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원주원씨중 시중(=僉議中贊) 벼슬을 하신 선조님은
원성백 극자유자(克猷)님의 10세손인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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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부(元傅)
[상세내용]
미상∼1287년(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의 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에 보직되고, 1269년(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년(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유경(柳璥)·김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 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종행하였고,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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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의중찬 [ 僉議中贊 ]
목차
정의
고려 후기 첨의부(僉議府)의 종1품 관직.
내용
전기의 문하시중을 계승한 수상직(首相職)이다. 정원은 좌ㆍ우 각 1인이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의 관제가 격하될 때 중서문하성이 첨의부로 되면서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개칭된 것이다.
고려 전기 이래의 상좌(尙左) 원칙에 따라 좌중찬이 우중찬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1291년에 원나라의 제도에서 영향을 받아 상우(尙右)의 원칙이 채택되면서 우중찬이 상위직으로 수상이 되었다.
1293년에는 첨의부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승격됨에 따라서 도첨의중찬으로 바뀌었지만, 품질(品秩)과 정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할 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개칭되었다가, 이 해에 곧 충선왕이 퇴위하고 충렬왕이 복위함에 따라 도첨의중찬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1303년에는 다시 상좌로 좌중찬이 상위직으로 되었다.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개칭되었으며, 정원도 1인으로 줄어들었다.
1330년(충숙왕 17)에도 충혜왕이 즉위하여 일시 도첨의중찬으로 개칭한 적이 있었지만, 곧 충숙왕이 복위하여 정승으로 환원시켰으며, 이때 정원이 좌ㆍ우 각 1인으로 늘어났다. 이후 다시는 중찬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고, 시중과 정승으로 번갈아 개칭되면서 고려 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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