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많은 사찰 연기담에는 창건, 중창, 폐사 등을 거치면서
여러 사연들이 혼합되어 역사와의 경계가 모호만 부분이 적잖게 많다.
사찰의 연기(緣起)설화가 교화의 또다른 방법이라는 인식이 필요한데,
사중(寺衆)의 권화자(勸化者)들이 돈독한 불심에서 지어낸 이야기도
일정 부분은 당시의 사정과 불자들의 여망을 모은,
어떤 면에서는 풍부한 정보의 산물인 점을 이해하고,
그 점이 정확한 연대기적 사실(史實)보다도
오히려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고려시대를 상회하는 곰절(웅신사) 명칭이
임진왜란 이후의 중창설화로
등장해서, 시대에 걸림 없는 이런 사례를 잘 보여준다.
곰메<熊山>는 <삼국사기>에 웅지(熊只)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지금 진해의 웅천(熊川) 등으로 그 지명이 남아 있는데
나라의 제사<소사. 小祀>를 지냈으며,
<경상도지리지(1425년)>에는 웅신현(熊神縣)의 명산으로 기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웅신현' 기사에는
'웅산은 웅천현의 진산으로 산꼭대기에 웅산신당(神堂)이 있어,
해마다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굿을 한다.'고 하였다.
<경상도읍지>에는 '산정에 기암이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이고
둘레가 50여 장이어서, 그 위에 30여 인이 앉을 만하다.
우뚝 서 있는데 이름을 천자봉(天子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시루봉과 천자봉이 같은 봉우리인지는 여기서는 별외로 하고,
우리 고유신앙에서 '산정에서 제사하고 하산해 굿을 한다'는 것은
무척 오래된 사연임을 확인할 수 있고,
어느 시점(아마 임란 이후)부터는 불법(佛法)과 만나,
성주사의 중창설화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웅신사가 성주사(聖住寺)로 표기되는 옛 기록은 서기 1750년 무렵,
국가사업으로 편찬된 <해동지도>가 그 첫 예로 확인된다.
이 지도를 제외하면 고려시대(자정국사 비문)부터 조선초기(조선왕조실록),
조선후기(영남읍지, 창원읍지 등)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웅신사로 기록되어 있다.
곰(ㄱ, ㅁ~ㄱ,ㅁ,)은 지모신(地母神)을 나태내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학계의 견해(민긍기.<창원도호부 권역의 지명연구> 2000. 경인문화사)가
있고, 임진왜란 이후에 건축목재를 날랐다는
중창설화의 ‘곰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다.
또 하나의 설화는, 예전에 불모산 자락에 재주 잘 부리는 곰이 있었는데,
도량석 소리 끊이지 않는 성주사 스님들의 수행정진에,
얼핏 겉멋이 든 곰이 외람되이 법회의 뒷좌석을 차지하고는
참선 모습을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이후 그 곰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전생의 흉내 덕분인지 성주사에서 부목(負木) 소임을 맡았으나,
역시 근기는 바닥이라 '미련 곰퉁이' 그 자체였다.
심성은 착하나 근기는 밑바닥.
공양간에서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서도
곧잘 멍청 삼매(三昧)에 빠져 졸곤 하였는데,
그만 솥밥이 타고 말았다.
마침 지나던 스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는,
"이 미련한 곰같은 놈"이라며 지팡이로 후려치실 때,
번쩍 자신의 전생 모습과 함께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이후부터는 오로지 용맹정진하여
이윽고는 큰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월간 <곰절> 2546(2002)년 1월호