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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일 기도>
제가 좋아하는 우리 단가 중의 하나가 사철가입니다.
이 단가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이 가사는 사철을 노래하는 것중에 봄 대목이지만, 젊은이가 부르는 봄 노래가 아니라 황혼에 있는 사람의 봄 노래이기에 봄 대목인데도 쓸쓸합니다.
제가 이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먹어서가 아니라, 이 노래를 처음 들은 30대 때부터이고, 이 노래를 젊었을 때부터 좋아한 이유는 흥타령이나 '허무로다. 허무로다.'를 얘기하는 코헬렛을 젊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곧, 인생을 거시적으로 보게 하기에 좋아하고, 젊다고 또는 힘이 있다고 날뛰지 않게 하기에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할까요?
그것은 오늘 사도행전의 가물리엘의 말 때문입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당대의 바리사이나 권력자들과 비교할 때 영적으로 참 지혜롭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렀냐 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계획이나 결정이나 실행을 하느님 뜻대로 하기보다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경향이 큰 데 비해 가말리엘은 그렇지 않다는 면에서 그럽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자기 힘으로 일을 마치려고 하지, 결코 하느님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일을 마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권력을 얘기할 때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란 그대로 직역하면 못할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인데, 사마천이 사기에서 여불위의 절대권력을 일컬어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하지요.
원래 장사꾼이었던 여불위는 돈의 힘으로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애첩을 왕에게 바치고 그 애첩에게서 난 아들이 진시황이 되게 하고는 절대권력까지 소유함으로써 못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힘 있는 사람 중에 하느님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일을 마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말리엘처럼 하느님 아래 자기 힘을 두는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음의 성무일도 마침 기도를 자주 우리의 <일 기도> 또는 <실행 기도>로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마친다면 좋을 것입니다.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가 할 일을 알려 주시고
그 일을 행할 힘을 주시어,
우리 모든 일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시작한 것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끝마치게 하소서."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표징 너머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됩니다.
이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 18,15) 하였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적인 것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잠언 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미신은 왜 생기는가?>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이 기적은 ‘산’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도 광야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까?”라고 대답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여전히 자기 능력에 의존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숫자 ‘12’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민족이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려면 먼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빵이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선악과로 배를 채웠습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척박한 땅에 살면 사람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빵은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살립니다.
그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고 에덴동산이십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헛것을 보며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척박한 땅에 사는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 욕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입니다.
욕구에서 벗어나지면 그냥 자연은 자연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할까요?
왜 우리는 사진을 찍어놓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았느니, 성모님을 보았느니, 천사를 보았느니 하며 놀라워할까요?
점이 많이 찍혀있는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상상으로 동물이나 자연의 일부분, 혹은 무기와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경우를 상상하도록 했고, 두 번째 그룹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휴양지에 놀러 와서 편히 쉬는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상상 훈련을 통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을 보는 두 그룹의 결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저건 뭐 그냥 점들만 찍어놓은 거네요”라고 대답했고, 첫 번째 그룹은 무의미한 점들 가운데서 동물, 나무, 단어 등 온갖 것이 그림에 담겨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조: ‘마음의 법칙;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널리 퍼지는 이유’, 폴커 키츠, 포레스트북스]
이렇게 내가 불안한 상황에 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착각해서 자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모두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둘 다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나뿐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을 만나야 합니다.
옛날 공주 지방에 한란이란 이름의 총각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그래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지만 손대는 것마다 잘 키워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시장에 나갔다가 누군가 팔고 있는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잉어를 나무를 판 돈으로 사서 강에 방생해줍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아이는 처음이구나.
그런 마음이라면 흉한 땅에 가서도 살기를 녹여버릴 수 있을 게다.
동쪽 오송벌로 가거라.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땅이지만 넌 큰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게야.”
잠에서 깨어난 한란은 너무나 생생한 꿈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오송벌은 엄청난 황무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려고 하면 지네신의 저주받는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황무지 북쪽에 지네창이라 불리는 흉가에 커다란 지네가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산 여인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고 3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출도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 윤달이 오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윤달이 왔고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 온 한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을 본 한란은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갔을 때 한란은 지네창으로 향했습니다.
집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의 뼈가 너저분하게 있었습니다.
지네의 냄새가 났습니다.
여인은 기절한 상태로 기둥에 묶여있었습니다.
한란은 처녀를 구해왔지만 지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혼인하여 열심히 일하여 황무지를 엄청난 곡식 지대로 변화시켰습니다.
만석꾼이 된 한란을 보며 마을 사람들도 지네창을 불태우고 황무지를 일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땅을 파보니 그곳의 퀴퀴한 냄새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네창을 팠더니 물이 많이 나와서 황무지에 물을 댈 수 있었고 그래서 모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주 한 씨 시조 한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출처: ‘금 손 총각과 처녀 제물; 청주 한 씨 시조 한란’, 유튜브 채널, 노가리 사랑방]
왜 한란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지네신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손만 대면 황무지에서도 곡식이 잘 자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싫었거나 혹은 그 황무지에서 그런 축복이 올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은 그 핑계를 지네신에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지네신을 만들어놓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물줄기가 있는 그곳을 파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신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을 버리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이유를 대기 위한 자기 합리화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나를 휴양지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이런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내가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셨고 제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보는 이를 선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한란과 같이 모두를 먹일 수 있는 에덴동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람이 헛것을 보며 나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시는 의복이십니다>
시에나에 들렀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강렬합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 사이로 빼곡히 들어선 고풍스런 옛 건축물 사이를 걸어 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토록 고색창연한 명품도시 시에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성녀(聖女)로 유명한 시에나의 카타리나 동정 학자(1347~1380)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도미니코회 재속3회 회원으로서 그녀는 탁월한 신앙생활은 즉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생활, 사심 없는 이웃사랑의 실천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지상에서 머물러야 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단명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후세 사람들은 대신비가, 탁월한 중재자, 위대한 신학자, 명설교가, 간호사들의 수호성인,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 등의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카타리나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서 주님과 일치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주님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시는 의복이십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甘味)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기도 안에서 주님의 형상을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활절 아침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성탄전야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혀드릴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그녀에게 주님께서는 오상(五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천국을 확신한 그녀였기에 임종 직전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이렇게 울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나는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 속에 쉬러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셔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와 늘 가까이 있겠고, 또 하늘에서는 더욱 열심히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니 가겠습니다.
주님의 귀중한 피로써 나를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는 6장 전체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라는 계시의 서론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라는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분,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의 정답은 “주님에 대한 믿음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사도들 모두에게 질문하셨는데, 필립보 사도만 이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라는 말은 사도들의 믿음을 끌어올려 주려고 하신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려고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는 필립보 사도의 대답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두 사도의 말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는지는, 즉 기적의 과정이나 방법은 모릅니다.
어떻든 한 사람의 한 끼 식사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다 배불리 먹었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어떤 아이의 모범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해서 모두 다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았고, 그래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 일이라면 감동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러면 이 이야기는 ‘빵의 기적’도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도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에 변화시킨 것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그것은 모범을 보인 아이가 일으킨 기적이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기적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읽을 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셨음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
당시에 그 빵을 먹은 군중은 모두 그 기적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긴 했지만 ‘기적의 의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직 신앙이 미성숙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했던 예언자입니다(신명 18,15-18).
그런데 신명기를 잘 읽어보면 ‘그 예언자’는 메시아가 아닌데,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고, 그 예언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에 구원과 해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루카 24,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 ‘정치 지도자’가 되라고 요구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주고, 경제 문제도 해결해 주는 지도자.)
그 당시 사람들은 바로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신 것은 사람들의 ‘세속적인 요구’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하긴 한데,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나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서 숨이 막힐 정도라면(마태 13,22), 그래서 ‘영혼의 구원’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몸’만 생각하다가 먼지로 사라지는 것, 그것은 속세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서 그것을 얻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분별력의 지혜 - 모든 덕행의 어머니>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시편 27,1)
화답송 시편을 들으니 힘이 납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 때 선사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오늘 새벽 휴게실에 들어서서 책 열람대를 보니 처음 보는 책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노년의 향기>
책 제목이 좋아 한 번 펼쳐 봤습니다.
70대 후반의 정하돈 노수녀님이 쓴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는 분별력의 지혜를 지닐 때 주책없는 노년이 아닌 참으로 '향기로운 노년'의 삶을 향유(享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엊그제 점심식사 후 집무실에서 잠시 휴식하려하자 갑작스럽게 백발의 노자매님이 웃으며 들어왔습니다.
작은 호두과자 한박스와 친히 집필한 <세 분의 어머니>란 신앙고백서 책 3권을 선물로 받고 무려 한 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1945년 경기 이천에서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권병애 루시아 자매인데, 참으로 평생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분투 노력한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처음엔 못마땅했지만 참으로 노년의 향기를 지닌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전개된 대화 나눔이었습니다.
책 제목인 <세 분의 어머니>는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마리아 성모 어머니를 지칭합니다.
진정성 가득한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저의 가정을 지켜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위안이 되고 힘을 주시는 내 버팀목이셨던 마리아 어머니셨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았음을 새롭게 느끼며 어머니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기도한다.
이 세상을 떠나 당신 곁으로 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 지켜주세요.
사랑하올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
새삼 이런 분별력의 지혜 역시 기도의 열매이자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14세기 이태리 출신의 위대한 신비가이자 교회 학자인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기념일입니다.
25남매 중 24번째로 태어나 16세에 도미니꼬 3회원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나이 만33세 선종할 때까지 참으로 눈부신 업적을 남긴 성녀였고,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분별력의 지혜였습니다.
참으로 타다 꺼져버린 삶이 아니라 33세 100% 완전 연소(燃燒)시킨 삶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시에나의 가타리나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고, 이어 1970년 성 바오로 6세는 성녀를 교회학자로, 그리고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 성 메토디오와 성 치릴로 형제,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타,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 에디트 슈타인 여섯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분별력의 지혜 하면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 그레고리로 대교황은 그의 ‘베네딕도 전기’에서 ‘그분은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라는 64장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을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비단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에게 참으로 필요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길눈’ 밝아야, 분별력이 좋아야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이고 사도행전의 온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율법학자 가말리엘 바리사이는 말그대로 분별력의 지혜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공성이불거,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는 노자 회고판에 나오는 말마디를 연상케 하는 오늘 복음 후반부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참으로 기민하게 그 자리를 떠나 혼자서 산으로, 하느님 곁 본래의 제자리로 떠나십니다.
참으로 분별력의 지혜로 잘 살다가 잘 떠날 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떠나야 할 제 때에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또 짐이 되는 삶이라면 참 민망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다가 잘 떠나는 죽음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분별력의 지혜가 상황을 압도하며 순식간에 혼란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해 버립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말리엘의 올바른 분별력의 지혜로 다시 자유로워진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고 기뻐하며,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집저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선포하니 참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복음의 분위기입니다.
한 사람, 가말리엘의 분별력 지혜의 위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겸손과 더불어 분별력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마도 주님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다음 화답송 시편 말씀처럼 주님의 집에 사는 축복일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시편 37,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이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과 추억으로 남습니다.
미래는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저도 과거의 기억과 추억으로 웃음 짓곤 합니다.
실수도, 성공도 지나간 과거로 남으면 추억의 앨범에 남는 사진과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성지순례를 갔을 때, 동창 신부님들과 휴가를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나환자 마을에 봉사 갔을 때, 농촌으로 봉사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라는 기억과 추억에 의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갑니다.
미래는 지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디딤돌이 됩니다.
이민 온 분들이 고생하면서 새벽잠을 설치던 것도 아이들에게 더 낳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여름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가는 것은 가을의 풍성한 결실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에 온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날이 남은 날보다 더 많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신앙의 발판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과거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때는’는 이라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율법과 계명의 ‘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과거에 누렸던 부귀와 영화에 젖어 있으면서 현실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는 ‘유령’이 되어서 현실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민 온 지 40년, 50년이 된 분들은 변화된 한국의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들의 기억은 과거에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걱정, 근심의 90%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의 지나친 근심과 걱정이 지금의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현실의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를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쟁기를 잡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들에 피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는 어떠하겠느냐?”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친다
과거와 미래일랑 모두 불살라 버려라.”
13세기의 영적 스승인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시간은 빛이 우리에게 당도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신에게 이르는 데 있어서 시간보다 더 큰 장애물은 없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지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버려라.’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거도, 미래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청년은 물려받은 과거의 재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오지 않았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때문에 물려받았던 과거의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교회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그동안 보여 주셨던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빵을 많게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걱정합니다.
고작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걱정을 떨쳐버린다면, 지금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의 발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릴 수 있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은퇴 후 시골에 내려와 사는 어느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도 그처럼 은퇴한 후 내려와 사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이 둘은 아주 친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옆집 이웃이 형제님에게 말합니다.
“이번에 이 동네에 이사 온 사람도 우리처럼 은퇴 후에 이곳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한 번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와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이 형제님은 물었습니다.
“은퇴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데?”
그러자 이웃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에 형제님께서는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과거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은연중에 과거를 통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려고 했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과거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를 알면 이상한 선입관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면 따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계사라고 하면 깐깐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또 정치인은 겉과 속이 다른 것처럼, 사업가면 자기 이익만을 챙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정확하지 않은 예측일 뿐입니다.
일 자체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제일 중요합니다.
과거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산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다른 현재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곳은 아주 외딴 넓은 공터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싶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던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적어도 노동자의 이백 일치 품삯이 있어야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필립보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고, 과거의 경험에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굳이 과거의 경험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들 모두 배불리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총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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