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혜장선사의 만남
――九六論辨――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 귀양살이할 당시에 대둔사(大芚寺:해남에 있는 大興寺)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해남의 한미한 출신으로 27세에 병불(秉拂:절에서 불법을 가르치는 首座)이 되자 제자가 백 수십 명에 이르고 30세에는 둔사(芚寺)의 대회(大會:이 대회는 오직 팔도의 大宗匠이 된 뒤에야 개최한다)를 주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가 바로 혜장선사(惠藏禪師)다.
혜장은 희대의 학승이었다. 재주가 발군하여 종횡무진, 불학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천품이 자유분방하고 기고만장했다. 어려서부터 스승을 좇아 불경을 배웠으나 어떤 스승의 가르침에도 그는 늘 불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듣는 척하다가도 문을 나서면 언제나 입을 비죽거리곤 했다. 그런 날이면 두주를 불사했다. 가위 기승이었다.
정약용이 강진에 와서 한 주막집 곁방에서 고적하게 지낸 지 5년째가 되던 해(純祖 5, 乙丑, 1805), 그러니까 정약용의 나이 마흔네 살이 되던 해 봄에 정약용보다 십년 연하인 혜장선사가 만덕사(萬德寺:白蓮社〈寺〉)에 와서 묵고 있었다. “목마르게 나를 보고 싶어 했다.”(渴欲見余)라는 정약용의 말로 미루어 보면 이때 혜장은 정약용을 무척 사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해 가을(「上仲氏」〈辛未冬〉)에 하루는 정약용이 신분을 감추고 한 야로(野老)를 따라가서 혜장을 만나 그와 더불어 한나절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혜장은 정약용인 줄을 알 턱이 없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서서 정약용이 북암(北菴)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이때 혜장이 헐레벌떡 좇아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을 하면서,
“공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사람을 속이십니까? 공은 정대부(丁大夫) 선생이 아니십니까? 빈도는 밤낮으로 공을 경모했는데(日夜慕公) 공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다. 손을 끌어 그의 방에 가서 묵기를 간청했다. 밤이 깊어지자 정약용은,
“듣자니 그대는 『역경』(易經)을 본디 잘한다던데 그것에 의심이 없는가?”라고 하니 혜장이,
“정씨(程氏)의 전(傳:『伊川易傳』)과 소씨(邵氏)의 설(說:『皇極經世書』)과 주자(朱子)의 본의(本義:『周易本義』)며 계몽(啓蒙:『易學啓蒙』)에는 모두 의심이 없습니다만 오직 경문은 잘 모르옵니다.”라고 했다.
정약용이『역학계몽』(易學啓蒙)에서 수십 장을 가려 그 뜻을 묻자, 혜장은 그것에 대해 정신이 환히 밝고 입에 익어서 한 번에 수십 수백 마디를 외우기를, 흡사 공이 언덕에 구르듯, 병이 물을 쏟듯 도도하게 그칠 줄 몰랐다. 정약용은 크게 놀라 혜장이 과연 숙유(宿儒)임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혜장은 제자를 불러 회반(灰盤)을 가져오게 하고서는 거기에다가 낙서구궁(洛書九宮)1)을 그리니, 본말(本末)를 분석함에 있어서 참으로 방약무인하였다. 팔을 걷어붙이고 젓가락을 잡아 왼쪽 어깨에서부터 그어서 오른쪽 발에까지 이르니 15였고, 오른쪽 어깨에서 그어 왼쪽 발에까지 이르니 15였다. 마치고 나서 가로 세로 세 줄씩 긋고 어디로 쳐도 15가 되었다. 문밖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비구들이 숙연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밤이 깊어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우니 서쪽 창에 달빛이 낮과 같았다. 정약용이 혜장을 당기며 “장공, 자는가?”라고 하니, 그는 “아닙니다.”라고 했다. 정약용이 “건괘(乾卦)에서 초구(初九)라 함은 무슨 말이지?”라고 하니, 혜장이 “九는 양수(陽數)의 끝입니다.”라고 했다. 정약용이 “음수(陰數)는 어디에 그치지?”라고 하니, 그는 “十에 그칩니다.”라고 했다. 정약용은 “그렇다면 곤괘(坤卦)는 왜 초십(初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라고 하니, 혜장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호소하기를,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역(易)을 공부한 것은 모두 헛된 물거품이었습니다. 곤괘의 초육(初六)은 어찌하여 초육(初六)이라 한 겁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약용이 곤초육(坤初六)을 물은 것은 시초(蓍草:筮竹)를 세어 괘(卦)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째서 九는 노양(老陽)의 수(數)가 되고 六은 노음(老陰)의 수(數)가 되는지, 이른바 ‘삼천양지’(三天兩地)의 이치를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2)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횡행천하(橫行天下)하던 그 기개는 다산의 한칼에 양단되고 만 거다. 그래도 혜장쯤 되니까 이럴 수나 있었으리라. 곤초육(坤初六)을 묻는 혜장에 대해 정약용은 “모르겠는데, 귀기(歸奇)의 법이 맨 뒤의 셈은 四나 二로써 기(奇)로 삼는데 二와 四는 우수(偶數)가 아닌가?”라고 했다. 여기서 일단 말머리를 “모르겠는데”라고 한 것은 혜장이 아무리 영리하다 하더라도 이를 이해시키려면 많은 말을 해야 되겠기에 한 말일 거다. 이어서 정약용이 귀기(歸奇)를 말한 것은 실로 놀라운 우회적 테스트다. 여기의 奇는 ‘짝을 이룬 한 쪽’을 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은 수’(畸)의 뜻이기도 함을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3) 그런 줄을 알 리 없는 혜장은 처연히 한숨을 내쉬며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醯鷄)는 정녕 스스로 슬기로운 체 할 수 없구나!”라고 하고서 더 가르쳐 달라고 했으나 정약용은 더는 응하지 않(다.
이해 겨울에 정약용은 보은산방(報恩山房:高聲寺)에 있었는데, 혜장이 자주 들러 서로 역(易)을 이야기하였다. 그 무렵은 정약용이 『주역사전』(周易四箋) 을축본(乙丑本)을 한창 고쳐 쓰고 있던 때였으니 『주역』에 대한 정약용의 열정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4년이 지난 봄(1808, 戊辰) 정약용이 귤동의 다산(茶山:만덕사 서쪽에 있는 처사 尹博의 山亭)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대둔사와는 가깝고 성읍(城邑)과는 멀어서 혜장의 왕래가 더욱 잦아졌던 모양이다.
혜장은 성품이 매우 고집스러웠다고 한다. 하루는 정약용이,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질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에 혜장은 스스로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했다.
혜장은 불법을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논어』와 『맹자』를 매우 좋아하였기에 중들이 그를 미워서 김선생이라 불렀다.(그의 본은 金씨) 그러한 그가 정약용으로부터 『주역』의 원리를 듣기 시작하고부터는 역(易)에 대해 전에 공부했던 걸 모두 팽개치고 ‘구가(九家)의 학’을 탐구하게 되었고, 4) 몸을 그르친 걸 후회하며 실의에 빠져 즐기는 기색이 없었다.(自聞易理 自悔誤身 忽忽不樂)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시를 탐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를 사오년(「上仲氏」〈辛未冬〉에는 육칠년이라고 되어 있음) 만에, 마침내 신미 년(순조 11, 신미, 1811) 가을에 술병으로 배가 불러 9월 기망(幾望: 14일)에 북암(北菴)에서 시적(示寂)하니 법랍은 고작 40세였다. 그가 죽을 무렵에 여러 번 혼자말로 無端兮(무단혜)라고도 하고 夫質業是(부질업시)라고도 했다니 전자는 ‘무단히’의 방언이요, 후자는 ‘부질없이’의 뜻이겠다. 둘 다 가슴 깊이 뉘우치는 소리가 아닌가. 죽기 한 해 전인 경오 년(純祖 10, 1810) 봄에 혜장이 정약용에게 「장춘동잡시」(長春洞雜詩) 20수를 보내주었는데 둘째 연에서 이렇게 읊었다.
백수공부에 누가 득력했나
연화세계 다만 이름만 들었네
미친 노래 늘 근심 속에 부르며
맑은 눈물 자주 취한 뒤에 흐르네
柏樹工夫誰得力
蓮花世界但聞名
狂歌每向愁中發(孤吟每自愁中發―上仲氏〈辛未冬〉)
淸淚多因醉後零
위의 내용은 혜장이 죽은 그 해에 정약용이 지은 「아암장공탑명」(兒巖藏公塔銘)(정약용 50세, 순조 11, 辛未, 1811)과, 같은 해 겨울에 정약용이 그의 중형인 정약전(丁若銓)에게 부친 「중씨께 올림」[上仲氏〈辛未冬〉]이라는 서찰에 나오는 얘기다.
위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얼더듬어 보았지만 나는 『역경』에 대해서도 석씨의 학에 대해서도 깊은 온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이 얼치기 학인의 눈에는, 혜장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방약무인하게 지껄이는 치졸하기 그지없는 혜장의 열변을 잠자코 듣고만 있는 정약용의 태도가 과연 조선조 제일의 학자답고, 얼른 알아보고 무릎을 꿇는 혜장의 경지 또한 아득하게 보일 뿐이다. 혜장이 아니라 원효였더라면 무릎을 꿇은 자는 원효가 아니라 정약용이었을 거라며 냉소를 짓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사람과 더불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약용과 혜장. 두 사람의 세계를 곡진히 안다고 하기엔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며 초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혜장이 정약용으로부터 『주역』의 원리를 듣고 “몸을 그르쳤음을 후회했다.”라고 하는 것은 승려가 된 걸 후회했다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곤괘는 왜 초십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라는 의표를 찌르는 정약용의 촌철살인 이 한마디에 무너져 버린 혜장선사! 승려로서 승려가 된 걸 후회하게 되었다면 미친 노래 근심 속에 부르고 취한 뒤에 맑은 눈물 흘리는 건 오히려 인지상정일 거다. 이 구절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만남이 때로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어떠한 만남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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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九六의 論辨에 대해서는 졸저『周易反正』(서울:학고방, 2013) 참조. 외람된 말이겠으나, 졸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비록 역학자라 하더라도 이 ‘九六之辨’에 대해서는 땅띔도 못할 것이다. 정약용과 혜장선사의 논변을 이야기하면서 ‘九六之辨’을 빠뜨린다면 그 글은 보나마나 팥소 빠진 찐빵이요, ‘九六之辨’의 해설을 잘못한다면 그 글은 굴타리먹은 호박이다. 정약용의 爻變論을 모르고서는 ‘九六之辨’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한국 역학의 수준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정약용의 爻變論에 대해서는 전게서 pp. 356〜395 참조.
3) 蓍草〈筮竹〉를 네 개씩 세어나가 그 나머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를 두 번 하는 것.『周易』「繫辭上傳」의 ‘歸奇於扐(귀기어륵)을 지칭. 졸저『周易反正』, 참조.
4) 九家之學이란 「荀爽集」에 나오는 京房, 馬融, 鄭玄, 虞飜, 陸績, 姚信, 宋衷, 翟(적)子玄, 荀爽 등 9家의 易學을 말한다. 이 九家를 筍九家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易學은 모두 象數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