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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공자는 그의 인생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내용은 논어, 「위정(爲政)」 편 제4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지우학, 志于學),
30세에 도를 얻어 섰고(이립, 而立),
40세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며(불혹, 不惑),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지천명, 知天命),
60세에는 들리는 것이 모두 순해졌고(이순, 耳順),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그것이 세상의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불유구, 不踰矩).”
즉, 공자는 때를 따라
인생의 목표를 잡았고,
스스로 일어설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고,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남의 말을 듣는 귀를 얻었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법도를 어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생에는 다 때가 있는데요.
그때를 알고, 시간을 잘 보내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인생에는 어떤 때가 있다고 하였나요?
#전도서 3장 1-11절, #김영한, #아침개인묵상, #성경 하브루타 코칭
<모든 일에 때가 있다>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1) 인생에 잊지 못할 때는 언제인가요?
2) 전도자는 시간에 대해 어떻게 말하였나요? (1절)
-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때 개념?
시간과 때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세슘 원자가 92억 번 움직이는 것을 1초로 봅니다.
세슘 원자에게는 1초가 그리 짧은 시간의 단위는 아닙니다. 아주 수없이 많이 움직인 기간입니다. 그런 1초 1초를 잘 관리하지 않는다면 좋은 관리자와 시간 소비자는 아닙니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 제우스의 아들로 다른 말로 하면 ‘기회의 신’이라 불립니다.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순간의 선택을 결정짓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 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아주 달라집니다. 카이로스의 기회의 신만 추구하면 기회주의자가 되고, 크로노스의 단순한 시간 속에서만 살면 기회를 만들 수 없는 시간의 소비자나 혹 낭비자만 됩니다.
나 자신은 시간 있어 사용에 10점~100점 만점 중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3)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제대로 해 보고 싶은가요?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1) 전도자는 어떤 다양한 때가 있다고 하였나요?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2절),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고,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고(3절),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고, 출출 때가 있고(4절),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고(5절),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고(5절),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고(6절),
-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고(7절),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8절).
D. R. 글렌은 그의 주석에서, 전도서 3장 2-8절이 어떤 내용을 담고, 무엇을 보여주는 시적 논증인지 말해줍니다.
“(전도서 3:2-8) 논증은 명확히 보여주었다. 솔로몬은 각각 그 시대에 일어나는 14개의 반대되는 시로 그의 일반적인 진술을 따랐다. 솔로몬이 7의 배수로 극의 반대를 활용하고, 출생과 죽음으로 그의 목록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7은 완전성에 관한 생각과 극적 반대(메리즘이라고 불리는 잘 알려진 시적 장치)의 사용이 전체성을 암시한다(참조 시편 139:2-3). 이러한 ‘활동’의 정확한 의미는 불확실하지만, 솔로몬은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모든 사람의 활동과 그리고, 사람, 물건, 사건에 대한 그의 모든 반응이 그 시대에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
(Glenn, D. R. (1985). 전도서. In J. F. Walvoord & R. B. Zuck (Eds.,). 성경 지식 논평 : 성경의 설명 (Vol. 1, p. 983). 휘튼, 일렉트릭: 빅터 북스)
...
Thesis illustrated (3:2–8). Solomon followed his general statement with a poem on 14 opposites, each of which happens in its time.
The fact that Solomon utilized polar opposites in a multiple of seven and began his list with birth and death is highly significant. The number seven suggests the idea of completeness and the use of polar opposites—a well-known poetical device called merism—suggests totality (cf. Ps. 139:2–3).
Though the exact meaning of some of these “activities” is uncertain, Solomon intended to affirm that all a person’s activities, both constructive and destructive, and all his responses to people, objects, and events happen in their times.
Glenn, D. R. (1985). Ecclesiastes. In J. F. Walvoord & R. B. Zuck (Eds.),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Vol. 1, p. 983). Wheaton, IL: Victor Books.
2) 나 자신은 최근 인생의 어떤 때를 보내고 있나요? 주님은 나 자신에게 어떻게 시간을 보내길 원하실까요?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 전도자는 어떤 자조적, 수사학적 질문을 던졌나요? (9절)
-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2) 전도자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무엇을 주셨다고 하였나요? (10절)
-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3) 전도자는 무엇을 깨달았나요? (11절)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 하나님이 일의 시작과 마침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신정론에 관한 고찰>
전도서는 하나님의 때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정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라는 기준 앞에서 ‘선악에 관한 기존의 판단’도 깨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인데요.
문제는 때로 인간은 인간의 기준과 잣대로 하나님이 악하시다고 여깁니다. 악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악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그러실까요?
유신론 믿음을 위협하는 악? 그 악이 파기자?
앨빈 플랜팅카는 <지식과 믿음> 책에서, 마지막으로 유신론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파기자가 바로, ‘악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악에 근거한 강력한 반신학적인 반증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고통, 악의 양, 다양성, 분포에 관한 지식이 신자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를 안겨 준다고 주장하였는데요. 이는 고대 에피쿠로스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논의는 철학자 데이비트 흄(1711~1776)에게도 되풀이 되었고요.
“에피쿠로스의 옛 질문은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악을 막고 싶지만 막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막을 수 있지만 막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막을 수 있고 또한 막고 싶은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ed. Richard Pokin (Indainapolis: Hackett, 1980)
앨빈 플랜팅카는 악에 근거한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서, 증거론적(evidential) 혹 개연론적(probabilianstic) 논증으로 돌아섰다고 하였습니다.
악과 자유의지 변론
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 왔나요?
a) 이신론 마니교?
마니는 선대 종교, 특히 조로아스터·붓다·예수의 계시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통합시켜 보편적인 세계 종교를 창설하려 했습니다. 단순한 혼합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이렇듯 마니교는 상황 의존적이었고, 이 점에서 이란 및 인도 종교, 그리스도교, 불교, 도교와도 비슷했습니다. 마니교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이원론 종교인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에 속하였는데요.
마니교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마니교는 이원론적 사상으로, 선한 힘과 악한 힘이 있는데,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를 제압하려고 하고, 이런 과정 중 세상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결국에 선한 신이 돌아와 악한 신을 물리치지만, 선한 신이 현실의 문제를 다 통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에 의하면, 살인자 속에 어둠의 악한 세력이 그 사람을 범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b) 이신론
이신론은 신은 존재하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신론적 발상은 악의 문제와 전혀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c) 일신론
악의 문제는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유일신을 숭배하는 일신론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악의 문제는 신이 전지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지선하지 않거나 중 하나만 부정돼도 모순이 매우 간단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신론 계열 종교에서 신이 전지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은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단의 발상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론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d) 기독교 안에서 악의 문제
악과 고통이 왜 존재하는지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이 있으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을 부인하는 논리, 근거로 말합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고로, 신은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함께 할 수 없는데, 이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못하시는 게 없나요?
첫째, 동그란 세모는 없고요.
둘째,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고요.
셋째, 게다가, 하나님은 도덕적 자유인에게 자유를 안 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즉, 꼭두각시로 창조하실 수 없고요. 전능한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진 인간? 로봇 같은 인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드시길 원하셨을까요? 앨빈 플랜팅카는 악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악은 하나님이 완전한 자유인으로 만들려고 허락하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플랜팅가 <자유 의지 변론> (free will defense)에서 악의 존재와 전지, 전능, 전선한 신의 존재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비판하였습니다.
앨빈 플랜팅가의 논증에 따르면 “신이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로운 피조물이 있는 세계를 창조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이 전적으로 선하다고 해도ㅡ만약 도덕적 선이 자유로운 도덕적 피조물들이 필요하다면ㅡ신은 악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플랜팅카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의 전지, 전능, 전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양립불가능한가?”
“유의미하게 자유로운 (악한 행위들보다 더 선한 행위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포함하는 세계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전혀 자유롭지 않은 피조물을 포함하는 세계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이제 신은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할 수 있지만, 신은 피조물이 옳은 것만 행하도록 야기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결국 유의미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옳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 도덕적 악을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했음에 틀림이 없다.”
- <신, 자유, 악 God, Freedom and Evil> / 앨빈 플랜팅가 57쪽,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악을 존재하게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만드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은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반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악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플랜팅카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악이 실재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가?”
결론적으로 플랜팅카는 악에 관한 훌륭한 반신학적 논증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신의 존재는 악의 존재로 인해 배제되지도 않으며 비개연적이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재난은 유신론자에게 하나의 문젯거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그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또는 개연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 <신, 자유, 악 God, Freedom and Evil> / 앨빈 플랜팅카 113쪽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신정론
과거도 그렇고,
오늘날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신정론을 인정하지 못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제는 없을까요?
현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이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지젝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사상가들과 대립하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 또한 해체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주체가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고 말했는데요. 지젝이 보기에 근대적 주체의 극복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젝은 그들 나름의 성과를 보존하며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새롭게 되살리려 시도했습니다.
지젝은 라캉의 실재계의 눈으로 주체와 세계를 조명하면서, 개인을 ‘상징계의 꼭두각시’로 간주하는 포스트 모던주의의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포스트 모던적 사유 속에서 주체는 ‘무의식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효과’로 간주될 뿐, 더 이상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할 여지를 갖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포스트 모던적 상황을 지젝은 ‘재귀성’으로 규정했는데요. 이 재귀성은 ‘아무도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로부터 비롯되고 다시 우리에게로 ‘회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상황에 대하여 책임 있게 문제제기하고 답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는 나는 제시할 답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삶 중심의 부재를 겪는 역설적 상황이 바로 포스트 모던적 사회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포스트 모더니즘은 상대주의를 외치는데요. 그러면서 절대주의를 추구하지 못 하게 하는데요. 그러나 결국에는 자체적 상대주의화한다는 절대주의로, 상대주의적 견해를 갖지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실재계의 눈으로 현실 상황을 조명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주체가 상징계의 대타자(the big other,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틀 구조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틀 구조 자체를 새롭게 창출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젝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은 “인간이 그냥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갇혀 사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때로 이런 이데올로기는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앨빈 플랜팅카도 역시 이렇게 보았습니다. 때로 이데올로기, 신념, 가치, 기준, 세계관은 그 사람의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철학, 진화론, 맑시즘은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신앙이 되기도 합니다. 고로, 이런 신앙적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신앙과 대립합니다.
고로, 플랜팅카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철학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진화론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맑시즘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때로 자명한 것을 수용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플랜팅카는 “자명한 것만 수용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자명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 자체가 자명하지 않고, 이 말대로 자명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포스트 모던에서 “모든 것은 상대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더 이상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플랜팅카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습니다. 인식 기능 정상 회복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플랜팅카는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옳다고 했는데요. 이렇게 말한 것은 고발자가 신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 속에 갇힌 주체?
지젝은 주체에 관해 말했는데요.
지젝이 말한 주체는 ‘코기토’로 대변되는 자기 완결적인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완전히 해체되어 버려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체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젝이 말한 주체는 무엇이었나요?
바로, 역동적이며 저항적인 주체였습니다. 이 작업에 동원된 것은 역시 헤겔, 마르크스, 라캉의 철학이었습니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 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체란 균열, 틈새,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주체는 말 그대로 “까다로운 주체”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체는 자신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젝의 실재계적 해방은 상징계의 대타자(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어떤 대타자의 보증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율적인 윤리의 조건”이라는 라캉의 말을 인용하였는데요.
지젝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만 권위를 부여받는 혁명 즉 “대타자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 혁명적 행위”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주체”를 주장하였습니다.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는데요. 인간은 실재계로 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를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플랜팅카는 성령 하나님을 언급하고, 그 도움을 말했습니다. 실재계에 하나님을 상징계에 인간을 돕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자의 사상도 현상계를 벗어난 초월을 말하였지만, 기독교적 사상과는 달랐습니다.
지젝은 우리가 상처 입은 주체라고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경제적 자유, 부한 삶을 추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지젝은 인간을 가두는 상징계와 상징계를 통제하는 대타자에게서 벗어나는 주체를 말했는데요. 이런 지젝의 주체는 자신의 행위들을 아무에게도 미루지 않고 기꺼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자유롭게 행위하는 윤리적 존재였습니다.
기존 상황의 의견이 강요하는 이익 관계들과 인과관계들의 망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행위하고 선택하는 윤리적 주체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대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의 사슬을 깨부수고 나오는 자유로운 주체였습니다. 이런 주체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존재가 되어, 절대적 고독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위해 스스로를 던지며 사라지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주체의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선험적인 좌표계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대타자의 토대를 무너뜨려, 대타자가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구조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로 바짝 다가가는 주체를 갈망했습니다.
반면, 앨빈 플랜팅카는 주체가 온전해지는 것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4) 최근 나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깨닫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5)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