응답이 끊임없는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기쁨, 성령과 용서, 믿음과 치유를 선물하시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편 118,1)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19.21.26)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임'을 믿도록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지요.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예수님도 그분 상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야' 믿겠다고 어깃장을 놓습니다.
이 어깃장에서 동료들에 대한 부러움과 예수님께 대한 야속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왜 하필 그때 오셔가지고... 나도 나름 인정 받는 제자였는데...'
토마스에게는 매우 길었을 여드레가 지나고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요한 20,27)
그분은 직접 보고 만져봐야 믿겠다는 그의 말대로 모든 걸 허용해 주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시지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이 말씀은 그를 나무라거나 부끄럽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떠나시고 난 후, 앞으로 이어질 성령의 시대를 준비키시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행적을 잇는 사도들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4)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고' 믿게 된 이들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새 그리스도인들이 '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 제자들, 사도들인 셈이지요.
제2독서인 요한 묵시록에서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를 기록하게 된 이유를 밝힙니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 보내라.'"
(묵시 1,10-11)
예수님 시대에는 그분을 '보고' 체험한 이들이 그분 주위로 몰려들어 믿게 되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일을 이어가는 제자들을 '보고' 체험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보고 듣고 겪은 그들의 체험은 "기록하여라."(묵시 1,19)는 주님 말씀에 순명한 이들에 의해 경전으로 묶여 수천 년이 지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그 덕에 우리는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의 한 사내 예수를 알고 겪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보고' 믿는 이와 '보지 못하고' 믿는 이 사이에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록은 보지 못한 이들이 믿게 하고 구원받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1)
그렇다면 '본' 사람은 자기 만족에 그치지 말고, 이를 전하고 기록하라는 과제를 받은 것입니다.
또 '보지 못한' 사람은 믿으라는 과제를 받은 것이고요.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소수의 직접 체험 세대가 끝난 뒤 이어질 무한대의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행복 선언입니다.
이로써 벗님처럼 제자의 제자의 제자를 보고 성령께 사로잡혀 기록된 글을 보고 믿게 될 온 세상의 잠재적 형제자매는 누구나 이 행복의 범주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본' 사람, '보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는 걸까요?
물론 아닐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분을 직접 '보고' 그분 행적과 기적을 '보고도' 자기 논리에 걸려 믿음을 저버렸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보고 믿는 사람이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나 관계없이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 과제는 '평화'의 축복에 뒤이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요한 20,22-23)
이 말씀은 꼭 교회 제도 안에서 직무사제단에게 부여된 사죄권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용서란 생명을 지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도전이요 과제라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으니까요.
고해성사 안에서 사제를 통해 얻는 하느님의 용서는 물론이고, 서로 다른 이들이 얽혀 살면서 맺히고 패인 고통과 상처에 대해 개인 차원에서 또 공동체 차원에서 베푸는 용서가 얼마나 큰 평화를 낳는지, 우리는 크고 작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그분을 본 사람이건 보지 못한 사람이건 '믿는 이들'의 표지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시기 전, 마치 창세기의 인간 창조 대목처럼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용서는 믿음의 증거인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 재창조의 증거가 됩니다.
나의 용서가 죄와 어둠의 기억에 불편하게 묶여 있는 사람을 풀어주어 사람 안에, 사람 사이에, 온 세상에 평화를 촉진하는 성령의 일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바가 아닐까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어렵다고 느낀다면 용서는 성령의 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고 그분 자비에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내게 오셔서 친히 '용서'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평화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하며 부활시기를 시작합니다.
팔일 축제 동안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단계적으로 체험하며 확신하게 된 제자들처럼, 벗님도 예수님과의 사랑의 추억들을 되새김하면서 그분이 벗님 안에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벗님 안에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걸어가시기만 하면 부활의 증인이 되실 겁니다.
그럴 수 있도록 그분께서 오늘 벗님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성령을 불어넣어주시며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니까요.
부활의 기쁨과 하느님의 자비가 벗님이 가는 곳곳에 흘러 넘치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의 생년월일은 주민등록에 있는 것과 집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은 주민등록에 있는 저의 생년월일은 기준으로 저를 기억합니다.
집에서 이야기하는 생년월일을 기록하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학교의 학적부에도, 은행의 전산에도, 사제의 인명부에도, 여권에도 주민등록에 기록된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년 어리게 기록된 것 때문에 고민도 있었습니다.
신학교는 나이순으로 순서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 50명이 같은 강당에서 잠을 잤습니다.
‘대침실’이라고 불렀습니다.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로 배정 받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될 때도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조금 늦게 본당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1년 늦게 기록된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1년을 더 젊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년을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민등록에 등록된 저의 생년월일보다는 부모님께서 알려주시는 생년월일을 본래의 생년월일로 믿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양치기 소년’을 읽었습니다.
양을 치던 소년은 심심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습니다.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늑대는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다시 심심했던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늑대는 양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진짜 불이 났습니다.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장난은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서 양치기 소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성공, 재물,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편리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거짓믿음입니다.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그런 믿음의 끝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학, 기술, 수학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유사믿음입니다.
과학, 기술, 수학으로 쌓은 믿음은 바벨탑과 같아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한 믿음입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됩니다.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이 믿음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년월일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공, 재물, 권력을 얻으려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학, 기술, 수학의 법칙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 때문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의 믿음입니다.
2000년 전에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 갇힌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무슨 커다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가족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운전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이 운전 경력이 이제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처음에는 운전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선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고, 차 속도를 높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차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초보 때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보 때의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신부님께서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사제서품 받고 나서 운전면허를 땄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신부님, 저는 면허 딴 지 벌써 40년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답니다.
소위 장롱 면허 소유자였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못 하는 아주 소용없는 운전자일 따름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실패도 체험하고 피하고 싶은 고통의 순간도 겪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면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지켜주셨던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패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기에, 나중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없어서 제자들의 증언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도 있는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십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말한 대로 손가락이나 손을 못 자국에 넣어 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요.
믿음의 유형은 이렇지 않을까요?
첫째는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보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지막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전혀 없어서, 어렵고 힘들면 곧바로 넘어질 사람입니다.
절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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