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다비장
김기리
화엄사 초입, 어느 집 담 옆을 떠나와
저곳에 서있는 살구나무
사실은 이곳에 살구나무 다비식이 한창이라 하여
멀리서 두 손 모으고 찾아왔다
연분홍색 주소가 환하다
풋풋하게 익어 갈 살구의 기미들은 가지에서 꼼지락거리고 있고
동남쪽 어귀에까지 걸어와 환장하게 서 있는 서천
흔들릴 일도 없고 봄 냄새 풍길 일도 없는
늙은 몸 한 그루가 늙은 꽃들과 놀고 있다
화염의 한 철이 살구나무에 붙어 다비식이 한창이다
바람이 살구나무에 뛰어들어 오롯이 불길을 열면
웃는 듯 우는 듯 허공의 극에
꽃불의 역할로 흩날린다
뭉쳐있던 봄날이 자욱하게 서천으로 풀리어 가고
묵언으로 솟아올라 묵언으로 내려앉는
가슴 쓰린 저 파르스름한 재 좀 봐!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아름드리 살구나무
만장 깃발은 한 그루 꽃구름이다
정녕 아쉬움은 시드는 온기로 뱅뱅 맴을 돌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화르르 만개한 육신들
한 발짝 돌아서면 여기고 한 발짝 내디디면 저곳인
타다가 못탄 꽃눈들 드문드문
살구나무 늙은 팔뚝에 매달려 있다
계절도 없이 들이 닥칠 어떤 날을 알지도 못한 채
보는 이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
살구나무 다비식이 저물어 간다
첫댓글 제목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