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의 밤 최형심 그네 의자에 앉아 레몬 빛 램프 속으로 들어가네 발을 세우고 귀 어두운 문장들 사이를 자맥질하면 겹겹의 고요를 껴안고 녹슨 청동방울을 흔드는 움막에 다다르리 자줏빛 그늘 한 점을 내려놓는 저물녘 저녁의 문을 열어 둔 채 떠난 사람이 있어 빈 마을에는 물 항아리 가득 전설이 넘치고 고장 난 달 아래 수국 무덤에선 물뱀이 은빛 적막을 비켜 가고 있네 장미 솔기에 남은 불씨를 당기면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회색 연기만 웃자라 나는 등에 바람을 달고 날아오르네 은하수 흐르는 낡은 목조 지붕 저편 숲이 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눕는데 어둠에 날개를 적신 나는 닿을 수 없는 먼 나라 무한한 여백에 온점을 찍고 푸른 밤을 처음 만난 해파리처럼 차고 시린 국경을 그저 만져볼 뿐이네
—계간 《시인시대》 2023년 겨울호 ------------------------ 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