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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총명한 제자는 안회였습니다.
어느 날 애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배움을 좋아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안회가 학문을 배우기를 좋아했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감정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안회는 40대 초반에 죽었습니다.
똑똑하고 총명한 제자가 안회였다면, 학문과 덕행을 갖추고, 유독 배움에 갈망을 가진 자는 칠조개였습니다.
<논어>에 보면, 칠조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칠조개는 공자가 벼슬에 나갈 것을 권할 때, 자신은 아직도 학문과 덕행을 충분히 쌓아야 하기에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처럼 부족한 사람은 벼슬이 아니라 학문과 덕행을 더 쌓아야 한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공자는 칠조개에게 벼슬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칠조개의 그런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자는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지혜를 얻고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전도서 2장 12-17절, #김영한, #아침개인묵상, #성경 하브루타 코칭
<지혜자나 우매자나>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13.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1) 전도자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였나요? (12절)
- 전도자는 3가지, 즉, a) 지혜, b) 망령됨, c) 어리석음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2) 전도자는 무엇을 염려하였나요? (12절)
- 대단한 왕 뒤에 후임자가 무슨 일을 행할 수 있을지 의문 시 하였습니다.
- 이미 이전 왕이 다 행한 오래전의 일이 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M. A. 이톤은 자신의 주석에서 12절 하반부를 어떻게 해석할지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원래의 문장이나 구절을 쉽게 풀어내는 것) 할 수 있다. ‘미래의 왕들은 내가 직면한 것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내가 다뤄야 했던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 내 후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
이 말은 다른 곳에서 언급된 미래에 대한 전도자의 관심과 일치한다(1:9–11; 2:18f., 21; 3:22; 7:14).”
(이톤, M. A. (1983). 전도서: 개론 및 주석 (Vol. 18, p. 81). 다우너 그로브, IL : InterVa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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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ay paraphrase: ‘How will future kings handle the same problem I have faced? What kind of person will my successor be in his attitude to the same problems I have had to deal with?’
This coheres with the Preacher’s concern for the future, mentioned elsewhere (1:9–11; 2:18f., 21; 3:22; 7:14).
Eaton, M. A. (1983). Ecclesiaste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18, p. 81).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3) 전도자는 지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나요? (13절)
-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다고 하였습니다.
4) 나 자신은 지혜를 얻고자 어떤 노력을 최근 하고 있나요? 더 지혜를 얻고자 어떤 노력을 한 가지 해야 할까요?
14.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15.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1) 전도자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하였나요? (14절)
-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릿속에 있고,
-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사는 우매자 – 플라톤 동굴의 비유>
플라톤 철학의 정수로 알려진 <국가론>에는 동굴의 비유가 나옵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의 대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이 어디까지 깨달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무지할 수 있는지 드러내 줍니다.
즉, 지하 동굴 속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굴 입구를 등진 채 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에 사슬을 감은 채 살아왔기에,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이들의 등 뒤쪽에서는 먼 거리를 두고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불과 사람들 사이에 나 있는 오르막길에는 마치 인형극 무대의 스크린처럼 낮은 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굴 인간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생긴 그릇과 나무 혹 돌로 만든 여러 동물상과 온갖 잡동사니를 들고 벽을 따라 걸어간다면, 벽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묻습니다. 개중에는 그림자로 형상화되는 것도 있고, 아예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음을 말합니다.
글라우콘은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고, 동굴에 사는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바로 동굴 속에 사는 자들과 같다고 합니다.
전도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머릿속에 있으나,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어두운 세상에 살면, 어두운 동굴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베이컨은 4가지 우상을 제거해야, 우매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베이컨은 경험론의 선두 철학자였는데요.
베이컨은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 신기관(新機關))>에서 우상론을 제시하면서 기존 학문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베이컨은 인간이 가진 편견을 4가지 우상으로 인해 생긴다고 보았는데요. 4가지 우상으로 인간은 더 이상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4가지 우상은 아래와 같다고 했습니다.
1. 종족의 우상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를 느껴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날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우리가 인간으로 잘못된 정보를 만들어 낸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낯에 말은 새가 듣고, 밤에 말은 쥐가 듣는다”라고 말하는데요. 이런 말과 생각은 우리가 인간 중심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이런 말은 사실과 다른 말을 전달하고, 사고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 동굴의 우상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개인의 습관과 취향으로 오는 편견과 선입견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 전체의 일반적인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3. 시장의 우상
인간의 언어 때문에 생기는 왜곡된 인식을 말하였습니다.
잘못된 언어 사용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보통 말하는 내용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라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 그에 부합하는 대상이 있을 거라고 여긴다고 지적했습니다.
베이컨은 사람들이 관찰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언어를 대화 중 사용하는데, 이럴 때 혼란에 빠지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4. 극장의 우상
유명하거나 권위가 있는 자의 말은 거의 다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이미 과학, 신학, 철학, 사회학 등 기존에 전통으로 확립된 이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학문을 할 수 없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로, 베이컨은 오직 자연 세계를 직접 관찰하고, 검증하는 방식으로만 학문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전도자는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가 맞이할 공통점을 무엇이라고 하였나요? (14절)
- 두 사람 다 당하는 일이 모두 같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4절).
3) 전도자는 지혜로운 자임에게도 마음속에 무엇으로 괴로워하였나요? (15절)
- 즉, 우매자가 당한 것을 지혜자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 고로, 지혜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지 의문 시 하였습니다.
- 전도자는 마음속으로 이런 일에 대해 ‘헛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4) 요즘 신앙 생활할 때, 무엇이 나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있나요?
16.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1) 전도자는 지혜자가 우매자와 함께 어떤 존재가 된다고 하였나요? (16절)
-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즉,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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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B. C. 341~271)>
에피쿠로스는 철학에서 쾌락주의자로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쾌락은 우리가 생각하는 쾌락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절제된 행동과 정신적 나눔을 통해 삶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것이었습니다.
즉,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테네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추종한 자중 퀴레네학파의 아리스티포스가 있었는데요. 그는 자신이 소크라테스에게 직접 배웠다며,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좋은 선은 쾌락이라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아리스티포스의 가르침을 받은 에피쿠로스는 쾌락 사상을 학문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에피쿠로스는 가장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 ‘아타락시아’, 즉 평정심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는 수많은 욕구 중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바라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고, 반면, 건전한 삶을 해치는 해로운 헛된 욕구도 있다고 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공식으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행복 = 성취/욕망
원하는 것, 욕망을 얻는 만큼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헛된 욕구가 많을수록 인간은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죽음을 염려하는 가운데,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행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행복의 과정을 추구하면, 우리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의 목표를 산정하면, 목표를 이루면 불행한데요. 공부 자체, 즉 과정을 추구하면,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불안 가운데,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직면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절대자를 찾고, 절대자 앞에 선 단독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통한 해법과 실존 - 헤겔, 하이데거, 사르트르>
홉스에게서 투쟁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서 종식된다고 하였는데요.
반면, 헤겔에게서 투쟁은 죽음에의 공포를 느끼는 자기 의식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종결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죽음의 절대적인 위력은 1) 자기 의식에게 자신의 존재의 절대성에 대한 무의미함을 알게 하고요. 2) 함께 실존적인 유한성을 깨닫고요. 3) 그리고 타자와의 동일성을 경험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헤겔에 의하면 자기 의식들의 발전과정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노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노동을 통해 자연적이며 직접적인 욕구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노예는 주인처럼 타자와의 부정적인 관계를 통해서가 아닌 타자를 인정함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타자에 의해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지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노예는 열심히 일을 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나중에 주인은 노예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전복된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였습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도 죽음 앞에서 실존자는 존재의 의미, 존재자,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하이데거의 불안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었는데요. 이 불안이란 기분에서 현존재의 실존적 성격, 즉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문제 삼는 현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낯설고 섬뜩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본래적인 존재가 우리가 보통 집착하는 세상적인 가치들로 은폐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적 존재자들에 대해서 갖는 차이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책에서 진리를 그리스어인 탈-은폐성(a-letheia)이라고 불렀는데요. 탈-은폐성을 존재자의 진리를 왜곡과 은폐로부터 강탈하는 것(Raub)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왜곡과 은폐는 우리의 지성을 예리하게 다듬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정화하고 고양함으로써 극복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불안을 견디면서 죽음으로 앞서 달려가면서(das angstbereite Vorlaufen zum Tode)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와 끊임없이 대결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옳은 실존이라고 보았습니다.
2) 전도자는 왜 자신이 사는 것을 미워하였나요? (17절)
-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자신에게 괴로움이고,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3) 나 자신은 살아가면서 무엇으로 힘들고, 괴롭고, 마음이 허무하곤 하였나요?
4)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