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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울음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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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뜨지 않는 새벽, 지난 여정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채 일찌감치 길을 나선 그는 까마득한 여행길을 마주하자 미지의 장소에 대한 불안과 설렘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편에서 기러기가 울며 날아오르자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기러기를 따라 옮겨 갔고, 두 눈에 가을 정취 가득한 강가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 들어왔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 불안은 사라졌고 어느새 아늑함과 평온함만이 자리 잡게 되었다. 소리로 인해 시야가 이동하고, 이동한 시야로 인해 심정이 변화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시 속에 녹여냈기에 두 구절을 자신의 작품 중 최고라고 꼽았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이날의 기러기 울음소리가 그에게 안정과 평온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하다. 이후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하던 김택영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1905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는 벗 황현에게 ‘문장을 통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라고 다짐했던 대로 중국 통주에서 문장가의 삶을 살아갔다. 당대 중국의 지식인이었던 장건(張謇), 엄복(嚴復) 등과 교유하며 문장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신위, 황현, 박지원의 문집과 조선의 역사서를 출간하는 등 지식인 디아스포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흐른 1921년 어느 가을밤, 그는 다시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이날 들려 온 기러기 울음은 그리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가을바람도 예전 같지 않게 차갑고 드세게 느껴졌다. 이 시에서 김택영은 노쇠한 자신에게 다시는 봄날 같은 좋은 시절이 올 수 있겠나며 절망적인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겪은 망국민의 설움 때문이었을까? 같은 제목의 시임에도 43년 전 작품과는 다르게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이 시가 지어지기 2년 전, 강남매화랑(江南賣畵廊)이라는 여행자는 통주(통저우, 通州)에서 김택영을 만나고 이렇게 기록했다.
아직 상투와 관을 정제하며 조선인의 긍지를 지켰던 그였지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겠노"라는 말에서 노년의 무기력함과 비애가 묻어난다. 머나먼 타향에서 노구의 몸으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던 한문 문장을 다루는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김택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는지 결국 6년 뒤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하고 만다. 변한 것은 기러기 울음소리가 아니라 가을날의 정취를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이국 생활에 지쳐 버린 그의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술에 대한 자부심만은 잃지 않았다. 윗글에서도 나타나듯 자조적인 언사를 내비치는 도중에도 자신의 저술을 소개하며 문장가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 했다. 그에게 문장이란 조국을 빛내고, 힘든 현실에서 자신을 지탱해 주는 존재였다. 비록 글에서 전근대적 면모와 중화주의 사상이 보인다는 비판도 있지만, 여한(麗韓)의 십가(十家) 중 한 사람으로 조선 한문학의 위상을 드높인 위대한 문인임에는 틀림없다. 중국 남통(南通)에 있는 그의 묘소에는 ‘한국 시인 김창강 선생의 묘[韓詩人金滄江先生之墓]’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그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묘비명이다. 하지만 그는 서거 9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변산의 기러기 울음을 다시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있다. 가을밤 읽는 그의 시가 처량하고 또 처량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 왼쪽 : 김택영의 묘소가 있는 남통의 낭산(狼山). 오른쪽 : 김택영 애국시인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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