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민족’ 우리민족의 대표 옷감 무명
‘백의민족’ 과거부터 하얀 무명천을 이용해 옷을 해 입었던 우리 선조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추운 겨울을 삼베 같은 성근 천으로 날 수 밖에 없었던 서민들에게 목화가 구세주처럼 나타났고, 이후 무명과 솜을 이용해 추운 겨울 바람도 버틸 수 있게 됐다. 이렇듯 목화와 무명의 보급은 우리 선조들의 의생활에 일대 혁명이 되었다.
무명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무명의 원료인 목화를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서 들여와 그의 장인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하고, 직조기술을 고안해 전국에 보급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보편화됐다. 이후 삼베, 모시, 비단과 함께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옷감으로 정착했으며, 다른 감에 비해 질기고, 부드럽고, 손질하기 쉽고, 계절을 타지 않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옷을 지어 입었다. 또 침구류와 화약이나 초의 심지 등 기타 생활용품에도 가장 많이 사용됐다.
무명의 제작은 재배와 수확,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순으로 이뤄진다. 8월 중순부터 목화를 따서 말려 씨를 빼내는 씨앗기를 하고, 솜활로 솜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솜타기를 거친다. 이후 고치말기와 실잣기를 한다. 실잣기는 탄 솜을 말판 위에 펴놓고 말대로 비벼 고치를 만들고 물레를 이용해 실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이어 실의 굵기에 따라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무명날기를 하고, 풀 먹이는 과정인 베매기를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무명을 짜낸다. 보통 목화 3kg(5근)으로 무명 20자 한필을 짤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샛골마을에서 직조되고 있는 고운 무명베와 무명짜는 일, 무명짜는 직녀를 통칭하는 말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당시 고(故)석주선 박사가 마을을 가리키는 ‘샛골’, 길쌈을 뜻하는 ‘나이’를 합해 ‘샛골나이’라고 이름 붙였다.
샛골마을 일대는 예부터 농토가 기름져 질 좋은 목화가 생산돼 왔고, 이곳에서 생산된 무명은 궁중에 진상품으로 올려 질 정도로 섬세하고 고와 극상품으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 일본, 대만에까지 수출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국내에도 서구의 기계문명이 들어왔고, 기계직 면포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우리나라의 재래식 수공면직물의 생산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근래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나주의 샛골나이도 그랬다. 1960대 초중반 무렵까지도 마을마다 부녀자들이 밤 새워 했던 무명짜기가 베틀과 함께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에 1968년 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를 실시해 1969년 나주의 샛골나이라는 이름으로 故 김만애 선생을 기능 보유자로 인정하게 됐다.
현재 나주의 샛골나이는 노진남 선생이 전승하고 있다. 노진남 선생은 故 김만애 선생의 며느리로 현재 샛골에서도 거의 사라져버린 재래식 무명짜기의 유일한 기능보유자이다. 노진남 선생은 김만애 선생이 보유자로 지정됨과 동시에 전수교육생으로 선발돼 1980년에 전수과정을 이수하고 1990년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하지만 무명을 짜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특별한 주문이 들어오거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을 위한 제작을 제외하고는 현재 거의 생산하지 않고 있다.
백목(白木); 무명실로 짠 직물(피륙)
서총대 무명이 백목만 못한 낮은 무명이지만 그때 시세가 한 필 가지고 쌀을 서너 말 바꿀 수 있었다.≪홍명희, 임꺽정≫
진상품관련근거
배목은 경상도(대구,상주,예천, 성주) 충청도(옥천,황간) 전라도(나주) 평안도(양덕)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에 기록되어있다.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12월 2일(갑술) 1번째기사 관목면·관정포·수주·정주·백목면·백정포·면화·백단향·속향을 창덕궁에 진상하라고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관목면(官木緜)·관정포(官正布) 각 4백 필(匹), 수주(水紬)·정주(鼎紬)·백목면(白木緜) 각 1백 50필, 백정포(白正布) 1백 40필, 씨를 뺀 면화(緜花) 1근(斤), 백단향(白檀香) 1백 근, 속향(束香) 60근을 창덕궁에 진상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것은 세시(歲時)에 궐내에 납입하는 것이 규례이다.” 하였다.
광해 28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4월 27일(임인) 5번째기사 자전의 존호 추존 등에 사용된 목면을 상고로 올리게 하다
〈전교하였다. “자전께 존호를 올리고 왕비를 책봉하고 세자를 책봉할 때 안에서 사용한 면주(綿紬) 4동(同), 백목면(白木綿) 1동, 백저포(白苧布) 1동, 목면(木綿) 4동, 포자(布子) 5동 등을 해사(該司)에서 상고(廂庫)로 올리라. 해사에 저축된 것이 없으면 사서 들이도록 해조에 말하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엔싸이버, 무명
1) 나비가 좁으며 옛날부터 한국 평민의 옷감으로 널리 쓰였는데 보통 40자가 한 필이며, 네 번 곱쳐 16겹이 되게 필을 짓는다. 50필을 한 동이라고 하며 상목(上木), 수목 등 종류가 많다.
2) 무명[명사] 무명실로 짠 피륙. 나비가 좁으며 옷감으로 많이 쓰임. 40척이 한 필의 표준임. 면(綿). 면포(綿布). 목면포(木綿布). 무명베. 백목(白木).
동서문화회사,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무명
1)수직기(手織機)인 재래식 베틀로 잔 명편직물. 무명은 광목9광목). 옥양목(옥양목). 서양목과 같은 면직물과 구별되어 명명 된 한국의 토속직물로서 실용적인 춘하추동의 의복재료 및 침구, 기타 생활용품재료로 가장 많이 이용 된 직물이다. 면화는 재래종과 육지면이 사용 되었는데 무명은 주로 황면 gossypium herbaceum인 재래종 면화에서 실을 뽑아 짰다. 나비는 32-36cm(7치) 내외였고, 한 필의 길이는 20m(40자) 내외였다. 무명은 소색(素色)으로 짜서 표백하여 사용하거나,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의 무명은 조선 태종 때에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면 종자와 제직기술도 전파시킴으로써 일본인들도 면직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는 오히려 일본면포와 공장제 제직기술이 역전파되어 한국의 무명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명은 질박하고 무기교하며, 또 물레로 실을짜므로 불규칙한 굵기 등에 의하여 표면에 변화가 있어 그 질감과 색감, 미적특성이 한민족의 감각에 맞아 오랫동안 자동직기에 의하여 제직된 값싼 면포를 압도하고 많이 짜여져서 사용된 옷감이다. 무명으로 옷을 지으려면 먼저 물에 담가서 날실날기때 먹인 풀을 개끗이 뽑고 잘 세탁하여 삶아서 널어 말린다. 그 뒤 다시 쌀풀을 먹여 양지에서 말린 뒤,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아서 다리거나 다듬이질하여 사용한다. 색무명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풀을 빼고 세탁하여 양지에서 말린 다음 염색한 후 풀을 먹여 다리거나 다듬이질한다. 무명으로 옷을 지을 때 겨울 옷은 솜을 두어 겹으로 지었으며, 봄.가을 것은 그냥 겹으로 지었고, 여름옷은 홑으로 지었다.(전경용어사전) <연구위원 : 고재희>
서민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옷감, 무명
목화씨에 달라붙은 털 모양의 흰 섬유질인 솜으로 만든 무명실로 짠 옷감을 말합니다. 무명은 다른 이름으로 면(綿). 면포(綿布). 목면포(木綿布). 무명베. 백목(白木) 면포(綿布), 목(木) 따위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을 짜는 과정은 모시를 짜는 것과 같지만 여름철용 옷감인 모시와 달리 무명은 사철 모두 쓸 수 있는 옷감입니다. 조선시대엔 무명말고도 삼베, 모시, 명주가 있었지만 목화솜을 이용한 이 무명은 다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생산도 많았고, 훨씬 많이 쓰였으며, 서민들의 옷감으로 가장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궁중의 임금은 보통 무명이 아닌 ‘나이무명’을 썼습니다. 나이무명은 부드럽고 풀기가 없어 속옷으로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 샛골에 이어 내려오는 무명길쌈인 ‘샛골나이’는 우리나라의 무명베를 대표하는 것으로 중요무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무명
면직물입니다.
무명실로 짠 피륙. 나비가 좁으며 옷감으로 많이 쓰임. 40척이 한 필의 표준임. 면(綿). 면포(綿布). 목면포(木綿布). 무명베. 백목(白木). (준말)명.
면직물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면포(綿布)·목(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색·품질·용도에 따라서 백면포·구승백면포·목홍면포·오색목·백목·극세목·백세목·관목·생상목·홍세목·황세목·초록목·남목·자목·홍목·흑목·아청목 등 각양각색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재래식 베틀로 제직된 면평 직물이 무명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명은 광목(廣木)·옥양목(玉洋木)·서양목과 같은 면직물과 구별되어 명명된 우리 나라의 토속 직물로서, 실용적인 춘하추동의 의복 재료 및 침구, 기타 생활용품 자료로 가장 많이 이용된 직물이다.
무명의 품질은 승 수(升數)로서 가름하는데(승 수를 샛 수라고도 한다.), 보통 일곱 새 정도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어서 실용적인 생활복에 많이 이용되었다. 열두 새, 보름 새는 섬세직에 들고 오늘날에는 열두 새가 극상이다. 조선시대의 ≪고사통 故事通≫에는 21승 면포가 기록되어 있다.
면화는 재래종과 육지면이 사용되었는데 무명은 주로 고지피움헤바시움(Gossypiumherbaceum)인 재래종 면화에서 실을 뽑아 짰다. 너비는 32∼36㎝(7寸) 내외였고, 한 필의 길이는 20m(40尺) 내외였다.
무명은 소색(素色)으로 짜서 표백해 사용하거나, 염색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소색으로 짜지는 않았다. 평안도 지역에서는 염색된 면사로 배색해 호직물(縞織物)로 짠 다양한 무명이 생산되었다.
≪성호사설 星湖僿說≫에도 번우(番愚) 지역에는 본래 푸르고, 붉고, 흰 세 종류의 무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흰 것만이 전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명의 색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무명은 조선 태종 때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면 종자와 제직 기술도 전파시켰다. 그리하여 일본인들도 면직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는 오히려 일본 면포와 공장제 제직 기술이 역전파되어 우리 나라의 무명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명은 질박하고 무기교하며 소백하고, 또 물레로 실을 자으므로 불규칙한 굵기 때문에 표면에 변화가 있어, 그 질감과 색감, 미적 특성이 우리 민족의 감각에 합당해 오랫동안 자동직기로 제직된 값싼 면포를 압도해, 많이 사용되었던 옷감이다.
무명으로 옷을 지으려면 먼저 물에 담가서 날실 날기 때 먹인 풀을 깨끗이 뽑고 잘 세탁해 삶아서 널어 말린다. 그 뒤 다시 쌀풀을 먹여 양지에서 말린 다음,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아서 다리거나 다듬이질해 사용한다. 색무명으로 사용할 경우는 풀을 빼고 세탁해 양지에서 말린 다음 염색하고 풀 먹여서 다리거나 다듬이질을 한다.
무명으로 옷을 지을 때 겨울옷은 솜을 두어 겹으로 지었으며, 봄·가을 것은 그냥 겹으로 지었고, 여름옷은 홑으로 지었다.
무명은 자동직기로 제직된 면직물인 광목·옥양목 등이 범람한 때도 농가에서 부녀자들에 의해 제직되어 자급자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무명 짜기와 그 소비가 단절되어, 다만 나주의 무명 짜기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명주
견사(絹絲)를 이용해 짠 견직물입니다.
원래는 명(明)에서 생산되는 견직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누에를 쳐 명주를 길쌈한 것은 이미 삼한시대부터 일반화해 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상류층이 중국산 명주나 비단을 수입하여 의복재료로 삼음으로써 명주를 길쌈하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이 상태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명주 길쌈을 권장하여 각 지방에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종상법(種桑法)을 반포했으며 관복을 국내산 명주로 바꾸어 짓게 했다. 또 성종대(成宗代)에는 후비들의 친잠례(親蠶禮)가 행해졌다. 그러나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에서는 명주를 고작 의복 안감이나 운혜(雲鞋)감으로만 사용했을 뿐 겉감으로 사용한 예는 거의 없었다. 반면 서민들에게는 혼수감이나 명절복에 쓰였던 가장 호사스러운 옷감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조선).
명주의 길쌈 과정
누에치기
양잠이라고도 하며 춘잠(春蠶)·하잠(夏蠶)·추잠(秋蠶)으로 나뉜다. 뽕나무를 심어서 뽕잎으로 친다. 누에알을 받아내고 부화된 어린 누에를 키워 고치를 얻는다.
실뽑기
따낸 고치로부터 실을 뽑는다. 가마솥에 물을 부은 후 물이 끓을 때 고치를 넣어서 나무젓가락에 실을 걸어 올리는 방법과, 가마솥 둘레에 진흙을 개어 바른 뒤 가마솥이 뜨거워졌을 때 물을 부어서 실을 뽑는 방법이 있다.
실내리기
왕채의 날개로부터 거둔 실을 실 솥에 1번 담가 올이 풀어지게 한 다음 잘 말려 돌 곁에 올린다. 한동안 말뚝에 실을 걸어두었다가 타래를 만들어준다.
명주매기
타래 지은 실을 다른 직물의 길쌈 때와 같이 풀칠을 해 말려서 도투마리에 감아준다.
명주짜기
도투마리에 감긴 명주실을 베틀에 올려서 잉아를 걸고 실꾸리를 북에 넣은 다음 명주를 짠다. 명주는 특히 올이 가늘어 가장 굵은 것이 10새이고 보통이 12~13새이며, 15새 정도가 되어야 상품(上品)으로 친다. 옷을 지을 때는 흰 명주 그대로 짓는 경우도 있고, 잇꽃·지치·느티나무꽃 등으로 빨강·자주·초록 등의 물을 들여 짓는 경우도 있다.
명주의 질은 산지의 기후조건이나 누에의 종류에 따라 다르며, 지방에 따라 천의 넓이가 다를 수도 있다. 1988년 성주 두리심의 명주짜기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어 조옥이(曺玉伊)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엠파스 백과사전
참고문헌
엠파스 백과사전, 홍명희, 임꺽정,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회사,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 아언각비(雅言覺非),성호사설(星湖僿說),고사통(故事通),木綿革命(角山洋行, 服裝文化 163, 1979),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8(석주선, 문화재관리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여지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