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사상 2조 발표
[이승만 정군의 비판적 고찰]
이승만 정권의 시기
이승만 정군의 시기에는 남한의 국가기구의 골격이 대부분 짜여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나 절차를 포함하는 정치적 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이승만 정권의 시기는 상당히 중요성을 갖는다.
(1)헌법의 제정과 정부수립
1.헌법의 제정
*1948년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회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곧바로 헌법제정작업에 착수
*6월3일 유진오의 헌법초안을 원안으로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하여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초안 완성
2.정부수립과정
남한에 미군이 주둔함 →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의함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신탁통치 논의함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 국제연합 남북한 총선거 결정 → 남한만의 총선거로 제헌의원 선출: 총선거결과 이승만 대통령 선출, 이시영부통령, 이범식 국무총리 임명
(2)자유당창당배경과 반민주주의적 정치과정
1.자유당의 창당배경
*국회에 의한 간선제로는 자신이 대통령이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재선되려면 현행헌법을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개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해주고 헌법개정을 지지해 줄 정당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어 정당의 창당을 추진했다. 신당조직에 대한 대통령의 의사표명이 있자 국회 내에서는 ‘공화민정회’가 주축이 되어 신당운동의 박차를 가하였다. 원외에서는 사회단체의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신당발기합동준비위원회”를 발족
2.반민주주의적 정치과정
*이승만.이범석 체제와 발췌개헌안
→발췌개헌안의 내용:국무위원 임명에 있어서 국무총리를 허용한다.
→개헌안 제출이유: 이승만 지지세력의 원내 외 실세확인,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 제고, 태동중인 신당 노선에 대해 탐색,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방안의 강구를 위한 탐색 조치
*이승만 친정체계와 사사오입 개헌
→헌법개정이 집권자에 재집군이나 집군연장의 법적 기반은 마련해주는 수단으로 도구화 되었다.
→사사오입개헌의 비합법성은 야당을 크게 자극하여 범야세력의 통합체인 “민주당”이 결성되게 만들었다.
→자유당은 최고 집권자의 군위구조를 지탱해주는 정치적 도구로 점차 전락해갔다.
*당관료 과두체제와 부정선거
→이기붕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3대 국회의 첫 번째 과제는 이승만에게 삼선의 길을 열어 주는 개헌 작업의 착수였다. 자유당은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무소속의원의 포섭에 주력하여 소속의원이 136명이 되어 개헌선을 확보하였다. 1954년 9월6일 대통령중심제, 국무총리폐지,국민투표제의 채택,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자유당측에 의해 제출되었으나 11월 27일 국회의 표결결과 재적위원 203명 중 135표로 그쳐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으로부터 명을 받은 공보처장 갈흥기는 개표결과 발표시 착오가 발생했다고 선언하고 사사오입론을 내세워 11월 29일 회의를 속개하여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하였다. 사사오입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3)야당세력의 대응
2.한민당
*한민당변천: 미군정 초기 결성→발전적 해체→민주당으로 다시 개편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의 주요견제세력
*야당의 여당견제: 보수 야당세력들은 이정권의 헌정 유린과 폭압통치에 맞서 반독재전선을 형성하기 시작, 직선제개헌을 저지하고 내각책임제개헌을 추진,대통령 선거에서의 야당의 정권 진출의 판도확장, 여당 지지약화
*민주당의 한계: 부수적 지주계급 출신들이 주류흫 이루고 있던 민주국민당 등 야당세력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할만한 자체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
2.진보당
*제1공화국하에서 진보세력의 결집체였던 “진보당“은 제 3대 정·부통령후보에 조봉암 ,박기출을 지명하여 이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를 개최 본격적인 정당활동을 시작한다.
*진보당 관계자들은 대부분 일제 시기 독립운동과 좌익운동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진보당의 불법화됨으로써 혁신정당이나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당체계 내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4)경제적 위기와 정권의 붕괴
1.한국의 경제적 상황
정부나 정치 지도층은 정부형태나 권력분배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국민의 생활양상 문제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다. 토지개혁의 실패와 이에 따른 자생적 산업자본형성의 실패는 기존의 중소기업가들을 몰락시켰으며 과도한 선거자금의 유출과 원조경체체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쟁수행자금이 조달에 따라 인플레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부실은 정치적 측면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관심을 갖게 하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2.원조경제의 파행
*미국원조가 미친영향
→미국의 대한 원조는 주로 국방비 충당을 위한 군사원조의 목적에서 제공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원조물자분배와 대충자금계정에 의한 재정투융자 환율정책 등에 의해서 수입대체산업을 추진하고 기업가들에서 정치적 통제망을 확립함
→원조물자에 의존한 수입대책산업은 삼백산업 위주의 소비재산업과 함께 제한적 형태나마 생산재 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미국에서 과잉생산되는 소비재만 원조받았기
3.경제개발계획의 시도와 실패
이승만 정권은 귀속재산의 불하, 원조물자부태,조세특혜,달러배정,금융특혜등 이러한 정책망에 의해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정치적 지지세력을 육성하고 기업가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치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58년 경제개발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던 것은 자본과 기술의 부족, 미원조의 감축 등의 요인보다는 자유당이 임박한 선거에 대비해서 경제 개혁 조치를 위할 여유가 없었다는 데 연유한 측면이 많았다.
4.농지개혁과 귀속재산의 처리
→농지개혁법의 제정과 실시는 반봉건적 토지소유를 타파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농지개혁의 내용과 방법 면에서 지주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미군정과 정부수립후 두차례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이 한국사회에 미친 정치 경제적 결과로 농지개혁은 농촌지역의 불평등을 어느정도 완화하고 소규모 자영농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기여하였다.
→1950년대의 농업정책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것은 농지개혁과 정부의 양곡수납정책,저곡가정책
5.이승만 정권의 붕괴 배경
→이승만이 권위주의정권의 대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그 정권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진보세력을 배제한 보수야당들의 통합한 민주당이 결성되면서 과거보다 지지세력이 낮아졌다.
→당시 한국경제는 심각한 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 했는 데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의한 경제악화가 국민의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첫댓글 어제, 수업마치고 수정을 했더니 날짜가 31일이되버렸네요;;ㅎ 아,, 멜주소는 hsy1806@nate.co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