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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보물섬, 사할린섬의 석유 개발 약사
(현재 사할린 섬에는 한국의 에너지 업체도 다수 진출했으며, 경제적 문제로 국제적 다툼이 있다는 뉴스 보도가 있습니다. 석탄 등 다른 자원의 개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사할린섬의 별명은 '보물섬' 입니다.)
개발 역사 :
제정 러시아시대부터 사할린섬의 석탄 광산이 개발되어 선박, 증기엔진, 기차용, 난방용으로 대량 사용되었다.
사할린 석유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니항(니콜라예프스크)과 연해주 일대의 상인이던 A.E. Ivanov의 직원 F. Pavlov는 '외국인의 지시에 따라' 사할린 섬에서 자연적인 원유(석유) 배출지점을 발견했다.
사할린섬 최북단 오호츠크 해 연안의, 산 사이에 끼인 좁은 계곡에 기름으로 가득 찬 구덩이가 많았다.
A.E. Ivanov는 회사 직원의 발견에 큰 관심을 보였고 1880년에 탐사 및 생산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Iavnov의 죽음은 진행되던 유전 개발 계획을 중단시켰다.
1888년 A.E. Ivanov의 사위이던 G.I. Zotov는 사할린 유전을 개발할 권리를 인계 받았다.
1800년대후반부터 1900년대 초에 그는 반복적으로 개발사업을 시도했지만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
1889 ~ 1890년에 사할린 유전 탐사는 광업 엔지니어 L.F. Batsevich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그는 사할린섬 북부의 Okha 및 Nogliki 강, Nabilsky 및 Nyisky 만 지역을 조사하였다.
유전 조사는 성공적이었으며 L.F. Batsevich는이 방향으로 더 많은 채굴작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산업화에 진행에 따라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원이 변경되어 갔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반에 외국 기업가들은 처음으로 사할린 석유에 관심을 보였다.
1892년 영국 회사 인 Royal Dutch Petroleum은 독일인 엔지니어 F.F. Kleie를 섬으로 보냈다.
그들은 1898년에 사할린섬의 유전을 개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많은 영국 기업을 유치하고 런던에서 100,000 파운드의 자본으로 '사할린 및 아무르 석유 광산 신디케이트'를 설립했다.
그러나 신디케이트는 거의 10년 동안 활동했지만 대량 생산된 원유(오일) 채굴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과 풍부한 천연가스, 석탄, 석유가 있는 보물섬. 사할린섬 일대
사할린섬 일대 가스전
러일전쟁이후 사할린섬의 분할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북위 50도를 경계로 사할린 섬 남부를 할양 받았다.
북부 사할린섬의 지질 조사는 K.N. Tulchinsky, E.E. Anert, N.N. Tikhonovich, P.I. Polevoy의 원정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다수의 퇴적층 지역들 (Okhinskoe, Noglikskoe, Nabilskoe, Boatasinskoe, Boatasinskoe, Katanglinskoe, Ekhabinskoe, Nyyskoe, Daginskoe, Chayvinskoe, Piltunskoe)
들은 러시아 기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1910년 Petersburg-Sakhalin Oil and Coal Society와 Vladivostok-Sakhalin Expedition이 설립되어 Nabilskoye, Katanglinskoye, Noglikskoye, Piltunskoye, Nutovskoye 및 기타 지역의 개발을 위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 식량난, 러시아 정치상황의 불안정 등등으로 개발개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일본 기업의 유전에 대한 관심 증가
동시에, 외국 (주로 일본) 기업의 북 사할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
백파 콜차크 정부 시대의 외국 기업 진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이후 1918년경 간섭전쟁이 발생하였고, 백파 콜차크는 일제 침략군 등의 지원으로 극동에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자 1919년에 일본의 미쓰비시와 이토 코라다 기업이 사할린 섬 북부의 유전 일대를 탐사했다.
1919년 봄, 콜차크 정부는 사할린 북부에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콜차크 정부는 사할린섬의 러시아 북부에서 일본의 경제 지배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며 일본, 미국 및 영국 자본간의 자유 경쟁적인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 원칙을 선언하였다.
백파 콜차크 정부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레닌정부의 독일에 대한 영토할양과 배상금 지불을 맹비난하고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일제에게 대놓고 사할린섬 북부를 할양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1916년 일본 상공 회의소 대표가 Petrograd Geological Committee와 사할린에 대한 공동 조사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으로 석유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인은 1918년까지 석유 탐사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일제는 1920. 4. 21. 경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짜프카 등을 살해하였다.
러시아 민간인 수천여명이 러일전쟁 이후 1905년경 사할린섬 학살 때처럼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으며,
일제는 북부 사할린섬 점령 기간 (1920-1925) 동안 석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퇴적층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18년경 일본군의 사할린주 침략의 표면적 이유중 하나는 사할린 섬 북부 일본 석유회사 "호쿠 신카이" 직원의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파쇼주의 옹호 도서가 일제가 사할린섬 북부를 공격한 것은 니항사건 이후인 1920년 7월이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도 니항사건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조작한 것이다.
일본의 1920년 4월 사할린섬 점령작전 목적
1920년 4월경부터 시작된 일제의 니항 재공격 작전. 일본 민간인과 포로구출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4월 일제의 북사할린섬 공격과 4월 참변 이후에서야,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가 처형되었다.
일제가 1920년 7월에서야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다. 오늘날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이렇게 까지 조작을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1930년대 일본이 사할린 섬 북부 오하에 건설한 채굴장
1891년경 사할린섬의 석탄광산
일본-석유회사의 진출
지질 탐사 작업은 처음에 일본의 Kuhara 회사와 일본정부 해상부가 자금을 지원했다.
1921년부터 Okhinsky 유전은 산업적으로 채굴되었다.
그 후 곧 Kuhara, Mitsubishi, Okura 및 Nippon Oil Company 회사를 포함하는 Hokusinkai 주식 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사는 8개 지역(Okha, Ekhabi, Piltun, Nutovo, Boatasyn, Nogliki, Uiglekuty 및 Katangli)에서 채굴을 하였다.
가장 경제적인 것은 Okhinskoe로 밝혀졌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거의 2만 톤의 석유가 생산되었다.
1925년 일본군의 사할린섬 북부 철군에 따른 소련의 1925년~1944년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과 광산 등 양보
1925년 12월 소련과 일본 정부 대표들은 모스크바에서 북부 사할린 유전, 광산 개발 등을 위한 양보 협정을 체결했다. (45년 동안).
총 면적 4,800 데시아틴인 8개의 매장지 (Okha, Nutovo, Piltun, Ekhabi, Chayvo, Nyivo, Uiglekuty, Katangli)는 체스판의 패턴으로 분포된 형태로 나누어져 일본에게 이권이 넘어갔다.
1925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과 탄광 등의 권리를 획득한 대가로, (사할린섬 남부는 일본이 1905 ~ 1945년까지 지배하였다.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등은 45년간 일본이 사용권을 획득하였으나 1944년경 2차 세계대전 전황 악화로 소련에게 돌려 주었다.)
사할린섬 북부 석유 생산 수입의 5 ~ 45%를 소련에게 지불하고 주 및 지방세를 지불하고 임대료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1926년 일본 기업가들은 북사할린 합자 석유회사를 설립하여 Okhinskoye 유전을 개발하고 그 유전에 할당된 다른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석유 생산량은 매우 빠르게 증가했으며, 1933년에는 195,000톤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산지표는 곧 안정되었고, 1937년부터 감소가 시작되어 일본에 대한 양보의 청산 (1944년)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일본은 북부 사할린에서 2백만톤 이상의 석유를 생산하고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1928년 소련 정부는 사할린 섬 유전의 소비에트 부분을 회복하기위해 사할린 네프트 국가신탁을 설립하여 운영 첫해에 296톤의 석유를 생산했다.
또한 1932년 188,900톤, 1940년 505,000톤, 1945년 695,100톤의 급속한 성장이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많은 지역의 개발을 통해 달성되었으며, 이는 차례로 지속적인 탐사 작업으로 보장되었으며, 그 결과 Ekhabi 및 Katangli 지역에서 가장 풍부한 석유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Ekhabinskoye 필드는 북부 사할린에서 가장 생산적이 되었다.
그래서 1940년에 316,800톤의 석유를 생산했다.
(국가신탁 총 생산량의 60 % 이상) 의 모든 사할린 오일은 섬 외부로 수출되었다.
일부는 본토 (주로 2차 5년 계획 중에 정유소가 건설된 하바롭스크)로 갔고,
일부는 일본으로 수출하여 일본은 1930년대 상반기에 사할린 네프트 제품의 3분의 2 이상을 구매했다.
(1929년부터 1937년까지 약740,000톤).
1937년 이후 일본으로의 '블랙 골드' 형태의 원유 수출은 주로 정치적 이유로 중단되었다.
석유 운송은 북부 사할린에서 석유 산업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1931년에 Okha-Baikal Bay 송유관은 두 번째 5개년 계획 인 Ekhabi-Okha 송유관에 따라 건설되었다.
1942년 Okha-Sofiyskoye-on-Amur 송유관이 가동되어 1년 내내 석유가 본토로 이동할 수 있는 1942년까지는 항구와 유조선을 통해 석유를 섬 밖으로 운반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1945년 소련은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를 다시 회복했다.
2차 대전후 일부 유전의 생산량 급감
전쟁 직후 사할린 석유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1946년 812,000톤, 1947년 735,000톤, 1950년 이미 617,000톤이었다.
주된 이유는 대부분의 오일이 매장지에 대한 당시 기술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것을 소련 지도부가 심각하게 걱정했했다.
1948-1951년에만 사할린의 석유 산업에 8억 9천만 루블이 투자되었으며, 주로 지질 탐사 및 시추 작업에 사용되었다.
동시에 수백 명의 유능한 엔지니어가 섬으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Tungor와 Kolendo 필드가 발견되었다.
또한 1950년대에는 2차 생산 방법의 개발이 시작되어 현장 운영의 효율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생산 감소를 억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성장을 달성 할 수 있게 했다.
(1947년 735,000톤에서 1964년 2,207,000톤으로).
196 년 CPSU 중앙위원회와 소련 각료회의는 "사할린 지역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조치에 관한"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에 따라 1970년까지 석유 생산 목표량을 350만 톤, 천연가스 28억 입방미터(365.9 %)까지 증가시켰다.
그러나 1970년이후 사할린 유전들은 계획된 지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1965년에서 1984년 사이 석유 생산량은 9.9%, 가스는 32.3% 증가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용된 2차 생산 방법은 채굴을 급격히 증가시키지 못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점성 오일의 80 % 이상이 매장지에 남아 있었다.
1967년부터 Okha, Katangli, 동부 Ehabi의 오래된 유전지대에서 뜨거운 물과 과열 증기가 고압으로 매장지에 주입되었다.
그 영향으로 점성 오일이 유동성을 증가시키고 더 쉽게 표면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비용은 분수나 가스 부양 방식으로 생산 된 것보다 훨씬 높았다.
1980년대 초까지 사할린섬 기존 유전의 대부분이 고갈되었다.
생산 가능한 매장지를 발견하지 못했고,
1974년부터 생산량이 다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Mongi 필드의 시운전만이 감소를 멈추고 연간 250 ~ 265만 톤 수준으로 생산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석유와 가스 탐사는 사할린에서 멈추지 않았는데, 이는 "블랙 골드" 매장량의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다의 유전 개발은 1960 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해상 부유식 원유 및 천연가스 장비
70년대 말까지 해안에서 오호츠크 해 바닥 아래의 탐사 및 상업적 시추가 모두 수행되었다.
그런 다음 탐사 시추를 위해 부유식 시추 장비를 사용했다.
그 결과 Chayvinskoye, Odoptinskoye 및 Piltun-Astokhskoye 유전 및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사할린 석유 산업은 또 다른 불황기에 접어 들었다.
사할린섬 유전이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2차 생산 방법을 사용하면 엄청나게 생산 비용이 들었다.
아직도 사할린섬 해상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지는 집중 개발되고 있다.
석탄 개발에 참여한 노동자
출처 : https://blogs.ildaro.com/1551
사할린섬에 여러개 세워진 조선인 학살 추모비들
2022년 현재도 해상의 천연가스 및 유전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으며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의 다수 기업이 진출하였다. 한국에서도 미세먼지 등의 문제로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일 등으로, 사할린섬 자원개발과 관련하여 자주 뉴스에 보도된다. |
원문 출처 등 :
http://zhurnal.lib.ru/e/ewgenij_medwedew/istoriadodichineftinasaxaline.shtml
사할린섬에 있는 여러개의 조선인 학살 추모비
https://www.youtube.com/watch?v=OYiuUeB2q_M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자료.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외에도 석유개발, 금광업, 광산업도 했던 시마다 모토타로
첫댓글 사할린섬이 보물섬이라고 불릴만 하네요 점성오일의 생산 비용이 컸군요 바다의 유전 개발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옹 백군이나 적군이나 러시아 제국 영토를 보전하려 했음은 같군요
1차 대전 말기
레닌이 독일의 지지를 받아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고, 독일과는 평화조약을 맺으며,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약속했습니다.
백파는 이것을 맹비난 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보니... 자기들은 제정 러시아 영토를 보존하는 편이라고 주장을 하였고, 볼셰비키를 비난하였죠.
다만, 콜차크 일당도 입으로만 비난한 것이고 미국, 일본, 체코군단의 지지를 한 때 받았죠.
그리고 승리를 위해서는 실제로는 일본에게 사실상 사할린섬 북부 등도 넘겨주려고 한 것이죠..
다만 대놓고 하기가 곤란했던 것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