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구동을 지나 황골로 들어가면 수백년된 솔밭속에 "고려진사 운곡 원천석지묘"라는 표지앞에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커다란 묘지가 나타난다.이분이 바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며 500년 지탱해온 무너지는 고려를 떠밭히다 못해 개성을 떠나 고향 원주 치악산에 들어와 일생을 홀로 "산나물과 샘물"로 시장기를 달래며 "시"(1144수)를 쓰며 고고히 사신 운곡원천석 선생이시다.
조선의 3대왕 태종(이방원)의 스승이였기에 태종이 등극한후 운곡선생을 모시러 7일동안을 御駕를 머물렀으나( 강림, 태종대) 끝내 피하여(부곡,노구소)(원주,입석대) 부귀 영화를 버리고 "節義의 시인으로 외롭게 살다 가신 "원주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눈마저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구블 節(절)이면 눈속에 구불소냐
아마도 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추초)로다
오백년 王業이 牧笛에 부쳤으니
夕陽에 지나는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전편은 忠節歌 이고 후편은 무너진 고려를 한탄하는 글이다. 운곡선생을 중국의 상나라의" 伯夷叔齊"에 비유하고 있는것도 30대에 상처하고 개성을 떠나 호화로운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치악산에 은거 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자식들에 누가 된다하여 독신으로 살면서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서 위정자들의 실정과 과오를 과감히 질타하는 "시"를 1144를 써서 우리나라의 "충절의 시인"으로, 원주를 대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적으로는 황골의 "묘역" "운곡재실(석경사)" "운곡시비" "변암" "태종대" "횡지암" "노구소" "입석대" "누졸재"등이 있다.
*치악산의 1288m 고지 弁岩에 운곡선생이 기거 하던곳에 이런詩가 새겨져 있다.
"암반에 우물을 파서 갈증을 면하고 산채를 거두어 시장기를 면했다."
*운곡선생의 역사적인 시가 (1144수)수록되여있는 "운곡시사"를 원주사람이면 한번 읽어 보기를 바라며 황골 묘소와 이접된 유적을 한번 탐방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