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목은 구거(舊居)
석야 신웅순
최○진 교수와 여주 답사를 갔다. 최교수님은 판소리 학자요 나는 시조 연구가이다. 신륵사 답사하신다기에 따라나섰다.
2년 전인가 최교수님은 나를 청했다. 석북 신광수 유적지를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의아해했다.
“판소리와 시조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예,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판소리와 시조와의 접점을 찾고 계셨다. 18세기 문화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작년 가을 내 고향 서천에서 석북에 대한 학회와 판소리 중고제에 대한 학회가 동시에 열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대 판소리 5 명창인 이동백 김창룡 두 분이 서천 출신이다. 중고제 판소리의 명창, 그 요람이 바로 서천이다. 시조명칭 유래가 석북 신광수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신광수 선생 또한 서천이 고향이다. 어쩌면 내 고향 서천은 판소리와 시조의 고향에 다름없다. 그런데 그 맥이 거의 끊겨 일말의 겨울 햇살만 몇 오라기 남아있을 뿐이다.
석북 선생은 50세에 첫 벼슬 영릉(寧陵) 능참봉으로 발령을 받았다. 거기에서 262편의 여강록을 지으셨다. 여기에「목은 구거」라는 시가 있다.
포은은 사직에 죽었고 야은은 산택으로 돌아갔었네. 누가 전 왕자를 세우려 했던 가. 이 일로 공이 또한 귀양 왔구나. 용마굴 남쪽가에 어느 때쯤 집을 지으셨던가. 문 앞엔 큰 강물이 흐르고 강 저편 언덕엔 신륵석이 서 있어라. 공문의 나옹과 벗하며 들배를 띄워 지내셨네. - 신광수의 시「목은 구거(舊居)」일부(신석초역)
목은 선생이 용마굴 남쪽가에 집을 지으셨고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강 저편 언덕엔 신륵석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집이 바로 목은 구거이다.
여기를 답사하러 왔다. 내겐 이유가 있었다. 석북은 목은 이색의 외손이요 나는 석북의 8손이다. 석북이 이색의 우거를 찾아 읊었고 나 역시 석북 선조의 뒤를 따라 찾았다.
신륵사 맞은편이면 썬밸리 호텔 부근이다. 이쯤에다 집을 지으셨을 것이다. 강변엔 산책도로가 강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이색과 석북 선생을 생각하며 유유이 흘러가는 여강을 바라보았다. 강 건너 맞은편 신륵사를 바라보았다. 목은 선생도 바라보았고 석북 선생도 바라보았을 저 강물과 신륵사. 산천은 변함이 없건만 무심히도 600백년 하고도 그 반세기 세월은 다시는 못 올 곳으로 흘러갔다.
“천지는 만물이 머무는 여관이요, 시간은 백대를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인생을 헤아리니 아득한 바다에 떠있는 한 알의 좁쌀. 두어라, 덧없이 떠도는 꿈 같은 인생이니 아니 놀고 어이하리.” 이백은 이리 읊지 않았는가.
여주 박물관 앞에 세워진 목은 선생 시조비 음기 일부이다.
한강 수로의 배를 이용하여 오대산으로 다시 돌아갈 때 이곳 여강 연자탄(제비여울) 에 도착하여 머무는 시간에 태조가 보낸 어주라고 위장한 술을 마시고 배 안에서 갑자 기 운을 마치셨으니 이 때가 1396년 5월 7일 이었다. 이 무렵 선생을 영접 나왔던 제 자들이 그 술을 마시지 말라고 권유하였으나 선생은 나는 명을 의심치 않는다 하였으 니 그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영원한 의혹으로 남아있다.
제비여울이라 추정되는 곳이 지금의 여주 세종대교 아래 양섬이라고 한다. 무심한 강물은 양섬을 에돌아가고 있었다. 그 좁은 여울에서 고려를 두고 떠나신 한 많은 님의 시조를 읊어본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양섬에 이르니 어느덧 해는 서산에 지고 있었다. 노을이 저 먼 강물과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늘그막 내 가슴에 까지 와 잠시 저녁을 머물다가고 있었다.
- 함께 해주신 최○진 교수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2024.2.21.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계시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