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드는 없어요 (외 1편)
장정일
그것을 이상이라고
그것을 승리라고
그것을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해피 엔드겠지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의 연인들이 두 사람의 비극으로부터
사랑의 이상과 승리와 원형을 구한다면 말입니다
우리 물리칩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론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반복하는
허다한 시와 소설과 영화를 물리칩시다, 비웃어줍시다!
압박자위를 따라하지 맙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산업입니다
사랑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원형이 없습니다
그런 해피 엔드는 없어요
사전(辭典)을 토해내는 사랑
원본을 물려줄 수 없는 사랑
스위트홈이 거부하는 사랑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랑
우리는 껴안아야 해요
캄캄하고 불안하기만 한 현재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대본을
사랑은 실험
해피 엔드는 없어요
구더기
캄캄한 항문을 보여줘
당신의 가장 감추고 싶은 것
당신이 줄 수 없는 것
당신이 아닌 것을 줘
침과 오줌과 똥
당신이 뻐기고 싶은 미모
담배를 사야 할 때마다 내보여야 하는 주민등록증
세상을 제압할 때 꺼내는 학위
말가죽 지갑 안에 모신 패스포트
대문 밖의 포르쉐
그 많은 보디가드들
나는 어두운 문을 두드렸지
당신 속의 난지도에 코를 박았지
당신도 가보지 않은 절벽에 매달렸지
그러자 항문을 내맡긴 주인
용서할 수 없는 배반자를 향해
보디가드가 일제히 총을 쐈지
공기인형처럼 당신은 길 위에 쓰러졌어
내가 맡은 냄새를 당신에게 옮기고 싶어
침과 오줌과 똥
우리는 창조해야 돼
입맞춤이 거부당한 곳에서 생겨나는
꼬물거리는 구더기
구더기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8월호
우물 깊은 집 (외 2편)
장정일
경적 소리에 놀란 새벽
깊은 우물이 부르면 대책이 없었다
ㄱ은 그것을 환각지라고 했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없어진 팔다리가 그대로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두고 온 집은 잊히지 않았다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에는 배겨 낼 장사가 없었다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는
ㄱ, ㄴ, ㄷ, ㄹ의 무책임한 충동을 길들였고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는
간밤에 덮고 잔 라면 박스보다 간절했다
김밥과 소주를 사들고
슬며시 들러 본 우물 깊은 집
그을린 대문이 바람에 열렸다, 닫히고
무너진 벽 모서리마다 활짝 핀 해바라기
예전의 안방에는
타다 만 장롱이 엎어져 있다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불타지 않은 데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시원한 물을 길어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운 곳
우물밖에 없구나!
소주를 마시고
깊은 우물을 내려다보니
목이 잘린 부모님과
철사로 찬찬이 묶인 아이들이
소곤소곤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네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마당에 뒹구는 벽돌을 모아
우물을 메우며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참(懺)
시베리아에는 참이라는 동물이 산다. 어떤 치들 가운데는 참을 곰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크기가 딱 그만한데다가 뒷발로 뚜벅뚜벅 걷는 그 놈을 온통 시야가 희미해지는 눈발 속에서 보면 영락없는 곰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곰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가지식자(假知識子)들은 또 참을 원숭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참이 원숭이 종류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원숭이류가 진화하고 분화하면서 열대성 기후를 좋아하는 놈들은 아프리카를 자생지로 삼았고, 추운 것을 좋아하는 놈들끼리 어울려 북방으로 갔는데 바로 그게 참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없는 말로 들리지는 않지만 , 주박이 되는 이론과 학설로 제 눈과 귀를 틀어막고 스스로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이들이 가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래턱이 튀어나오지 않고 안으로 잘 들어가 있는 것 하며 얼굴에 털이 없는 것을 보면 참이 원숭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일종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시베리아의 겨울은 기후의 변덕이 심해서 날씨가 마냥 좋을 줄 알고 겁 없이 긴 사냥길에 오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어쩌다 길눈이 어두워 실종하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막해지면서 눈보라가 불어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길이 지워지고, 흔적 없는 길 위에서 사냥꾼의 마음은 공황에 빠져버린다.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황급히 몰아쉬는 입김은 살얼음이 되어 뺨에 달라붙고 칼끝 같은 바람은 사정 보지 않고 언 살갗을 찢어 놓는다. 하므로 그 와중에 살아남는 이가 좀처럼 없다. 온 목숨을 걸어놓고 제 딴에는 한 방향을 향해 열심히 전진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맴도는 실없는 봄날의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한 장소를 몇 바퀴나 거듭 배회했을 뿐이다. 길 잃은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승냥이 떼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있고, 마을로 생환하여 그날을 생일 삼아 잔치를 벌이는 사람이 있다. 배는 고프고 온몸이 한기로 뻣뻣하게 굳어 탈진되었을 때, 갑자기 인기척처럼 등 뒤가 뜨끈해지는데 그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조난자의 어깨를 툭 친다는 것이다. 환영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에 참이 있다. 지금 말하려고 아까는 그냥 지나갔는데, 참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뜨겁다는 것이다. 얼마나 뜨거운가 하면 이 짐승이 딛고 지나간 곳은 눈이나 얼음이 흥건히 녹아 있다. 참은 인간을 좋아해서 아주 멀리서도 인간의 냄새를 맡고 온다. 그러면 길 잃은 조난자는 가지고 있던 칼로 반가워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참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낸 다음, 그 속에 들어가면 된다. 눈보라 치는 얼음장 위에 벌렁 누운 채 참은 실종자가 칼을 들고 그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 동안에도 마취제 없이 개복 수술을 받는 것마냥 두 눈만 끔벅끔벅하고 있단다. 생래적으로 피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참의 피는 실핏줄과 살 속에 고농축된 채 스며 있기 때문에 피칠갑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몸이 들어갈 만큼 참의 내장을 들어내고 조난자가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면 한증탕에 든 것처럼 후끈하다. 뿐 아니라 참의 뜨거운 뱃속은 동상으로 못이 박힌 어혈을 단번에 풀어준다. 추위와 동상을 해결했으면 이제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데, 허기진 조난자는 방금 파낸 참의 뜨거운 내장을 오물오물 씹어 먹어도 좋고 자신이 들어앉아 있는 참의 뱃속에서 젖을 빠는 새끼처럼 야금야금 살을 파먹어도 좋다. 참의 육질은 어릴 때부터 우유만 먹여 키운다는 저 어느 색목인 나라의 송아지 고기보다 맛있고 저작을 하면 할수록 살코기로부터 갖가지 신비로운 성분이 발효한다고 한다. 참은 배에 긴 칼금을 맞은 채로도 일주일 정도는 정상대로 심장이 벌떡이고 눈도 끔벅거리며, 죽고 나서도 한 달간이나 생전의 체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구조된 조난자들은 거개가 참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데, 참이 이렇듯 잘 알려지지 않고 이 변변치 않은 사람의 글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인간에게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부지한 조난자는 차마 동료를 죽이고 그 덕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린다. 칼로 배가 쭉 갈라진 동료가 오랫동안 죽지 않고 눈을 끔벅이며 “살려줘, 살려줘, 나는 너의 친구잖니?”라고 호소했다는 것, 그런데도 혼자 살기 위해 동료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 것을 수치로 여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X
너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칫솔보다는 확실히 달콤했지만, 칫솔만큼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혀는 입안을 숨 가쁘게 돌아다니며 잇몸을 훑고 입천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아직 사랑니가 나지 않은 내 이빨을 하나씩 헤아렸다
처음 숫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아이에게 숫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네 혀는 길게 늘어나며 내 목구멍 깊숙이 들어왔다
깊숙이 쳐들어와 내 갈비뼈를 하나씩 씻어 주었다
마치 앞서 배운 숫자를 복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그 숫자들로 마작을 놀듯이
그러고 나서 혀는 내 오장육부를 간질이며
온몸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달뜨게 한 혀는
이윽고 그 자신에게 되돌아가기 위해
나올 구멍을 찾았다
제일 먼저 혀는 오른쪽과 왼쪽 콧구멍으로 번갈아 나왔다가 출구가 아닌 것을 알고 다시 들어갔다
나는 처음으로 남의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혀는 다시 양편 귓구멍으로 나왔다
내 귀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쫑긋거렸다
세상은 음악이었다
혀가 두 눈을 출구로 오해하고 비집고 나왔을 때는 아파서 눈물이 났다
젖은 눈앞에 온통 새로운 것이 펼쳐졌다
나오는 구멍을 찾지 못한 혀는 내 온몸을 들쑤신 끝에
항문을 삐죽이 뚫고 나와
그 주위를 오래도록 핥았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오랫동안 항문을 빨고 나서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온 너의 혀는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
네 혀는 힘차게 내 성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길게 늘어지며 너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감쌌다
뾰족해진 너의 혀는 너의 가랑이를 더듬었고
너는 네 자신의 절정을 탐닉했다
사랑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신을 더욱 잘 사랑하는 것
⸺시집 『눈 속의 구조대』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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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1962년 경북 달성 출생.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춤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눈 속의 구조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