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왜 조선총독을 유임하려 했나?
미군 진주와 미군정 출범
< 일러스트=한상엽 >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이 남한 점령의 임무를 맡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소련군이 남하하는 한반도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사령관 맥아더는 명문 군인 가문의
후예로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최연소 승진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던 최고의
엘리트 군인이었다.
또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던
사실상 정치인이었다.
그에 반해, 남한의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일리노이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고등사관양성소를 통해
장교로 임관한 비(非)육사 출신 야전
지휘관이었다.
과달카날, 솔로몬, 레이테, 오키나와 등
태평양전쟁 주요 격전지에서 무훈을 세워
‘군인 중의 군인’ ‘태평양의 패튼’으로
불리던 용맹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군정(軍政) 경험은 전무했고,
한국 문화와 정치 상황에도 무지했다.
8월 19일 주한 미군사령관에 임명된 이후,
하지에게는 제24군단의 신속한 한반도
진주를 요구하는 전문이 이어졌다.
‘일반명령 제1호’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을 명시했지만,
미국 정부는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지
않더라도 소련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9월 말로 예정되었던 미군의 남한 진주는
세 차례 앞당겨져 9월 초로 결정되었다.
하지는 남한의 점령과 통치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가 입수한 한국에 대한 최신 정보는
대부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관구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8월 31일 제24군단은 조선군관구와
무선회선을 개설하고 전문을 주고받았다.
고즈키 요시오 사령관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존재가
남한의 치안을 어지럽힌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평화와 질서를
교란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이 존재한다”
고 보고했다.
하지는 고즈키에게
“질서를 유지하고, 기존의 통치기구를
존속시키라”
고 지시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엔도 정무총감의
합의에 따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되었고, 연이어 무도(武道)계 인사,
체육인, 중등학교 체육 교사, 학생 등을
중심으로 건국치안대(치안대)가
결성되었다.
8월 말까지 전국에 162곳에 달하는
지방치안대가 설치되었다.
그 밖에도 경위대, 학도대, 자위대, 보안대,
청년대 등 다양한 이름의 치안 단체들이
난립했다.
8월 말, 건준 조직을 장악한 공산당
인사들은 미군 진주 이틀 전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출범을 선포했다.
고즈키가 언급한
“공산주의자들과 선동가들”
은 바로 이 인공과 치안대를 지칭한
것이었다.
전쟁 기간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고,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다.
그러나 종전 이후 미국이 구상하는
세계 질서에 소련이 가장 큰 위협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은 급속히 미국의 우방국
지위를 회복했다.
9월 초, 맥아더는 기존 행정기구를
이용해 일본을 점령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일본인 행정 관료를 감독하는
임무만 맡기로 했다.
2년 11개월 남한의 미군정 기간,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번번이 오판을 내리게 된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치명적인 오판이
직속상관 맥아더가 일본에서 실시한
선례에 따라,
“하루가 될지, 1년이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남한에 총독부를 유지한
상태에서 아베 총독과 일본인 관리들에게
남한의 행정을 맡기려 한 것이었다.
9월 초순 오키나와에는 연일 큰 파도와
강풍이 휘몰아쳤고, 승선을 기다리던
하지와 제24군단은 악천후로 출발을
두 번이나 연기했다.
9월 5일 바람이 조금 누그러진 틈을 타서
하지와 제24군단은 21척의 수송선에
승선해 인천으로 향했다.
9월 6일에는 해리스 준장을 비롯한
선발대 31명이 군용기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튿날 엔도 정무총감을 만난 해리스는
“남한은 당분간 총독과 정무총감의
관할 아래 두고 미군사령관은 행정의 관리,
감독을 할 생각”
이라고 말했다.
하지와 제24군단은 사흘간의 항해 끝에
8일 오후 1시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
미군을 맞은 것은 검은 제복을 입고
길 양편에 도열한 일본 경찰이었다.
모든 환영 행사를 금지하라는 하지의
지시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전부터
인천 시민의 외출을 막았다.
일본 군경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환영
나온 한국인들이 경비 구역을 돌파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발포해 2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47)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26)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매일신보’, 1945.9.12)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내려가고(왼쪽), 성조기가 새로 게양되고 있다----
< US Navy >
이튿날 오전 8시 장갑차 11대를 앞세운
미군 선발 부대가 경인가도를 내달려 서울로
진주했다.
이날도 거리에는 일본 군경이 도열했고,
개선 행진이나 환영 인파는 볼 수 없었다.
오후 4시 총독부 청사에서 하지 중장과
킨케이드 제독, 고즈키 요시오 중장,
야마구치 기사부로 제독,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 직후 35년 동안 총독부 정문 앞에
휘날리던 일장기가 강하되고,
그 자리에는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그날 밤에도 치안 유지 활동을 벌이던
연희전문 재학생 안기창, 이인제,
용산 지구 학도대원 신성문 등 3명이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매일신보’, 1945.9.12.)
항복 의식을 치른 직후 하지는
아베 총독을 포함해 총독부에 소속된
모든 일본인과 한국인의 업무를 계속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분개했다.
해방 직후 창립된 영자신문
‘서울타임스’는 사설에서
“한국인은 아베에게 통치받느니
보르네오에서 온 추장에게 다스려지는 것을
선택할 것”
이라 비판했다.
미국에서도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국무부는
“하지의 일본 관리 유임 선언은 국무부의
입장과는 다르다”
고 해명했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총독과 일본인
관리들을 즉시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9월 12일 하지는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아널드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틀 후에는 엔도 정무총감과 모든
일본인 국장을 해임하고, 총독부 명칭도
군정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하지는 해임한 일본인 관리들을 군정청
행정 고문으로 잔류시켰다.
군정장관에 취임한 아널드는
“현재의 경찰 조직은 한국인이 대체할
때까지 유지된다”
고 발표했다.
군정청 고문으로 유임된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은 2개월 이상 한국에
더 머물며 미군 장교들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미군의 진주 당일에도 한국 청년들은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미군의 진주 후에도 조선총독은 나흘이나
더 현직을 유지했다.
해방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oscar
이 글을 읽으면서 분통이 터지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국가의 힘이 없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처절하게
느껴야 한다.
하나되어 힘을 모아야 할 지금까지 공산주의가
이 땅에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며 민주 남한에서
종북주사파 당사자와 그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국회와 주요 기관에 존재하는 실태가 정말
한심스럽고 우려스럽다.
동구능
역사에서 아직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이 안쓰럽다.
FaceFact
이 글 읽고 반일하라는 건가?
1109@mse
미국 야전 군인인 하지 중장으로서 조선 통치는
그의 역량으로 감당 할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냉전 시대의 정치 감각도 없었고
조선에 관한 문화 철학에 완벽하게 무지 하였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참모들도 동일 하였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행정을 통해서 조선을 관리할
정도로 무식한 인간이었다.
강화텃밭
만사에 인과응보가 있듯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동족의 남북 분단이 왜 일어났는지 심층
분석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관련 서적과 문헌이 무수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과문인지
모르겠지만 좀 명약관화하게 밝힌 문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다루어진 문헌이 많아야 다시는
이런 민족적 비극의 재발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그리 생각이 든다.
문외한 나도 한번 손을 대 봤으면 한다.
태권더박
양키 고홈!
주한미군 철수! 주일미군 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