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에 캔 햇쑥
이월 하순 넷째 토요일이다. 입춘과 우수 절기에 맞춰 두 차례 내습한 추위가 물러갈 기미를 보인다. 자연학교 등교는 미적대다 시조를 한 수 남겼다. “입춘에 땜하느라 수은주 빙점 아래 / 우수에 다시 추워 매서운 바람으로 / 잠에서 깨려던 꽃눈 기지개를 멈췄다 // 봄 오는 길목에서 나목은 수액 올라 / 망울은 애태우며 터질 듯 부풀더니 / 한순간 꽃잎을 펼치자 진한 향기 뿜는다”
‘꽃망울에서’ 전문이다. 어제 강둑과 들녘 산책 후 한림정에서 열차 편으로 창원중앙역에 닿았다. 창원대학 캠퍼스로 들어 공학관 앞을 지나자 매화와 산수유 망울이 부풀어 사진과 함께 남겨두었다. 토요일 아침 식후 느긋하게 지내다가 햇살이 퍼진 이후 집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꽃대감 꽃밭을 지나다 비교적 이르게 꽃을 피우는 히말라야 바위취는 망울이 부푸는 기미가 아직 없었다.
토요일이면 주중 수요일과 함께 동네 농협 마트에서 청과물 중심 장터를 열어 고구마를 한 상자 사다 집으로 들여놓았다. 이왕 사는 김에 한 상자 더 사서 장터 인근 제과점에 맡겨두고 버스 정류소에서 소답동으로 나갔다. 마산 월영동을 출발 본포로 가는 40번 버스가 와 바꾸어타고 용강고개에서 내렸다. 구룡산 산기슭에 용암과 용전과 함께 ‘용’자 돌림 세 마을 가운데 하나다.
용강마을 어귀 안내판에는 구룡산을 두고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눈길을 끌었다. 구룡산에 살던 용이 세 마을에 세 마리씩 내려왔다고 했다. 아마도 ‘용강(龍降)’이 한자로 ‘내릴 강’이라 그렇게 풀어둔 듯했다. 그곳은 근대화 이전 69년도 구룡산 기슭에 큰 산사태로 다수의 인명 피해지였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이재민 위로차 그곳을 다녀갈 정도로 큰 재난이었다.
신풍고개를 넘는 철길이 터널로 빠져나오고 남해고속도로에서는 차량이 질주했다. 철길 육교를 건너간 용강 본동에는 호환에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사로잡은 해주 오씨 효자를 기린 빗돌과 정려가 세워져 있었다. 다른 마을에도 그와 유사한 효행담이 전해옴을 더러 봤다. 용암마을 어귀 고목 정자나무 근처는 나주 임씨 삼대 효자비 세 개가 나란했고 그 앞에 제단도 보였다.
천변 저지대 농지에는 연근을 심어 뿌리를 캔 밭이 나왔다. 굴삭기를 동원해 땅을 뒤집어 인부들이 연근을 찾아 챙겨간 이랑에는 흰뺨검둥오리들이 떼 지어와 먹이활동을 하다가 날아갔다. 평소 인적 없는 곳이라 마음 놓고 연근 부스러기를 찾아 먹었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 녀석들의 평화를 깨트려 미안했다. 밭둑에 어지러이 자란 매실나무 가지는 자잘한 꽃망울이 부풀어갔다.
용전마을에 이르기 전 구룡산 기슭으로 민자 건설 유료 터널로 뚫은 자동차 전용도로 요금소 부근으로 갔다. 과수원이던 산비탈을 깎아 자동찻길에 나면서 훼손된 자연은 복원되면서 시든 검불이 덮여 있었다. 가시덤불을 헤집으니 볕이 바른 곳이라 움이 터 자란 쑥이 보여 쪼그려 앉아 캐 모았다. 바람을 피한 남향 언덕이라 철 이르게 돋은 쑥을 인내심을 발휘해 몇 줌 캘 수 있었다.
햇쑥을 캐 용전마을에서 남산리로 건너가 내가 속한 문학동아리 원로 회원이 가꾸는 분재원을 들렀다. 고령의 농장주는 부재중이고 일꾼은 묘목장에서 어린 명자나무를 돌봤다. 온실에도 분에 심어둔 명자나무가 그득했는데 임자를 못 만나 여태 키운다고 했다. 한복판에 고목 분재 홍매화 몇 그루는 선홍색 꽃을 피워 눈길을 끌었다. 분재 대가다운 주인장의 공력이 든 명품 고매였다.
분재원에서 중앙천 건너 예전 근무지에서 먼저 퇴직한 동료가 노후를 보내는 블루베리 농장을 찾아갔다. 지인은 농한기라 열선이 깔려 따뜻한 농막 실내에서 영상으로 두는 바둑 대국을 관전했다. 커피를 들면서 선배는 지난날 박사 학위에 수학 참고서까지 펴낸 총기가 돋보였는데 세월 따라 기억력이 희미해짐을 염려했다. 나는 자연스러운 노화로 받아들이십사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