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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6619019357
분석글이기 때문에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된 고전 소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들어가며
<Wuthering Heights>, 우리나라에서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 명작 중 하나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들도 많다. 특히 캐서린 언쇼(이후에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여 캐서린 린턴으로 이름이 바뀐다)의 캐릭터성에 대한 비난이 많다. 왜냐하면 히스클리프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집착과도 같은 처절한 사랑과 복수심에 공감할수록 캐서린이 에드가와 결혼한 이유가 그저 자신의 계급을 지키고 싶었던 속물적인 여성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잘못 해석하여 벌어진 오해에 가깝다. 오늘은 캐서린 언쇼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폭풍의 언덕>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겠다.
# 우리가 서술자 넬리 딘을 신뢰하는 이유
일단 <폭풍의 언덕>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원작에서는 소설의 서사를 두 명의 서술자가 풀어낸다.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전세 내어 입주한 세입자 록우드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그에게 이 근방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정부 넬리 딘이 록우드에게 말해주는 액자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서술자 중에서 넬리 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감형 인물"이다. 그녀는 히스클리프가 힌들리에게 구박 당하는 모습을 보고 가엾게 생각하여 그를 돕고, 힌들리가 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아들 헤어턴을 정성을 담아 기르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며, 힌들리에게 맞서기도 하는 용기까지 갖춘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좋은 인품에 가정부로 일하면서 캐서린, 히스클리프, 힌들리, 에드가 린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녀를 믿을만한 서술자라고 생각하게 된다(물론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서술자인 록우드의 덕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각으로 알려준 이야기와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를 그녀가 본 시각으로만 따라가면, 캐서린 언쇼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서술자 넬리 딘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
문학 작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의 시점이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상대적으로 다른 시점보다 편파적인 면이 적지만(편파적으로 서술을 하더라도 독자들에게 티가 많이 난다), 다른 시점의 경우에는 글을 읽으면서 사건의 재구성을 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인물도 인간과 똑같다. 그들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그에 따라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선입견도 존재한다. 그래서 A라는 인물이 B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을 때, A가 B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들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B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넬리 딘의 케이스도 이와 같다.
넬리 딘은 록우드에게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난 다음부터 캐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다시 말해 넬리는 캐서린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호감형 인물이라고 해도 더 이상 중립적인 서술자로서의 지위는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녀의 캐서린에 대한 평가는 모두 제외해야 하고, 독자들은 캐서린의 행동에 대해 언급한 부분만 따로 놓고 그녀의 진짜 심리는 어땠는지 다시 파악해야 한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 색안경을 벗고 인물을 재평가 해보기(예시)
캐서린과 넬리가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캐서린은 넬리에게 자신이 히스클리프를 위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히스클리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라며 넬리가 비난하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맛본 크나큰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가 당한 고통이었어. 처음부터 그 고통 하나하나를 지켜봤고 겪어 냈지. 살아오는 동안 내 생각의 가장 큰 몫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 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되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내가 그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거야. 린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후략)"
<워더링 하이츠> 을유문화사 번역본에서 발췌
이 말을 하고 울먹거리며 넬리에게 안기려는 캐서린을 넬리는 밀쳐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터무니없다고 하며 이런 독설을 날린다.
"아가씨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이해하려고 해 보면, 아가씨는 결혼과 함께 떠맡아야 할 의무가 뭔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드네요.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막돼먹은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은 거죠."
이 상황은 넬리의 시각으로 보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할 것이라며 히스클리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캐서린의 모습이 위선적이며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캐서린에 대한 넬리의 부정적인 시선들을 걷어내고 다시 한번 이 대사를 살펴보자. 과연 캐서린은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할까?
캐서린의 대사를 보면 오직 히스클리프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그녀는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오빠인 힌들리에게 학대 당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둘이 결혼을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는 여전히 힌들리에게 괴롭힘을 받고, 자신은 그를 지켜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를 자신이 지켜주기 위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한다면 그녀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지만, 자신이 린턴가의 도움을 받아 힌들리로부터 히스클리프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선택은 절대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고약한 심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둘 다 가지고 싶다며 떼쓰는 어린아이의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캐서린의 결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까지도 던질 수 있는 자기희생에 가까우며,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글을 마치며
이런 맥락으로 소설 속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재평가를 해보면 이때까지 읽었던 <폭풍의 언덕>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말괄량이와 같던 그녀의 성격이 왜 히스클리프가 떠난 시기에는 정숙하고 병약한 부인이 되어버렸는지, 혹은 넬리가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린턴 부부가 정말 행복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를 다시 살펴봐야하니까. 이처럼 <폭풍의 언덕>말고도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서술자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지 계속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폭풍의 언덕>을 그동안 잘못 읽은 것 같다고 느낀다면, 다시 한번 읽으며 수수께끼들을 풀어서 넬리 딘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흥미로운 독서를 해보길 바란다.
댓펌
제가 보기엔 캐서린의 저 말은 그냥 핑계 같습니다. 그렇게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면 차라리 그와 함께 떠나는 게 맞겠죠. 그저 미사여구를 잔뜩 넣었을 뿐.
물론 보는 사람의 관점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서 역사 서술도 틀어진다만, 넬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전제한다면
뭐가 됐든지 그녀는 어려운 길보단 쉬운 길을 간 거라 봅니다.
정말 좋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반대로 히스클리프에게도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서로 좋아하는데 왜 같이 도망을 안쳤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죠. 제 개인적인 해석을 알려드리자면, 조금 뻔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만큼 확실한지 몰랐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대 관계는 강했습니다. 그러나 캐서린이 린턴가와 친해지며 둘의 관계에 에드가 린턴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오게 되죠. 이때 서로 혼란스러워 피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지고 결국 오해를 바로 잡지 못하고 끝납니다. 캐서린과 넬리의 이야기를 오해한 히스클리프가 저택을 떠나버리고, 복수극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둘 사이의 확실한 소통 부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헤어턴과 캐시 린턴의 관계가 이들과 정반대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각종 오해로 인해 관계가 최악으로 시작하죠. 그러나 이후에 오해를 풀고 끝내는 결혼까지 하는 정반대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의 문제이기 보다는 둘의 소통 부재로 인한 오해가 가장 큰 문제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넬리의 증언의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납득이 가지만, 그렇다고 캐서린이 딱히 좋게 보일 것도 아니지 싶은데요.
어찌되었건 관점보다 명확한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본심이 아니거나 오해라고 말해도 이해해 주기에는 좀…
맞습니다.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완전히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극에서 그녀의 책임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사랑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의 끔찍한 행위들이 용서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문학에서는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인물의 심리나 어떤 일의 과정이죠. 캐서린이나 히스클리프 두 인물 모두 자신의 시점이 아니라 서술자들에 의해 설명된 부분이 전부이기 때문에 다시 평가하는 부분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제 보니 조금 덜 논쟁적인(?) 부분을 예시를 들었으면 읽는 분들이 조금 더 공감이 가셨을 것 같긴 합니다. 좋은 예시를 선정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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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넬리를 의심하며 읽어야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구나
다시 읽어봐야겠어
배워간다.. 좋은 글 고마워
근데ㅜ캐시도 캐신데 히스클리프도 너무 악인이라 난 그냥 아무도 이해안되더라… 고전 진짜 좋아하는데 유일하게 끝까지 안읽은게 폭풍의언덕임
헐
헉 회사라서 지금은 못보는데 보고싶어서 일단 북마크!!!이따볼게!!! 고마워!!!
서술자의 시선으로만 감정이입하다보니 전혀 의심을 못했어.. 다시 읽어봐야겠다
와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다....난 캐서린한테 감정이입 해서 넬리 비호감이긴 했어...냉정하다면 냉정한? 뒷담이 은근히 껴있고 ㅋㅋㅋㅋ
제 3자 입장에서 서술되는 작품은 무조건 의심하면서 읽어야 함...인물이 항상 진실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와..이런거 찾아내는 사람들 대단해..난 걍 생각없이 읽어서 그런지ㅎㅎ..
난 어릴 때 읽고 캐서린이 불쌍하고 넬리가 쫌 미웠던거 같은데 다르게 읽은 사람들이 많구나..! 이것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